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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131화 (131/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31화

131화. 예인(藝人)으로 살어리랏다(10)

어스름이 피어난 해가 어둠을 몰아냈다.

지영은 잠시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현장에 오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분주함과 차분함이 이상하게도 비슷한 비율로 공존하는 곳이었다. 지영이 그런 현장을, 이제 슬슬 마지막이라 눈에 조용히 담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4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 작품의 스크립터 이상윤 씨로, 언제나 현장에 나와 드라마가 잘 촬영되고 있는지 기록하는 두 사람 중 한 분이었다. 그래서 사실 지영은 소개만 받았지, 따로 친분을 쌓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지영은 완전 신인이고, 이런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제작사, 제작진 사람들이었다.

지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꾸벅.

지영이 인사를 하자 씩 웃은 스크립터 이상윤 씨도 마주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지영 배우.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오늘이요? 평소랑 같아요.”

“하하, 다행이네요. 음, 잠깐 얘기할 시간 있어요?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네? 저한테요?”

“네, 지영 배우한테요.”

음, 뭔 말을 하려고?

살짝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와서 예의를 갖춰 청하는데, 아니요. 시간 없는데요. 이러기에는 좀 그래서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밖이라,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자리 잡았다.

그러자 이상윤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음, 지영 배우 다음 작품 스케줄이 혹시 있나요?”

“저요? 아니요. 없습니다.”

“따로 컨택 온 곳도 없고요?”

“네.”

다음 작품 스케줄을 묻는 것에서 지영은 사실 어느 정도 눈치는 챘다. 하지만 본인이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지영도 일단은 듣기만 했다.

“음, 저는 제작사 측 스크립터입니다. 따로 직책도 있는데 그건 뭐 이름뿐이고요. 하하. 어쨌든 저희가 겨울 크리스마스에 맞춰 로맨스 영화 하나를 기획 중인데, 혹시 생각 없으세요?”

“아, 영화요…….”

“네, 남자 주인공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지영은 예상했었지만, 설마 영화를 제안해 줄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잘해야 또 이번 작품처럼 조연 정도일 줄 알았는데, 설마 영화의 주연배우 자리를 제안할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황한 와중인데, 마치 유령처럼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어머, 상윤 스크립터님. 이 바닥 상도덕을 잘 아시는 분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정말 예상도 못 했네요?”

“아, 은진아. 하하. 이거 참. 들켰나?”

“흥, 그럼요. 내 배우 데리고 슬그머니 가는데 내가 미쳤다고 가만있겠어요?”

말은 날이 서 있는데, 표정을 보니 꼭 그렇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지영의 생각이었다. 임은진은 웃는 낯으로 사람을 쏘아대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배우가 신인이고, 고등학생이라고 은근슬쩍 접근해서 작품 계약 따내려고 하는 거, 이거 진짜 좀 너무하네요.”

“에이, 작품 계약이라니. 나는 그냥 의사 타진만 해보려고 한 거야.”

이상윤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반박했지만 임은진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런 식의 날치기 제가 경험이 없을 거라 생각하신 거면 너무 실망인데요? 저 임은진이에요, 임은진. 이 바닥 스무 살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살아남은.”

임은진의 말에 이상윤의 난감한 표정이 더욱 진해졌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상윤의 방식이 아무래도 상도를 좀 어긴 것 같았다. 그런데 지영도 조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느껴지긴 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생짜 초보.

그런데 재능이 있으니 다음 작품에 쓰고는 싶다. 떡잎이 남다르니까, 욕심이 나는 거다. 그러니 슬그머니 접근해 구두로라도 얘기를 던진 다음, 그걸 토대로 회사와 대화를 시작하면 아무리 구두계약과 비슷하더라도, 책임을 안 질 수가 없었다.

그걸 노린 접근.

‘여기도 진짜 만만치 않네.’

지영은 솔직히 좀 놀랐다.

정말 사람 좋은 얼굴이었는데 그게 전부 가식이었다니, 좀 충격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 정말 딱 맞았다.

“이런 식이면, 저 스튜디오 블루 아주 고깝게 볼 거예요! 제 인맥 아시죠? 이 얘기 한 번 퍼지면 어떻게 되는지도?”

“미안, 미안하다. 하하. 임 매니저 내가 실수했으니까 우리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자. 응?”

“흥, 21년산.”

“……오늘 내로 하나 챙겨올게.”

“좋아요. 흥.”

하하.

쩔쩔매는 걸 보니 스크립터긴 하지만, 복장이나 나이로 보아 꽤 직급이 있을 것 같은 이상윤이 정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함께하는 것도 익숙한 임은진이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 같았다.

“그럼, 임은진 매니저. 정식으로 시나리오 보낼 테니까 생각은 해줄 수 있지?”

“그건 우리 배우님이 결정해야죠. 저는 제작사, 제작진, 배급사 등등에 전반적인 조사는 해줄 수 있어도 작품을 고르는 것만큼은 언제나 배우에게 맡겼거든요.”

“오케이. 그럼 오늘 내로 대본 보낸다?”

“네, 배우님이 보고 별로라고 하면, 저도 어쩔 수 없는 거 알죠?”

“알지, 잘 알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하, 오늘 일은 작품에 넣지 않기?”

“네, 그럴게요.”

“그래, 그럼 하하, 수고해.”

꾸벅, 지영에게도 인사를 한 이상윤이 자리를 뜨자, 임은진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조금만 한눈을 팔면 이런다니까?”

“죄송합니다.”

“에이, 지영이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좋은 배우만 보이면 눈독 들이고 어떻게든 구두계약이라도 따내려는 인간들이 문제지. 지영이 너 잘못한 거 하나 없어. 그리고 내가 올 때까지 조용히 하고 있던 것도 나이스였고. 오히려 잘했어. 역시 차분하고 신중하니까 이런 게 좋네.”

“하하, 그런데 좀 전 같은 경우로 작품 강제 계약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당연하지. 이 바닥이 진짜 눈뜨고 코 베어 가는 곳이야. 솔직히 어린 배우가 네. 해도 그런 거로 압박하는 경우가 꽤 있거든. 특히 영세한 제작사에서 나온 끼 있는 배우들이 그렇게 작품 강제 계약한 경우도 종종 있어. 한나미 알아?”

“음, 아니요?”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래서 지영이 고개를 젓자, 임은진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있었어. 그런 애가. 그 애 데뷔 당시 고1이었거든? 근데 걔가 발육이 엄청 좋았어. 그런데 하필이면 소속사가 엄청 영세한 곳이었고. 딱 지금 같은 상황에서 거대 제작사가 압박하니까 뭐 별수 있어? 계약했지. 그런데 노출을 시킨 거야.”

“아…….”

“물론 뭐 등이나 가슴 이런 데 나온 노출은 아닌데 얘를 코스프레 취미인 캐릭터에 넣어서 이런저런 옷 다 입혀서, 뭐 결국 걔는 그거 찍고 욕 엄청 먹었지. 그리고 한나미는 바로 은퇴해 버렸고.”

“…….”

이 바닥.

좋지 않은 곳인 건 알고 있었다.

솔직히 정치권보다 더 추문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 이곳이었다. 팔릴 것 같거나, 돈이 될 것 같으면 가차 없는 곳. 연예계는 명과 암이 아주 분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암이 가득한 곳은, 진짜……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혹시라도 누가 다음에 작품 하나 같이 하시죠. 이런 말 하면 조심해. 검증된 분들이면 괜찮아도 아니면, 알지?”

“네.”

충분히 조언이 되었다.

하지만 지영은 속으로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배우?

‘안 하면 그만이지.’

지영은 연기라는 것에 재미를 느꼈고, 그 쾌락에 발이 빠져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여기에 목을 매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지영의 기색을 읽었는지, 아차. 내가 괜한 말을 했네? 하면서 지영을 다시 현장으로 이끌었다.

현장은 어느새 다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정적이 감도는 이유는 당연히 다음 신이 시작될 준비가 끝난 탓이었다. 이번에도 선동일 배우님의 신이었다.

협주 장면을 마치고, 단상에서 단원에게 설교를 하는 장면.

아니, 말이 설교지 날이 잔뜩 선 독설을 날리는 장면이었다.

그의 독설은 경계가 없다.

지휘자, 마에스트로서 그는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이다. 그러려면 단원들이 따라와야 하고, 그런 단원들에게 그냥…… 폭격을 가한다. 결코 좋은 캐릭터는 아니었다. 이 작품에는 나사 하나 빠진 캐릭터들이 상당수 등장하는데 선동일이 연기하는 마에스트로 정은 그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또라이였다.

서건이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사는 또라이라면, 저 마에스트로 정은 오직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는 또라였다. 하지만 실력은 또 어마어마해서, 그가 또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단원으로 들어가고 싶은 연주자들이 넘치고 넘친다는 설정이었다.

그런 마에스트로 정 역을 맡을 선동일 배우와 지영은 잠시 뒤 함께 찍는 신이 있었다.

임윤옥 선생님과 찍었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영은 이런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좋았다.

확실히 압도되는 무언가가 있는.

이곳이 유도 경기장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지영도 이제 겨우 적응해가는 곳이었다. 솔직히 낯설다고 해도 무방한 곳. 그게 아쉬우면서도, 재밌기도 했다. 지영은 이런저런 감정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처럼 하자, 딱 지금처럼.’

혼나지 않고.

NG를 내서 스태프들 고생시키지 않는 지금 선만 유지하자고 다짐하자 마음이 다시 한결 편해졌다.

촬영이 이어졌다.

해가 뜨자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고 드디어 지영의 차례가 됐다.

현장에 도착하고, 2시간 만이었다.

점검을 맞추고, 넓은 들판에 내놓은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는 지영. 그랜드피아노의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지영은 눈을 감았다. 연습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감을 잡기 위해서였다.

띵, 띵, 띵.

하나씩 눌러보는 건반.

지영의 손가락이 길어서 그래도 다행히 건반을 누르는데 크게 힘들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 그걸 위해 노력한 게 그래도 효과가 있는지, 어색하긴 하지만 제대로 건반을 누를 수 있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어색한 피아노 소리.

“오, 피아노도 칠 줄 알아요?”

“……아니요. 그냥 손가락만 움직이는 거예요.”

한 배우의 질문에 지영은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건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치는 척을 할 뿐이었다. 건반을 누르니 소리는 나겠지만 그건 ‘곡’이라고는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잠깐 피아노를 치는 역을 위해 속성으로 누르는 위치만 배운, 진짜 초보조차도 될 수 없는 지영이었다.

그 배우가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자, 그를 시작으로 다른 배우들도 의자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자, 이번 신도 아까 첫 신과 다를 것 없습니다. 어차피 음악 입힐 거고, 나머지도 편집으로 다 해결할 거니까 실제로 처음처럼 연주 연기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네에!

실제 악기를 든 배우들이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지영의 목소리도 당연히 그 틈에 있었다.

다들 자신이 연습해 온 연기를 한 번씩 해가며 점검했고, 잠시 뒤 연기가 시작됐다.

선동일 배우의 지휘에 맞춰 시작된 합주.

불협화음.

이건 아주…… 불협화음의 극치였다. 실제로 건반을 누르고, 활로 현을 긁어대니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느낌만 살리는 거라, 합주가 될 리가 없었다. 이건 듣는 사람이 살짝 괴로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다들 격정적으로 연기해도, 실제로 강하게 터치하는 건 아니라서 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놓고 막 긁어댔으면…… 오히려 집중이 깨져서 엉망진창이 될…….

“아니야!”

쩌렁!

선동일 배우가 또 고함을 치면서 엉망이 됐다.

연기 중이던 지영은 그 고함에 저도 모르게 눈을 떴고, 이글거리는 선동일 배우의 시선과 마주쳤다.

비릿한 조소?

아니다. 이건 또 뭐 하는 새끼지?

이런 표정이었다.

“너 뭐야?”

“…….”

그때 들린 선동일 배우의 대사.

애드리브다.

이런 대사는 지영의 대본에도, 연기자들의 대본에도 없을 거다. 당연히 선동일 배우의 대본에도 없을 거다. 암기 하나는 자신있는 지영이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지문과 대사를 놓쳤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격.’

이 상황은 자신을 저격하기 위한 애드리브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지영은 건반에서 손을 떼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숙여 선동일을 아무런 생각도 없는 무심한 눈빛을 위장해,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거, 이미 한 번 겪어봤어.’

경험이 없었다면 모를까, 경험이 있는 지영이다.

그러니 애드리브엔, 똑같이 애드리브로 받아쳐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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