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00화
100화. 왕의 초대(2)
대한민국 유도 국가대표.
안호진.
이 선수의 이력은 독특하다.
일단 재일교포 3세라는 점부터 시작하니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영은 일단 안호진이란 인간에 대한 생각보다, 통화에 집중했다.
“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강지영 선수. 이렇게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선배님. 괜찮습니다.”
뭐지.
왜 전화했을까?
자신의 번호야 뭐 이우진도 알고, 구혁도 알고,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연락처를 알아내는 거야 문제도 아닐 거다. 그리고 아마 지금 이우진은 선수촌에 파트너로 들어가 있는 상태일 거고. 하지만 번호를 왜 알아내서 전화했는지, 이게 중요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선배님.”
-아, 제가 전화를 한 이유는요. 궁금한 것도 있고,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궁금한 거?
그리고 부탁할 거?
지영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네.”
-네, 고마워요. 그럼, 큼, 혹시 지영 선수가 선수촌에 안 들어오는 다른 이유가 있나요?
“아…….”
선수촌.
이전에는 흔히 태릉 선수촌이라고 했고, 그곳은 국가대표 선수들만 들어가서 훈련을 받는 곳이다. 아니면 유망주들이 파트너로 들어가던가.
‘들어오라고 연락은 많이 오긴 했지만…….’
그건 학교 측에서 거절했다.
그리고 학교 측이 거절하지 않았어도, 지영은 선수촌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선수촌에 들어가면 합숙을 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자유도 빼앗긴다. 지영은 합숙이야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 괜찮지만 자유를 빼앗기는 건 별로였다.
그리고 이는 지영뿐만이 아니라, 친구들 전체의 의견이 같았다.
거기다 선수촌에 굳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건 실력을 인정받은 극소수의 선수뿐이다.
그러니 입촌하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하지만 황금세대는 이제 고작 고등학생이었고, 선수촌에 들어가지 않아도 지금까지 정말 성적을 최고로 내오고 있었다. 그래서 유도협회에서 보내오는 입촌 얘기는 학교가 나서서 다 거절하고 있었다.
학생의 본분 중의 하나인 학업 때문에 연희고 선수들의 입촌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대충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이걸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을 것 같고…….’
이걸 그대로 얘기하면 시건방도 이런 시건방이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아보려고 머리를 빨리 굴려봤지만, 아무리 지영이라고 해도 단시간 내에 아아, 그렇군요. 하고 수긍할 만한 변명거리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학교에서 보내주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아, 학교에서……. 그럼 어쩔 수 없겠네요.
다행히 안호진은 이걸 수긍하고 넘어가 줬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은 뭔가요?”
-아 부탁이요. 음, 지영 선수. 선수촌에 한번 오지 않겠어요?
“네?”
-대표팀 감독님, 코치님한테 연희고 선수들과 훈련을 같이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했는데, 전부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부탁하는 거예요.
차분한 어조의 부탁에 지영은 아, 하고 짧게 탄성을 흘렸다.
말은 길지만, 이걸 짧게 줄이면 그냥 한 판 붙자! 이거였다. 구혁이 마! 함 붙자! 이런 식이라면 안호진은 조곤조곤, 한번 붙어봐요.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전자나 후자나 그냥 한판 하자고 하는 건 똑같았다.
“평일은 학교 훈련 프로그램이 있어서 힘듭니다. 혹시 주말에도 훈련하세요?”
이건 기회였다.
지영으로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
-네. 토요일 오후는 정상 훈련을 해요.
“……그럼 저라도 가겠습니다. 훈련장이 진천인가요. 태릉인가요?”
-진천 훈련장이 공사 중이라 태릉에 있어요.
“네, 그럼 토요일 날 갈게요.”
-정말요? 고마워요! 지영 선수!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아니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안호진은 목소리만 들어도 굉장히 기뻐 보였다.
그리고 솔직히 없는 인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안호진의 훈련 초대. 솔직히 지영도 기꺼웠다. 토요일은 어차피 서울에 가기로 했다. 그러니 스케줄 상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유진 씨도 일은 6시 넘어서 끝나니까…… 딱이네.’
끝나고 잠깐 얼굴을 보고, 저녁을 먹고, 막차를 타고 내려오면 되는 스케줄이다.
좋다. 이 정도면 오히려 지영이 부탁했어야 할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는 훈련이었다.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통화를 끝낸 지영은 바로 차표를 예매했다.
토요일은 오전 훈련이 없으니 출발 시간은 11시쯤이고, 도착해서 이동시간까지 합치면 3시까지는 넉넉하게 태릉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호진, 안호진 선수…….’
현재, 그는 대한민국 유도계의 간판스타였다.
-73㎏급에서는 거의 왕처럼 군림하는. 지난 몇 년간 국가대표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부동의 1선발 선수였다. 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입상하지 못했지만,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는 2위 입상까지 한 실력자였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세계에서 유도를 제일 잘한다는 인간들과 겨뤄 은메달을 딴 실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게다가 피지컬이 떨어질 나이도 아니지.’
안호진은 아직 서른 전이다.
선수로서 최상의 기량을 아직 유지할 때였다. 떨어지는 폼을 강제로 붙잡고 있을 시기가 아니니 지영이 다음 올림픽을 노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붙어봐야 하는 선수였다. 그래서 가슴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양유진으로 인해 뛰는 것과는 결이 다른, 유도선수일 때만 나오는 두근거림이다.
아드레날린이 아직 서로 맞잡지도 않았는데 폭발적으로 솟구쳐서, 오후 수업을 받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기대감을 얼른 풀어주고 싶은 모양인지 주말은 보통 체감보다 훨씬 더 빨리 왔다.
각자 주말 스케줄이 있는 만큼, 주말만큼은 보통 프리하다.
시합이 얼마 안 남아 숙소에 남는 후배들의 배웅을 받으며 지영은 숙소를 나섰다. 교문에서 택시를 불러 서로 인사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황석은 아침부터 모시러 온 한은정과 강한결은 강원도로, 임효중과 이성진은 둘이서 주말을 보낼 거다.
지영은 버스를 타고 바로 서울로 향했다.
12시쯤, 점심시간인지 양유진의 메시지가 왔다.
[연예인님! 오늘도 와요?]
[네, 오늘도 가요.]
[그럼 오늘도 저녁 먹어요?]
[네, 오늘도 저녁 먹어요.]
[아! 그럼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오늘 저 월급 받았어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으니까! 꼭 제가 사고 싶어요.]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메시지다.
서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왕을 만난다는 기대감과 긴장감에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이 메시지를 보니 다시 평온하게 가라앉아 갔다. 여러 가지 의미로 양유진이 자신에게 좋은 기운을 준다는 생각에 지영은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다시.
[어제요. 회사 분들이랑 회식했는데요! 되게 맛있는 삼겹살집 알아냈어요! 연예인님 삼겹살 좋아하세요?]
연예인님.
참으로 낯 뜨거운 호칭인데, 뭘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아서 지영은 이제 그냥 익숙해지고 있었다.
지영은 다시 없어서 못 먹어요.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니,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양유진은 다시 일을 하러 간다는 메시지를 보내곤, 잠수 모드에 들어갔다. 그녀가 일터로 향했을 때니, 슬슬 서울에 도착할 시간이 됐다.
30분쯤 더 달려 서울에 도착하자 지영은 잠시 고민했다.
버스, 지하철, 택시.
지영은 잠시 고민 끝에 버스를 탈까 하다가, 택시를 탔다. 지하철은 익숙하지 않고, 버스는 잘못하면 늦을 것 같아서였다.
선수촌 앞에 도착해 안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지영 선수! 도착했어요?
“네, 지금 막 도착했어요.”
안호진은 예의가 있었다.
말을 놓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고, 말투에도 상대를 배려하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심성이 정말 나쁘지 않은 선수.
‘태극마크를 달고 싶어 귀화까지 한 선수니까 뭐…….’
여기에 애국심까지 있는 선수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가장 좋아할 만한 조건을 모두 갖춘 선수였다.
-지금 바로 갈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네.”
여기를 지영은 자력으로 출입할 수 없으니, 안호진이 나와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경비실에 전화를 해줘도 되지만…… 본인이 직접 온다니 어쩔 수 없지.’
솔직히 어색할 것 같아 연습 때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입구 한쪽에 서서 시간을 보니 이제 훈련 30분 전이다. 잠시 기다리자 안호진이 나왔다. 복장은 뭐 특별할 것도 없었다. 지영이 훈련 갈 때처럼 유도복 바지에 위에는 대충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어깨에 티로 묶은 도복 상의를 매고 있는 정도였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도복과 트레이닝복 상위에 태극마크가 박혀 있다는 것뿐이었다.
“지영 선수. 반가워요. 안호진이에요.”
한국어를 아무래도, 여성에게 배운 것 같다.
어색하진 않지만 느낌이 그랬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강지영입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악수도 하고.
그러자 안호진이 밝게 웃었다.
첫인상으로 바로 떠오른 건, 신지와 함께 온 유도소년 마사루였다. 느낌이 진짜 그와 비슷했다.
경비실에 안호진이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지영은 그와 나란히 정문을 통과했다.
태릉 입촌.
이런 식으로 입촌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그런지 느낌이 좀 묘했다. 조금 걸어 올라가자 훈련 가는 다른 종목 선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선수촌…….’
기세가 남다르다.
졸음이 덜 깬 얼굴, 피곤에 절은 얼굴들이지만, 하나같이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모두 국가대표였다. 파트너로 입촌한 소수를 제외하면 전원이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
멋으로, 폼으로 다는 게 아닌, 진짜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니 기세가 역시 남다르다.
“여, 호진이. 왜 아래서 올라오냐?”
길을 가던 중 마주친, 강한결이나 황석보다도 큰 선수가 안호진을 향해 물었고, 안호진은 차분하게 손님을 모시고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손님? 하고 고개를 갸웃한 키 큰 선수가 지영을 바라봤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이 연예인이야?”
“응? 하하, 아니야. 유도선수야.”
“유도선수라고? 아니 이 얼굴로 왜…… 아. 아아. 좀 노는 언니들에 나왔던 그 아이돌들?”
“맞아. 그런데 유도선수야. 아이돌이 아니라.”
“알아, 나도. 와, 반가워요. 농구 심석훈입니다.”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꾸벅.
한참 선배들이다.
그래서 지영은 바로 예의를 갖췄다.
정신연령이야 비슷하겠지만 그건 의미가 없었다.
“반가워요. 와.”
악수까지 하고 헤어졌다.
농구선수라더니, 손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렇게 가면서 인사하고 하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가서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에, 그 사람이 먼저 지영을 발견했다. 지영을 보고는 또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지영아!”
여자 배구팀과 얘기 중이던 한유진이 지영을 향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시선이 그냥…… 와르르 달려들었다. 지영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한유진에게 다가갔다. 지영이 다가가자, 배구팀이 마치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게 더 어색해서 갈라진 틈 끝에 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나 안녕하세요.”
“어! 안녕! 근데 너 왜 여깄어? 입촌했어?”
“아니요. 오늘 오후만 초대받아서 훈련하러 왔어요.”
“초대? 누가?”
“호진 선배요.”
“아, 호진이.”
“누나는 왜 여기 계세요?”
“나? 잠깐 불러서. 아, 맞다. 나 아까 오전에 현정이 만나서 다 들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해요.”
“죽었어, 아주!”
피해야겠다.
그리고 자신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보는 여자 배구팀 선배님들 시선도 살짝 버거웠다. 인사를 하고 얼른 튀는데 이따가 전화 안 받으면 죽을 줄 알아! 하고 소리쳐서 더 무서워졌다.
다사다난까진 아니지만, 이런저런 일 끝에 유도장에 입성.
이미 선수들이 와서 각자 몸을 풀고 있었다. 겉과는 다르게, 안은 묵직한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공기를 느끼기 시작하자 쿵쿵거리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갔다.
이 공기.
이 느낌.
‘이거지…….’
지영은 그제야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안호진이 말해준 탈의실에서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시선이 다시 확 달려들었다. 지영은 그 시선을 이곳으로 걸어올 때와는 다른 눈빛으로 담담히 받아넘겼다.
도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있을 때 지영과 도복을 입은 지영은 다르다.
이때의 지영은 대통령이 와도, 그보다 더한 사람이 와도 심적으로 기죽지 않았다. 유도복이 그렇다. 지영에게는 이 유도복이 무기나 마찬가지였다. 전장에 나선 장수가 칼이나 창을 쥐듯, 지영에게도 유도복은 그런 느낌의 무기이자, 방패였다.
‘특히 이런 곳이라면…….’
그러한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호기심과 무관심 속에 섞여 있는 실낱같은 적의조차 느껴졌다.
적의?
굳이 찾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인간일 테니까. 지영은 스트레칭을 하는 척 상체를 숙이며 슬며시 웃었다.
‘다 깨버리면 되니까 뭐…….’
지영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3시 땡.
준비운동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