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27화
127화. 예인(藝人)으로 살어리랏다(6)
장민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대본 리딩 때 봤던 운동선수. 장 작가님이 픽한 강지영이란 청년을 봤을 때 솔직히 그는 좀 불만이었다.
‘유도 선수? 아니, 뭔 운동선수가 현역 때 연기를 해?’
그가 캐스팅됐다는 얘기를 듣고 인상을 찌푸리며 매니저에게 그렇게 말했던 장민재였다. 장민재는 본인이 연기에 욕심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배우들보다 배역, 작품에 대한 애착이 더 심하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1, 2화 대본을 읽고 그는 서건 역할에 바로 류아인 선배를 떠올렸다.
예술가 연기를 류아인 선배님만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뭔 운동선수가 그 자리에 캐스팅됐다.
그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캐스팅은 작가와 감독, 이 두 사람의 고유권한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장민재가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솔직히 불만이 많았었다.
그랬던 마음이 대본 리딩을 할 때 좀 변했다.
운동선수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도 미리 알아볼 마음에 유명한 영상을 찾아봤고, 왜 유명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합 영상도 봤다. 자신과는 전혀 궤가 다른 치열함을 보여줬기에, 조금은 인정하는 마음을 가졌다.
임윤옥 선생님이 챙겼을 땐 솔직히 부러웠고, 선생님이 몰래카메라 같은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을 때, 지영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버릴 생각을 했다. 물론 실패했다. 어느 순간, 기질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차분했던 기질이, 무신경하게 변했다.
그리고 짜증이 서리더니, 이내 그것조차 확 가라앉았다. 그게 터지기 전에 임윤옥 선생님이 끝내지 않았다면 분명 그날 대본 리딩은 개판이 됐을 거다. 솔직히 좀 어이없었지만, 본업이 운동선수란 걸 떠올리자 충분히 수긍이 되기도 했다. 아쉬운 게 없을 테니 말이다.
자신처럼 연기에 목을 매달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 그 친구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늘.
새벽에 본 그의 연기는, 좀 충격이었다.
엄청나게, 와, 미쳤다…… 대박! 이런 말이 절로 나올 연기력은 분명 아니었다. 자신이라면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연기였다. 하지만 이연을 따라 슬그머니 움직여 모니터해 본 결과, 자신이 본 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눈빛 연기가… 정말 섬세해.’
감각이 좋지 않은 사람은 연기로 성공하기 힘들다. 하지만 민재 너는 감이 좋다.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다. 이런 말을 연기 선생님에게 들었던 장민재는 그 말처럼 감이 좋았다. 그리고 상상력도 풍부해서, 그 감과 상상력으로 지영의 눈빛 연기가 어떤 걸 그리고 있는지, 보는 순간 깨달았다.
미세한 표정 변화, 찡그림, 눈빛의 변화로 장민재는 뭔가를 떠올렸고, 대본을 확인한 뒤에 자신이 봤던 게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확실히 성공적인 연기였다.
‘생에 첫, 연기가 그렇게 어려운 거였는데…… 한 번에 성공한 거지.’
재능이었다.
기술적인 부분은 부족해도, 감성적인 부분과 전체적인 느낌 자체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으니 나올 수 있는 연기였다. 장민재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연기에 발을 들인지 이제 고작 두세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게 떠오른 탓이었다.
재능.
천재.
서건.
생각해 보니까, 그 모습 자체로 서건이 보였다.
자신이 열등감을 폭발시켜야 하는 캐릭터. 뭘 해도 잘한다. 새벽에 찍은 신처럼 그냥 대충하는 것 같아도 느낌이 팍 살고, 팍 살다 못해 그가 그렇게 소망하는 ‘성공’을 너무나 쉽게 해버리는 천재성이 그냥 살아난다.
장민재는 이것도 소름이 끼쳤다.
‘장 작가님 선구안 미쳤네…….’
이렇게까지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를, 배우가 아닌 운동선수에서 찾아내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민재야.”
“어, 형.”
매니저 철승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나는 장민재. 고개를 들었더니 박철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어? 아니, 그냥……. 너 너무 생각이 많은 것 같아서.”
“하하, 걱정돼? 저 새파랗게 어린 신인한테 먹힐까 봐?”
“아니! 그런 걱정은 안 하지!”
파다닥!
닭이 날갯짓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이 형은 참, 손사래를 이상하게 친다.
“그럼?”
“나는 그냥, 실수할까 봐 그게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하지 마. 공과 사는 구분해. 지영이 쟤, 천재는 천재더라. 연기 배운지 두세 달밖에 안 됐을 텐데 그 어려운 눈빛 연기 신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더라고.”
“어? 어, 그랬어?”
“어. 잘해. 천재야. 서건 같은.”
“그, 민재야. 너도 천재야. 너 천재 맞아. 그러니까…….”
“형.”
장민재는 박철승의 말을 끊었다.
그러곤 웃으며 말했다.
“형, 이번에 내 역할이 뭐야.”
“어? 그…… 좀 찌질하고 뭐 그런?”
“응, 그렇지. 천재에게 열등감 느끼고, 그래서 찌질하고. 근데 악에 받쳐서 음악은 놓지 못하는 지지리 궁상맞은 놈이잖아?”
“어, 뭐…….”
“근데 내 감정이 지금 딱 그래. 연기하기 딱 좋아. 지영이 쟤, 진짜 질투가 나게 해줘. 나도 저런 연기는 솔직히 한 번에 오케이는 무리라고 생각하는데, 쟨 금방 하잖아. 장 작가님이 원하는 대로, 감독님이 만족할만한 연기를 한 번, 두 번 만에 딱딱 하잖아. 이러니 내가 질투가 안 생겨? 하하.”
매니저 철승의 말문이 막히는 말을 하는 장민재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철승이 말문이 막힌 이유는 말 때문이 아닌, 장민재의 눈 때문이었다.
불타고 있었다.
화르르…….
연기에 미친 장민재가 의욕이 넘치다 못해, 열정을 불 싸지르고 있었다. 질투라는 감정을 연료 삼아서.
그래서 철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똑똑.
“장민재 배우님! 준비해 주세요!”
“네!”
크게 대답한 장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의상과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직원 둘이 쪼르르 달려와 점검을 해줬다. 거울 앞에 앉아 10분 정도 걸려 점검을 마친 장민재가 보무도 당당하게 대기실을 나갔다.
보여줘야 할 때였다.
‘새파랗게 어린 신인한테, 고작 연기를 두 달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운동선수한테 연기로 지면…… 나가 뒤져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액션 위치로 향하는 장민재는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질투를 품게 된 자신이…… 이번 작품에 무슨 짓을 할지를.
* * *
컷.
사인이 나기 무섭게.
“와 미친…….”
“미쳤네, 와. 대박…….”
스태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엔 세트장을 난장판으로 만든 채 학학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장민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번 장민재의 신은, 역시나 열등감이 서럽게 폭발하는 신이었다.
왜 너는 그렇게 쉽게 되는데! 나는 안 돼! 가 아니라 나는 왜 안 되는 건데…… 왜에…… 하면서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행동과 표정이 완벽하게 따로 놀아야 한다.
행동은 사물을 때려 부수지만, 표정은 서러워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냥 으아아! 하고 악을 쓰는 게 아니라, 소리죽여, 숨죽여 우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행동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보는 사람이 으…… 하고 떠는 게 아니라, 저렇게까지 망가지는 주인공이 안쓰러워 입술을 꾹 깨무는, 그런 느낌으로다가 보여줘야 하는 신이었다.
그런데, 장민재는 완벽했다.
단 한 번의 NG 없이, 그 서러운 감정의 폭발을 정말이지…… 완벽하게 보여줬다.
그런 장민재에게, 스태프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중엔 지영도 있었다.
“와…….”
절로 입이 벌어지는 연기였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도 감탄했었다. 그런데 좀 전에 보여준 신은, 진짜 최고였다.
‘발악, 발작 속의 슬픔이라…….’
감정을 터뜨리는 신.
지영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런 신을 많이 봤다.
특히 분노의 양치질 신 같은 건 인터넷으로도 자주 보고 그랬다. 그런 폭발적인 연기와 장민재의 지금 연기는 역시 달랐다.
작가의 의도가 완벽하게 표현된.
정말이지…… 대단하단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 연기였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나자, 잠시 쉬는 시간이 됐다. 이런 연기를 하고 나면 배우도 지치고, 지켜보는 사람도 지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박지상 감독이 30분만 쉬고 합시다! 를 선언하기 무섭게 진짜 스태프들이 무슨 썰물처럼 쑥 빠져나갔다. 모두가 떠나자 지영도 몸을 돌리려는데, 어디선가 날아드는 시선이 발목을 잡았다.
다가오던 임은진도 지영이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그쪽을 바라봤다가 슬그머니 뒤로 다시 빠졌다.
장민재.
그가 지영을 보고 있었다.
지영은 그런 장민재의 시선을 받으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접점이 없진 않지만, 저렇게 아직 감정이 빠져나가지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이유는 없다는 게 지영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보고 있으니, 고개가 당연히 갸웃해졌다.
“…….”
“…….”
지영은 그 시선을 잠시 마주 보다가, 몸을 완전히 돌렸다.
어떤 느낌인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계체하러 갔을 때, 체육관에 입장하는 순간 날아드는 그 눈빛이랑 비슷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투지가 섞인 그런 눈빛 말이다.
‘이상하네. 굳이 날 저렇게 볼 필요가 있나?’
어차피 가는 길이 다른데 말이다.
그걸 장민재도 모르지 않을 터다.
엄연히 따지면 자신은 조연이고, 게다가 출연 비중 또한 많지 않다. 애초에 그런 이유가 드라마 출연을 결정하는 데 큰 몫을 하기도 했고.
그러니 굳이 자신한테, 저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 참, 혀가 절로 차졌다.
지영이 걷기 시작하자 임은진이 바로 와서 옆에 섰다.
“장민재 쟤, 시작됐나 보다.”
“네? 뭐가요?”
“배역에 대한 몰입.”
“아……. 그런 거죠? 어차피 결이 다른데 저렇게 봐서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어요.”
“후후, 좋은 조짐이야. 배우가 벌써 작품에 몰입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이런 작품이 잘되거든.”
“그래요?”
“그렇지. 아무래도 열정 자체가 다르니까.”
임은진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지만, 이쪽은 그녀가 전문가다.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자신이 그 말을 의심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쨍쨍 내리치고 있었다. 그 햇빛에 임은진이 지영의 소매를 잡았다.
“안 되겠다. 대기실로 가자.”
“…… 네.”
바람을 좀 쐬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근데 바람도 거의 안 불어서 나간다고 제대로 바람 맛을 보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 지영은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30분은 금방 지나갔다. 아직 차례가 남아 조금 더 기다렸다가 나가자, 조용하던 세트장은 다시금 시끌벅적했다.
여기저기서 고성이 들리고,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여 장민재의 세트장과는 다른 차분한 느낌의 세트장을 만들어, 점검하고 있었다.
이번 세트장은, 카페 세트장이었다.
음악에 매진하는 연인 도언을 위해 희수가 알바를 하는 장면이 주된 장면이었다. 대본을 확인하니, 진상 손님에게 물까지 맞아가며 연기를 할 예정이었다.
카페에서 일하는 편한 복장으로 나온 이연이 카운터에서 대본을 보며 동선을 확인했다.
이윽고 다시 조용해지는 세트장.
그런 고요함 속에서 이연의 연기가 시작됐다. 이연은 어떤 놀라움을 보여줄까, 하는 마음으로 보는데 뒤에서 누가 툭툭 쳐서, 고개를 돌려봤더니 임윤옥 선생님의 매니저가 서 있었다. 그는 지영이 돌아보자 대본을 툭툭 치며, 뒤로 가자고 손짓을 했다.
지영은 그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
연습이다.
이연의 다음 신은, 임윤옥 선생님과 지영의 신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지영은 매니저와 함께 조용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아쉽지만, 이연의 연기는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