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96화
96화. 날지 못하는 신데렐라(6)
서울역에 도착하자, 장세리가 마중을 나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지영아! 얼른 타!”
“네.”
지영이 차에 오르자 장세리가 안부를 물었다.
“어떻게, 시합 끝나고 잘 지냈어?”
“네. 선배님은요?”
“나야 뭐 항상 같지. 그보다 정말 연기할 거야? 연기 어려워. 옛날이야 길거리 캐스팅해서 현장부터 넣어버려서 키웠지만, 요즘엔 아주 체계적으로 연습하고 그래. 근데 그래도 안 되는 게 그 바닥이고.”
차에 오르자마자 곧장 걱정부터 날아든다.
연예계의 무서움, 그리고 그 벽에 대해서라면 지영도 어느 정도는 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 아깝다. 나중을 생각하면 더더욱 지금 경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무작정 할 생각은 아니지만, 일단은 작가의 보여준 성의를 봐서 오늘 미팅을 해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장세리의 질문에 답하는 게 먼저였다.
“무모한 마음으로 덤벼드는 건 아니에요.”
“그럼? 확신이 있어?”
“아니요. 확신보단, 이번엔 검증의 느낌이 강해요.”
“검증? 아아, 재능에 대한 검증?”
“네.”
무턱대고 들이밀 생각은 없었다.
지영이 이번 미팅을 나가는 이유는, 그 작가님의 노력과 성의가 일단 70% 이상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염두에 쓰셨다고 했다. 연예인도 아닌 자신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창조했다는데, 얘기도 안 들어보는 건 조금 그랬다.
지영은 이 부분도 설명했다.
그러자 장세리도 어느 정도 이해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 그 작가님이 아예 너를 모델로 캐릭터를 만든 공을 보였으니 또 안 만나볼 수는 없겠네.”
“그래서 일단은 얘기라도 해볼 생각이에요. 자신이 없다는 것도 얘기할 거고요. 그런데도 원하신다면, 그러면 해볼 생각입니다.”
“오케이. 그럼 확정은 아니라는 거네. 알았어. 일단 얘기부터 그럼 들어보자.”
“네.”
부웅.
부드럽게 출발하는 차량.
“참나, 너희랑 계약하고 나니까 바로 드라마 미팅부터 들어가는구나. 신기하다, 신기해.”
차를 출발시키면서 장세리가 한 말에 지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되자 지영도 뭔가 좀 신기했다. 그리고 장세리와 함께 방송국에 가는 상황도 신기했다.
지영은 두 개의 회사와 계약이 되어 있었다.
황금세대라 불릴 때. 즉, 운동선수 신분으로 무언가를 할 때는 연희 스포츠 소속이다.
하지만 연희고 아이돌로 움직일 때. 즉, 방송인 느낌으로 움직일 때는 장세리의 회사 소속이었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계약을 건 이유는 이성진 때문이었다.
이성진은 이미 장세리의 소속사가 케어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성진은 연희 스포츠와 계약이 애매해졌다. 그렇다고 또 이성진만 뚝 떨구고 나머지만 연희 스포츠와 계약하기 뭐해서, 김지영 여사님이 생각해 낸 수가 바로 분야를 달리해서 맺는 계약이었다.
운동에 관한 지원, 케어는 연희 스포츠.
방송 쪽에 관한 지원, 케어는 비즈 인터내셔널.
다행히 장세리 선배님은 흔쾌히 여사님의 제안을 수락했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얘기가 오고 간 다음 날 아침부터 두 분이 만나 세부적인 사항을 조율하고, 바로 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이성진은 역시나 어느 곳에도 아직은 소속되지 못했지만, 이성진을 제외한 네 명은 따로따로 계약을 맺게 됐다.
아이들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셔서 찾아오시는 부모님들이라, 그날 전부 청주에 모여 계약을 마쳤다.
그래서 오늘 미팅도 장세리가 직접 이렇게 나왔다.
“바빠지겠네, 바빠지겠어.”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무슨. 나야 회사도 커지고 좋지.”
긍정적이고, 도전적이신 분.
지영은 장세리와 이렇게 연이 닿게 된 계기가 된 예능에 출연했던 게 정말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tvM.
종편방송사 중에서 드라마, 예능으로는 최강자다.
아니, 이제는 공중파의 아성조차 무너뜨렸고, 특히 드라마 쪽으로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곳이었다. 지영이 이 드라마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방송국이 tvM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에 황석이 출연한 의사 생활 시즌2도 이곳이었고, 임스테이도 이곳 예능이었다.
그러니 지영과 아주 연관이 없는 곳도 아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로비로 올라가자, 곳곳에 연예인들이 보였다.
좌를 봐도 연예인, 우를 봐도 연예인. 정면에는 걸그룹과 보이그룹. 방송과 예능 때문에 연예인들이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영은 덤덤했다. 지나가던 이들이 장세리를 알아보곤 인사도 건네왔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주차장에서 미리 연락을 해놨던 장민주 작가가 멀끔한 신사와 함께 내려왔다.
“지영…… 어? 장세리 선수?”
“에이, 선수 그만둔 지가 언젠데요. 대표라고 그냥 불러주세요.”
“아아, 네. 그런데 지영 학생과는 어떻게 같이 오셨어요?”
장민주는 지영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둘이 있는 게 퍽이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 이번에 지영이랑 연희고 아이돌들이 우리 회사와 계약했거든요. 그래서 방송 부분은 저희가 케어합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그때 툭, 하고 장민주를 치는 멀끔한 신사.
40대 중반? 후반인데 옷차림도 그렇고 정말 신사 느낌이 나는 분이셨다.
“아! 내 정신 좀 봐! 안녕하세요. 지영 학생. 전화했던 장민주 작가예요. 이쪽은 박지상 감독님.”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지영의 차분한 인사에 박지상도 자기를 소개한 뒤, 지영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다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는지 왠지 알 것 같았다.
“자, 올라가실까요? 위에 회의실을 잡아놨습니다.”
“네, 그래요.”
지영은 그들을 따라 회의실로 이동했다.
회의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길쭉한 테이블 하나에 의자가 양쪽으로 네 개 정도 들어가는? 그 정도였다. 그런데 카메라가 몇 대 보였다. 불이 깜빡이는 걸 보니 실제로 촬영도 돌고 있는 모양. 뭐지, 오디션인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영과 장세리가 자리에 앉자, 장민주가 지영의 앞에 앉았다. 박지상 감독은 냉장고에서 차를 꺼내 두 사람에게 주고, 장민주의 옆에 앉았다.
“어, 음……. 일단 이렇게 와줘서 정말 감사해요.”
의례적인 인사.
지영은 그 인사에 고개를 숙여 받아넘겼다. 건방지지도, 굽신거리는 느낌도 없는 딱 그런 자세였다.
“음, 이렇게 보니까 지영 학생 마스크가 생각보다 훨씬 느낌이 있네요.”
훅 치고 들어오는 말.
“감독님은 어때요?”
“음, 솔직히 말하면 딱 천재는 이렇게 생겼다, 의 표본 같아.”
하하…….
사람을 앞에 두고 저런 대화를 나누다니, 이건 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에 장세리는 씩 웃었지만 지영은 그런 속내를 감추고 그냥 덤덤하게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근데 문제는 연기지.”
“그렇긴 하죠. 하지만 왠지…… 지영 학생은 잘할 것 같아요.”
“그건 모르는 거야. 일단 들어가 봐야 알지.”
두 사람의 대화에 지영은 잠시 손을 들었다.
“네? 지영 학생.”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네.”
“왜 저였나요? 제게 관심을 가졌다면 저보다는 한결이가 더 완벽한 느낌이었을 텐데요?”
천재란 이런 것이다?
그런 얼굴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지영을 포함한. 강한결을 아는 모든 이들이 진짜 얘는 천재다, 하고 생각하는 건 지영이 아니라 강한결이었다.
운동, 공부, 인성, 외모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아니,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은 인간. 봐라. 장세리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진짜 천재는 강한결이었다.
그런데 장민주 작가는 지영을 모델로 삼았다. 이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이게 제일 궁금했다.
그런 지영의 물음에 장민주 작가는 씩 웃었다.
“맞아요. 좀 알아보니까 강한결 학생은 진짜 엄청나더라고요. 제가 방송쟁이들도 좀 알아서, 은근히 파봤더니 이건 뭐…… 넘사벽이던데요?”
그럴 거다.
약점, 흠집을 낼 수 있는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인간이니까.
하다 못 해 절약 정신도 있다.
“그런데 제가 바라는 이미지는 아니었어요.”
“이미지요?”
“네. 저는 날카로운 이미지를 바랐거든요. 뭔가 예민한, 날이 선, 그런 느낌이요.”
“아…….”
그건 강한결에게 없는 게 맞았다.
임효중은 선하다. 황석은 터프하게 굵은 느낌이고, 이성진은 개구진 귀공자 느낌이다. 그리고 지영은 여성과 남성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중성적인 느낌이 강하고. 그럼 강한결은? 외모도 완벽하다.
차갑다, 선하다.
이런 느낌이 아니라 그냥 뭐랄까…… 조각 같은 느낌이다.
왜, 아직 한 발 남았다란 대사로 강원도 정선 출신 연예인처럼. 아니면 늘 새로워, 늘 짜릿해로 유명한 연예인처럼. 강한결이란 인간은 그렇게도 완벽하다.
“예술에 관해서는 한없이 천재이면서, 타협도 없는 그런 느낌. 어떤 건지 아시겠어요?”
“……조금은요.”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이 바란 이상적인 ‘것’이 나오지 않으면 남이 봤을 때는 아무리 대단해도 찢고 깨버리는 그런 인간.
예술가의 고집.
풉.
장세리가 지영을 잠시 보더니 동의하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가 끝난 지영도…… 인정했다. 자신의 외모는 확실히 날카롭다. 중성적인 느낌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일단 눈매도 살짝 찢어진 편이고 하니…….’
장민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확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래서 꼭 물어야 하는 게 있다.
“그런데 저를 만약 썼다가…… 망하면요? 제가 연기를 정말 못할 수도 있잖아요.”
이게 사실 오늘 미팅의 핵심이었다.
느낌은 충분히 캐릭터에 충족되지만, 연기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지영의 성격상 카메라 앞에서 얼거나 그러진 않겠지만……. 연기를 하는 건 달랐다.
그러자 장민주는 웃었다.
“괜찮아요. 이 캐릭터는 연기보다는 분위기거든요.”
“네?”
“연기력보단, 강지영이란 캐릭터가 가진 느낌을 편집으로 극대화시켜 주인공의 서사에 영향을 주는 것. 이게 포인트에요.”
“……연기를 개발새발 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아휴, 그건 안 되죠. 하지만 기본만 해주면 돼요. 기본만. 왜 그때 임스테이에서 보여줬던 모습이랑, 좀 노는 언니들에서 보여줬던 모습처럼요. 그냥 편안하게, 목소리도 지금 이 톤으로 해주면 딱 좋겠고요.”
“…….”
아!
장민주가 또 뭐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며 눈을 반짝였다.
“그 시합 때의 느낌을 계속 유지해 주면 더욱 좋고요!”
“시합이면…… 작년 겨울에 있었던 시합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 일본 선수랑 했던 시합이요!”
신지와의 시합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 그때 느낌이 어땠더라? 솔직히 말하면 지영에게는 좋은 느낌이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좀 무서운 느낌도 있었을 거다. 왜냐하면…… 진득한 희열로 눈이 아예 돌아간 그런 느낌이었을 테니까.
‘아…… 그러네. 예술가가 뭔가에 심취해 희열을 느끼면…… 비슷하게 눈이 돌아가긴 하겠네.’
미치광이.
때에 따라서는 희열을 넘어 광기에 찬 모습을 보여주는 예술가.
어째 장민주 작가는 자신에게 이런 느낌을 바라는 것 같았다.
“괜찮겠다. 지영이 너한테 딱 어울려.”
“……선배님이 보기에도 그래요?”
장세리의 말에 그렇게 되물었더니, 장세리는 지영의 어깨를 치며 씩 웃었다.
“누가 봐도 딱 그런 느낌이란다.”
“……하하.”
장세리까지 그렇게 말하니 장민주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그에 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늘 여기 온 건 거절하려는 마음이 반 이상이었는데…… 오히려 코가 꿰었네요.”
“네?”
“대본을 몇 개 받았어요. 그런데 두 개는 배역도 배역이지만 그냥 느낌이 별로였어요. 그리고 작가님이 보내주신 것도 사실 전 이쪽에 문외한이라 잘 몰라요. 하지만 편지까지 써주셔서, 그 성의와 궁금증 때문에 만나 뵙긴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솔직히 지금도 연기는 자신이 없고요. 그런데 그렇게 열성적으로 말씀해 주시니까…….”
“거절하기 힘들다?”
“네.”
자신을 찾아보고, 연구해서 캐릭터를 만들어주셨다.
어떤 느낌으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 정도 성의를 보였는데,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숨을 하아, 하고 내쉬었다.
그러자 장민주 작가의 눈빛이 또 반짝인다.
“그건 체념의 한숨인 거죠?”
“…….”
그 말에 지영은 그냥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반항을 시도했다.
“그런데 캐스팅을 이렇게 해도 되나요? 하다 못 해 테스트 같은 것도 안 하고.”
큼.
그 말은 박지상 감독이 받았다.
“테스트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지영 학생.”
“네?”
“장민주 작가는 지영 학생의 있는 그대로를 이미지로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모습, 이 대화 자체가 오디션인 겁니다.”
“있는 그대로라……. 카메라 앞에서 그게 제대로 나오진 않을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신인 조련은 제 특기거든요.”
“……조련이라니. 뭔가 무섭게 들리는 단어네요.”
“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저, 나도 모르는 걸 끌어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네.”
빼박이다.
그리고 이제는 지영이 해보고 싶어졌다.
테스트, 자신에게 과연 연기 재능이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기왕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최선을 다해서.
“작품에 피해가 가지 않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꾸벅.
지영이 본인의 의지를 그렇게 전하자 앞에 두 사람은 씩 웃었다.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미팅은 그걸로 끝이었다.
세부 사항은 나중에 다시 미팅을 잡아서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자리를 파했다. 점심을 함께하자고 했지만, 아쉽게도 선약이 있어 지영은 그걸 거절했다. 대신 근시일 내로 다시 자리를 빨리 잡기로 약속했다.
장세리와도 로비에서 헤어졌고, 지영은 나와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그곳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창가에 이런 공간 자체가 어색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양유진이 보였다.
‘…….’
그리고 그녀를 보자마자,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 * *
지영이 그녀를 만날 즈음, 장민주와 박지상은 아까 대화를 나눴던 회의실에서 오늘 찍은 영상을 확인 중이었다.
“좌우대칭 마스크가 정말 또렷하군. 좀 애매한 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앵글에 담기니까 또 달라.”
“그렇죠? 확실히 분위기 있지 않아요?”
“그건 그냥 봤을 때도 느꼈지. 고등학생이면 아무래도 좀 방송국의 분위기에 눌리기도 하고 그런데, 그 친구는 그런 게 하나도 없더군. 뭔가 자신만만해.”
“천재라서 그래요.”
“천재, 천재라. 하긴…….”
실력을 보면 확실히 그럴 만도 했다.
박지상은 처음 장민주가 강지영이란 듣도 보도 못한 신인을 쓴다고 했을 때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내준 자료를 보고는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전문 연예인이 아니지만, 오히려 그 이상의 아우라가 있는 친구는 솔직히 처음 봤다. 자신의 분야에서 이미 거의 정점을 달리고 있고, 천재라 받들어줘서 그런지 그런 분위기는 더욱 배가 됐다.
“시합장에 갔을 때 기억해요?”
“음, 그때도 그랬지.”
아까 대화에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지영의 시합하는 날 직접 찾아갔었다. 가서, 경기장 한쪽에서 강지영이란 선수를 자세히 관찰했다.
천재성이 폭발하는.
솔직히 유도에 대해 잘 모르는 박지상도 그날 강지영에게서 뭔가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다. 고작 고등학교 선수인데, 수년을 정상의 자리에서 버티고 버틴 왕보다도 뭔가 더 임팩트가 있었다.
“그때 다른 선수들이 하는 얘기 들었죠?”
“들었지. 부러워하는 것보단, 좌절을 넘어 체념하는 것 같더군.”
“그러니까요.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런 좌절을 넘어 체념하게 만드는 인간. 제가 생각한 캐릭터가 딱 그런 캐릭터거든요. 그래서 주인공 도언은 서건을 향해 끝없이 질투하고, 좌절하고, 체념했다가 다시 일어나야 해요. 비록 손에 잡히지 않아도, 그를 쫓아가면 갈수록 성장한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지영 학생은 이미 이미지 면으로는 최고예요. 게다가 워낙에 스팩이 좋으니, 따로 이미지를 만들 필요도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쓰면 되는 거예요.”
“흐음.”
“등장도 많은 필요는 없어요. 그저 도언이 심적으로 흔들릴 때, 그 언저리에 있으면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동기부여가 되니까.”
확실히. 그렇긴 그렇다.
그날 관중석에서 시합을 구경하다 보니 주변 선수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거기엔 황금세대라 불리는 저 친구들의 얘기도 당연히 있었다.
좌절, 절망감을 선사하는 선수.
신기하게도 아무도 그에게 도전 의식을 불태우지 않았다. 마치 강지영이란 선수에게, 황금세대에게 지는 걸 당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는 실력에서 나오는 좌절이었다. 어떻게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통곡의 벽에 이미 수차례 부딪치고, 깨진 뒤에 나오는 박탈감과 허탈함을 느끼고들 있었다.
아주 당연하게, 강지영에게 졌으면 뭐.
이런 분위기들이었다.
승부욕이 없나? 그런 생각을 당연히 했었는데 직접 보니 왜 그런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지영의 시합은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유도를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치열한 경기는 하나도 없어 보였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분위기, 일단 장민주가 생각한 환상, 이상향, 신기루 같은 캐릭터에는 부합된다는 건 인정했다.
그렇게 인정하고 난 뒤 오늘 본 강지영은, 역시 묘했다.
걱정도 하고, 왜 자신인지 궁금해했지만 이상하게도 진짜, 정말 궁금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건방진가? 아니다. 차분한 신색에 어조였지만 역시 건방진 느낌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자세도 아니었다.
“뭔가 싶네, 진짜.”
“네? 뭐가요? 그래도 좀 꺼려져요?”
장민주 작가의 대답에 박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그 또래처럼 안 보이잖아.”
“아, 그건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일단 그 나이 때 애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 앞에 서면 설설 기는데. 그런 모습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평온하지? 인생 2회차인가?”
“헛, 그럴 리가.”
“그래서 어때요? 이대로 밀고 가도 되겠죠?”
“그래, 제대로 해봐. 내가 잘 담아볼게.”
“넵, 그럼 감독님만 믿고, 그대로 달릴게요!”
“하하, 그래. 고생하라고.”
“네!”
장민주가 떠나고, 박지상은 아까 대화를 찍은 장면을 다시 한번 돌려봤다. 차분한 눈빛. 흔들리지 않는 어조. 그리고 아무런 편집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볼 맛이 나는 얼굴까지. 그런 느낌을 받으며 어느새 박지상은 강지영이란 청년을 어떻게 표현할지, 그에 대한 상상의 나래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새 그에게 기분 좋은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