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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95화 (95/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95화

95화. 날지 못하는 신데렐라(5)

음.

연락이 없다.

힐끔,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무의식적으로 폰을 꺼내려던 지영은 멈칫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시간, 지금이면 일어났을 시간을 넘어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일 거다. 그런데 어제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장이 오질 않았다. 숫자는 사라졌으니 읽은 건 맞는데, 답장이 없으니까 이거 참…… 기분이 요상 했다.

“으음…….”

“……왜?”

“뭔갈 분명 숨기고 있는데, 왜 말을 안 해줄까?”

2학년으로 올라와서도 같은 반이 된 이성진의 말에 지영은 속이 뜨끔했다. 솔직히 숨기고 있는 게 제법 됐다. 하지만 아직 자리 잡기도 전이기도 해서 오픈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면 분명 서운하겠지만, 강한결도 아직이라고 말한 만큼, 말할 때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고민은…… 이성진에게는 절대 얘기할 수 없었다.

입이 자동문처럼 비밀을 술술 부는 친구는 아니지만, 요즘 텐션이 머리 꼭대기까지 찬 이성진에게 이성 문제를 꺼냈다가는 잠자고 운동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빼고는 계속 놀림당할 게 분명했다.

“없어, 그런 거.”

“아니야, 있어.”

“없다니까.”

“있다니까.”

“…….”

지영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면 어차피 한도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지고, 이성진을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요즘 황석에게 온 ‘대본’과 지영에게도 들어오기 시작한 ‘대본’을 보면서 연기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수작까지 부리면 더욱 답이 없었다.

지영이 입을 다물고 창가로 눈을 돌리자 이성진의 눈빛이 대번에 변했다.

“이봐이봐, 있네, 있어!”

“…….”

가라, 그냥 좀…….

안 그래도 마음 심란한데!

처음이었다.

여성에게 일적인 문제로 연락한 걸 빼고, 그리고 어머니한테 연락한 걸 빼면 이성에게 먼저 연락처를 받고, 연락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연락이 대놓고 씹히고 있었다.

스물여덟의 인생 동안, 정말 처음이라서 어제 연락할 때 얼마나 심장이 두근대던지…… 밤새 핸드폰을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그래서 솔직히 마음이 매우, 매우…… 심란했다. 솔직히 지난 며칠간 정말 고민했다. 연락을 보낼까 말까. 과연 나의 지금 이 감정은 연민에서 시작된 건가, 아니면 정말 이상형을 만나 생긴 감정인가. 지영은 이걸 가만히 내버려 둔 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체크했다.

그리고 결과는 연락을 해보고 싶다로 나왔다.

그쪽이 자신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고 해도, 일단은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연락했다.

어떻게 인사를 할까, 안녕하세요? 가 좋을까? 아니면 양지원의 문제로 할 말이 있다고 할까 등등, 정말 고민하다가 그냥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하고 짧게 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씹히고 있었다.

사실 보내놓고도 진짜 센스라고는 개뿔 0.1도 없는 메시지라고 스스로 자책했다.

‘그때 그냥 지웠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그러기 전에 잠들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메시지가 확인된 뒤였다. 그래서 그냥 체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다. 최소한 아 네. 안녕하세요. 정도의 답장은 올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게 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영이 아예 반응이 없자 칫! 삐진 이성진이 자리로 돌아갔다. 이성진이 자리로 가자 한숨을 길게 내쉬는 지영.

하아…….

“웬 한숨? 여자한테 차였어?”

“…….”

뜨끔.

기척도 없이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지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한은정과 황석이 나란히 서 있는 게 보였다.

“……뭐지, 이 반응은? 이거 되게 당혹스러운 반응인데?”

잘 대답해야 한다.

말을 끌지도 말고,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차분하게!

“갑자기 말 거니까 그렇지. 어쩐 일이야?”

“내가 다가온 것도 모른 게 이상한데? 평소에는 살금살금 걸어가도 귀신같이 눈치채는데. 그리고 바로 어쩐 일이야? 하고 말을 돌리네?”

능글능글한 한은정이 지영의 앞에 앉으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지영은 최대한 담담하게 그 눈을 마주 봤다. 한은정은 강한 상대다. 적당히, 대충해서는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호, 요것 봐라……. 마치 시합 들어가기 직전 얼굴인데?”

“그건 네 생각이고. 아, 아까부터 이성진부터 진짜. 점심은 좀 쉬자.”

“오오, 짜증까지. 생전 안 내는 짜증까지 내고, 이거 진짜 뭐 있네?”

“하아…… 아니라니까?”

여자한테 선톡 했는데, 반나절 가까이 씹히고 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한은정은 분명 충분히 괜찮은 조언을 해주겠지만 문제는 한은정 때문에 주변 사람이 알게 되는 경우다. 지영은 아직 양유진에 대한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조심 또 조심.

그날 김지영 여사님이 말한 것처럼, 지영은 이제 자신이 어떤 위치로 가고 있는지 냉정하게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공익광고가 나가고 아직 한 주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학교 홈페이지에 대문짝만하게 걸어놓은, 연희고 아이돌 문의는 연희 스포츠로 해달라는 요청을 보고 그쪽으로 문의가 쇄도하고 있었다.

이성진, 임효중, 강한결은 인터뷰와 예능이 이상하게 많았고, 황석은 이미 연기자 데뷔를 한 만큼, 연기 쪽으로 문의가 많이 왔다. 그리고 지영도. 물론 주조연 롤은 아니었다. 그냥 잠깐, 짧고 굵게 나오는 임팩트 강한 신에 지영을 원했다.

하나는 사극이었고, 하나는 청춘물이었다.

지영은 솔직히 어차피 다음 시합까지 시간이 제법 비어서, 아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전원이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현재 지영은 이런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반은 연예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라 양유진에게 다가가는 것도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영은 이러한 사실을 아직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기 때문에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만약 어느 정도 관계가 진전되면, 그때나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전까진, 누구한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지잉!

그때 갑자기 주머니에 넣어뒀던 폰이 울었다. 그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는데, 다시 재차 지잉! 지잉! 두 번이나 연달아 더 울었다.

양유진의 답장일까?

절로 손에 땀이 차며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영은 앞에 장판파의 장비처럼 버티고 있는 한은정 때문에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한은정과 황석이 돌아갔고, 지영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녀다.

그녀에게 온 답장이었다.

* * *

다음 대회인 세계 청소년 선수권까지는 이제 두 달 반이 남았다.

올해 황금세대가 잡은 시합 스케줄은 애초에 많지 않았다. 작년에는 나갔던 용인대 총장기는 나가지 않고, 체전과 다시 아시아 청소년 선발전과 본 대회까지, 딱 이렇게만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국내대회보다는 국제대회에 중점을 두기로 했기도 했고, 다른 선수들 배려차원에서 이렇게 정하기도 했다.

황금세대가 작정하고 모든 시합에 출전하면 유도계는 정말 쑥대밭이 된다. 특히 대학에 가기 위해 입상이 필요한 선수들에게는 말 그대로 재앙이다. 황금세대는 고등부에 올라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내대회에서는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금세대의 컨디션 조절, 폼 관리와 배려를 동시에 생각해 이런 시합 스케줄이 결정됐다.

따라서 시합이 한 번 끝나고 나면 기본적으로 두 달 이상은 시합이 남았다.

이번 선발전이 끝나고 세계 청소년까지는 두 달 반이 남았고, 세계 청소년 선수권이 끝나고 나면 다시 체전까지 두 달이 넘게 빈다. 그리고 다시 선발전과 아시아 청소년권까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빈다.

이 시기를 지영은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유도선수의 수명이 길지 않다는 생각에서 황석부터 일단 연기로 밀어 넣었고, 이제는 연희고 아이돌들 모두가 따로 개인적으로 섭외 연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영도 당연히 들어왔다.

드라마와 영화 하나.

일단 영화는 사극 장르였고, 주인공의 아역이었다.

“원하는 게 노출이라…….”

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남자 배우들의 노출은 거의 기본이었다. 특히 타깃층이 젊은 여성이라면 거의 무조건이라고 보면 된다. 노출. 사실 유도선수들은 일단 기본적으로 복근은 가볍게 드러내고 간다.

시합 때 규정이 남자 선수는 팬티 말고는 안에 아무것도 입을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도 웃통을 까고 뛰는 것도 기본이었다. 그러니 노출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끌리지는 않았다. 일단 사극에서의 제안은 물에 주인공이 어릴 적 성장 장면을 단계별로 보여주는데, 여기에 초등학생 정도의 배우가 출연하고, 그리고 지영, 그다음이 주인공인 30대 사내다.

복수를 위해 혹독한 수련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노출 신이다.

그래서 지영은 그리 끌리지 않았다.

19금 사극은 아니지만, 완전한 상의 탈의 신은 별로…… 촬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청춘물도 비슷했다. 이건 주인공의 아역 역할은 아니지만, 사나운 느낌을 주는 학급의 일진이다. 일진? 공익광고를 찍은 게 얼마 전이고, 지금도 TV에서 그렇게 틀어대는데 일진 역을 한다?

“미친 짓이지.”

물론 완벽한 일진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그냥 언터처블의 학생이다. 자신만의 세상에 사는, 예술가 기질 만땅의 좀 또라이 같은 느낌도 있는. 남을 괴롭히지는 않지만 건드리면 누구나 물어뜯는 사나운 광견 기질도 있었다.

100% 일진은 아니지만, 이건 지영 자신이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두 개 다 패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 마지막 대본을 살폈다. 어제 들어온 따끈따끈한 드라마 대본이다.

펼치자마자 작가의 편지가 있었는데, 내용은 간단했다.

처음 캐릭터를 구상할 때부터 지영을 염두에 뒀다. 운동과 학업으로 바쁜 걸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필체를 보니 여성의 필체다.

“음…….”

이건 좀 끌렸다.

이렇게 성의를 보여주면, 사람의 마음은 당연히 조금이라도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대본을 살폈다. 드라마였다. 이것도 청춘이지만, 이전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주 베이스는 음악이다.

드라마 제목은 ‘성공의 노예’. 요즘 제목들과 비교하면 좀 올드한 느낌이 난다. 하지만 가제라고 첨언이 붙어 있는 걸 보니 제목은 언제고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청춘 드라마인데, 그 끝에 노예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궁금증도 생겼다. 그 궁금증은 시놉시스를 읽어보자 바로 풀렸다.

음악에 목숨을 건 인생들.

홍대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음악 하나만을 보고 달려가는 젊은 청춘들을 위한 서사. 사랑과 우정 배신. 그리고 이별. 작가는 지영에게, ‘천재’라는 설정을 쥐여줬다. 악기도 잘 다루고, 노래도 잘 부르고, 연기도 잘하고, 거기에 외모에 인성까지 정말 뛰어난. 현실에서는 정말 존재하기 힘든 천재. 그래서 주인공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지만, 반대로 동력 자체의 역할을 하는 포지션이다.

언제나 저 멀리, 저 멀리서 등을 보이고 걷는다.

그리고 가끔 멈춰 선다.

주인공이 쓰러졌을 때 잠깐. 하지만 일으켜 주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본다. 주인공이 정말 환장하게. 그래서 그에 열 받은 주인공이 포기하려다가 다시 얼어나 쫓아오게 만드는. 정말 사람 속을 긁어놓는 포지션이다.

마치 신기루처럼,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는…… 그런 역할이다.

닿고 싶어서 손을 뻗어봐도, 절대로 닿지 않는. 그런 캐릭터다.

“재밌네.”

그래서 재밌었다.

아주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자체가 자신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마 수많은 선수들이…… 자신을 여기에 나오게 될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봤을 테니까. 지영은 왜 이 캐릭터를 그릴 때 자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했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아마 자신에 대한 자료조사까지 했을 거다.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진짜 대단한 건 자신보단, 강한결이다. 지영은 그나마 공부는 조금 별로다. 하지만 강한결은 공부도 전국 최상위권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성적을 유지하는지, 정말 의문이 드는 괴물이다.

그런데 그런 강한결이 아니라, 자신이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지영은 바로 편지 말미에 적혀 있는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만나서 얘기해보고 싶다, 이 정도의 내용이었다. 답장은 바로 왔다. 그리고 지영이 내용을 살피기도 전에 전화가 왔다.

“네, 강지영입니다.”

-지영 학생? 저 장민주 작가예요.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연락 줘서 정말 고마워요.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

그래서 신뢰감이 드는 목소리였다.

지영은 그녀와 이번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궁금증은 대면해서 푸는 게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직접 내려온다는 것도 말렸다. 서울에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버스를 타고 직접 올라가기로 했다.

통화를 끝낸 지영은 톡을 확인했다.

와 있다.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 뒤 답장을 보내는 지영.

약속은 이 사람과 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겨우 잡은 약속이었다. 지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슬슬 야간운동 시간이라 지영은 책상을 정리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야간운동은 가볍게 트랙 러닝이었다.

그렇게 공부와 운동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하나씩 해나가다 보니, 주말은 금방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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