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89화 (89/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89화

89화. 전국 청소년 유도 선수권(5)

4강 대진이 결정되고, 30분 휴식이 주어졌다.

지영은 바로 관중석으로 올라가 학부모님들이 싸 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 점심은 한은정과 그녀의 부모님이 싸 왔다. 평소라면 한은정이 여기저기 쏘다니며 조잘거렸을 테지만, 그녀는 눈치를 보며 조용히 음식만 날랐다.

평소에는 황석을 질질 끌고 다닐 정도의 당차고 깨발랄한 그녀지만,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금씩 풀리는 중이었다.

“오, 맛있다. 은정이 네가 만들었어?”

“어? 어! 맛있지? 에헴! 내가 솜씨 좀 부려봤지! 후후!”

이성진이 김밥을 먹고 난 뒤에 한 말에 한은정이 이때다! 기회를 포착한 눈빛으로 그의 옆에 앉아서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당근 김밥도 먹어봐! 그게 야심작!”

“윽, 당근 싫은데…….”

“어허! 고등학생이 되어서 어! 반찬 투정하고 그럴 거냐! 얼른 먹어 당근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아…….”

“자, 아…….”

이성진이 난색을 보이자 한은정은 아예 강제로 김밥을 이성진의 입에다가 넣었다. 궁시렁궁시렁. 볼을 잔뜩 불리고는 그래도 받아먹긴 한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다. 지영도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김밥과 어묵국을 먹기 시작했다.

역시 맛있다.

코로나로 진짜 힘든 시기를 솜씨 하나로 버텨낸 게 이해가 갔다.

“자, 이것 좀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김지영 여사님이 오늘 시합을 보러온 장세리 선배님에게도 음식을 전달했다. 사실 올라오기 전까지는 장세리 선배님이 왔는지 몰랐었다. 평소라면 정말 반가웠겠지만, 오늘은 좀 애매했다. 하필이면 안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세리 선배님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하긴, 오래 선수 생활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어보셨을 테니까, 이 정도로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지영은 빠르게 식사를 끝내고, 남은 시간을 쉬기 위해 바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역시 머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판 상대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이우진과 구혁. 여긴 둘 중 누가 올라올지 모르겠고.’

둘의 실력은 비등비등했다.

수치로 나누자면 49 대 51 정도. 그날 컨디션에 따라 51은 번갈아 가며 차지하게 될 거다. 그러니 결승엔 누가 올라올지 아직 예상할 수 없었다. 반대로 지영의 준결승전 상대는 역시 용인대 선수다.

작년에 2등만 세 개를 한 선수로, 시합하는 걸 보니 용인대에 가서 폼이 많이 올라온 것 같았다.

8강 하는 걸 봤는데, 잘못하면 진다.

잘못하면.

그건 반대로 생각하면 제대로 하면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영은 긴장감은 유지하되, 몸은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했다. 딱 20분의 휴식이지만 그래도 에너지가 보충되기에는 충분했다. 안내방송이 나오고 다시 경기장으로 내려온 지영.

역시 4강부터는 분위기가 달랐다.

참가자 전원이 메달권 선수기도 하지만 4강에 오른 선수들은 운으로 올라온 몇몇 선수가 아니라면 전부 정상을 노릴만한 실력이 있는 선수들이다. 그래서 분위기는 진짜, 남달랐다. 하지만 지영은 이런 고양감이 좋았다.

준결승은 네 개의 경기장에서 일시에 시작됐다.

체급이 8개.

55와 66이 한 경기장. 다시 66과 73이 한 경기장. 이런 식으로 네 개의 경기장에서 일시에 준결승이 시작됐고, 예선전과는 다른 응원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연희고에서는 임효중과 이성진이 가장 먼저 들어갔다. 처음이 이성진이고, 그다음이 임효중이었다.

준결부터는 따로 심판진이 들어가서, 사이드는 임대성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지영은 이제는 쓰이지 않는 빈 매트에서 막 시합에 들어가는 이성진을 바라봤다. 다행히도 이성진은 평정을 찾았다.

인사하고, 시작.

합!

아악!

각자의 각오, 의지, 투지를 담은 기합을 내지른 뒤에 시합이 시작됐다. 이성진의 상대 역시 용인대다. 하지만 작년에 이성진에게 이미 두 번이나 졌던 선수였다. 그 선수 또한 용인대에 들어가서 폼이 올라왔지만, 단시간 안에 두 번이나 자신을 박살 냈던 선수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시합은 시종일관 이성진의 우세로 진행됐다.

2분쯤 지났을 때, 이성진의 빗당겨치기가 제대로 들어가면서 절반이 나왔고, 이어서 다시 1분이 지났을 때 덤벼들던 상대를 받아 반대쪽 빗당겨치기로 한판을 따냈다.

주먹을 들어 짧게 포효한 뒤에 나온 이성진에게 지영은 손을 들어 올렸다.

짝.

이제는 확실히 풀린 표정으로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지나가는 이성진. 됐다. 이제 문제는 다 사라졌다.

후우.

이어서 임효중이 시합이 들어갔다.

임효중의 상대는 동의대 선수였다. 구혁과 같은 학교에서 올라간 부산체고의 에이스다. 그러나 그런 동의대의 차기 에이스 권성찬도, 임효중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제는 2학년이 된 대학부 선수들도 작년 한 해 동안 황금세대를 막지 못했다.

차기 국가대표로 손꼽히는 신지혁도 이성진에게 패배했다.

다른 체급은, 사실상 거의 적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임효중도 시원하게 한판으로 이기고 나왔다.

그리고 지영의 차례가 금방 돌아왔다.

시합장으로 올라온 지영은 발바닥에 찬 땀을 슥슥 닦아내고, 제자리 뛰기로 몸을 예열시켰다. 그러자 건너편에 서는 용인대 임주식. 그는 지영을 향해 매우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면서 몸을 풀었다.

“지영아!”

“…….”

임대성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더니, 그는 두 손을 엎은 채로 뻗어 내리누르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건 곧 흥분을 누리라는 뜻. 애초에 흥분도 하지 않았지만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딱 좋은 상태다.

적당히 먹은 점심이 에너지로 변환되어 최고조의 컨디션을 유지 시켜주고 있었다.

시합을 하고 싶다.

트러블이 생겨 스포츠맨십이 결여된 시합 말고, 진짜 시합을 하고 싶어졌다. 준결승. 지영은 솔직히 상대가 강했으면 했다. 더 강하게, 부디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제법 높았다. 신기하게도 예선전 때 운이 좋아서 꾸역꾸역 준결승까지 올라온 선수라 하더라도, 준결승이 되면 메달 버프와 분위기 버프를 받아서 그런지 본래 실력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단체전이 그랬다.

팀 버프.

흔히 기세를 탄다고 하는데, 이 기세는 한 번 불붙으면 진짜 무섭게 타올라 실력을 향상시켜 줬다. 마치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게 바로 준결승 버프다.

지영은 부디 상대가 그 버프를 받았기를 바랐다.

심판이 들어왔다.

인사하고, 입장. 다시 인사하고, 한 걸음 앞으로. 그리고 시작.

하!

짧게 기합을 지른 지영은 자세를 잡고 천천히 전진했다.

지영의 자세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등을 훤히 내주는 자세. 잡기 싸움을 잘 하지 않는 지영은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이렇게 먼저 깃을 내준다. 지영이 이렇게 나오자 임주식의 눈빛에 갈등이 잠깐 서렸다.

누가 봐도 잡으라고 내주는 자세인데, 저걸 잡자니 뭔가 미끼를 무는 것 같아서 기분이 꺼림칙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안 잡을 수는 없었다. 유도는 잡아야 비로소 승부가 시작되는 게임. 잡지 않고서는 상대를 넘길 재간은 지영에게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민 끝에 지영의 등 깃을 잡는 임주식.

지영은 손을 안쪽으로 넣어 상대의 등 깃을 아래쪽에서 잡았다. 보통 이런 경우 위를 잡은 게 더 유리하긴 하다. 끄는 것도, 휘감는 것도 위로 잡아야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유리하게 잡은 건 임주식인데, 그는 극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유리하게 잡고 방어 유도?’

그건 전문가가 아니면 솔직히 풀어나가기 쉽지 않다.

일단은 반칙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도 반칙을 조심해야 한다. 기술에 안 넘어간다고 유리한 게 아니고, 승기를 잡는 것도 아니었다.

메쳐서 이기는 것.

반칙으로 이기는 것.

그리고 상대가 시합을 포기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유도의 승리방식이다.

그리고 거의 90% 정도가 첫 번째로 결정지어진다. 그런데 방어 유도는 첫 번째도 첫 번째지만, 두 번째를 진짜 잘해야 한다. 요즘 세계 유도 흐름의 추세는 조금만 수비적으로 나와도 지도를 주고, 이는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툭, 툭!

돌아 나면서 몸을 써 모두 걸기를 쓸었다. 거리가 워낙에 멀어서 제대로 걸리지 않았지만, 이걸로 시합이 좀 더 활동적으로 변했다. 엉덩이를 살짝 빼고, 자세를 낮춰 지영의 기술을 방어하던 임주식이 훅 들어오더니 찍어서 허벅다리를 찼다. 하지만 방어 하나는, 지영을 따라올 선수를 찾는 게 힘든 게 현재 대한민국 유도판이다.

자세를 낮춰, 상대의 허리가 아예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리자 임주식은 바로 자세를 풀고 도로 물러났다.

서로 간에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았다.

당장은 어느 쪽이 공세라고 말하기 뭐한 상태라서, 지영은 좀 더 간을 보기로 했었다. 임주식은 전형적인 오른쪽 틀어잡기 선수였다. 허리후리기, 허벅다리, 이 두 가지 기술에 업어치기는 그저 시간 끄는 용도 정도로만 쓰는 선수.

어떻게 보면 임효중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효중에 비해 중심과 힘, 기술을 걸 때의 속도와 힘, 타이밍 등이 전부 부족했다. 매일같이 임효중과 잡아서 연습하는 지영이라, 오른쪽 기술밖에 없는 허리기술 선수를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리기술을 걸 때 가장 중요한 건 상대의 중심을 앞으로 당겨 놓는 거고, 그 순간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기술을 거는 거다. 사실 이건 유도의 모든 기술이 그 순서를 따라간다.

‘요는, 그 타이밍을 안 주면 기술이 완전히 막힌다는 거지.’

첫 번째, 상대를 잡아당겨서 자신에게 붙여놔야 한다.

두 번째, 그 상태에서 상체를 앞으로 숙여 나와 상대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게 만든다.

세 번째, 기술을 건다.

허벅다리든, 허리후리기든, 허리채기든.

여기서 뭐 하나가 툭 빠져버리면 앙금 빠진 찐빵처럼 되어버리는 게 유도의 모든 기술들이었다. 지영은 임주식의 허리기술 전체를 그렇게 막아버렸다. 상대가 들어오면 같이 물러나고, 당기려고 하면 뒷기술을 걸 모션을 걸어 위협을 줬다.

이런 지영의 전략에 임주식은 이도 저도 못 하고 헤매기 시작했다.

그쳐!

시도! 시도!

그래서 둘 다 나란히 지도를 받았고, 다시 시합이 시작됐다. 그 사이 용인대 코치가 코칭을 열심히 넣었고, 임주식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에 다시 지영을 바라봤다. 비장한 표정. 지영은 용인대 코치가 외치는 걸 같이 들었다.

“마! 주식아! 져도 괜찮으니까 적극적으로 승부 봐라!”

예전에 이호석을 끌고 갔던 그 코치는 지영에게 자신의 선수가 안 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리한 코칭 말고, 가장 현실적인 코칭을 해줬다.

적극적.

겁먹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근데 따지고 보면 이게 현재 임주식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었다. 코치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임주식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이런 선수들은 이제, 무섭게 자신만의 유도를 펼쳐올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영이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다부진 눈빛으로 다시 덤벼오는 임주식.

지영은 그런 임주식을 맡아 오랜만에 온전히, 기분 좋게 집중하는 시합을 했다.

각오가 선 선수는 역시 매서웠다.

하지만 지영은 그 매서움보다, 윗줄에 있었다.

파앙!

돌아 나가려는 임주식에게, 지영은 등 깃만 잡은 채로 빗당겨치기를 넣었다. 그러자 중심이 붕 떠서 앞으로 빙글 돌았지만 소매 깃을 잡고 있지 않아 바닥에 손을 짚어 기술을 방어했다. 그런 상대에게 몸을 역으로 구겨 넣어 배대뒤치기를 걸었다.

“억!”

설마 이 자세에서 배대뒤치기를 걸 줄은 몰랐는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임주식. 빙글! 발바닥으로 차올린 뒤 기울이기. 임주식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그대로 앞구르기를 하는 것처럼 뒤집혔다. 지영은 그 상태로 같이 굴러서, 상위 포지션을 잡으며 임주식을 메쳤다.

쿠웅!

닛폰!

등으로 너무 정직하게 떨어져서 이건 여지가 없는 한판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임주식의 도복을 놓고 일어선 지영도 짧게 숨을 내쉬었다. 경기 시간은 총 3분 30초 정도.

제자리에 가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임대성이 수고했다고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음 순번인 황석에게 향했다. 그렇게 결승을 확정 지은 지영은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이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지영의 경기 전 이우진과 구혁의 승부는 이번에도 이우진의 승리였고, 지영은 이우진과 결승만 세 번째를 치르게 됐다.

‘이번에는 부디, 모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결승전이 되기를…….’

지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우진을 마주 보며 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