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99화
99화. 왕의 초대(1)
4월이 훌쩍 가고, 5월도 훌쩍 지나고 있었다.
“아니지! 지호야, 그쪽으로 돌면 날아간다니까!”
쩌렁!
임대성의 말에 권지호가 움찔하는 순간, 지영의 빗당겨치기가 빛살처럼 들어갔다. 아주 잠깐의 틈이지만, 지영은 그걸 놓치는 선수가 아니었다. 억! 소리와 함께 권지호가 빙글 돌아 매트에 떨어졌다.
지영은 도복을 놓고 일어나 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강한결에게 사력을 다해 덤비는 조영우가 보였다. 하지만 여기, 정점에 선 강한결을 넘기는 힘들었다. 5분 연습 동안 세 바퀴나 날아가니까. 물론 그래도 위협적인 장면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슬슬 후배들이 황금세대에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근데 그것도 사실 당연했다. 매일같이 훈련을 같이하니 재능이 나쁘지 않은 후배들이 적응하는 건 사실 시간문제이기도 했다.
일어나서 다시 전의를 다지는 눈앞의 권지호도 마찬가지였다.
지호를 포함한 후배들은 얼마 뒤 시합이 있었다.
YMCA배 전국유도대회.
보통 3월에 했던 대회지만 요즘은 6월로 시기가 변했다. 6월 첫째 주에 하는 이 대회는 후배들이 전원 참가한다. 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야 국내보단 국제대회 쪽에 초점을 맞춰서 올해의 스케줄을 짰지만, 후배들은 아니었다.
후배들은 아직 고등부에 좀 더 익숙해져야 했고, 그러니 시합을 나가는 건 필수였다.
그래서 요즘은 후배들의 연습을 중점으로 봐주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2주쯤이라, 이렇게 봐주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1주일 전부터는 체중 관리와 컨디션 관리가 같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며칠 안 남은 후배들의 연습을 지영은 성의껏 봐주고 있었다.
특히 권지호.
이번에 이우진만 넘으면 금메달을 딸 거라 예상되는 유망주이기 때문에 지영은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쿵!
하지만 이우진 스타일대로 해주는데도, 권지호는 맥을 못 추고 있었다.
2번째는 업어치기로 던진 뒤, 일어난 권지호에게 지영은 조언을 시작했다.
“지호야. 이우진은 양쪽 업어치기 다 하고, 양쪽으로 허리기술도 찰 수 있는 올라운더야. 좀 전에 빗당겨치기로 당했다고 그것만 막으려고 하면 지금처럼 반대쪽으로 대번에 업힌다.”
“네, 형. 후아.”
권지호는 지영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부진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다부짐 속에는 욕심도 엿보였다. 좋은 모습이었다. 운동선수에게, 운동하는 순간에 욕심은 아주 필요한 덕목이었다. 욕심. 이기고자 하는 욕심은 그 자체로 승부욕이라 봐도 좋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그런 후배의 정신에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상대를 시작했다.
권지호는 잘하는 후배였다.
가장 늦게 시작했으면서도, 정상을 차지했었던 전적이 있는. 재능이 없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걸 해냈으니 충분히 나중이 기대되는 선수였다. 하지만 이런 권지호와 이우진을 비교하면?
승부의 추는 급격하게 이우진 쪽으로 기운다.
이우진은 지영이 없었으면 벌써 유도계를 호령했을 선수였다. 실제로 올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7위에 입상하기까지 했다. 대학부를 넘어 심지어 실업팀 선수들까지 이겨가며, 현재 –73㎏급 왕좌에 앉아 있는 안호진에게 빗당겨치기 절반으로 패배했다. 권지호를 거기에 대입하면?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을 거다.
그런 이우진은 분명 천재 소리를 들을만한 선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영이 있어서 그 빛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승부의 세계는 매우 냉혹하다. 재능과 실력, 노력이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판이다.
4분의 경기에 모든 것을 토해내고, 그 끝에 서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종목.
2등도, 3등도 대단하지만 1등만을 기억하는 종목.
유도는 그런 종목이었다.
그래서 지영의 그림자에 이우진은 맥을 못 추고 있었다.
5시.
훈련이 마무리됐다.
연희고는 절대로 5시 훈련을 넘지 않았다.
이어서 체력훈련은 해도, 본훈련은 무조건 5시에 끝이었다.
5시가 넘자 자유 연습을 마치고, 밀어 올리기와 버피, 쪼그려 뛰기, 팔 벌려 뛰기로 체력훈련을 하고 나자 몸에 피로감이 훅 엄습했다. 아무리 시합 전이라 체력이 넘치는 지영이라지만, 마지막 체력훈련까지 하고 나면 이렇게 파김치가 된다.
이렇게 끝까지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훈련에 임하는 이런 자세가 강지영이란 선수의 실력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기둥이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씻은 지영은 루틴대로 하루 훈련을 소화했다.
그리고 틈틈이 그녀에게 연락도 잊지 않았다.
똑똑.
10시가 넘은 시간.
노크에 지영은 들어와,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황석이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왔다.
“지영아, 이 애. 이번 주 보러 갈까 하는데, 같이 갈래?”
“누구?”
“수진이.”
“수진이? 양궁 이수진?”
“응.”
음…….
지영은 이번 주 스케줄이 뭐가 있는지 폰으로 확인을 했다. 별다른 게 없긴 하지만…… 이렇게 별다른 게 없을 땐 보통 서울에 간다. 그래서 대답이 살짝 궁색해지자, 황석이 씩 웃었다.
“그렇게 좋아?”
“……너까지 왜 그러냐.”
하아…….
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한결과 함께 서울에서 마주쳤던 날, 양지원, 양유진 자매와 저녁을 먹은 날, 그날 청주에 돌아와서 지영은 솔직하게 후원에 관한 걸 오픈했다. 그러자 애들은 처음에는 서운해했지만, 같이 분업을 하자는 말로 두 사람을 이해해줬다.
근데 딱 거기까지만 얘기하려고 했는데, 강한결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폭탄을 내던졌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지영이도 생겼다고 같이 덤으로 끼워서 터뜨렸다. 그 결과 이제는 모두가 다 안다.
아직 애인은 아니지만, 지영이 좋아하는 사람과 꽁냥거리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천하의 황석이, 이 바위 같은 놈도 종종 이렇게 지영을 놀렸다. 물론 그게 싫지는 않았다.
그냥…….
‘적응이 안 되네…….’
뭔가 이상하게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럼 내가 은정이랑 같이 갔다 올게.”
“그래. 참, 준비는 어떻게 되가?”
“영화?”
“응.”
황석은 친구들, 그리고 한은정과 상의해서 영화 출연을 결정지었다.
당연히 주연, 조연은 아니다.
그런 롤을 맡아 길게 촬영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 이번에 황석이 맡은 역은 ‘경호원’이었다. 그것도 청와대 경호실의 막내 역할. 초반에는 실수 좀 하고 하다가,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는.
감독과 출연 배우들도 출중해서, 최고의 선택이란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심지어 이 선택에는 미래를 아는 지영의 의견이 살짝 들어갔다. 지영이 이쪽에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잘 된 작품은 재방송으로 계속해서 노출되게 마련이고, 개봉이 한참 지난 이후도 명작으로 불리며 자주 재방송되면서 지영도 아는 영화였다.
제목은 경호원들.
청와대를 무대로 펼쳐지는 경호 얘기다. 시원시원한 액션과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경호원의 삶을 다룬 영화였다.
문제는 황석이 들어감으로써 그 영화가 지영의 기억처럼 흘러가냐인데, 지영은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봤다. 황석은 섬세하다. 첫 데뷔인 의사생활에서도 짧지만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그리고 지영처럼 황석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 대한 책임을 알아서 요즘은 연기 연습도 열심히 한다.
그런 황석이니 믿을 만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석은 웃었다. 자신감 있는, 다부진 웃음.
지영이 황석을 확실히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웃음이었다.
“잘 되어가고 있어.”
“다행이네.”
“너는 어때? 너도 곧 촬영 들어간다며.”
“나도 뭐, 너랑 비슷해.”
“잘하겠네.”
하하.
지영은 그 말에 그냥 웃고 말았다.
황석의 말처럼 자신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장민주 작가가 보내준 걸 토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뿐이었다.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후원도 하고, 심지어 연애도 하려고 하는 중이지만 지영은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대성 코치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놔서 지영이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하지만 지영은 그런 임대성 코치의 걱정을 성실함으로 무마시켜 줬다. 지영은 정말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임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아직은 젊고, 운동으로 인해 체력이 일반인보다 월등해서 이 정도는 거뜬히 버틴다는 점이었다.
‘더 일을 벌일 생각은 없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해.’
그리고 몸에 과부하가 오는 느낌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본래도 내구성 하나만큼은 엄청났던 몸이었다. 그래서 체력적인 부분만 따진다면 황금세대 중 거의 1, 2위를 차지하는 게 지영이었다. 물론, 그 내구성도 사고를 이겨내지 못했지만 사고가 없는 지금은 마치 중장갑차처럼 단단했다.
그런 탄탄함에, 체력까지 탑재되어 있어서 지금 이 빡센 하루하루가 결코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빡세도, 빡세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던 과거가 있기에 웃으며 견딜 자신이 있는 지영이었다.
“은정이는 요즘 어때?”
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지영이야 이제 연애에 연 자를 시작한 단계지만 황석은 벌써 중학교 때부터 연애를 시작한 친구다. 그것도 지영이 진짜 믿고, 어쩌면 존경할 수 있는 친구랑.
“잘 지내. 요즘은 보양식 쪽에 꽂혀 있고.”
“보양식?”
“응.”
보양식이라.
레스토랑 셰프를 꿈꾸는 친구가 보양식이라고 하니 뭔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한은정이면 그것도 잘할 것 같았다. 좀 더 얘기를 나눈 황석이 나가고, 지영은 다시 노트를 펼쳤다. 아무리 일로 바빠도 공부는 빼놓을 수 없었다. 평소 루틴대로 공부도 끝내고 나자, 12시가 넘었다. 목이 말라 밖으로 나오자 거실은 어둡고, 조용했다.
친구들은 아직 안 자고 있는지 방에서는 불빛이 문틈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영은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선영에게 온 메일을 살폈다.
이선영에게 메일이 매번, 매일같이 오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제대로 조사를 하고, 정말 지원이 필요하다고 그녀 스스로가 인정할 때까지 취재한 뒤에야 보내주기 때문에 시간은 적지 않게 걸렸다. 그래서 많이 오면 일주일에 서너 개고, 없을 땐 아예 오지 않기도 했다.
오늘도 새롭게 온 메일은 없었다.
그래서 지영은 후원 파일을 펼쳤다.
강한결이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후원 파일을 열자 벌써 제법 된다는 게 느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이도 했네.”
정기적인 후원이 필요한 아이들과 잠깐 필요한 아이들이 있다. 그걸 전부 합해놓자 벌써 달에 만만치 않은 금액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목돈은 뭉쳐만 있어도 돈이 된다. 그런데 그 목돈을, 능력이 좋은 전문가가 직접 굴리니, 수익 또한 상당했다.
후원을 위해 남겨 놓은 돈과 수익을 낳게 돌아가는 돈이 따로 있었고 후자 때문에 마이너스는 아니었다. 아니, 한참 플러스였다.
앞으로 현재 후원을 시작한 열다섯을 두 배인 서른으로 올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지영은 노트북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폰을 열었는데, 메시지는 없었다. 다 좋은데, 이 사람은 답장을 정말 잘 보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게 좀. 아니, 많이 답답했지만 양지원이 슬쩍 알려준 얘기로는 자신의 언니는 폰을 달고 사는 사람이 아니니, 이해하라고 해서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한창 일할 시간.
아직 알바를 그만두지 못해서 편의점에서 한창 일할 시간이다. 그래서 지영은 너무 끈적대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심이 없는 것 같지도 않은 모호한 내용의 메시지를 보낸 채 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근데 바로 오는 답장.
[연예인님! 잘 자요!]
“…….”
언젠가부터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변하지 않는 호칭. 지영은 그에 누나도 일 잘하고, 조심하고, 잘 자요. 라고 답장을 보낸 뒤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지영의 하루하루는 특별한 것 같으면서도 특별하지 않은 채로 흐르고 있었다.
금요일 점심시간.
반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폰으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예전에는 모르는 번호면 아예 받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후원이란 걸 하고 있어,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혹시 강지영 선수 번호 맞습니까?
억양이 상당히 애매하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누구세요? 하고 되묻자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 반갑습니다. 저, 안호진이에요.
“어…….”
대답 안에 담겨 있는 저 이름이, 지영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