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25화
125화. 예인(藝人)으로 살어리랏다(4)
컷!
박지상 감독의 컷 사인에 지영은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처음 든 생각은 모르겠다. 이런 마음이었다. 일단은 지문에 적힌 대로 하긴 했다. 새를 보고, 뭔가를 느낀 것처럼 연기해라. 이런 주문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이게 제대로 표현이 됐는지는 솔직히 미지수였다.
아니, 미지수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모르겠는 지영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좀 차리고 일어나서 박지상 감독을 바라봤는데,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연기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구나, 이런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영은 다시 모니터링을 하러 갔다.
그리곤 자신의 연기를 확인하는데, 박지상 감독이 물어왔다.
“무슨 생각 하면서 연기했어?”
박지상 감독의 말에 지영은 잠시 모니터를 멈추고, 말을 골랐다.
“음, 새가 사마귀 같은 곤충과 잠시 싸우다가, 겨우 물리치고 목표로 했던 벌레를 물어 새끼들에게 날아가는 모습이요.”
“그렇지?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하.”
“어, 아셨어요?”
지영이 놀라서 묻자, 박지상 감독이 씩 웃었다.
“평생 이것만 했는데 설마 모를까, 초반에 걱정하는 감정, 그리고 힘내라는 감정이 느껴졌거든. 그래서 아, 새를 위협하는 뭔가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리고 나중에 은은하게 웃을 때는 새가 적을 물리치고 먹이를 구했구나. 이렇게 생각했고.”
“와…….”
놀랐다.
일단 이번 신에, 서건이란 캐릭터가 새를 보고 뭔가를 느꼈다는 게 명료하게 보여야 했다. 이 신을 찍는 이유 자체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영은 뭐를 느끼면 좋을까 해서, 적과의 싸움을 일단 가장 먼저 떠올렸다. 사실 지영이 자주하는 이미지트레이닝은 반드시 상대가 있었다. 예를 들면 미야모토 신지다. 신지의 스타일을 아니 신지와 붙는 이미지트레이닝이 주가 되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바로 상대였다.
그래서 당연히 지영은 상대를 떠올렸다. 상대는 곧, 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영은 사마귀를 떠올렸다. 벌레를 포착하고 내려왔는데, 바로 옆에 사마귀가 있네? 그리고 그 사마귀가 위협을 하네? 사마귀로 정한 건 작은 새와 비견할 만하고, 그리고 새가 당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마귀도 강해 새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상상 속에서, 새가 이기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마귀를 퇴치한 새가 먹이를 물어 돌아간다. 발견, 사마귀 등장, 걱정, 응원, 사마귀 퇴치, 안도, 먹이를 물고 돌아가니, 괜히 뿌듯. 이런 순서를 정했다. 이런 표정 연기는 장민주 작가가 보내준 자료와 영상을 보면서 참고했다.
어젯밤에도 대본을 보고, 상황에 맞춰 계속 이미지트레이닝을 한 지영이었다.
특히 이 장면에 더 많이 했다. 서건의 캐릭터에 맞춰 표정이 절대로 극적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예 적나라한 것 자체가 안 됐다.
미묘한, 천재의 메마른 감성이 아주 미묘하게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사족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가 상상을 잘한 게 아니라, 지영이 네가 딱 그렇게 보여준 거야.”
“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는 무슨, 보면서 좀 감탄도 했는데. 하하. 이번 신은 더 안 가도 되겠다. 그럼 다음 신 준비할까?”
“네.”
지영은 다시 꾸벅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지영이 가자,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이연, 장민재, 그리고 임윤옥까지 박지상 감독에게 다가왔다.
“쟤 한 거 우리도 좀 보자. 응?”
“어이쿠, 그럼요.”
주연에, 위대한 배우라고 슬슬 불리기 시작한 원로 배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지영이 찍은 장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확인이 끝난 직후, 다들 말없이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박지상 감독은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돌아갈 때 표정들이 심상치 않았다.
장민재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 이연은 미묘한 눈빛, 임윤옥은 대차게 뿌듯한 표정. 이런 표정들이었다.
“이번 드라마, 잘하면 내 인생의 역작이 되겠는데?”
하하.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저들의 표정이 저런 이유는 제각각 조금씩 달랐지만 전부 지영의 연기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특히 장민재는 지영의 연기에 좀 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요즘 20대 배우 중, 연기에 가장 욕심이 많은 배우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게 장민재였다.
그래서 이번에 장민주 작가에게 시나리오를 받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게 장민재였다. 그리고 그건 장민주 작가도 박지상 감독이 장민재 이름을 언급했을 때 군말 없이 오케이 했다. 장민주 작가는 애초에 지영을 픽하는 것만 고집했을 뿐이고, 그걸 위해 캐스팅 권한 자체를 그에게 일임하기도 했다.
그래서 배우진은 전부 박지상 감독이 캐스팅했다.
그중 여주인공 이연도 장민재와 비슷하게 작품을 정말 신중히 고르고, 촬영에 들어가면 정말 혼을 태우는 느낌으로 임하기로 정평이 난 배우였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한겨울에 입수와 생얼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배우였다.
그런 이연이, 묘한 표정을 지은 건 이런 의미였다.
어…… 이것 봐라? 바로 이런 의미. 지영의 연기가 가볍게 생각할 만한 연기가 절대 아니라는 걸 보자마자 느낀 것이다.
이런 두 주연 배우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건 곧, 연기 욕구에 불을 지폈다고 볼 수 있었다.
“잘되는 작품은, 이렇게 배우들끼리 치고받아야지.”
생짜 신인의 연기에 자극을 받은 주연 배우.
이보다 더 연기력 상승에 영향을 미치는 좋은 자극제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박지상 감독은 자신에게도 열의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안했던 게 사실이었다.
강지영이란 선수를 직접 만나봤고, 대본 리딩 때도 한 종목에서 천재로 군림하는 선수가 어떤 기세를 내뿜는지 확실하게 느꼈지만 연기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안감이 희석된 건 이번 대회에서였다.
그는 연기의 천재는 봤다.
텐 미닛이라는 노래로 대한민국을 흔들었고, 여전히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여가수의 계보를 잇는 젊은 가수이자, 배우 윤이은을 봤을 때, 그는 그녀가 천재라고 느꼈다. 특히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를 봤을 땐, 거의 충격적이었다.
그저 노래만 잘하는 가수인지 알았던 박지상에게는 쇼크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번 슬쩍 찔러봤지만, 역시나 스케줄 문제로 잘렸다.
‘어쩌면 지영이 저 친구…….’
잘하면, 정말 잘하면, 여기서 더 배우고, 이 바닥에 익숙해진다면, 더 많은 작품을 접하고, 눈이 뜨이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는 천재가 될 수도 있었다.
운동 말고, 연기에도 말이다.
그런 천재를 자신이 가장 먼저 만지는 이 기분. 박지상 감독은 이런 자신의 생각이 변태같다는 걸 알고 있지만 중독성이 있는 이 쾌감을 도무지 끊을 수 없었다. 이런 배우들을 발견할 때면,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열의가 찾아오곤 해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지금 그랬다.
고작 두 신.
대사조차 없는 신이었지만 이미 머리로 그려놓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연기와 아무것도 없는 마당에서 새가 사마귀와 싸우고, 먹이를 성공적으로 낚아 날아가는 새를 바라본다는 느낌이 명확히 드는 표정 연기는 이미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거기에 그런 신인의 연기에 주연 장민재가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이연이 위기감을 느꼈다.
대배우 임윤옥은 검증되지 않은 신인의 연기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돌아가기까지 했다.
“이 정도까지 판이 마련됐는데, 대충하는 건 죄악이지.”
그것도, 스스로를 지옥불에 떨구고도 남을 큰 죄악이었다. 남들은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그렇게 말하겠지만 적어도 박지상 스스로는 그러했다. 박지상 감독은 슬그머니 주변을 돌아봤다. 촬영장엔 당연히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지영이 첫 신을 찍기 전에 보였던 부정적인 분위기가 있는 반면, 지금처럼 안도하고 다음 신을 기분 좋게 준비하면서 나오는 분위기도 있었다.
자신의 사단마저도 불안해했다.
감독의 안목을 믿지만, 그래도 너무 중요한 역할에 연기를 조금도 배우지 않은 신인을 박아 넣었으니 당연히 드는 불안감이었다. 그런데 그런 불안감이 벌써 사라져 있었다.
“벌써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배우라……. 이거 참.”
박지상 감독은 그런 혼잣말을 내뱉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뭔가 다르다는 게.
배우를 캐스팅하는 건 감독과 작가, 둘의 고유의 권한이다. 물론 탑은 정반대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임윤옥 배우님 빼고는 모두 자신이 ‘택한’ 배우들이었다. 그런데 지영의 연기를 보는 순간 아주 짧게나마.
“나랑 장 작가가 간택 당한 건가? 허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편지까지 써서 공을 들였다, 이미. 누가? 장민주 작가가. 그리고 미팅 때도 지영이 하겠다고 해서 출연이 결정됐다. 보통은 반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우가 그러면 음, 그럼 좀 더 생각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하하. 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이런 관계가 반전되어 있었다.
애초에…….
“그걸 이제 알았어요?”
어느새 다가온 장민주 작가가 박지상의 혼잣말을 듣고 샐쭉하게 툭 던진 말에, 박지상 감독은 허허, 웃고 말았다.
스물 후반에 입봉해서 지금은 마흔 후반.
20여 년 만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어서 정말……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가 몰랐던 걸 깨달은 사이, 다음 신 준비가 끝나 있었다.
* * *
하지만 정작 이런 분위기를 지영은 느낄 새가 없었다. 다음 신을 다시 머릿속에서 창조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애초에 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장민주 작가가 보내주는 자료를 통해 연기를 배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가 일반적인 연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영의 방식도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연기하는 사람들도 상상을 많이 쓰지만, 지영에게는 상상이 사실상 전부인 상태.
그러니 지금처럼 이미지트레이닝이 정말 중요했다.
다행이라면, 선수의 신분으로 하던 이미지트레이닝과 아주 큰 차이는 없다는 점이었다.
지영은 눈을 감은 채 장면 하나하나를 연상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기존의 이미지트레이닝이 영상이라면,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스케치부터 시작해 천천히 윤곽을 잡아나가는.
어느 정도 스케치가 끝나자 지영은, 그걸 좀 더 뚜렷하게 구도를 잡아갔다. 색은 입히지 않았다. 천재의 세상에 색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트레이닝이 끝나자 지영은 눈을 떴다.
그러자 또 주변이 고요하다.
누가, 언제 가져다 놨을까?
앞에는 새하얀 머그컵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노트북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잠깐 그림을 그리는 사이 어느새 준비가 끝나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가 벌써 전부 끝났나 보다.
지영은 연기에 들어가기 전에 이번 신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이번 신도 이전 신과 비슷하게 어렵다. 게다가 이번 신은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신이다.
CG로 새벽부터, 오전, 오후, 야간까지.
쉬지 않고 두들기는 타이핑. 그리고 저녁 늦게 한 권의 소설이 완성된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영감이 번뜩여도 하루 만에 책 한 권 분량을 쓴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지영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극 중 천재 서건은 한다.
화장실을 가는 시간을 빼고는 오직 타이핑만 한다. 그게 종일 이어지고, 하나의 소설이 탄생한다.
제목, 새.
사마귀와 싸우면서 먹이를 쟁취한 새를 보면서 얻은 영감이, 하나의 소설로 하루 만에 완성된다.
그리고 무료 연재 사이트에 올라간 그 소설은 격렬한 반응을 일으킨다.
‘당연히 드라마니까 가능한 설정……. 하지만 지금부터 나는 그런 천재를 표현해야 해.’
그런 캐릭터의 표현을 위해 자신은 이 작품에 캐스팅됐다.
그러니 맡은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 뒤에 박지상 감독을 바라봤다. 그런 지영의 눈빛을 받은 박지상 감독의 입이 천천히 열렸고, 지영의 연기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엔 두세 번 NG는 있었지만, 깔끔하게 신을 소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