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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129화 (129/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29화

129화. 예인(藝人)으로 살어리랏다(8)

일요일 촬영은 그래도 좀 일찍 끝났다.

저녁 여섯 시.

원래 8시쯤에 임윤옥 선생님과 신이 하나 더 있는데, 임윤옥 선생님이 체하시는 바람에 그 신이 수요일로 옮겨갔다. 그래서 지영은 여섯 시에 촬영을 전부 마무리하고 임은진과 함께 현장을 떠났다.

현장을 나선 지영이 향한 곳은 아이스링크장이었다.

“음, 으음.”

링크장에 도착하자 임은진이 묘한 소리를 내었고, 지영은 가방을 챙긴 뒤 그냥 모른 척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창문을 연 임은진이 말했다.

“혼자 가면 안 된다? 이따가 볼일 끝나면 청주까지 태워줄 테니까, 꼭 연락해, 꼭. 알았지?”

“그냥 막차 타고 내려가면 안 돼요?”

“안 돼. 어떤 매니저도 자신이 맡은 배우를 집에 대중교통으로 보내는 일은 없어. 피치 못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나는 그러라고 장세리 대표님에게 스카우트됐고, 월급도 받는 거야. 그러니까 꼭 연락해. 꼭. 알았지?”

“네, 알겠어요.”

이런 건 말씨름할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태워다 준다면 솔직히 좋은 일이다.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서울은 서울이다. 대중교통으로 터미널까지 이동해서, 막차를 타고 또 청주까지 가서, 또 거기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학교까지 가면 아마 새벽쯤일 거다.

“그럼 데이트 잘하고!”

지이잉.

창문을 올린 임은진이 잽싸게 떠났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지영은 가방을 고쳐 매고 링크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하지만 시즌 첫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양지원에게 주말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링크장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달려들었다.

지영은 가방에서 두툼한 후드티 하나를 꺼내 입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저녁 시간이라 아무도 없는 2층. 고전 영화의 OST ‘A TIME FOR US’ 덕분에 어둑하고, 음울한 느낌마저 났다. 하지만 지영은 개의치 않고 링크장이 잘 보이는 쪽에 가서 앉았다.

유려한 움직임이다.

얼음을 타는 양지원의 모습은 지영이 보던 그 어떤 피겨 선수보다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거기에 키까지 크고, 팔다리가 길어 동작 자체에 시원시원함도 얼핏 묻어 보였다. 하지만 A TIME FOR US 노래가 워낙에 차분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아련함이 있어서 그런지 전체적인 느낌은 슬프기 그지없었다.

그런 양지원을 링크 한쪽에서 바라보고 있는 곽현정과 외국인 여성, 그리고 양유진.

외국인 여성은 안무가인 것 같았다. 코치는 곽현정이 맡고 있었고 그녀는 그 자리를 뺏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곽현정은 새로운 안무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저 외국인 여성은 이번에 고용한 안무가일 거다.

‘연봉이 거의 1억에 가깝다고 했지.’

가장 큰 지출이었다.

원래도 피겨에서 가장 많이 나가는 게 외국인 코치나, 안무가 고용 비용이었다. 이 종목은 심지어 국제대회를 나갈 때 코치나 안무가의 숙박비용 전체를 선수가 해결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수제 피겨화, 피겨복 말고 가장 많은 돈이 나간 게 저 코치를 1년 고용하는 비용과 안무 의뢰 비용이었다.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돈이었지만 둘 다 돈 욕심 자체가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정도 나간다고, 확 티가 날 정도로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연희 스포츠 쪽 계좌에는 지난 코인 대란을 이용해 상당히 많은 돈이 예치되어 있었고, 그 돈이 0을 찍어도 둘은 그리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지영과 강한결도 어느 정도는 빼서 부모님께 드렸기 때문에 돈을 다 쓴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양지원은 강한결이 가슴과 마음에 품은 친구였다.

둘은 요즘 부쩍 연락을 자주 했고, 강한결도 틈만 나면 서울에 왔다 갔다 했다. 그런 양지원을 지원하는 일이니, 강한결도 그렇고 지영도 그렇고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나도 뭐, 크게 다르지 않고.’

촬영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왔다.

양지원을 보러?

아니다. 주말에는 양지원의 연습과 케어를 담당하고 있는 양유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연애는 운동선수에게는 양날의 검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해소가 되어 적을 벨 수도 있지만, 심취하면 중독증상을 보이며 내 자신을 베는, 그런 양날의 검이다.

지영은 자신이 마지막에 칼로 자신을 찌르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며 안무를 끝마치는 양지원처럼, 검을 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도 그렇지.’

마지막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로미오를 뒤늦게 깨어나 본 줄리엣이, 로미오의 칼로 자신을 찔러 그의 뒤를 따른다. 칼. 그런 의미로 칼이 등장한 건 아닐 테지만, 어쩌면 양지원과 양유진, 그리고 자신과 강한결의 상황이 참 잘 설명된 안무와 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외국인 안무가가 숨을 몰아쉬는 양지원에게 가서, 몇 가지 동작을 지적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양지원이 언니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땀을 닦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지적받은 안무를 다시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며 지영은 역시 모든 운동은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자세란, 기술을 들어가기 직전의 자세를 말했다.

유도도 잡기, 기술, 기울이기 등으로 연결되는데, 여기서 기술에 들어가기 전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발을 찌는 위치, 기술을 거는 각도, 그 모든 건 자세가 올바른 상황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 힘으로 억지로 기술을 걸어도, 자세가 중요한 건 당연했다.

피겨도 마찬가지였다.

링크를 새처럼 활강하는 자세에도, 손짓과 몸짓, 표정조차도 자세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점프는 말할 것도 없었고, 회전 또한 그러했다. 적어도 피겨에 무지한 지영의 눈엔 그래 보였다. 그래서 팔을 뻗을 때, 몸을 빙글 돌릴 때도 안무가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자세로 보이게끔 끝도 없이 수정했다.

아, 끝은 있다.

양지원이 제대로 된 수정을 마치면 그 동작은 끝이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자세는 계속해서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아주 미세한 차이로 비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이는 지영도 그랬다. 지영도 그날 컨디션이나, 상대의 대응에 따라 자세가 뭉개지는 상황을 몇 번이나 마주한다.

특히 연희고 황금세대는 죄다 실력자들이라, 완벽한 자세로 기술이 들어오게끔 해주는 상황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완벽하다 싶었는데, 들어가면 그게 미끼라서 되치기에 날아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는 지영뿐만이 아니라 전부가 그랬다.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도 가끔 헛발질을 할 때가 있었고, 세계 최고의 투수도 가끔 포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공을 던지기도 하고 그런다. 그러니 양지원도 실수는 피할 길이 없었다. 좀 전에 수정한 걸, 다음 동작을 신경 쓰느라 또 실수를 반복하는 그런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양지원은 지쳐갔다.

또한,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는 게 힘든지, 양유진도 지쳐갔다.

지영은 이해했다.

‘실수가 반복되는 순간만큼 힘든 것도 없지.’

지영이라고 안 겪어봤을까.

방어 유도로 스타일 자체를 바꾸면서 지영은 친구들에게 하늘을 수도 없이 날아다녔다. 갑작스럽게 자세를 바꿨으니 기술을 거는 타이밍부터 시작해 각도까지 전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날아다니다 보면, 내가 지금 잘하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안 떠오를 수가 없었고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자책감에 자존감마저 깎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겨내야지.”

그런 고된 시간을 견디고, 또 견디다 보면 길은 보인다.

아니,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게 바로 최소 적응의 단계였다. 이 단계에 서면, 실수는 확실히 줄어든다.

양지원 또한 마찬가지다.

의심하지 말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운동선수에게 실력 향상의 지름길은 없다.

가진바 재능과 체력, 피지컬을 바탕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견뎌야 했다. 지금 당장 억울하고 분해도, 이 악물고 참으면서 끝까지 자신이 믿는 길을 향해 연습을 멈추지 말아야 할 때였다.

이게 바로 지영이 생각하는 스포츠였다.

그리고 다행히…… 양지원은 독종이었다.

그녀는 억울하고 분해할지언정, 포기하진 않았다. 트리플 악셀 도중 미끄러져 벽에 부딪혔으나 금방 일어나 끝까지 안무를 이어갔다. 그러곤 다시 자세 수정. 연습. 끝없이 반복되는 연습이란 이름의 늪.

양지원은 그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악착같이 연습했다.

보통 잘 안될 때는 차라리 다음에 하라고 하지만, 오늘 안 되던 게 내일 갑자기 잘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되는 경우는 원래 되던 건데, 컨디션이나 감을 되찾으면서 원래의 실력이 나오는 경우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아예 안 되던 건, 자고 일어난다고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일로 미루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어차피 내일도 안 될 테니, 그저 연습할 시간만 까먹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영은 이런 지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행히 곽현정도, 외국인 안무가도 같은 지론을 가졌는지 실패한 기술과 동작을 다시, 다시! 끝없이 연습을 반복해서 하게 했다.

저게 답이다.

반복, 반복, 될 때까지 무한 반복.

무식하다고 하겠지만, 저런 반복훈련은 왕도에 가깝다.

아니, 지영에겐 왕도였다.

그렇게 한참 구경하던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오늘은 훈련이 끝나면 양유진과 가볍게 저녁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생 걱정이 저렇게 그득한 양유진을 보고 있자니,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될지 몰라서 미리 연락은 안 했는데, 안 하기를 잘했네.’

미리 연락했으면 간다는 변명을 해야 하는데, 그걸로 양유진이 실망할 수도 있으니 지영은 차라리 연락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자리에서 링크장을 벗어난 지영은 폰을 꺼내 임은진에게 연락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으니 곧 오겠다고, 조금만 기다리라는 답을 받았다. 지영은 후드를 벗어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주차장에서 잠시 기다렸다.

20분쯤 지나 임은진이 왔다.

그녀는 왜 벌써 연락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피곤하면 좀 자라는 말로 지영을 편하게 해줬다. 보조석에 타서 그래도 잠은 안 자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깨어보니, 2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정말 정신없이 자서 좀 민망해졌다.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이틀이나 새벽바람부터 촬영했는데, 안 피곤하면 그게 사람이야? 기계지.”

“그래도요. 끙, 어디쯤이에요?”

“청주 다 도착해가. 참, 전화 많이 오더라.”

“아, 네.”

청주에 거의 도착했나보다.

가방에서 폰을 꺼내 보니, 양유진에게 전화 두 통과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연예인님!]

[어디세요?]

[어? 그냥 갔어요?]

[지원이 훈련 끝났는데 힝ㅠㅠ]

이런 귀여운 투정 메시지에, 지영은 잠결이지만 저도 모르게 웃었다.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잠깐 들린 거라고, 숙소 도착하면 전화하겠다고 답장을 보낸 지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적당한 시간이었다.

30분쯤 더 달려 숙소에 도착한 지영.

지영이 차에서 내리자, 임은진이 다음 스케줄을 확인해 왔다.

“이번 주는 수요일, 토요일, 일요일. 이렇게 촬영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편의를 많이 봐주긴 했지만 그래도 평일 촬영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연희고가 워낙에 완강해서 조금 조정해서 평일에는 하루만 빠지는 걸로, 그렇게 합의가 됐다. 이 정도 편의를 받으니 솔직히 좀 미안하긴 했다.

그러니 그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수요일은 당연히 내가 데리러 올 거고, 금요일도 데리러 올 거야. 이번처럼 혼자 슝 하고 날아오면 안 된다?”

“어, 음… 네. 얌전히 기다릴게요.”

지영의 대답에 임은진이 씩 웃었다.

“그래, 얌전히 기다려, 내 배우님. 호호.”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는! 난 내 배우가 커 가는 모습에 보람을 느껴서 하는 거야. 이 일. 그러니 그런 생각할 것 없어. 지영이 네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지금처럼, 지금처럼만 해주면 돼. 연기, 이번만 할 건 아니잖아?”

“음, 아무래도요?”

유도를 그만두고, 이 길로 간다고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려있긴 했다.

“좋아. 나도 힘이 나는걸? 좋은 작품 찾으면 보여줄게. 괜찮지?”

“네, 물론이죠.”

“오케이! 그럼 주말 이틀간 고생했고! 다음 주에 보자!”

“네, 누나. 조심히 올라가세요.”

“그래!”

손을 흔든 임은진이 창문을 올리고 차를 돌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이제 다시 달려서 서울까지 가야 하니, 참 힘든 직업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지영은 터덜터덜 걸어 숙소로 올라갔다.

힘들면서도, 보람찼던 주말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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