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78화
78화. 야나기가우라(6)
어?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황석.
지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단 좀 걷자.”
“응…….”
시무룩.
‘아이고…….’
풀이 죽은 소다. 소.
속으로 혀를 찬 지영은 트랙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시작은 역시 황석의 여자친구, 한은정이었다.
‘한은정. 와 넌 진짜…….’
너 진짜, 대단한 애였구나?
지영의 기억으로 한은정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식당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수완이 좋아서 제법 매출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다음 당당하게 황석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이에, 지금 이 문제를 끼워 넣으면 단순히 그녀를 의리가 있다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학업 포기는 어차피 정해져 있던 건가?’
이맘때쯤 사기라면…….
애초에 그녀가 돈을 버는 목적이 이쪽으로 한정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속단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
지영이 아는 건 황석이나 임효중이 알려준 것들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지영에게 최소한으로 알려준 거라면? 만약 그 시절의 임효중, 강한결, 황석도 알고 있었지만 지영에게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당연히 지영이 알 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즉, 회귀 전에 일어났었던 일이지만 지영은 모를 수밖에 없던 일이라는 거다.
여기에 하나 더.
‘우리가 사고를 당하지 않아서 생긴 나비효과라면?’
제법 그럴듯하다.
황석네 집과 한은정의 집은 정말로 친한 사이니까. 그리고 황석네도 그렇게 유복한 편은 아니었다. 만약 수술비가 많이 들어가서 한은정의 부모님이 황석의 부모님에게 수술비를 빌려줬고, 그래서 사기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황석의 사고가 없다. 황석의 사고가 없으니 여윳돈이 제법 있었고, 그 돈을 사기당한 거라면? 이렇게 생각해도 제법 말이 된다.
‘근데 그렇다고 쳐도…….’
한은정이 진짜 대단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부모님이 사기까지 당해서 마음이 편치 않을 상황까지 겹쳐 있었다고 가정해도, 그녀는 그래도 끝까지 황석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와…….’
대단한 거다…….
자신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그 당시 자신을 잡아먹은 어둠을 생각하면 한은정처럼 일어서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물론 한은정은 사지육신이 멀쩡했다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진짜 대단했다. 세상 맑고, 밝은 한은정의 의지가 얼마나 단단했는지. 그리고 의리와 황석을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에 대해서 지영은 정말 놀랐다.
회귀 전과 회귀 후인 지금 이 상황이 뭔가 맞지 않는 느낌도 있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애초에 경우의 수가 너무 많으니까 현실에 집중하는 게 나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고, 인과가 비틀렸나? 하고 고민할 게 아니었다. 그 당시의 자신은 어차피 뭔 말을 했어도 집중하지 못했을 거고, 그런 자신에게 이런 사실을 말할 사람도 애초에 없으니까.
그런 친구들이다.
황석도, 임효중도, 이성진도, 그리고 강한결도.
그러니 지영은 그건 고민에서 뺐다.
대신 한은정이라는 대단한 한 명의 인간에게, 어떻게 보답을 하는지로 넘어갔다.
‘너는 자격이 있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지영은 한은정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고맙지만, 황금세대 친구들만큼은 그래도 아니었던.
하지만 그녀의 정신력과 의리를 생각하면,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것들을 생각하면……. 그녀는 자격이 있었다.
미래의 기억을 가진, 자신이 진심으로 도와줄 자격이 충분히 차다 못해, 넘치도록 말이다.
어느새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석아.”
“으, 응?”
에구, 이 순진한 친구.
지영이 아까 안 된다고 했던 것 때문에 아직도 얼어 있었다.
“너 은정이 사랑하지?”
“……응?”
“얼마만큼 사랑하냐?”
“……많이.”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해서 지영은 또 픽 웃고 말았다.
‘그래, 이렇게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도와줘야지.
그리고 이것도 잘 생각해 보면 지영이 하려는 일의 연장 선상이기도 했다.
“석아.”
“응?”
“너 나랑 일 하나 하자.”
“어? 일? 무슨 일?”
“네가 사랑하는 사람 도와주는 일.”
“…….”
지영의 그 말에 황석은 대답 대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만 끔뻑거렸다.
그런 황석을 보며 지영은 또 픽 웃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수정해야겠네.’
그런 생각과 함께 야간 운동을 마치고 다시 오랜만에 친구들을 소집한 지영은, 다시금 친구들을 설득했다. 이번에 지영이 꺼낸 카드는 황금세대의 ‘비상금’ 개념이었고, 이성진이 이부자리를 가지고 와 바닥에 깔아줬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해프닝이었고 이번에도 친구들은 지영을 전적으로 믿어줬다.
* * *
비시즌 하루 훈련은 보통 새벽은 각 팀이 알아서 하고, 오전과 오후만 합동 훈련이다. 그리고 야간도 각자 하던가, 아니면 연습 시합 때문에 함께할 때가 있다. 연희고도 비슷했다. 새벽은 혼자 했고, 오전과 오후만 함께했다. 연습 시합도 무리하지 않고 오후 운동 끝나고만 했다.
여기서 좀 더 세분화로 들어가면 새벽은 체력 훈련, 오전에는 굳히기, 오후에는 자유 연습, 야간에는 고무줄이나 로프, 혹은 개인 운동으로 나눌 수 있었다.
화요일 오전.
오전 훈련은 몸을 풀고 곧바로 굳히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오전엔 자유 연습 없이 끝까지 굳히기만 하다가 끝난다.
사실 지영은 굳히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실제 시합에서도 이기는 와중에도 굳히기를 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는 편이었다. 이상하게도 굳히기를 하면 아귀와 체력이 더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아예 그쪽엔 힘을 허비하지 않는 편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만큼 지영은 굳히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지영은…… 오전 내내 영혼이 탈탈 털리는 중이었다.
“와…….”
세다.
우석이나 비봉, 원광의 굳히기 실력은 연희고와 비슷했다. 굳히기보다는 자유 연습에 중점을 둔 훈련을 한 선수들,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야나기는 달랐다. 야나기는 굳히기를 진짜 잘했다. 지영은 첫판 마사루를 시작으로 세 번째 판까지 지금 탈탈 털리는 중이었다.
‘아니, 내가 이렇게 굳히기를 못했나?’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충북권에서 굳히기를 제일 잘하는 청석 선수들과 붙어도 조금 밀리는 정도였다. 청주대 선배들과 붙어야 실력 차이가 좀 나는, 분명 그런 정도였다.
그런데 야나기에는 진짜 탈탈 털리는 중이었다. 심지어 좀 전에 한 선수는 60 선수였다. 체중 차이가 그렇게 나는데도, 피지컬에서도 분명 훨씬 나은데도 우위는커녕 형편없이 밀렸다.
“와, 얘들 굳히기 진짜 잘하네…….”
선수가 많아 굳히기도 나눠서 해서, 밖으로 같이 쉬러 나온 이성진도 야나기의 굳히기 실력에 감탄 중이었다. 이건 뭐, 좀 정도껏 강해야 하는데 야나기는 진짜 굳히기에 강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당연했다.
한국 유도와 일본 유도의 차이점이 있다면, 한국 유도는 메치기에 중점을 두는 스타일이었다. 잡기 싸움부터 시작해 메치기, 그리고 굳히기는 시간 끌기용으로 쓴다. 그리고 이는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지영은 애초에 정말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굳히기는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본 유도는 달랐다.
여기는 굳히기를 굉장히 중시했다. 한국이 다 필요 없고, 그냥 메치기로 끝내면 돼! 라고 생각한다면 굳히기도 유도의 하나. 그러니 우린 종주국이니 굳히기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현재 국제유도도 굳히기에 상당히 중점을 뒀다.
그래서 국제유도를 보면 유럽권 선수의 굳히기에 아시아권 선수들이 홱홱! 뒤집히는 모습이 자주 나왔다. 힘에서 워낙에 밀리니 이리 돌리면 이리 돌아가고, 저리 돌리면 저리 돌아가는 공처럼 굴러다녔다.
그런데 지금 지영이 그랬다.
굴리면 굴리는 대로, 데굴데굴 굴렀다. 하도 굴러다녀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지영아. 우리 굳히기 이렇게 못했었냐?”
“우리가 못하는 게 아니라, 야나기 쟤들이 진짜 잘하는 거야.”
“그지? 와, 나 현타 올 뻔했다니까?”
“난 왔어…….”
60㎏ 선수한테 눌렸을 때의 그 기분은 진짜…… 하.
그런데 그런 지영의 앞에, 선수 하나가 다가왔다.
“어우야.”
“…….”
이성진이 고개를 돌리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왜? 다가온 사람이 안자이 히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영을 바라보며 또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의사 표현은 명확했다. 한판 잡아달라는 뜻. 지영은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선수들이 지독히도 강하다면, 차라리 여자 선수들부터 차근차근해 나가는 게 낫다.
너무 갭이 큰 실력 차이는 오히려 훈련에 도움이 안 될 때도 있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비슷한 상대와 붙어서 실력을 올리는 게 나았다. 그런 마음으로 안자이 히카리에 네 번째 판을 들어간 지영은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깨달았다.
여자와 남자.
동 체급의 선수들이 붙으면 남자가 당연히 유리하다.
이는 굳히기라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여자가 주짓수 검빨이거나, 레드 벨트고, 남자가 이제 겨우 초심자를 벗어난 정도인 화이트에서 블루라면? 이건 결과를 굳이 예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동 체급이라면, 아마 열에 최소 여덟에서 아홉은 여자 선수가 이길 거라고 할 거다.
안자이 히카리가 그랬다.
그녀는 대단한 테크니션이었다.
특히 반쯤 누운 V자 자세에서 다리로 상대의 골반을 받쳐서 방어하는 기술이 기가 막혔다. 지영이 힘으로 뚫고 들어가려고 해도 브릿지로 튕겨내거나 어깨를 빼내면서 거리를 벌렸고, 발을 정말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전진을 막았다.
힘은 분명 지영이 위였지만 거리를 쉽게 좁히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굳히기 자세에서는 무턱대고 팔을 뻗을 수도 없었다. 무턱대고 손을 뻗으면 뱀처럼 손을 휘감아 넣고 목, 어깨, 아니면 허벅지를 지지대 삼아 꺾기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히카리가 여자라서 가슴 깃을 잡기가 애매했다. 물론 선수들은 어느 정도의 터치는 그냥 넘어가지만 지영이 불편했다. 그래서 복부를 팔뚝으로 체중을 실어 찍어 누른 다음 위로 손을 쭉 뻗었는데 그 순간 어깨를 빼더니 지영의 팔을 대번에 휘감았다. 그리고 몸을 도로 비틀더니 허벅지로 지영의 목을 휘감아 쭉 당겼다.
순식간에 팔 가로누워 꺾기 포지션을 잡는 히카리.
지영은 후, 한숨을 내쉬면서 히카리쪽의 어깨를 뽑았다. 여기서 뽑는다는 건 연골에서 뼈를 뽑는 게 아니라,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려 남은 공간으로 어깨를 빼내는 걸 말했다. 그러자 지영의 몸이 어느 정도 옆으로 틀어져서 꺾기 포지션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역시, 테크니션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손을 짚고 몸을 붕 띄워 지영의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허벅지에 감겨 있던 팔 때문에 다시 몸이 도로 뒤집혔다. 그대로 변형 곁누르기 포지션.
‘와…….’
이건 생각도 못 했다.
히카리의 체중은 상당하다.
그녀는 –70을 뛰는 선수다. 그렇다면 비시즌인 지금 체중이 그것보다도 위다. 그런데 뭔 깃털보다 가볍게 체중을 건너편으로 옮기는데, 이걸 지영은 아예 예상도 못 했다. 하지만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지영은 브릿지로 바로 히키라를 튕겨냈다. 변형 곁누르기 포지션이라 밀착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라 히카리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밀려 나갔다. 이쯤 되면 이제,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지영은 어깨를 뺀 뒤에, 몸을 틀어서 역으로 허벅지로 히카리의 얼굴을 감아 당겼다.
이번엔 지영의 팔 가로누워 꺾기 포지션. 그러나 미처 팔을 고쳐 잡기도 전에 브릿지로 허리를 튕기더니 몸을 뒤집어 지영의 위로 올라탔다.
그래서 그녀의 머리가 지영의 하복부 쪽으로 내려왔지만 이런 건 양쪽 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영은 몸을 다시 빼서 엎드렸다. 그러자 위에서 빙글 돌아 지영의 위로 올라온 히카리는 곧장 목깃과 허리띠를 잡아 툭 채서 끌어 올렸다. 그다음 그 사이로 발을 집어넣어 조인 다음 대각으로 굴러버리니 버틴다고 버텼는데도 몸이 끌려갔다.
‘이건 뭐 곰 인형도 아니고…….’
인형을 좋아하는 여자가 인형을 끌어안으며 침대에 눕는 모양새. 지금 지영의 꼬라지가 딱 그 품에 안긴 곰 인형이었다.
다리로 지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히카리의 손이 목으로 들어왔다.
하…….
조르기 포지션으로 가는 거다.
‘얼씨구……?’
이건, 선을 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에게 졸려가면, 이건 지영의 유도 사에 길이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 될 거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리고 평생 놀림감으로 따라다니겠지…….’
그러니, 절대로 졸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지영은 턱을 바짝 당겼고, 목으로 들어오는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붙였다. 그러곤 마치 아기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몸을 말고 버텼다. 그리고 다행히 그렇게 시간이 지나 타이머가 삐이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타이머가 울리는 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기는 정말,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