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12화
112화. 세계 청소년 유도 선수권(5)
몇 장의 흑백 스틸컷으로, 드라마 예인으로 살어리랏다의 기대감을 한층 올려놓은 강지영이란 운동선수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팬이 생겼다. 그리고 그 팬들은 오늘 지영의 시합을 보러 왔다가, 깜짝 놀라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 저번에 대회에서도 입술 터져서 피 막 흘리더니, 또 다쳤네.
-저거 왜 찢어진 거예요?
-커팅 같은데? 왜 복싱이나 격투기 선수들 이마 찢어지는 거?
-이마에 부딪힌 거예요?
-브라질 선수가 몸 세우면서 뒤통수에 제대로 부딪힌 것 같은데요?
-와, 피 엄청 난다…….
-엄청 길게 찢어진 듯…….
-저기 눈썹 안쪽에 뼈가 있는 부위라, 원래 잘 찢어짐.
-그래도 눈두덩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눈두덩이면 진짜 많이 붓고, 피도 더 많이 나는데.
-저렇게 되면 시합은 어떻게 돼요?
-저게 흔하진 않아도 없지는 않은데, 아마 시합은 속행할 겁니다. 강지영 쟤가 승부욕은 또 엄청나거든요.
-어? 진짜요? 지영 오빠 잘 알아요?
-……청대 다녀서 훈련 같이 자주 합니다. 잡으면 이기려고 기를 써요. 제가 체급이 위인데도 솔직히 밀릴 때도 있습니다.
-와… 부럽다.
-경기장 안 나가고 지혈하는 거 보니 시합 속행하겠네요.
-아으…….
-입술 깨물고 있는 것도 멋있네…….
-……제가 보기엔 지금 짜증 제대로 올라온 것 같은데요?
-그래도 멋있으니까 상관없음!
-붕대 감은 모습도 멋있네 ㅎㅎ
-눈빛 봐. 살벌하다…….
-와 운동선수 눈빛이 뭔…….
-어, 지도다. 조금만 더 하면 반칙패로 이기겠는데?
-되치기다! 한판!
-우와……!
이후, 박수를 치는 이모티콘이 채팅창을 가득 메웠다.
그런 이모티콘 사이로 올라오는 메시지 하나.
-얘는 존재 자체가 진짜 드라마틱하네.
지영이 봤다면, 예리한데? 하고 중얼거렸을 메시지였다.
* * *
“언니 괜찮아?”
“응? 어, 어어…….”
양지원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의 언니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한순간이었다.
갑자기 지영 오빠가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그 순간 피가 확 피어났다. 깜짝 놀란 언니가 입을 틀어막았고, 양지원 본인도 왜 피가 났는지를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채팅창 또한 난리가 났었다.
그래서 더욱 걱정됐다.
그녀가 아는 언니는 피라면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포영화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피가 튀기는 장면이 나와도 히엑! 하면서 눈을 질끈 감는 언니였다.
그녀는 진짜 그렇게 순한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가, 지영의 입은 부상을 정면으로 또렷이 바라봤다. 입술을 질끈 깨물긴 했지만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왜 눈을 피하지 않는지, 눈치 빠른 양지원은 바로 눈치를 채 버렸다.
‘언니도 좋아하긴 하나 보구나…….’
언니가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양지원은 그게 신기하면서도, 어딘지 이상하게 서운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언제나 옆에 있던 언니였다. 언니가 보육원을 나가게 될 때도 함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갔지만 자신이 피겨를 시작한 이후 마치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일을 하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라, 차라리 지금 이렇게 변한 게 너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고개를 불쑥 치켜들었다.
“언니.”
“으응…?”
“지영 오빠 좋아해?”
“어?”
고개를 삐거덕거리며 돌린 양유진의 하얀 낯빛이, 발그레 물들어가는 걸 본 양지원은 괜히 심술이 나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속으론, 내일 한결 오빠는 다치지 말았으면 하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색한 침묵.
그 침묵의 사이로, 지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 *
후.
짧게 숨을 내쉰 지영은 매트에 올라 발바닥을 슥슥 닦았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 보통 루틴은 제자리서 점프도 하고 몸을 푸는 편인데, 머리 상처 때문에 전부 생략했다. 대신 상대를 바라봤다.
후안 페르난데스.
남자가 봐도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외모는 유도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허리기술이 주특기에, 나처럼 방어유도도 하고, 카운터도 치는 선수.’
후안 페르난데스는 잘하는 선수였다.
애초에 메이저 대회에 선발될 정도인 걸 넘어 4강까지 올라올 실력이니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기대감과 동시에, 불안감도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불안감의 이유는 부상 때문이었다.
미세하지만, 컨디션에 문제가 생겼다.
특히 아귀 쪽에 힘이 조금 빠진 느낌이었다.
현기증 같은 건 없지만 힘 자체는 빠진 느낌이 났다. 그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해 가며 알아냈다.
베스트 컨디션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번 시합을 승리로 끝내고 뭘 좀 먹으면 체력이 회복되며 힘도 올라오겠지만, 중요한 건 그건 이번 시합을 이기고 난 뒤의 얘기다. 지금 당장도 이럴 정도인데, 시합을 시작하면 분명 빠른 속도로 컨디션이 뭉개질 것 같았다.
이런 밸런스의 붕괴는, 솔직히 지영이 정말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미 무너진 지금의 밸런스는 잡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바로 시합 입장 전의 상태.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판이 입장했다.
‘잡생각은 그만.’
이제는 시합에 집중할 때다.
인사하고.
입장.
다시 인사하고, 한 걸음 앞으로.
하지메!
악!
짧게 기합을 내지른 지영은 후안을 상대하기 위해 발을 디뎠다.
그런데 이 새끼…….
확! 달려들더니 지영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일단 엎드렸는데, 그 위로 올라타더니 손을 목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지영의 상처 부위를 꽉 누르기 시작했다.
잠잠해졌던 통증이 꼭지가 날아간 수도에서 물이 뿜어지는 것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걸 신경 쓰면, 목에 손이 들어와서 지영은 턱을 꽉 조였다. 그러자 상체를 들어 앞으로 심판의 시선을 막고는, 손으로 꾸욱, 꾸욱! 지압하듯이 상처 부위를 찍어눌렀다.
지영은 겨우 멈췄던 상처 부위에서 피가 다시 새는 게 느껴졌다.
그게 지영의 정신에 불을 지폈다. 텅! 허리를 당겨 튕기자 앞으로 데굴 굴러떨어지는 후안 페르난데스.
지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볼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소매로 슥 닦아냈다. 파란 도복이라 티는 안 나겠지만, 얼굴은 아마도 엉망진창일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고…….
이 새끼.
얼굴과는 다르게 스포츠맨십이 진짜 쓰레기였다.
실수?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좀 전에 굳히기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생긴 상황이 아님을 지영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지영이 출혈이 있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상처 부위를 노렸다.
씩.
후안 페르난데스가 지영을 보며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굉장히 음습해 보였다.
“아.”
넌, 그런 새끼구나?
파악이 끝났다. 그쳐가 없었기 때문에 지영은 곧장 시합을 재개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행히 처음에 피가 샌 다음에, 더 출혈이 크게 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파울로와 시합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서 그사이 제대로 지혈이 된 것 같았다. 다시 한번 피를 닦아낸 지영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툭, 소매를 잡으려고 손을 뻗자 이번에도 바짝 붙어오는 후안 페르난데스.
지영은 스텝을 밟고 후안이 움직이는 순간 이미 몸을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곤 소매 끝을 잡아 발목받치기를 쳤다.
빙글.
대놓고 달려들고 있어서 중심이 제대로 무너졌다. 겨우 몸을 세우고 소매를 뿌리치는 후안에게 쫓아가, 이번엔 모두걸기를 쓸었다. 머리의 상처만 노리던 놈이라, 하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부웅!
텅!
와자리!
연속으로 들어간 발기술 두 개로 절반을 딴 지영은 표정이 일그러진 후안을 보면 피식 웃었다. 후안은 아마 모를 거다. 지영이 자신에게 더러운 형태로 도발을 걸어온 상대를 어떻게 뭉갰는지.
왕종현은 뼈가 부러졌고, 이호석은 졸려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용인대 선수도 지영에게 탈탈, 영혼까지 털렸다. 지영은 이런 식의 도발,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한다. 이런 도발은 신기하게도 강지영이란 유도선수의 진짜 실력이 나오게 만드는 트리거 역할을 했다.
철커덕!
그렇게 트리거가 당겨지면, 지영은 굉장히 차가워지고, 또 그만큼 사나워졌다.
후안.
이 친구는 모를 거다.
지금 그 잠금장치가 풀려버린 상태라는 걸.
절반을 빼앗긴 후안은 더욱 야비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퍽!
맞잡은 상태에서 치는 모두걸기가 아주 그냥, 지랄맞았다. 맞은 발목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후안은 아주 교묘했다. 절대 반칙의 선을 넘지 않았다. 그냥 후려치면 반칙이지만, 발바닥과 발등의 사이로 치는 건 반칙이라 보기엔 애매한 각이다.
반칙과 기술.
딱 그 사이.
후안은 아주 정교한 반칙을 구사했다.
하지만 지영은 그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거에 흔들리는 거야말로 후안이 바라는 바일 테니까, 차분하게 상대했다.
어차피 절반도 땄으니 급하게 시합을 풀어갈 것도 없었다.
피도 더는 나지 않는 것 같아서 더더욱 급할 게 없었다. 반대로 2분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훅 지나고 나니 급해지는 건 당연히 후안이었다.
지도는 승패를 가를 수 없지만, 절반은 승패를 가른다.
이대로 2분이 더 지나면, 그대로 지영의 승리다. 하지만 아무리 지영이라고 해도, 원하는 대로 시합을 풀어나갈 수는 없었다.
팡!
등판만 잡은 채로 찬 허리후리기에 몸이 붕 떴다. 실력은 그래도 있어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방어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술에 넘어가진 않았는데 대신 바닥에 엎드려서 굳히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여지없이 손이 들어왔다.
한 손은 목으로, 한 손은 역시나 이마로.
지영은 바로 상체를 세웠다.
그러자 후안은 팔을 허리에 넣어 꽉 조여왔다. 옆구리가 아팠지만 지영은 그대로 상체를 세웠다. 이렇게 일어나야 굳히기가 판정 상태에서 풀리기 때문이었다. 후안이 원하는 건, 상처 부위의 출혈이 터져서 시합 속행이 불가능한 상태로 몰고 가는 거다.
일단 어떻게든 피를 터뜨린 다음에, 지영을 구석으로 몰고 가는 게 목표겠지만, 지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스타일의 양아치들과는 이미 시합 전적이 꽤 된다.
툭, 투둑!
뭔가 뜯어지는 소리, 느낌과 함께 통증이 확 솟구쳤다. 이성의 끈이 뜯어진 게 아니라, 살이 뜯어지면서 난 소리였다. 그에 인상을 와락 쓴 지영.
‘이런 개…….’
“X발…….”
머리에서 터진 욕이, 입에서도 터졌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상체를 세웠고, 심판이 그쳐를 선언했다. 폴짝, 지영의 등에서 일어나면서 또 다리로 뒤통수를 퍽 치고 가는 후안.
인내심이 뚝뚝 뜯어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지영의 표정이 한없이 차가워졌다.
“지영아! 강지영! 참아!”
“…….”
전기정 교수의 외침에 지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침 상황을 본 전기정 교수님이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반칙이다. 고의로 상처 부위를 눌렀다. 등으로 어필했지만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도 심판은 격투기 심판처럼 바닥에 엎드려 가며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대신, 심판도 뭔가를 감지하긴 했는지 후안 페르난데스에게 지도를 줬다.
그러자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들어 올리는 행동을 취하는 후안 페르난데스.
지영은 그 동작이 너무 얄미워서, 참을 수가 없어졌다.
‘뭐, 너도 그랬으니까 나도 팔 하나쯤은…….’
가져가도 되잖아?
힐끔, 점수판을 확인하니 이제 남은 시간은 1분 30초 정도.
‘넉넉하네.’
팔 하나 잡아먹기에는.
하지메!
지도를 받은 후안이 빠르게 다가왔다.
시간이 없으니 어떻게든 지영을 코너로 몰고 갈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잡기 싸움은 없었다. 하지만 후안은 조심했어야 했다.
홰액!
지영은 툭, 툭! 상대를 후안을 두 번 당긴 다음 그대로 몸을 띄워 허벅지로 후안의 목을 감았다. 그러곤 그대로 체중을 실어 굳히기 포지션으로 끌어당긴 다음, 팔가로누워꺾기로 연결했다.
제이미가 걸었던 플라잉암바였고, 제대로 걸렸다.
무방비 상태인 후안의 팔을 꺾으며 지영은 속으로 기도했다.
버텨라.
제발, 더 버텨라.
팔이 부러질 것 같아도 제발 참아줘라.
툭! 투둑!
인대가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이제 더 당기면, 부러진다.
“악! 아악!”
후안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그러곤 세상 다급하게, 지영의 다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탭을 쳤으니 지영은 결국 팔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꺾었다간, 오히려 자신이 반칙패를 받기 때문이었다.
‘후…….’
더러운 성깔에 비해 인내심은 별로라서, 지영은 그게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팔을 부여잡고 인상을 잔뜩 쓴 채 경기장을 나가는 후안을 보자 그나마 좀 속이 풀렸다.
결승.
이제, 결승전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