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93화
93화. 날지 못하는 신데렐라(3)
양유진이 도착하고, 통성명한 뒤에 후원 면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지원이 발에 딱 맞는 피겨화와 의상, 그리고 곡과 안무예요. 아, 그리고 링크장의 정기 이용 비용하고요. 코치는 지금처럼 제가 봐도 되거든요.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제가 선수보다는 코치에 재능이 있는지 지금까지 지원이를 잘 키워왔고, 앞으로도 그럴 자신이 있습니다.”
“아니요. 이해합니다. 어젯밤에 양지원 선수 자료는 다 읽어봤어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옆에서 코치님이 잘 가르쳤기 때문에 이만큼 빨리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저도 동의했어요.”
“에고, 감사합니다!”
어린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대담한 곽현정.
그녀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서슴없이 얘기했다. 그리고 양지원에 대한 코치 자리 또한 본인이 욕심냈다.
‘따지고 보면 곽현정 선배님보다 나은 코치님은 더 많겠지.’
피겨스케이트 계의 퀸이라 불린 위대한 선수도 외국인 코치를 고용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외국인이니까 더 낫겠지! 가 아니라 진짜 실력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 코치를 섭외한 거다. 그리고 그 비용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지영은 곽현정 선배의 실력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재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재능이 개화하는데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지도자다. 아무리 재능이 좋아도 옆에서 잘못된 부분을 다듬어줄 지도자가 없으면 씨앗은 꽃이 되지 못한 채 시들어버린다.
지영도 그랬다.
지영이 처음 다녔던 유도 체육관 관장님도 용인대 선출 출신 관장님이셨고, 체육관을 열기 전엔 초등부 코치로 전국 최고의 팀을 만들었던 적도 있었다. 가르치는 데는 확실히 뛰어난 코치가 있었기 때문에 지영과 친구들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양지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곽현정의 코칭이 별로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그래서 실력 있는 코치는 비싸다. 그걸 생각하면, 자신의 재능을 이렇게 아낌없이 베푸는 곽현정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럼 당장은 그 정도만으로 충분한가요?”
“네, 일단 이번 대회 레퍼토리와 의상, 그리고 피겨화만 마련이 되면 지원이는 더 높은 곳을 향해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음…….”
김지영 여사님은 고개를 끄덕이곤 지영과 강한결을 돌아봤다.
그때까지 대화에 참여하고 있지 않던 둘은 자세를 바로 했다. 힐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뭐가 그리 불안한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양유진을 잠시 봤던 지영은 양지원에게 시선을 돌리고,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양지원…… 음, 선수?”
“네.”
호칭이 애매하다.
그래서 그냥 선수라고 부르자, 차분한 대답이 들려왔다. 언니와는 정반대다, 정말.
“목표가 어떻게 돼요?”
목표.
운동선수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게 바로 목표 설정이다.
올바르게 설정한 목표가 부동의 의지와 만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영이다. 지영은 운동 말고도 다른 목표를 두고 있었고, 그 결과 중 하나가 지금 이 자리였다. 자는 시간까지 쪼개서 모든 것을 가지고자 하는 욕심. 욕심은 곧 목적이나 목표라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양지원의 목표가 뭔지.
그런데 이 질문에 양지원은 생각도 못 한 답을 내놓았다.
“돈 걱정 없이 사는 거요.”
“…….”
“…….”
그 말에 지영은 물론 강한결도, 김지영 여사님도, 그리고 곽현정과 언니인 양유진의 눈에도 당황과 놀람이 깃들었다. 차갑고, 냉한 표정 때문에 솔직한 성격일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당황한 양유진이 동생의 팔을 잡으며 인사 이후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어, 어어…… 지원아. 돈은 언니가 어떻게든…….”
“아, 조금 틀리게 말했어요. 더 정확히는 우리 언니가 돈 걱정 없이 사는 게 제 목표예요.”
“지원아…….”
지영은 양지원의 눈빛에 반항, 불만, 분노 등이 깃든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 질투처럼 보였다. 지영은 왜 양지원이 이런 눈이 됐는지도 알 것 같았다. 부러운 거다. 지영과 강한결이.
자신보다 한 살밖에 안 많은데, 누구는 후원받고 누구는 후원하는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나고, 부러운 거다.
‘그리고 자신의 언니가 이렇게 저자세로 숙이고 있는 이 상황까지 전부.’
싫은 거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
‘만약 어머니가 옆에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계셨다면…….’
지영 또한, 그 상황이 매우 싫었을 거다.
후원은…… 받는 입장에서는 동정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양지원.”
가만히 듣고 있던 강한결이 양지원을 불렀다.
지영은 잠깐 친구를 바라봤다. 강한결의 표정은 차분했다. 마치 철없이 굴 때의 이성진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왜요?”
“그 말은 곧 세계 최고가 되어서 누나를 호강시켜 주겠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될까?”
“네.”
“좋아. 후원할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말 놔요?”
응?
양지원의 눈빛이 갑자기 사납게 변했다.
딱, 현실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난 암고양이처럼 나온다. 지영은 이런 양지원의 반응이 순간 재밌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 날 선 대화의 승자가 누가 될지도 알아차렸다.
‘천하의 강한결이다……. 넌 못 이겨.’
말빨로는 지영도 구석으로 밀어 넣는 게 바로 강한결이다.
거기에 이성진도 애 다루듯이 끌고 가는 게 강한결이고. 그러니 양지원이 아무리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쏘아붙인다고 해도, 강한결을 이길 수는 없을 거다. 지영이 그렇게 생각하는 강한결은, 그냥 곧장 전투를 회피했다.
“아,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흥.”
아휴…….
곽현정이 이마를 짚었다.
제자의 반응이 너무 철이 없어 보였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사실 그게 맞았다. 양지원의 이런 반응은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니, 도움이 되는 걸 떠나서 오히려 역효과였다.
후원을 한다고 말 잘 듣는 걸 기대하는 건 죽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날 선 모습을 보이면 당연히 후원자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김지영 여사님의 마음까지 저격했다.
힐끔.
자기 아들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 번 본 여사님이 말을 이었다.
“양지원 선수?”
“네.”
“좋네요. 운동선수가 그런 당찬 모습도 있어야지. 독한 모습도 그렇고. 보기 좋네요.”
“감사합니다.”
양지원은 다행히 김지영 여사님에게까지 버릇없이 굴지 않았다. 피아식별이 완벽하다. 반대로 지영에게도, 그렇게 날 선 느낌은 아니었다. 지영은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봤다.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양유진. 그리고 그런 언니를 입술을 꾹 깨문 채 잠깐 보고 마는 양지원. 하지만 지영은 양지원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인생을 희생하고 있는 언니에 대한 미안함과 하필이면 재능이 있어서 포기하지 못하는 현실 등등.’
모든 운동이 그렇듯, 세계 정상에 서면 부는 어느 정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거기에 희망을 품었지만 그 끝까지 가는 것 자체가 너무 녹록지 않고,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자신의 재능이 아깝고, 지금까지 뒷바라지한 언니에게 미안하고. 그런 상황이었다.
‘답답하지.’
재능이 없는데 물고 늘어지는 선수들을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반대로.
재능이 있는데 현실이 받쳐주지 못해 포기하는 선수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양지원은 후자의 선택지밖에 없는 상태였고, 그래서 더욱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자매를 보고 있다 보니 불쑥 떠오르는 생각.
‘눈물 나는 자매애네…….’
비꼬고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의미 그대로. 정말 눈물 나는 우애였다.
“그런데 선배님. 양지원 선수를 보면 후원 얘기도 많았을 것 같은데, 후원을 받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까?”
강한결의 질문에 곽현정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제가 여러 군데 문의는 해봤어요. 그런데 지원이가 운동을 시작한 나이가 걸려요. 지금은 정상급이긴 하지만, 여기서 더 올라갈 가능성이 없다고 본 거죠. 실제로 지금 지원이는 한창때거든요. 그런데 아직 국제대회 전적도 없어서…….”
“아…….”
천재는 언제고 꽃을 피운다.
하지만 후원하는 입장에서 만약 선수가 꽃을 피우지 못하면 애꿎은 돈만 날리게 된다. 특히 피겨 같은 돈이 많이 드는 운동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다를 게 없는 게 바로 운동선수 후원이다.
게다가 기업의 후원은 투자에 가깝다.
선수에게 기업이 투자를 할 때는, 반드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데 양지원은 아무래도 그 리스크를 감당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피겨의 전성기는 15에서 20 사이고 스물이 조금만 지나도 노장 소리를 들으니까,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지영의 생각은 달랐다.
‘양지원이 진짜 천재라면…….’
제대로 지원을 받고, 제대로 훈련을 시작하면 분명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좀 관심을 보이는 곳도 있었는데요. 거긴 꼭…….”
말꼬리를 흐린 다음에 더 말이 없다.
지영은 그것도 알 것 같았다.
양지원은 예쁘다.
일단 기본적으로 외모가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하는 피겨 종목 선수기도 하지만, 애초에 양지원은 기본적으로 미인이었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임에도, 아름답다는 말을 쓸 수 있는 외모였다.
그러니 아마 더러운 수작질을 부리려고 했던 제안도 있었을 거다.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걸 지영은 이제 잘 알 나이다.
몸은 열여덟이지만, 정신은 스물여덟이니까 말이다.
“힘들었겠네요.”
“네, 하하…….”
김지영 여사님의 위로에 곽현정이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번에도 크게 기대는 안 했어요. 그런데 안 그래도 요즘 좀 힘든 시기라서, 어제 면담부터 잡고 밤새 지원이 설득했거든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만나보자 하면서요.”
“잘하셨어요. 저는 선수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라서 운동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하지만 제 아들들은 다르거든요. 종목은 달라도, 스포츠인들이 보는 눈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아서 아이들의 안목을 믿어요.”
“아…….”
“그래서 아들들이 잘될 거라고 믿는, 양지원 선수도 믿을 수 있어요.”
“…….”
“아들들이나, 저나 양지원 선수에게 바라는 건 딱 하나예요. 가능한 선에서 지원할 테니까, 아까 말한 꿈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기.”
안 될 수도 있다.
어떻게 100% 성공을 장담할 수 있을까.
애초에 지영도, 강한결도 무조건 성공할 것 같은 아이들만 후원하기! 같은 마음을 가진 게 아니었다. 재능은 있지만, 가정 형편상 그 꿈을 접어야 하는 위기에 처한, 혹은 지원이 있어야 더 원활하게 재능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들에게 후원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떠한 대가도 없다.
아, 하나 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이는 학폭과 관련된 그런 문제를 말함이었다.
이걸 빼면,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 운동에 정이 떨어져서 대충하면, 그때는 후원을 정리한다고 해놨다. 그러니 운동만 성실히 하면,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괜찮았다. 그러니 양지원에게도 바라는 건 하나였다.
“정말 그거면 되나요?”
양지원의 되물음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강한결도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답에 양지원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래도 조금 안도한 표정이었고, 양유진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흑, 흐윽…….”
그리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눈물이 이해가 갔다. 그녀는 자신의 뒷바라지가 부족해 동생이 이대로 꿈을 접는 게 아닐까 걱정했을 거다. 그래서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일했지만 그것조차도 한계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그게 후원으로 해결이 됐으니, 동생이 계속 운동을 할 수 있다는 마음에, 그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터진 눈물이었다.
지영은 그렇게 우는 양유진을 가만히 보다가, 왜 저 여자에게 그렇게 시선이 가고, 마음이 가는지를 깨달았다.
‘어머니구나…….’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어머니가 저렇다. 내 가족, 내 핏줄을 위해서 고되고 힘들어도 참고 끝까지, 악착같이 뒷바라지하는 것. 손이 부르트고 엄동설한에 추위에 떨어도, 전기세 수도세, 기름값 아껴서 아들딸 공부시키고 운동을 시키는 것. 그래서 자신은 찢어진 옷을 기워입고, 먹는 것도 아끼고 아껴 대충 끼니를 해결해도 내 자식은 맛있는 거, 좋은 옷 입히려는 마음.
그 마음이다.
양유진에게는…… 그런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양지원의 언니지만 엄마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런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자리 때문에 나름 차려입은 거라 생각되지만 저 나이 때의 여자가 입기에는 너무 초라한 복장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지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즉, 양유진은…… 지영의 이상형이었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곤란한 게, 불쌍한 모습이 포인트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저 성격, 성품이 포인트였다.
그래서 지영의 머릿속에는 지금.
‘도와주고 싶다…….’
양지원이 아니라, 양유진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