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87화
87화. 전국 청소년 유도 선수권(3)
이번 대회는 사실 작년 선발전 대회와 비슷했다.
작년이 아시아 선수권과 흡사한 유망주 대회 출전권을 건 대회였다면, 이번 대회는 진짜 세계 선수권 대회인 메이저 대회다.
이 대회를 작년 초에는 적응의 문제로 출전하지 않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이미 고등부는 물론, 대학부 시합에 나가도 될 정도로 적응을 끝낸 상태였다. 그러니 세계 선수권 출전권이 걸려 있는 이 대회를 놓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시아권 선수들에게는 적응이 거의 끝났다.
일본에서 불굴의 천재라 불리는 신지 정도의 선수는 아시아 전체를 따져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실제로 신지는 현 일본 국가대표와 붙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고 했다. 연습 때 붙으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는 정도?
불세출의 천재는, 이미 국가대표의 자리를 넘봐도 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신지의 실력은 세계에서도 통할 정도라는 뜻이기도 했다. 현 73㎏ 세계랭킹 1위가 일본 선수니까 말이다.
그럼 지영은?
지영은 자신의 실력이 신지와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상대 전적에서는 앞서는 상태였다. 물론 이게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엔 제법 충분했다.
그럼 지영은 지금 한국 국대 선수와 붙어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실력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게, 강지영이란 선수의 현주소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지영의 시선은 아시아가 아닌, 세계로 뻗어 나갔다.
‘아시아 유도와 세계 유도는 또 다르지.’
아시아 유도가 부족한 피지컬을 채우기 위한 기술 유도라면, 유럽권은 전형적인 피지컬 유도다. 우월하다 못해 압도적인 피지컬로 승부를 보는 스타일. 그게 서양권의 유도다. 지영은 그 유도가 궁금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언제나 영상을 통해 본 세계의 실력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번 대회 우승은 필수야.’
그래서 지영은 스스로에게 일말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장한 지영의 첫판은 경기대 선수였다. 작년에 지영이 나가지 않은 대회에서 3위 입상이 전부인 선수.
객관적으로 봐도 지영의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영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지영보다는 두 살 위 선수인데, 확실히 지영을 상대하면서 긴장한 걸 넘어 얼어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지영은 길게 끌지 않았다.
잡아서 툭 끌자, 그대로 딸려오는 상대에게 발목받치기를 걸었다. 그랬더니 몸이 아예 붕 뒤집혔다. 오히려 기술을 건 사람이 좀 놀랄 정도였다.
와자리!
절반이다.
사실 중심만 무너뜨리려고 건 기술인데, 절반이 나오자 오히려 지영이 좀 황당했다. 지영은 차라리 이렇게 된 거, 빨리 시합을 끝내기로 했다. 그쳐 이후 다시 시작. 지영은 상대의 목을 확실히 제압했다.
그리고 모션 뒤에, 허리후리기로 그대로 한판을 따냈다.
이번엔 저항을 좀 하려고 한 것 같지만 이미 몸이 경직되어 있어서 걸리는 순간 거의 한판이 결정 났다.
그렇게 1분도 안 되어 시합을 끝내고 나온 지영은, 옷을 챙겨 입은 뒤에 대기석으로 향했다.
경기장을 많이 쓰다 보니까 시합이 순식간에 진행됐다. 지영은 자신의 시합이 끝나고 나서 들어간 두 선수를 확인했다.
한 명은 한체대, 한 명은 보성고다.
73의 전통 강자였던 보성에서 보낸 한체대 선수, 그리고 같은 학교 후배였던 보성고 선수.
둘은 워낙에 서로 자주 잡아 스타일 전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경기는 굉장히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그러다 결국 지도를 두 개씩 받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승자는? 한체대 선수였다.
먼저 덤벼든 보성고 선수의 기술을 받아서 되치기 절반.
경기 시간 30초를 남기고 나온 절반이라 그대로 시합은 한체대 선수의 승리로 끝났다. 지영은 그 선수의 특징을 머릿속에 잘 넣어놨다.
황석의 차례가 왔다.
1회전 마지막 게임이라 현재 대기 중인 강한결을 대신해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코치석으로 이동했다.
“석아!”
“…….”
황석은 대답 없이 지영을 돌아본 뒤,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석의 상대는 작년에 두 번이나 석이에게 진 선수로, 사실상 크게 걱정은 없었다. 사실 현재 이변이 없으면 몇 체급은 이미 우승자가 내정되어 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었다.
66, 73, 81, 90. -100, +100.
이성진부터 시작되는 황금세대 라인과 괴물의 장대호의 체급이다.
작년 선발전은 그나마 피 튀기는 경기들이 있었지만, 한 해가 지나면서 나이 제한이 걸리면서 황금세대와 장대호를 막을 선수는 이제 없다는 판단이었다.
황석의 체급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대학교 2학년이 된 선수들도 그를 막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상대가 없었다. 황석은 상대를 발목받치기 후, 핸들치기 한 방으로 한판을 따내면서 1회전을 깔끔하게 넘어갔다. 이제 강한결만 남았다.
강한결도 들어가서 1분 만에 시합을 끝내고 나왔다.
1회전이 다 돌았다.
그리고 이제 2회전.
주성호가 처음으로 들어갔고, 최선을 다했지만 졌다.
그다음은 권지호였는데, 지호도 최선을 다했지만 졌다. 상대는 구혁. 질 만한 대진이었다. 이우진과 구혁은 또, 4강에서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차례가 올 때가 돼서, 패딩을 벗고 시합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안 돼!”
“성진아 참아!”
성진?
지영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상대 선수의 목을 잡고 찍어 눌러, 주먹을 내려치려 하는 이성진의 모습이 보였다.
지영의 신형이 그 순간 총알처럼 튀어 나갔고, 그 뒤를 연희고 전체가 뒤따랐다.
* * *
“아 아오, 진짜! 저 새끼가 먼저 저한테 욕했다니까요!”
심판에게 그렇게 소리치는 이성진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눈이 새빨갛게 변해서, 올라오는 분노를 어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지영은 상황을 파악했다.
“욕? 무슨 욕?”
“애미 애비도 없이 자란 개X끼라고 소곤거렸다고요! 계속! 처음 잡았을 때부터!”
“…….”
심판이 그 말에 눈매를 꿈틀거리곤 상대 선수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당황함이 가득한 얼굴로 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안 그랬습니다!”
그렇게 다급하게 부정하지만.
“했네.”
“저 새끼가…….”
강한결과 임효중은 대번에 상대 선수가 이성진에게 트래쉬 토크를 진짜로 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지영도 곧바로 깨달았다. 저급한 트래쉬 토크가 허용되는 경기가 있긴 하다. 야구도 그렇고, 축구도 종종 그런 모습이 나온다.
가족, 인종 등을 가지고 거는 트래쉬 토크.
그에 흥분한 선수가 들이받아서 경기가 멈추거나 퇴장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그 종목에서 트래쉬 토크를 일종의 심리전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유도는 아니었다. 그럴 겨를도 없는 게 사실 유도였다. 조금만 방심해도 한 바퀴가 돌아가는 게 유도인데, 그 틈에 트래쉬 토크를 한다? 그것도 이성진을 상대로? 말도 안 된다. 그런데도 상대는 했다.
아마 실력으로 이길 자신이 없어서일 거라고 지영은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이성진의 유년 시절은 이미 방송을 타서 한국에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아주 유명한 얘기였다. 본인이 직접 방송에 터뜨렸고, 학대라는 이야기로 공중파까지 탔을 정도였다.
그래서 상대는 그걸, 이성진의 역린으로 잡았다.
그리고 역린이 맞긴 했다. 진짜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역린.
-장내 모든 경기 잠시 중단하겠습니다. 심판 선생님들은 진행 본부로 모여주세요. 다시 한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장내 경기 중단하겠습니다. 심판 선생님들은 진행 본부로 모여주세요.
경기가 올 스톱 됐다.
이성진과 한체대 선수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선수들이 시합을 중지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럴 만도 했다.
유도는,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난다고 한다.
그래서 흔히 예시예종이라고 하고, 이건 유도에 입문한 순간부터 가르친다. 물론 당연하게도 어느새 금방 잊어버리고 말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서 유도는 뭐로 시작해서 뭐로 끝난다? 하고 물으면 초등학생도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납니다! 하고 대답한다. 예시예종이란 단어는 금방 안 떠올라도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난다는 말은 쉽게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유도 경기 중에서, 저급한 트래쉬 토크를 걸었으니 시합이 스톱 되는 것도 당연했다.
문제의 한체대 선수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마 이성진을 흔들려고 한 것 같은데, 딱 보니 그 뒤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설마 성진이가 그렇게 대놓고 터뜨릴 줄은 몰랐겠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지영은 심판들이 모여 회의 중인 곳을 바라봤다. 솔직히 걱정도 됐다. 이성진이 너무 거칠게 나왔다. 다행히 주먹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징계를 받아도 될 만한 행동을 저질렀다.
잘못하면 반칙패도 당할 수 있는 상황.
“아, 미치겠네, 진짜…….”
후우.
임효중은 답답함을 참지 않았다.
강한결은 굳은 눈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임대성 코치를 바라봤고, 지영은 다시 시선을 돌려 차갑게 굳은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는 이성진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런 지영의 귀로.
“아 거 씨. 시합 중에 그럴 수도 있지.”
개소리가 들려왔다.
“……뭐?”
지영은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쪽에 한체대 선수 넷이 보였다. 지영의 시선을 받은 가장 앞에 선수가, 지영을 향해 이죽거렸다.
“아니, 뭐 틀린 말도 아니고. 그 정도는 할 수도 있는 거지. 유도도 멘탈 게임인데.”
피식.
언제부터 유도가 멘탈 게임이었지?
아마 같은 팀을 두둔해 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상대를 골라도 너무 잘못 골랐다. 심지어 지금 이 말을 하는 선수는 지영의 다음 판 상대다.
“…….”
지영은 욱해서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황석을 막았다.
그러곤 다음 판 상대인 한체대 1학년, 장상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웃었냐?”
“유도가 좀 거친 운동이긴 하지.”
“뭐?”
“그러니 시합 중에 어디 하나 박살 나기도 하고. 뭐 그런 운동이지. 안 그래?”
“야, 너 말 다 했…….”
쓰레기들이다.
지영은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다시 이성진을 바라봤다.
“이성진!”
“…….”
지영의 부름에 이성진이 돌아봤다.
좀 전까지는 뜨거웠다면, 지금은 차갑게 식었다.
“시합 재개되면, 반 죽여놓고 나와.”
“…….”
씨익.
이성진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사과해도 부족할 판인데 그럴 수도 있다? 유도가 멘탈 게임이다?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들이니 인정사정 봐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진 후배들은 어쩔 수 없지만, 이제 한체대는 이번 시합 한정 무조건 적이다.
보통 합동훈련 때도 이렇게 학교끼리 척을 지고 치열하게 싸우듯이 연습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시합 때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라이벌 의식 때문에 치열해지는 경우는 있어도, 이런 문제로 싸우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이건 상대가 걸어온 싸움이었다.
대학부?
그런 건 상관없었다.
유도가 뭐 단체 패싸움도 아니고.
‘하나씩 다 깨버리면 돼.’
회의 결과가 나왔는지, 심판들이 흩어져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앉아서 대기 중이던 선수들도 전부 일어났다. 지영은 가만히 판정을 기다렸다.
‘반칙패를 주겠지.’
연기를 잘했으면 이성진이 아마 반칙패를 당했을 건데, 이성진의 날 선 반응에 오히려 자기가 쫄아서 제대로 대처를 못 했다. 아예 뻔뻔하게 나왔으면 아마도 이성진의 반칙패였을 거다. 역시나 심판은 한체대 선수에게 반칙패를 선언했다.
홱!
인사를 하기 무섭게 밖으로 나온 이성진.
이성진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한체대 선수가 길을 막자,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너 이 새끼야. 넌 선후배도 없어? 어디서 겁대가리 없이!”
“비켜, 다 죽여버리기 전에.”
“너, 이 개…….”
“뒤지고 싶어? 애미 애비 없는 새끼한테?”
“…….”
이를 갈면서 으르렁거리는 이성진의 기세는 진심으로 사나웠다. 평소에는 세상 밝게 웃는 이성진이지만, 한 번 뚜껑 열리면 진짜 모조리 뒤엎어 버리는 게 또 이성진이다. 극과 극. 이 양극의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외박을 나가도 언제나 임효중이 붙어 있고, 숙소에서는 강한결이 컨트롤한다. 귀찮게? 왜?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한결은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진의 옆에 서서.
“한체대 선배님들.”
“……왜, 뭐!”
“각오들 하세요. 오늘 시합, 아주 재밌게 해드릴 테니까.”
오죽하면 강한결마저 상대에게 경고를 날렸다.
이걸로 이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성진과 강한결의 옆으로 황석과 임효중, 그리고 지영이 나란히 서자 쪽수에서도 밀리는 한체대 선수들이 뒤로 물러났다. 애초에 고3이었던 작년에도, 황금세대에 번번이 밀렸던 선수들이다. 도복을 입지 않았다면 모를까, 도복을 입었을 때 이들의 앞에서 어깨를 펴고 떵떵거릴 수 있는 선수들은 최소 한국에선 현재 정상급 기량을 가진 선수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꼬리를 만 건 한체대였다.
잠시 뒤, 지영은 시합장으로 들어섰다. 그런 지영의 건너편엔 한체대 선수가 서 있었고, 그 선수를 보며 지영은 차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