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19화
119화. 세계 청소년 유도 선수권(12)
한국 대회와 세계 대회의 똑같은 점이 있다면, 시합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어 탈락자가 반 이상이 나왔을 때부터는 대회장의 분위기 자체가 변한다는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단 1, 2회전이 끝나고 3회전까지 올라오는 선수들은 98% 이상이 진짜 실력자들이다. 어느 조에 던져놔도 입상권을 노릴 수 있는 선수들.
다들 실력에는 자신이 있는 선수들.
그런 선수들이 3회전까지 왔고, 3회전은 입상 가시권이다. 한판만 이기면 4강이고, 4강에서 한판만 이기면 결승, 일단 결승까지 가면 최소 은메달은 확보다. 그리고 져도 패자결승에 자동 진출이고, 3등을 노려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 3회전이다.
그러니 분위기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정적.
메치거나, 승부가 나거나, 그런 경우에만 환호성이 울리고 거의 조용히 시합을 관전했다. 마치 어제 지영의 경기 때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게, 사실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선수들이야 시합에 집중하느라 모르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진짜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경기마다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들어갔을 때면, 훨씬 더 심하다. 그래서 이게 진짜 사람을 환장하게 한다.
쿵!
아아!
상대가 앞으로 엎어져서 점수가 나오지 않았고, 관중은 탄식을 터트렸다. 응원하는 선수가 점수를 따내지 못해 아쉬워 나온 탄식 반, 응원하는 선수가 점수를 빼앗기지 않아 안도의 마음에서 나온 탄식 반.
지영은 후자였다.
“아오…… 씨. 심장 아파.”
이성진의 중얼거림에 지영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좀 전에 앞으로 떨어진 건 강한결이었다.
강한결의 컨디션은 역시 올라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떨어졌다. 2회전에는 약한 상대였다. 아마도 이번 대회 –90의 최약체 선수였을 거다. 그런데도 4분 게임을 전부 했다. 결과는 10초 남기고 빗당겨치기 절반 승.
미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강한결의 3회전은 중국 선수였다.
아시아 선수권에서는 본 적이 없는 선수지만, 지영이 보기에 크게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피지컬을 앞세운 전형적인 힘 유도 스타일. 거짓말 조금, 정말 조금 보태서 강한결이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강한결을 문자의 뜻 그대로인 유도를 한다.
힘도 나쁘지 않지만, 정말이지 부드러운 유도를 한다. 특히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되치기는 지영보다도 낫다. 지영은 타이밍에 그냥 갖다 꽂는 느낌이라면, 강한결은 상대의 힘을 부드럽게 받아서 살짝, 돌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이면 전자는 화려해 보이고, 후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힘은 상당 부분 세이브할 수 있었다. 아주 효율적인 체력 운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강한결은 그걸 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맛이 갔다.
지금 강한결의 모습은 진짜 딱 그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결은 버텼다. 컨디션이 안 좋은 정도를 넘어서 아예 망가졌는데도, 끈기로 버티고 있었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무난히 우승할 거라고 점쳐졌던 게 강한결이었다.
이는 물론 대표팀 내의 평가였지만, 강한결만큼 완벽한 실력을 갖춘 선수가 –90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밤의 실수 한번이, 그 평가를 송두리째 뒤집어버렸다.
강한결은 지금, 가장 떨어지기 직전에 몰려 있었다. 절벽 끝, 낭떠러지. 조금만 밀리면 추락하게 될 거다.
그러나 지영은 강한결을 믿었다.
비록 컨디션은 좋지 않지만…….
‘실력 자체는 어디 가는 게 아니지.’
기본적으로 육신과 정신에 머물러 있는 실력은 아무리 몸 상태가 최악이라도 어디 가지 않는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힘들지만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힘들지만, 착실히 승리를 쟁취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곧 실력이었다.
하지만 진짜 실력자들을 만나면, 이제는 진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번 경기도 비슷했다. 중국의 힘 유도는 강한결이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힘을 역이용해 되치기를 치는 건 그의 특기기도 했다.
그런 강한결이, 중국 선수의 강공을 차분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지도가 하나였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천하의 강한결이 지도를 받았다. 놀랄 노자였다. 진짜. 하지만 지영은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시합 분위기가 2분쯤 되었을 때부터 묘해졌다.
그리고 그건 황금세대 전원이 알아차렸다.
“야 저거, 지영이 자센데?”
“그러게. 와, 강한결 진짜…….”
자세가 변했다.
그것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어깨나 가슴 깃을 잡기 쉽게 일부로 길을 열어주는 자세였다. 잡기 싸움을 안 하는 지영의 독특한 자세. 현대유도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잡기 싸움을 포기한 자세였다.
지영은 왜 강한결이 이런 자세를 잡았는지 깨달았다.
“체력 소모를 아예 없애려는 거구나.”
“아, 맞네. 안 그래도 지금 힘없어 죽겠을 상황일 테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번.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한 10번만 갔다 오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 처음에야 장 속이 비워지니 개운하겠지만 그게 10번쯤 되면 단숨에 몸이 신호를 보내온다. 온몸이 탈진한 것처럼 기력이 쫙 빠져나가고, 거기에 더해지면 싸는 만큼 에너지도 같이 날아간다.
강한결은 아마 밤새 시달린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아예 힘을 빼는 잡기 싸움은 포기하고, 지영처럼 카운터 방식으로 전략을 바꿨다. 되치기도 카운터지만, 아예 대놓고 카운터를 치겠다고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자세 변화는 사실 유도에서 쉽게 볼 수 있긴 했다.
하는 중에 아무래도 상성에 걸리면, 자세를 바꿔서 하는 선수가 제법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선수가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쿠웅!
와자리!
강한결이 하면, 그 자체로 특별한 거다.
강한결의 자세가 변하자 쉽게 등판을 잡은 중국 선수가, 소매도 잡은 김에 으라챠! 찬 허벅다리를 피해서 그대로 빗당겨치기. 하지만 역시 힘이 없어서 제대로 몸이 들어가지 못했고 아까운 찬스를 겨우 절반을 따내는 걸로 그쳤다.
하지만 절반이다.
이제 경기 시간은 2분이 지났으니, 남은 시간만 버텨도 승리는 확정이다. 하지만 2분은 긴 시간이다. 그리고 강한결은 정상이 아니고. 중국 선수는 절반을 빼앗기더니, 마치 뒤가 없는 것처럼 숨 막히는 강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2분이면 지도 2개를 먹이는 데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합 운용은 황금세대 전원의 특기다.
강한결은 잡기 싸움은 하지 않고, 간간이 기술 모션과 발기술로 중국 선수의 중심을 제대로 흔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칙을 모면할 수 있었다. 딱 적당한 타이밍에 기술을 한 번씩 걸어, 유효포인트를 따내자 결국 중국 선수는 30초를 남겨놓고 마구잡이로 덤벼들다가, 그대로 달려드는 힘을 이용한 업어치기에 훌렁 넘어갔다.
의심의 여지도 없는 한판이었다.
“하, 심장 쫄리네, 진짜…….”
이성진의 푸념에 지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석은 1회전을 끝내고 컨디션을 회복했다. 그래서 2회전, 3회전을 정말 깔끔하게 통과했다. 임효중은? 현재 무쌍을 찍고 있었다. 임효중은 경기 시간 2분을 넘긴 적 없이,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갑자기 경기가 진행이 꼬여 황석보다 늦게 들어간 강한결만 지켜보는 사람이 정말 힘든 시합을 이어가고 있었다.
잔뜩 지쳐서 나온 강한결에게 지영과 이성진이 동시에 붙었다. 일단은 매트에 눕히고, 땀을 닦아주기 위해 도복을 젖혔는데, 망할……. 땀이 거의 나지 않았다. 몸은 뜨거운데 땀이 거의 나질 않았다.
그에 이성진과 지영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
“…….”
꿀꺽.
겉으로 보기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4분 게임을 전부 하고 나면 땀이 비 오듯이 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거의 땀이 나질 않았다는 것은.
‘몸에 수분이 없다.’
이렇게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제 진짜 심각하게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서 수분을 쭉쭉 뽑아냈다. 그런데 다시 탈이 날까 봐 수분 보충을 제대로 못 한 상황이 겹치니, 이런 심각한 탈수증상이 찾아온 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 강한결이 잘 알고 있었다.
“한결아.”
“네, 감독님.”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온 전기정 교수의 말에 강한결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옆에 한쪽 무릎을 꿇은 전기정 교수는 오히려 상체를 밀어 편히 눕게 했다.
“시합, 오늘 하루만 있는 거 아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딱 두 판 남았어요. 준결, 결승. 두 게임 못 뛸 정도는 아닙니다.”
“야, 시합할 때는 다 죽어가는 눈빛이더니, 왜 시합을 더 하겠다고 말할 땐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하는 거냐?”
“……주장이거든요.”
“응?”
“쪽팔리게 주장이 제 몫도 못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야 이…….
이게 무슨 만화냐?
순간 훅 들어온 오글거리는 말에, 지영은 실제로 손발이 좀 오그라들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그간 강한결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갈고닦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책임감이다. 황금세대라는 말도 안 되는 천재집단의 리더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실력과 인성을 겸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걸 딱, 책임감이란 말로 포장할 수 있었다.
“좋을 때다. 알았다. 대신 현기증 나거나 그러면 바로 시합 중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양보 못 해. 내가 봤을 때 더는 안 된다 싶으면 거기서 끝내는 거야.”
“네.”
전기정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나고, 지영은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살다 살다 네 입에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좀 오글거렸지?”
“손발 잘라내고 싶었다.”
“하하.”
강한결은 낮게 웃고는, 눈을 감았다.
지영은 그런 강한결의 얼굴을 물기 있는 수건으로 닦아줬다. 준결승까지 길어야 40분에서 1시간. 다른 체급들을 돌고 들어갈 테니 휴식할 여유는 있었다.
“한결아. 준결만 버텨. 결승전까지 시간 많이 남으니까 그때 회복하면 돼.”
“오케이. 나 좀 잘 테니까, 때 되면 깨워줘.”
“응.”
스르륵.
눈을 감은 강한결은 거짓말처럼 곧장 잠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영은, 아, 하나를 더 깨달았다. 배탈이 나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했으면 잠도 못 잤을 게 분명했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만 자도 오후쯤 되면 아무리 철인이라도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는데, 아예 잠을 못 잤다면 지금 눈꺼풀이 뚝뚝 떨어지고도 남았다. 남다른 체력을 자랑한다고 자부하는 지영도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지금, 졸린 상태일 거다.
그런데.
‘차라리 잘됐어. 자고 나면 조금이라도 회복될 거야.’
먹는 것과 자는 것.
인간의 컨디션을 회복시키는 최고의 휴식이 바로 이 두 개다. 비록 전자는 불가능하지만, 후자만으로도 충분히 컨디션을 어느 정도 올릴 수 있긴 할 거다.
‘70%.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70%만 회복하면 무난하게 우승할 거야.’
지영에겐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 사이, 임효중이 들어갔다. 잠시 브레이크타임 뒤에 들어간 임효중은 여전히 무쌍을 찍었다. 임효중의 준결승 상대는 일본 선수였다. 일본은 전 체급 우승 후보를 내보낸 나라였다.
일본 전체에서 날고 긴다는, 최고의 유망주들만 모아서 내보냈으니, 선수들의 실력은 말해봐야 입 아팠다.
애초에 선수 수 자체가 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나라였다. 인구도 인구지만, 유도는 본래 쥬도(JUDO)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이 종주국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유도에 정말 많은 지원을 한다.
유도를 하는 학교 수 자체도 한국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러니 선수도 많았고, 당연히 실력 있는 선수들이 더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라에서 최고들만 추려서 내보냈다. 애초에 일본은 이 대회 전 체급 석권이 목표라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었다.
물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일본 선수가 실력이 엄청나다는 건 사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선수가 탈탈, 영혼까지 털리고 있었다.
“와, 효중이 뭐 화났나? 저건 터는 게 아니라 아예 썰어버리는데?”
“효중이가 잘하는 거지.”
“야, 사실은 우리 중에 효중이가 가장 에이스 아닐까?”
“응?”
지영이 뭔 소리냐는 뜻으로 반문하자, 이성진이 턱짓으로 상대를 털고 있는 임효중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잖아. 나 지금까지 효중이가 조금이라도 힘들게 시합한 걸 본 적이 없어. 그냥 나가면 다 무난하게 우승이야. 위기 없이.”
“아아…….”
그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진은 이미 아시아 청소년 유도선수권에서 진 경험이 있고, 황석도 점수를 자주 빼앗긴다. 강한결은 오늘 컨디션 조절에 실패해 더없이 힘든 시합을 치르고 있었고, 지영은 말해봐야 입 아프다.
입술부터 어제 이마까지.
신지와 만나 항상 다이내믹한 시합을 하는 지영이었다.
그런데 임효중은?
위기가 없다. 그렇다고 못 하는 선수들이랑 붙는 것도 아닌데, 항상 무난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게, 정말 편안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부웅!
쿵!
와자리!
허벅다리로만 절반 두 개.
잇폰!
합쳐서 한판.
고작 2분 만에 일본의 유망주에게 지도 두 개를 먹이고, 절반 두 개로 영혼까지 썰어버린 임효중이 시합을 끝내고 나왔다. 하여간 진짜, 끝내주는 경기력이었다. 준결승이 그렇게 착착 진행됐고, 다행히 황금세대는 모두 결승에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