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30화
130화. 예인(藝人)으로 살어리랏다(9)
운동, 공부, 촬영에 매진하다 보니 시간이 쑥쑥, 순식간에 지났다.
지영은 무난하게 촬영에 임했다.
스스로 내가 지금 어디 모난 곳 없이 연기를 하고 있구나.
지영이 자신의 연기에 내린 평가는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단 더 잘했다. 아니, 잘한 정도를 떠나서 지영은 NG를 세 번 이상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작가의 의도를 읽은 감독의 요구사항을 정말 찰떡같이 캐치해, 그걸 소화했다.
그래서 요즘 스태프들 사이에서 지영은 ‘서건’이라고 불렸다.
배역을 완벽히 소화해, 지영을 볼 때마다 그 캐릭터가 떠오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서건이었다. 칭찬이었다. 정말 극찬이었다.
극 중 서건은 정말 다 잘했다.
특히 예술 쪽에 관련된 쪽으로는 독보적인 천재다. 그래서 현실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그런 캐릭터다.
그렇기에, 현실감이 지극히 떨어지는 캐릭터였다.
애초에 캐릭터 자체가 그랬다. 사막의 오아시스로 보이는 신기루.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에 더욱 빛나지만, 그만큼 아득하다.
그런 캐릭터를 지영은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그래서 스태프들은, 어느 순간부터 지영에게 질린 시선을 보냈다.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캐릭터가 눈앞에 진짜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별의별 말들이 다 나왔다.
“와, 대단하네. 유도하는 거 봤는데 거기서도 엄청나던데.”
“게다가 투지도 넘치고. 피 흘리면서 시합하는데 와. 장난 아니더라. 그런데 연기도 그만큼 하네? 미친…….”
“연기 배운 게 두 달 좀 넘었다며?”
“그것도 시합 준비하느라 시간 쪼개고 쪼개서 하루에 몇 시간 안 했다던데?”
“공부도 잘한다며? 연희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인데 거기서 중간이면, 와…….”
“다 가졌네, 다 가졌어.”
누가 다 가졌네, 진짜 천재네. 하면서 질투하면 대번에 이런 말들이 날아들었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 자면서 운동하고 공부하고, 연기 연습한다잖아. 너도 그 정도는 해보고 질투해라.”
“맞아요. 정말 노력하는 케이스죠. 그런데 아무리 젊다지만 저게 인간적으로 되는 스케줄이에요? 아무리 건강하고 젊어도, 저렇게 몇 주만 하면 퍼질 것 같은데?”
“그걸 중학생 때부터 해온 애들이야. 중학교 때도 반에서 성적 중간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없고, 유도 대회는 전부 나갔다 하면 쓸어버리고. 몇 년이나 자의로 저걸 해온 애들. 어떤 의미로는 진짜 존경스럽지.”
“왜 그런 것만 보세요? 쟤들, 인성도 죽이잖아요. 자발적으로 왕따 문화 없애고, 학교에서 모나게 굴지도 않고, 건방지지도 않고.”
“지영인 좀 건방진 느낌 있지 않아?”
“에이, 선배. 큰일 날 소리를! 절대 아니죠. 지영인 성격이 좀 조용한 편이라서 그렇지, 보면 인사도 되게 깍듯하게 잘해요. 가끔 바쁘면 일손도 돕고요.”
“진짜?”
“그럼 제가 거짓말하겠어요? 저번에 막 바빠서 아 X 됐다! 하면서 짐 나르는데 어느 순간 지영이가 두 박스씩 나르고 있더라고요.”
“헐…….”
“왜 그런 애들 있잖아요. 자기가 정해놓은 선. 그 선에 따라 움직이는 애들. 넘어가지도 않고, 넘어오면 참지도 않고. 딱 그런 느낌이에요.”
“아아.”
이런 대화도 있었다.
하지만 배우들 사이에서 나오는 얘기는 좀 달랐다.
선동일.
예능도 예능이지만, 배우로서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그는 지영과 아직 합을 맞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촬영장에 와서 지영의 연기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배우들끼리 모여서 한 잔 두 잔 오가다가, 지영의 얘기를 꺼냈다.
“창선아, 걔 있잖여. 걔.”
“예, 행님. 누구여?”
“걔 왜. 이름 여자여자한 애.”
“아아, 지영이여? 지영이는 와여?”
“갸 연기하는 거 보니까, 재밌게 하드라?”
“아아, 지영이 가 감각 있지요? 그런 느낌 풀풀 납디다. 해보니까예.”
이쪽저쪽 다 섞인 사투리지만 다들 익숙한지 대화는 잘만 흘러갔다.
“그렇지? 캬. 어디서 그런 애가 나왔다냐?”
“행님, 모릅니까?”
술잔을 기울이던 선동일이 뭘? 하는 눈빛으로 고창선을 바라봤다.
“갸, 운동선숩니다.”
“어? 운동선수?”
“아이고 행님,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데 담 싸아도 그렇지, 어찌 그걸 모릅니까? 갸 유도선수고, 장민주 작가님이 고마, 그 친구한테 반해서 편지까지 써서 데리고 온 애 아입니까.”
“어 그래? 운동선수였어?”
“예. 행님 몰라도 너무 모르네.”
“어후야……. 그럼 운동은 그만둔겨? 이쪽으로 나오려고?”
“그럴리가예. 갸 유도쪽에서도 천재라캅니다. 이번에 갸 촬영 늦어진 것도 세계 청소년? 그 뭐시깽이 대회 나가서 아입니까.”
“아아 그래? 그 뭐, 잘했대?”
“우승! 행님! 지영이 우승했다아입니까! 한일전에서! 아 고마 쫌! 세상 좀 보고 사시소!”
“야 이! 넌 왜 화를 내구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이제 아들도 다 컸는데 집에 TV도 좀 놓고여! 아휴, 내 우리 행님 때메 몬산다, 몬살아!”
“됐고! 내일 갸랑 신 있는데, 어떻게 좀 싹이 보이는지 좀 볼려고. 흐흐, 재밌을 것 같지 않냐?”
선동일이 그렇게 말하며 음흉하게 웃자, 다들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같이 자리에 합석한 전여옥이 그 말을 받았다.
“재미는 있겠네요. 오빠 무참히 망가지는 재미.”
“어, 나 왜! 내가 그래도 그렇지! 고작 고삐리 연기 하나 못 이기려고!”
“아휴, 그런 뜻이 아니라요. 혹시 애드리브 세게 때릴 생각이시면, 하지 마세요.”
“왜? 작가가 아껴서?”
“그게 아니라, 안 받아요. 걔는.”
“어? 뭔 소리야, 그게.”
“애드리브를 안 받아요. 여유가 없는 건지. 저도 한번 해봤거든요? 그랬더니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더라고요.”
“곤조부리는겨, 벌써?”
선동일의 말에 또 다들 고개를 저었다.
“곤조가 아니고. 오빠. 이제 연기 배운지 석 달도 안 된 애한테 우리가 애드리브 친다고 그게 받아지겠어요?”
전여옥의 말에 선동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세 달? 걔 연기 그거밖에 안 배웠어?”
“네. 민주 작가가 캐스팅한 순간부터 배웠다고 했으니 햇병아리도 그런 햇병아리가 없죠. 그러니 연기는 분명 천재적으로 잘해도, 심적으로 여유는 거의 없을 거예요.”
“아아, 그려? 이야, 근데 그건 좀 충격적인데? 고작 세 달 배워서 그 정도로 한다고?”
“뭐, 천재니까요.”
홀짝.
전여옥이 혼자 잔을 들이키자, 넌 왜 혼자 마시구 그러냐! 하면서 선동일이 타박을 줬다. 그러자 전여옥이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아시죠? 저 연기력 때문에 엄청 고생한 거. 오빠한테 맨날 전화해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저.”
“어, 뭐. 그러긴 했지. 야 근데 그건 단련의 시간이었고.”
“걔는 그런 단련의 시간을 고작 세 달밖에 안 겪었는데요? 저는 무려 5년이나 겪었는데. 진짜 오빠가 불러준 작품 아니었으면 저 은퇴했어요.”
“야야, 뭐 그런 걸로 질투를 하냐. 걔는 그런 애고. 너는 전여옥이고.”
“그러니까요. 걔는 강지영이라서 천재인 건가? 솔직히 오빠들도 지영이 연기하는 거 보면서 질투 느낀 적 없어요?”
전여옥이 모인 배우들을 주욱 둘러보며 묻자, 다들 어색한 웃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전여옥은 어깨를 으쓱하며 선동일을 향해 재차 말했다.
“봤죠? 걔 연기는, 이런 느낌이에요. 우리같이 이 바닥 10년, 20년 있던 사람도 씁쓸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야, 내일 더 건드려보고 싶어진다. 마침 낼 협주 신 촬영이네? 흐흐.”
“후후, 난 경고했어요?”
“됐고, 지가 뭐, 날 뭐 어쩔 건데. 치면 뭐 날 잡아먹기라도 할 거야?”
“업어치기는 할지도?”
“……야.”
선동일의 반응에 깔깔 웃은 전여옥이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리고 건배를 한 선동일은 피식 웃고는, 막 예고편으로 나오는 예인에 시선을 뒀다가, 히죽 웃었다. 스쳐 가듯 나온 지영 때문에 내일이 괜히 기다려지는 선동일이었다.
* * *
지영의 분량은 거의 마지막이다.
이쯤 되자 조금은 아쉬워지긴 했지만, 반대로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자, 세팅 끝!”
“감사합니다.”
그런 생각은 다 끝나고 하라는 것처럼 들려온 한찬미의 말에 지영은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오늘의 메이크업은 역시나 창백했다. 아니, 오늘은 병약한 느낌마저 났다. 마치 계체하기 하루나 이틀 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는 더했다.
지금 지영의 체중은 76 정도로, 보통 80을 평체로 유지할 때보다 4㎏나 부족한 상태였다. 거기에 몇 주간의 강행군으로 체력이 상당히 떨어져서, 그렇게 든든한 체구를 가졌는데도 얼굴만 보면 어디 아픈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게 서건의 이미지라,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샵을 나와서 다시 현장으로 이동. 오늘도 역시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한 지영이었다. 차에서 스태프들이 지영을 향해 밝게 아는 척을 해왔다. 처음엔 좀 질려하더니, 지금은 그래도 웃으며 인사를 해줘서 지영도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대기실로 향했다.
오늘 의상은 수트였다.
아니, 수트보단 연미복에 가까웠다.
오케스트라 신.
지영은 이 오케스트라 신에 피아노 연주자로 나온다. 지휘자는 선동일 배우님이 맡고, 종종 호흡을 맞춘 조연분들도 대거 나오는 날이었다. 이 신이 몇 개의 신이 이어진 다음, 바로 시작이다.
지영은 옷을 갖춰 입고, 대본을 확인했다.
피아노.
사실 아주, 아주아주 어렸을 때 뚱땅뚱땅 건반을 누르는 정도를 딱 넘은 정도로만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 배웠던 게 아마, 학교 종이 땡땡땡이었나?
아무튼 피아노는 그 정도밖에 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게, 피아니스트 역이라고 굳이 피아노를 진짜 칠 줄 알아야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 신은 서건이란 캐릭터와 선동일이 맡은 ‘마에스트로 정’ 부각하기 위한 신으로, 그리 많이 나가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짧게 하는 아, 저런 것도 할 줄 아는구나, 하고 보여주는 용도의 신이었다.
그러니 일단 치는 척만 하면 된다.
하지만 지영은 그래도 혹시 몰라서 실제로 방송에 나갈 월광을 어느 정도는 익혀 왔다. 익혔다고 진짜 치는 건 아니고, 치는 시늉이라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감독님도, 작가님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해줬다.
이를 위해 학교 음악실에서 하루 1시간씩 영상을 보며 며칠이나 보낸 지영이었다.
나름의 준비는 끝.
영화 그것만의 내 세상에서 자폐 연기를 한 배우만큼은 못 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커버가 될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협주곡 장면이라고, 예술의 전당 같은 공연회관이 촬영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야외였다. 거친 느낌의 오케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래서 세팅은 이번에도 세트장이었다. 정확히는 세트장의 후방, 넓은 들판을 배경 삼은 공터였다.
이곳에서 지영보다 먼저 도착한 배우들이 한창 연기를 펼치는 중이었다.
“아니야!”
지잉!
거친 불협화음처럼, 조용한 공간을 쨍! 소리가 나도록 깨버린 배우.
선동일.
정장 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의 그가 한쪽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러자 그에 맞춰, 조연 배우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였다. 누가 봐도 선동일의 눈빛에 기가 질린 모습이었다.
‘이분도 진짜 대단하시다.’
아니야!
지영은 솔직히 그 외침에 순간 움찔했다.
소리를 크게 지른 것도 아닌데, 뭔 고함이 공간을 예리한 칼날로 종이를 베는 것처럼 쭉 찢어지는 느낌이 났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지영은 그렇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요 몇 주 동안 촬영을 하면서 지영은 확실히 느낀 게 있었다. 그건 바로, 경지에 이른 배우의 연기는 상상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그 자체로 상상이 된다는 점이었다.
임윤옥 선생님이 그랬고, 고창선 배우님, 전여옥 배우님도 그랬다.
장민재도 그랬고, 이연도 그랬다. 그리고 다른 배우님의 연기를 볼 때도 간혹 느꼈다. 그런데 오늘 이분. 선동일 배우님의 연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색이 짙었다.
지영은 목을 살짝 빼고, 등도 살짝 구부정하게 숙인 상태로 실수를 한 단원을 노려보는 선동일의 모습이 아주 확실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어떤 표정일지도, 그것도 떠올랐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 아니야. 이런 경우에, 좀 전의 톤이라면…….’
아마, 더럽게 서늘하지 않을까?
마주치는 순간 오금이 팍 저리는. 그런 눈빛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지영은 선동일의 등만 보고 있어서 확인은 불가능했다.
다만, 그렇게 상상이 됐다.
멋있는 세계.
명과 암이 확실한 세계.
지영은 이 세계의 매력이 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매력에 조금은 빠졌다는 것도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아서 피식, 작게 실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