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91화
91화. 날지 못하는 신데렐라(1)
청주로 돌아가는 길, 청주 근처 가든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체중감량을 많이 했기 때문에 닭백숙이었다. 먹는 것만큼은 한없이 진심인 장세리가 아는 가든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닭백숙 맛은 아주 훌륭했다.
시합이 주말이라 외박도 없이 바로 숙소로 돌아왔고, 지영은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누웠다.
몸이 노곤했다.
저녁을 많이 먹어서 그런 것도 있고, 시합 내내 끌어올리고 있던 긴장이 풀려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들 각자 방에 틀어박혀 밀려오는 피곤함에 몸을 맡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영은 잠시 누워서 쉬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지영은 벌여놓은 일이 많았다.
하루쯤 쉬어도 되지만, 혹시 이선영에게 메일이 와있는 게 있으면 지영은 그걸 바로바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지영이 귀찮고 피곤해서 그걸 미루면, 그 선수는 지원을 하루에서 며칠을 늦게 받고, 그 기간만큼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 없게 된다. 지영이 오늘 시합 때 생각했던 것처럼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슷한 실력이라면 땀의 총량에서 승패는 갈리게 된다. 그걸 잘 알아서 지영은 노트북을 켜고 메일함에 접속했다.
역시, 요 며칠은 시합에 집중하느라 확인하지 않았더니 몇 개의 메일이 와 있었다.
“어? 근데 누가 읽었네?”
그런데 그 메일은, 전부 읽은 상태였다.
시간을 보니 좀 전이다.
지영은 대번에 이걸 누가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강한결.
이 메일 계정을 쓰는 사람은 지영과 강한결밖에 없으니 읽을 사람도 강한결밖에 없었다.
“하여간 넌 진짜…….”
대단하다.
행동을 보면 진짜 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친구였다. 강한결도 봤으니, 지영도 이선영이 보낸 메일을 바로 확인했다. 첫 번째는 충주에 사는 초등학생이었다. 여기도 역시 조실부모하고, 할머니 손에서 크는 남자아이다.
그런데 사연이 제법 기구했다.
음독자살.
두 부모님이 음독자살을 했을 때 이 아이도 같이 데려가려고 했는데, 천운으로 아이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다시 천운으로 어떠한 장애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아이는, 수영에 두각을 보였다.
충주 삼원초 옆에는 수영장이 하나 있는데, 삼원초 학생이라 거길 여름에 놀러 갔다가 자연스럽게 재능이 발화됐다. 하지만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예전에야 헝그리정신과 스파르타로 밀어붙이면 성적이 나왔지만 요즘은 아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병행해야 한다. 수영이야 수영복을 포함해 그렇게 장비가 비싸지는 않지만 문제는 먹는 부분이다. 한참 먹어야 할 때지만 이 친구는 국가지원금을 받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먹는 게 너무 부실했다. 점심이야 학교에서 주지만, 아침저녁의 식단이 형편없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먹는 것까지가 운동이라고도 하지…….”
아주 유명한 말이다.
가수이자 예능인이며, 헬스인인 어떤 형님이 한.
지영은 그 말에 동의했다.
뭐 아주 체계적인 식단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운동 후, 필요한 영양을 제대로 채워줘야 한다. 이선영은 아이가 먹는 아침과 저녁의 보편적인 식단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그걸 보자마자 지영은 지원을 결정했다.
단백질이 없었다.
고된 훈련 뒤에 단백질 섭취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게다가 한참 커야 하는 나이라서 굳이 운동하는 게 아니더라도 단백질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사진에는 밥, 맑은국, 볶은 김치, 감자채볶음? 이 정도가 전부였다.
“매일같이 이런 걸 먹는 건 아니겠지만…….”
아마 한 번씩 고기도 먹고 할 거다.
그러나 지영은 매일 같이 고기를 먹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속으로 거의 결정을 내렸다. 물론 한번 만나봐야 하긴 한다.
“내일 외출 때 잠깐 갔다 와야겠다.”
그래도 무작정 할 수는 없다.
재능이 없고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알지만, 일단 애가 어떤지도 한 번은 봐야 했다. 저번 주에 지우와 지호 남매를 굳이 보러 갔다 온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두 번째도 비슷했다. 메일은 총 세 개였고, 지영은 마지막 메일을 열었다.
그러자 이번엔 첨부 영상이 있었다.
지영은 영상을 내려받는 동안 메일 내용을 읽었다.
이번엔 서울에 사는 운동선수였다.
그런데 나이가 지영과 비슷했다.
이제 고1.
종목은 피겨 스케이팅.
한때, 세계 최강이었던 피겨를 하는 친구였다.
이름은 양지원.
지영은 프로필을 읽고 나서, 빠르게 사연을 읽었다.
여기도 역시 부모님이 없었다.
그것도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당시 3살 위 언니와 함께 버려져서 보육원에서 자란 친구다. 그러다 중2 때, 처음 학교에서 단체로 가본 링크장에서 자신의 적성을 찾았고 당시 링크장에 있던 관계자에 눈에 들어 피겨 스케이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피겨를 중2 때 시작한 거면…… 늦은 거 아닌가?”
지영이 피겨를 잘 모르긴 해도, 피겨가 굉장히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야 하는 운동이란 건 안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더니 어마어마하게 어린 나이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유럽 같은 경우는 3살, 4살에도 시작했다.
그런데 양지원은 중2 때 시작했다.
사실상 선수로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
“그런데 입상성적이 있네?”
혹시나 해서 양지원이라고 쳐봤더니 연예인 밑으로 피겨 선수 양지원도 있었다. 그 선수를 클릭하자 나이는 일단 같았다. 프로필에도 사진은 없어서 이게 같은 사람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학교까지 같은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런 양지원은 중2 때 시작해, 벌써 국가대표의 턱밑까지 추격한 도전자였다.
아직 국가대표도 아니고, 세계대회 출전도 못 했지만 양지원은 벌써 국내대회는 휩쓸고 있었다. 그런 양지원에 대한 기사도 제법 있었다.
“피겨를 늦게 접한 안타까운 천재 소녀라…….”
양지원의 시작 나이가 문제라서, 아마도 한계가 있을 거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리고 거기엔 지영도 동의했다. 유도는 진짜 재능만 확실하다면, 2년이면 정상을 노려볼 만하다. 실제로 지영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선수들을 날리는 데 걸린 시간이 정확히 1년 6개월 정도였다.
천재성.
재능.
이 타고난 것 앞에서는 본래 세월은 의미가 없어지는 법이다.
양지원이 그랬다.
자신보다 10년을 일찍 시작한 선배들을 쫓다 못해 따돌리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2년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종목에서 날고 긴다는 선수들 몇몇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이어서 지영은 이선영이 양지원을 선정해서 보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유도나 태권도 같은 종목과는 다르게 피겨는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었다.
자신에게 꼭 맞는 피겨화, 경기 의상, 그리고 코치 비용에 안무 비용 등등을 생각하면 유도는 아예 게임도 안 되는 돈이 들어간다. 실제로 실력 있는 코치 선임 비용만 해도 수천만 원이 넘어가니, 보육원에서 자란 양지원이 그 돈을 낼 수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이선영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양지원을 피겨의 세계로 끌어들인 피겨 관계자 아니었으면 사실상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세계대회를 나가게 될 때와 더 높은 곳을 노리기 위한 훈련 비용 등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해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게 이선영의 생각이었고, 잠깐 고민해 본 결과 지영의 생각도 같았다.
“흠…….”
지금 양지원의 훈련비용은 양지원의 친언니가 겨우겨우 대고 있다고도 적혀 있었다. 실력 있는 기자 이선영은 양지원의 친언니 양유진이 하루에 4시간만 자고 일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내서 첨언을 붙여 뒀다. 더불어, 지금이 양지원의 피겨 생활의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는 것도. 지영은 그 의견에도 동의했다.
“이대로 그만두든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든가.”
양지원에게는 지금이 분기점이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세계대회 준비와 훈련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랬다. 잘 모르는 지영도 피겨에는 돈이 많이 들고, 그걸 양지원의 언니 양유진이 아무리 2교대 공장, 접시닦이, 편의점 알바를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더라도 정말 최소한일 거고.”
지금만 해도 양지원은 자신에게 딱 맞는 수제화가 아닌, 물려받은 피겨화를 신고 훈련은 물론 시합까지 나가고 있었다. 의상 또한 마찬가지.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게 아니라 이건 그냥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영은 이제 영상을 보기로 했다.
굳이 영상을 보낸 이유가 이 안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참 전에 받아진 영상을 틀어보는 지영.
영상이 시작되자 양지원이 바로 나왔다. 시합 영상은 아니고, 훈련 영상 같았다. 검은색으로 훈련복으로 통일한 양지원이 자세를 잡고 있다가, 음악이 시작되자 안무를 시작했다. 지영은 피겨를 잘 모른다.
유도를 시작한 이후에는 다른 스포츠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안목을 가졌다.
하지만, 운동선수이기 때문에 일반인과는 다른 시점이 존재하긴 했다.
그건 바로 안정감을 볼 수 있는 감각이었다.
황금세대가 처음 유도를 시작하고, 성장하며 지금의 실력을 갖추기 전엔 지영을 포함해 전원이 불안한 시합을 할 때도 있었다.
아슬아슬.
넘어갈 듯 말 듯.
관전하는 사람의 심장이 벌렁벌렁이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심하면 과호흡 때문에 현기증이 나기도 하고, 막 그런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실력이 안정권에 들어가면, 시합을 관전해도 그런 증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양지원이 그랬다.
그녀의 연기는 그냥 편안했다.
홱! 하고 공중 3회전? 트리플 악셀이라고 하는 기술도 너무나 수려하고, 아름답게 돌았다. 넘어질 것 같단 불안감 자체가 들지 않는. 그래서 보는 사람의 가슴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연기였다.
누가 찍었는지, 연기를 하는 동안 계속해서 카메라가 따라붙었는데, 그 덕분에 보이는 근접샷은 또 다른 느낌을 지영에게 선사했다.
“음…….”
그리고 지영은 그녀의 표정을 보자마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분한 클래식에 맞춰 펼치는 그녀의 표정 연기는 당연히 상당히 절제되어 있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지영은 이상하게도, 그 표정이 아팠다.
가슴이 뭔가 저릿하면서도 익숙했다.
“아…….”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표정이었다.
지금이 아니라, 회귀 전에 지영이 경기장을 보면서, 매트 위에서 실력을 겨루는 선수들을 보면서 자신이 지었던 표정이었다. 화장실에서, 혹은 거울에서 순간 스쳐 갈 때 봤던 자신의 표정과 양지원의 표정은 거의 흡사했다.
아니, 판박이였다.
“알고 있구나…….”
닿을 수 없다는 걸.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재능이 뛰어나도 양어깨에 매달린 현실이란 것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구나.
그게 연기를 하는 와중에도 저렇게 티가 나고 있었다. 재능이, 현실에 막히는 상황이 딱 이런 상황이었다. 지영과는 전혀 다른 현실 때문에, 날개가 꺾이기 일보 직전의 백조. 양지원은 지금 딱 그런 상태였다.
연기가 끝났다.
피날레 포즈를 취했던 양지원이 이내 천천히 자세를 풀고 뒤로 빙글 돌았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잠깐 흘렀던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검게 물드는 화면. 영상이 끝났다.
지영은 이건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그리고 친구도 마찬가지의 생각인 것 같았다.
“들어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강한결이 들어왔다.
“영상 봤지?”
“응. 좀 전에.”
“어떡할 거야?”
“바로 가보려고.”
원래는 내일 잠깐 충주에 갔다 오려고 했는데, 이 영상으로 마음이 변했다. 급한 건 이쪽이었다. 의지가 꺾이기 전에 급히 다시 불을 지펴야 할 건 이쪽이었다.
“나도 같이 가자.”
“그럴래?”
“응. 보고 싶어졌어.”
“그래, 그럼.”
지영도 보고 싶었다.
보고, 만나서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이 일을 하는 거니까.’
시합이 끝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지영은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오히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지영은 정서적으로 훨씬 더 안정을 얻고 있었다. 몸은 조금 피곤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평안했다.
이게 중요한 거다.
정서적인 안정.
“그쪽에는 내가 연락해 보고 스케줄 잡을게.”
강한결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할게.”
“오케이. 고생했는데 쉬어.”
“고생은 나만 했나. 너도 했고 우리 전부 다 했지.”
“하하, 그런가?”
씩 웃은 강한결이 나가고, 지영은 한 번 더 날개가 꺾이기 직전의 백조가 애처롭게 노니는 영상을 보다가,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래도 시합을 해서 몸이 피곤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딴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 지영은 김지영 여사님, 그리고 강한결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