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92화
92화. 날지 못하는 신데렐라(2)
새싹 링크장.
서울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고 도착한 링크장의 이름은 귀여웠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 이제 고작 5살? 6살 정도 된 여자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링크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저런 나이에 시작하는데, 늦긴 늦었네. 진짜.”
저런 아이들을 보니 양지원이 확실히 늦게 시작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그런데도 이 정도까지 올라온 걸 보면 진짜 천재는 천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 양지원?”
“응.”
“그렇긴 하지. 유럽 쪽은 3살에도 시키고 그런다더라.”
그건 어제 지영도 찾아봐서 알고 있었다.
그런 거에 비해 양지원은 무려 중2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국내 정상급을 넘보는 실력이다. 이는 진짜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걸 생각하면 양지원이 진짜 대단하긴 해.”
“인정.”
강한결의 말에 지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솔직히 자신도 천재라고 생각했다. 부정해 봐야 타고난 재능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건 황금세대 전체가 쿨하게 인정하고 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지영이 자신과 비슷한 재능을 가진 천재라 인정한 사람은 미야모토 신지가 유일했다. 그런데 타 종목에 자신과 비교해도 될, 아니, 자신보다 어쩌면 더 뛰어날지 모르는 천재가 있었다. 솔직히 그래서 만남이 기대됐다.
강한결은 어제 그 관계자라는 분에게 연락해 오늘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강한결의 연락을 받은 양지원의 코치는 어차피 오늘 훈련이 있다면서 바로 수락했고, 이어서 면담도 잡아줬다. 면담에는 양지원의 친언니인 양유진과 코치 자신까지, 셋이 함께 나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강한결은 바로 어머니인 김지영 여사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어차피 둘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알고 계신 김지영 여사님께서는 흔쾌히 수락하시고, 오늘 이렇게 함께 서울까지 왔다.
‘어른이 있어야 저쪽의 신뢰를 사기도 쉽겠지.’
만약 강한결과 함께 둘이 딸랑 와서 양지원 선수를 후원하겠습니다! 하면 이것들이 지금 장난치나? 이런 생각을 상대가 안 할 수가 없었다. 지영과 강한결이 방송에도 종종 모습을 내보인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쪽과는 연관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검증된 어른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에 설립한 ‘연희 스포츠’ 대표 김지영 여사님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화장을 고치신 김지영 여사님이 차에서 내리시며 말했다.
“자, 가자. 아들들.”
“네.”
아들.
같은 운동부에 있으면 부모님들은 다 내 자식이고, 내 딸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호칭도 아들이다. 하도 어려서부터 들어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호칭이었다.
추울까 봐 두툼한 패딩을 챙겨 링크장으로 들어선 지영은 2층 벤치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역시 한기가 훅 덮쳐왔다. 지영은 링크장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패딩을 입었다.
유아부 시간인지, 아장아장 걷는 걸 겨우 벗어난 아이들이 링크장에서 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양지원은 그중에 섞여 있었다. 그녀를 찾는 건 쉬웠다.
다들 머리가 긴데, 양지원만 똑단발이라 불리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는 애들 가르치는 알바 하나 봐.”
강한결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도 프로필을 보면서 이미 숙지한 사안이었다. 언니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자신도 노력 중인 양지원. 일단 여기까지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지영은 그런 양지원을 자세히 살폈다.
‘일단 표정.’
아이들을 대하는 양유진의 표정은 밝았다.
하지만 그 밝음 속에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짙은 어둠이라 할 수는 없었다.
‘부럽구나…….’
넘어지고 고꾸라져도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
아프면 울면서 달려가 매달릴 사람이 있다. 넘어져서 아프면 괜찮니? 하고 얼른 다가와 호호 불어줄 사람이 있다. 그래, 어머니다. 가족이 있는 아이들을 양지원은 부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그런 눈빛이었다.
꽈당!
양지원이 맡은 아이가 잘 가다 말고 엎어졌다.
얼른 다가가 아이를 일으켜 세웠지만 아이는 이미 울음이 터졌다.
어머 지수야! 하고 엄마가 냅다 빙판에 들어섰다.
어머니 그냥 들어가시면 안 돼요! 하는 직원의 말에도 그냥 냅다 달린다. 그러다 또 꽈당. 아이는 또 그런 엄마한테 엉금엉금 기어 왔다. 그걸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바라보는 양지원.
“하아, 총체적 난국이네.”
한숨을 내쉬며 김지영 여사님이 한 말에 지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탓하기도 애매하다.
어머니와 아이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하기도 뭣한 이유는 아직은 무조건 품 안에 두고 키워야 할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양지원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너무 어린아이들이다 보니, 양지원은 엄청 헤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잘 흘러서 아이들이 빠질 시간이 됐다. 이어서, 훈련 시간이 됐는지 패딩을 벗고 몸을 풀기 시작하는 양지원.
양지원의 키는 컸다.
영상으로 보았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직접 보니 적어도 167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거기에 피겨화까지 신었으니, 170은 훌쩍 넘었다. 보통 피겨 선수들의 신장을 보면 이렇게 크지 않던데, 저게 이점인지 아니면 약점인지 궁금해졌다.
워낙에 신장이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그냥 가볍게 링크장을 돌기 시작하는데도 뭔가 시원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슈악, 슈악. 얼음이 피겨 날에 갈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졌다.
“지원아! 10분 후 시작하자!”
“네, 샘!”
어?
익숙한 목소린데?
저 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지영보다 강한결이 먼저 알아차렸다.
“곽현정 선배님이네.”
“아, 역시. 목소리가 낯익다 했어.”
“까랑까랑하시잖아?”
하이톤에 까랑까랑한 느낌이 있는 곽현정의 목소리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양지원을 피겨로 끌어들인 게 곽현정 선배님인가 본데?”
“어? 그러네. 양지원이 지금까지 훈련할 수 있게 도와준 것도 그럼 선배님인 거고.”
“그럼 크게 문제없겠다, 이따가 면담도.”
“그러게.”
곽현정과는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당시 좀 노는 언니들을 촬영할 때는 한유진이 지영의 옆에 찰싹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서먹서먹한 사이는 아니었다. 한유진처럼 연락처를 주고받진 않았지만 그래도 촬영이 끝나고 곽현정은 모두를 가볍게 안아주고 앞으로 파이팅하라며 응원을 해준 뒤에 떠났다.
텐션이 좀 높지만, 사람은 좋은.
그게 지영이 생각하는 곽현정 선배였다.
10분 뒤, 훈련이 시작됐다.
피겨 훈련은 유도 훈련과는 전혀 달랐다. 유도는 거의 90%는 다 같이 함께하지만, 피겨는 오로지 혼자였다.
‘외롭겠네…….’
코치가 있긴 하지만 훈련은 결국 스스로 해야 하는.
누구의 도움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넘어지고 깨지고는 본인 스스로의 몫인. 지영이 아주 잠깐 느낀 피겨는 외로운 종목이었다.
“오…….”
빙그르르.
트리플 악셀? 아, 세 바퀴는 아니니까 트리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감탄사가 나올 만한 동작이었다. 양지원이 워낙에 크고 팔다리가 기니까 동작이 진짜 시원시원했다. 뭘 모르는 지영이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그런 훈련이 계속됐다.
손을 뻗고, 다리를 들어 ㄱ자를 만들어 링크장을 쭉 미끄러지는 그런 동작도 멋있게 보였다. 추운 링크장에서, 양지원의 몸에서만 열기가 뿜어졌다. 훈련은 1시간 동안 이어졌는데 양지원은 그 한 시간 동안 정말 조금도 쉬지 않았다.
곽현정 선배님이 코칭을 할 때를 제외하곤 계속 움직였다.
마치 1분 1초가 아쉬운 사람처럼.
‘다행이다…….’
지영은 그런 양지원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영상에서 지영이 느낀 감정과는 별개로 양지원은 열정적이고, 성실했다. 그리고 욕심도 있었다.
손에 뻗어도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뻗어보는 고집스러움이 있었다.
이는 사실상 운동선수에게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 안도의 한숨이 나온 거다. 연습이 끝나고 양지원이 링크장에서 나가자 지영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들들 저 애 보는 눈빛이 반짝반짝하네?”
여사님의 짓궂은 말에 지영은 그냥 웃었지만 강한결은 표정이 묘했다.
‘어?’
하지만 어느새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표정과 눈빛. 지영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강한결이 먼저 움직여 지영을 스쳐 갔다. 그래서 눈을 몇 번 끔뻑이다가 김지영 여사님을 바라봤더니, 여사님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셨다.
“오, 우리 아들…….”
여사님의 말에 지영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는 강한결을 바라봤다.
이건 또 예상 밖의 상황이라서 솔직히 지영도 좀 놀라웠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놀리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강한결의 뒤를 따라 링크장을 벗어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이곳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작은 카페였고, 약속 시간은 30분이 남았다. 할 것도 없어서 가서 기다리려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곽현정 선배님이 먼저 와 계셨다.
딸랑, 풍경 소리에 카운터에서 주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고개를 돌린 곽현정이 바로 지영과 강한결을 알아봤다.
“어? 지영이랑 한결이?”
“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와아!
쫑쫑쫑! 반가운 얼굴로 다가온 곽현정이 뒤이어 들어온 김지영 여사님이 강한결의 옆에 서자 멈칫했다.
“저희 어머니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번에 방송 같이한 곽현정입니다!”
“호호, 한결이 엄마예요. 반가워요. 곽현정 선수.”
“에이, 이제 선수도 아닌걸요. 그냥 편하게 대해주세요!”
“호호, 그럴까요?”
친화력이 대단하시다.
그때야 카메라가 있어서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카메라가 없는데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엄청 신기했다.
“아 근데 둘이 여긴 어쩐 일이야?”
“선배님 만나러요.”
“나? 나 왜?”
뭔 소린지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이는 곽현정. 그런 그녀에게 김지영 여사님이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오늘 후원 면담은 ‘연희 스포츠’ 이름으로 했고, 현재 대표는 김지영 여사님이셨다.
그러니 명함을 받은 곽현정은 어? 하더니 또 눈만 끔뻑였다.
그런 곽현정에게 강한결이 재차 말했다.
“어제저녁에 연락드린 것도 접니다, 선배님.”
“어 진짜? 지원이 후원하고 싶다고 연락한 게 너라고?”
“네.”
“……와, 와아.”
곽현정이 놀라서 말을 못 잇는 사이 딸랑,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렸더니 옷을 갈아입은 양지원이 들어서고 있었다. 일단 이렇게 서 있을 수는 없어서 김지영 여사님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일단 자리를 잡았다. 미리 예약을 해뒀는지 프라이빗 룸에 자리를 잡자마자 곽현정이 놀란 기색 그대로 말문을 열었다.
“진짜 너야? 이거 막 세리 언니가 몰래카메라 하는 거 아니지? 그치?”
“네, 제가 했습니다.”
믿기지 않는 기색이다.
하긴, 누가 고등학생이 갑자기 나타나 제가 후원하겠습니다. 하면 아 그래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이해하겠나. 이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고 그래서 김지영 여사님이 오늘같이 온 거다.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아까 명함 보셨겠지만 저는 연희 스포츠의 이름뿐인 대표 김지영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양지원 선수 코치 곽현정입니다!”
“네, 반가워요. 그리고 이미 안면이 있으시지만, 여긴 제 친아들인 강한결. 그리고 제가 아들처럼 생각하는 강지영 학생이에요. 그리고 이 둘이 연희 스포츠의 실질적 대표고요.”
“네?”
“연희 스포츠에서 나가는 모든 후원금은, 이 두 아이의 것이거든요.”
“…….”
뻐끔뻐끔.
끔뻑끔뻑에 뻐끔뻐끔까지 더해지자 표정이 웃겼지만 지영은 차분한 신색을 유지했다. 그러곤 양지원을 살폈다. 살짝 상기된 얼굴. 영상이나 아까 애들을 봐줄 때처럼 부러움과 포기, 체념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피겨라는 운동을 더 하고 싶은 유망주.
지영의 눈에 양지원은 그렇게 보였다.
“너네 부자구나?”
하하.
그렇게 말하는 곽현정의 눈빛엔 부러움이나 질시, 돈이 많다고 뭔가 배척하는 것 같은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순수하게 너네 부자구나? 한 그런 느낌이었다. 반대로 양지원의 표정은 그렇게까지 밝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과는 다르게 그냥 차분한 기색만 보였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온 여자.
차갑고, 화려한 느낌의 양지원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세상 수수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그러나 누가 봐도 양지원의 언니처럼 보이는 여자. 양지원의 친언니인 양유진이었다.
‘어, 음…….’
그리고 지영은 고개를 조아리며 늦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양유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고, 지영은 그런 혼란스러움을 겨우 숨긴 채 자신의 앞에 앉은 양유진을 봤다. 그리고 그제야 숨을 진정시킨 양유진도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지영을 바라봤다.
“…….”
“…….”
시선이 그렇게 잠시 마주쳤는데, 지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