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77화
77화. 야나기가우라(5)
아쉽다.
신지를 이기지 못한 게 아쉬워서가 아니라, 운동이 끝날 때까지 이노우에 코세이를 잡지 못해 아쉬웠다. 그는 신지와 딱 붙어 있었고, 처음 스트레칭을 빼면 몸을 풀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영은 운동을 할 의사가 없는 이노우에 코세이에게 가서 잡아달라고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에게 갈 겨를이 없었다.
야나기의 66, 73, 81 선수들이 지영에게 찾아와 잡아달라고 했고, 비봉이나 우석, 원광의 선수들까지 몰려와 그걸 뿌리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 선수들을 잡아주냐고, 결국 끝날 때까지 그쪽으로는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응?”
“아냐. 맞다, 아까 신지 잡아봤지? 어땠냐?”
“신지? 잘하던데?”
비봉과의 연습 시합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저도 모르게 한 혼잣말에 근처에 있던 임효중이 바로 반응했다. 그래서 지영은 화제를 얼른 돌렸다.
“이겼냐?”
“아니, 비겼어. 어후, 하도 시달리다가 막판에 잡아서 힘이 좀 없었거든. 잘하긴 하는데, 내 기준에서는 못 넘길 정도는 아니야.”
“…….”
지영은 그럴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모토 신지가 실력자인 건 당연히 인정이다. 실력으로 따지면 아마 자신과 비슷할 거다. 하지만 임효중과는 또 다르다. 일단 체중, 신장, 리치, 힘까지 차이가 난다. 비슷한 건 아마 기술 정도고. 시합 운용 또한 임효중도 만만치 않아서 신지는 분명 고전했을 거다. 반대로 임효중은 좀 여유가 있었을 거고.
선수들이 한 체급을 올릴 때 걱정하는 게 다 저런 부분이다. 73에서는 힘이 좋다고 떵떵거려도, 81로 올라가면 그냥 아주 평범한 수준으로 뚝 떨어지니까 말이다.
그러니 신지가 아무리 날고 기었어도, 임효중을 상대로 우위를 잡기는 힘들었을 거다.
“이성진은 뻥뻥 날았다.”
“야!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
황석의 조용한 말에 앞서 식당으로 걷던 이성진이 발끈했다.
그 말처럼 이성진도 신지와 잡았는데, 두 바퀴나 돌았다. 그래도 이성진은 이성진이라, 업어치기 한판을 만회하긴 했다만 시합이었으면 먼저 한판 돌아간 이성진의 패배였다.
“내가 내일 무조건 복수한다!”
“쉽지 않겠던데?”
“야, 내가 방심만 안 했어도 처음에 한판 안 뺏겼거든?”
“마지막에 한판 넘어간 것도 다치지 않으려고 힘 풀어서 넘어간 거던데? 애매하게 기술 걸려서.”
“……너 뭐야. 너 누구야! 너 황석 아니지!”
평소 이런 놀림은 잘하지 않는 황석이라 이성진이 정체를 불라며 난리를 부렸지만 분위기는 조금도 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오랜만에 땀을 쫙 빼고, 자유 연습도 넉넉하게 해서 기분이 좋은 탓이었다.
가는 길에 바로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각자 식판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아 앉아서, 허기가 많이 져 허겁지겁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같이 땀을 많이 뺀 날은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밥과 반찬을 처음처럼 다시 퍼와 반쯤 먹고 나서야 첫 대화가 시작됐다.
“비봉은 올해 체급별 단체전은 힘들겠던데?”
임효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중량급은 좀 하는데, 경량급이 너무 약해.”
“중량급도 그 정도면 애매한 거야. 보니까 우리 신입생 애들 들어오면 걔들한테도 안 되겠던데 뭐.”
황석의 말을 강한결이 냉정하게 수정했다.
“맞아. 애매하지 그 정도면, 나 오늘 비봉 중량급 주전들 전부 한판 띄웠다. 나한테 돌아갔으면 말다 한 거지 뭐.”
이성진이 그랬다면 그런 거다.
그리고 이성진에게 돌아갔으면 체면 제대로 구긴 거고, 그게 진짜 실력이면 솔직히…… 답이 없는 거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지영이 다른 학교 이름을 입에 담았다.
“비봉보단, 우석이 더 세겠어. 팀 밸런스가 좋아. 그리고 거의 1, 2학년이고. 올해는 힘들어도 내년엔 강팀 되겠던데.”
“오, 맞아. 우석 이제 신입생 애들이 특히 좋더라.”
우석고.
전주에 있는 학교로, 옛날부터 강팀이었다. 언제나 준수한 성적을 내는 학교. 황금세대나 장대호 같은 천재는 없지만 이대로 성장하면 결승까지 올 실력들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전 체급에 그런 선수가 있다 보니, 단체전에도 분명 강세를 보일 게 분명했다. 이런 선수들은 전부 주의했다.
함께 연습은 하고 있지만 겨울 비시즌 전지훈련은 전력 탐색의 의미도 강했다. 그 학교들이 연희고에 온 건, 다섯 체급의 최강자가 이 학교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들을 넘지 않고서는 정상에 서는 건 불가능했다.
황금세대가 실수로 지거나, 시합에 출전 자체를 안 하는 경우를 빼면 말이다.
그러니 이번 전지훈련에 최대한 전력을 탐색해 갈 거다. 그런데 반대로 이건 연희고도 마찬가지였다.
임대성 코치는 다각도에 카메라를 설치했고, 그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유망주, 요주의 선수들의 데이트를 뽑아내는 귀중한 자료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잡아보면서 전력을 추려보는 건 아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원광은?”
강한결의 물음에 다들 고민하다가, 답을 내놓았다.
“원광은 적어도 우리 졸업 전까진 힘들겠던데?”
“동감. 약해.”
임효중과, 이성진의 냉정한 평가였고 황석과 지영은 그 말에 지극히 동의해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광은…… 아쉽게도 약했다. 전체 선수를 잡아본 건 아니지만 오늘 잡아본 선수들의 평가를 내려본다면, 전국대회로 쳤을 때 딱 16강에서 겨우 8강 수준이다.
4강이 입상권이니,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은 입상이 힘들다는 뜻이었다.
“보성이나 경민, 부산체고와 비교하면 우석만 겨우 비빌 정도고, 원광은 적어도 한 수 이상 아래네, 그럼.”
“그렇지.”
비봉은?
여긴 무차별에 두각을 나타내긴 할 거고, 일단 괴물 장대호가 있어서 판단 보류다.
이런 선수가 있는 팀은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야나기는 어때?”
“신경 쓸 필요 있나? 어차피 일본 팀인데.”
“아, 그러네.”
이성진과 임효중의 대화를 끝으로 식사는 마무리됐다. 식판을 가져다 놓고, 숙소로 올라온 지영은 일단 씻고 나와서 폰을 확인했다. 머리를 털면서 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영은 의외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번호를 교환했지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소담의 부재중 전화 때문이었다.
지영은 전화를 걸까 하다가 진짜 용무가 있으면 다시 하겠지, 하는 생각에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대신 무슨 일이야? 하고 톡을 보내놓았다. 그리고 다시 메시지 확인. 별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3일의 시간을 준다고 했던 이선영도 연락이 없었다.
“뭘 맡고 있어서 바쁘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3일이 되면 연락 주겠지.”
머리를 대충 말리고 노트북 앞에 앉은 지영은 이선영이 제안을 거절했을 때를 대비하기로 했다. 지영이 건드리려는 코인은 JB코인에 대한 정보가 몇 개 더 떠올랐다. 일본의 집요함. 아까 훈련 때 잠깐 생각했던 이 집요함이란 단어에서 떠오른 건데, 애초에 이 코인이 폭풍처럼 성장하게 된 계기에는 일본 정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음모론이 있었다.
비트코인처럼 만들기 위해서, 코인을 강제로 조작한 거다.
그것도 정부 차원에서.
애초에 올림픽 때도 가상화폐를 현금처럼 사용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던 게 일본이었다. 그러니 자국 정부의 의지가 통하는 코인을 비트코인처럼 키워놓으면, 그 수익과 이용처는 무궁무진하리라, 라는 음모론이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했다, 라고 했던 것도 떠올랐다.
물론 음모론이지만, 정부가 개입했다는 말이 있던 만큼 성장은 폭발적이었다. 정육점 주인아저씨 아들은 그때 진짜 운 좋게 탑승해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됐다.
“놓치기엔 기회가 너무 아깝지.”
그러니 반드시 이용해 먹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스텝이 이선영이다. 자신이 가진 베가 제약 주식을 담보로 한 코인 투자라 그녀가 거절하면 자금을 확보할 곳이 마땅치 않아진다.
“어머니한텐 절대 말 못 하지…….”
지영이 운동을 안 하고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며 또 혼자 밤새 끙끙 앓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런 걱정을 안기느니, 최악의 경우 그냥 포기하는 게 낫다. 진짜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지영은 베가 제약 주식을 처분할 계획도 세웠다.
그 경우 문제는, 김지영 여사님이다.
위탁관리를 해주시고 계셔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베가 제약 주식을 매도해 달라고 하면 분명 이유를 물어보실 게 빤했다. 그럼 지영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건 또 내키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코인으로 갈아타게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정말 만약 어쩔 수 없다면…… 주식 매도가 최후의 답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아직 민증도 나오지 않은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주식 매도가 정답이었다. 대출도 힘들고, 그렇다고 일수나 사채를 쓸 수도 없지 않은가. 애초에 그런 쪽은 아예 엮이지도 않는 게 답이었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주식 매각으로 방향을 잡았다.
똑똑.
“지영아. 들어가도 돼?”
우직한 목소리.
황석이다.
“어, 들어와.”
대답 뒤에야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황석.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머리에 물기가 가득하다. 듬직한 체격에 정말 남자다운 느낌을 주는 외모라, 가끔 부럽기도 했다. 자신의 외모는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한 ‘애매한’ 얼굴이라서 말이다.
“무슨 일이야?”
“그냥, 뭐 하나 해…… 코인? 코인 하게?”
“어? 아, 이거. 아니야, 아무것도.”
지영은 노트북 창으로 열어뒀던 JB코인 기사 창을 슬그머니 닫았다. 그러자 어울리지 않게 눈을 찢는 황석.
“다시 예전 강지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내가? 내가 뭐?”
“속내 숨기기.”
“…….”
이런 귀신같은 놈.
“그런 거 아냐. 그냥 어쩌다 열린 거야.”
“표정이 순도 100%짜리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내 얼굴에 그런 것도 있어?”
“응. 우리는 알 수 있는 거, 짓, 말, 이라고 쓰여 있어.”
피식.
황석이 이런 말도 하고, 얘도 조금씩 변하려나 보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그냥 들어와 본 거야. 진짜 뭐 하나 해서.”
아, 그럼 진짜 그냥 들어온 거다.
이렇게 물었는데도 얘기를 안 할 친구는 아니니까 말이다.
“야간은 뭐 할 거야?”
“새벽에 못 뛰었으니까 가볍게 러닝 하려고. 왜?”
“그냥 같이하게. 이따 8시에 할 거지?”
“응.”
“그래, 그때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나가는 황석.
뭐지?
무슨 고민이 있나? 그런데 얼굴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얼굴에 뭐가 쓰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더 드러나는 건 황금세대 중에서도 황석이 제일 심했다. 그런데 시원한 표정을 보니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라고 이때까진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지영은 침대에 누워서 잠시 쉬었다.
그리고 7시 40분쯤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다들 나갈 준비가 끝나 있었다. 임효중과 강한결, 이성진은 도복을 챙긴 걸 보니 기술연구를 할 생각인 것 같았고 황석만 지영처럼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셋은 체육관으로 가고, 지영은 황석과 함께 준비운동을 하고 트랙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바퀴를 걷는 동안 황석은 말이 없었다. 지영은 그제야 황석이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뭐야, 무슨 일 있지, 너?”
“지영아.”
“응?”
“은정이 부모님, 사기당하셨대.”
“……어?”
사기?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아니, 회귀 전엔 그런…….’
아니지, 잠깐.
그때, 이 시기의 지영은 한은정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이미 강지영이란 인간의 영혼에 금이 쩍쩍 가버려서, 한은정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고 살았다. 면회를 오긴 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그러니 은정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나는 모르는 거지.’
그리고 나중에라도 누가 이걸 자신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더더욱 모르는 거고. 예상은 꽤 된다.
‘맞아. 석이나 은정이나 날 배려한다고 그런 얘기를 했을 리가 없어.’
가장 어둠에 빠져 있던 건 자신이었다.
실의에 빠진 것 이상을 넘어서, 혼이 나간 인간마냥 있었으니 그런 자신에게 우리 집 사기당했대, 은정이네 부모님 사기당하셨대 같은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 주식 팔아서 은정이 도와주려고.”
“…….”
“주식 기회는 지영이 네가 준 거잖아. 그래서 허락은 맡아야 할 것 같아서.”
“…….”
“그래도 되지?”
그래도 되냐고?
된다.
한은정이니까 당연히 된다.
당연히 되는데…….
“아니.”
지영은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