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76화
76화. 야나기가우라(4)
이노우에 코세이는 몸을 풀었지만 자유 연습을 하러 나오지는 않았다.
그의 유도를 좀 보고 싶었는데, 이건 좀 아쉬웠다. 그때 다가오는 신지.
“다음 판 잡았어?”
“아니, 다음 판 할까?”
“응. 하자. 다음 판.”
“그래.”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판에나 잡자고 할 줄 알았는데 벌써 잡자니, 이건 좀 의외였다. 하지만 언제 잡든 그건 상관없었다.
신지를 잡는다는 게 중요했다.
그에 지영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아직 뭉친 아귀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사루의 힘이 워낙에 좋아서 고작 5분인데도 뻐근함이 남아 있었다. 설렁설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고, 어느 정도는 최선을 다해서 찾아온 후유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게 아쉽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이 정도는 훈련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줄 수 없었다. 5분 게임. 집중하면 충분히 관리하면서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사루는 어때?”
“잘하던데? 지금 당장 한국에 와도 1위는 할 수 있겠어.”
경민의 천재, 이우진과 비교하면 둘은 거의 비슷하다.
둘 다 잡아본 지영이 1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긴다면, 이우진이 9고 마사루도 9다. 즉,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뜻. 하필이면 상대가 지영이고, 신지였기 때문에 둘은 그런 천재성을 지니고도 1등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뒤에 가려진 살리에리.
둘은 그런 포지션이었다.
“저 친구도 잘하네. 지영 네 친구지?”
“누구? 아, 효중이? 응. 내 친구야.”
홰액!
이번에도 야나기 선수를 잡은 임효중이 맞잡은 상태인데도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다음, 그대로 찍어 허벅다리로 상대를 시원하게 메쳤다. 얼마나 시원하게 넘어가는지, 막혔던 속이 뻥 뚫릴 것 같은 시원한 허벅다리였다.
“다음에 잡아봐야겠다.”
“해봐. 재밌을 거야.”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더 기대되네.”
재미는 있을 거다.
그리고 아마 정신이 번쩍 들 거다.
임효중은 이상하게도 잡아보면 해볼 만한데? 이런 느낌을 주는 선수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받는다고 해도 임효중을 이긴 선수는 정말이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뭔가 만만한데, 안 넘어가지.’
황금세대 전체 중에서도 중심 하나만큼은 최고인 게 임효중이었다.
중심, 밸런스가 좋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기술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임효중은 좌와 우, 양쪽을 똑같이 허벅다리를 찰 수 있었다.
그래서 임효중을 잡고 얕잡아보던 선수들은 모두 하늘을 시원시원하게 날았다. 아마 신지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신지는 지영이 인정한 천재. 아니, 황금세대 전체가 인정한 천재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재능이지만 피지컬에서 차이가 나니, 아마 상대가 절대로 쉽지 않을 거다.
일본 땅이 아마도 좁았을 신지.
그리고 한국 땅이 좁은 황금세대.
대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삐이이!
타이머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연습 중이던 선수들이 멈추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들과 교차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지영. 그런 지영의 앞엔 당연히 미야모토 신지가 있었다.
지영은 다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5분 동안 그래도 뭉쳤던 아귀가 많이 풀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5분 연습을 할 만하다. 임대성 코치가 시간을 재조정하고, 선수들이 준비가 됐는지를 확인한 뒤에 타이머를 눌렀다.
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연습이 시작됐다.
그 짧은 틈에 눈앞에 있던 신지의 기세는 이미 변해 있었다. 경기장 밖에서는 세상 밝던 신지는 어느새 오만한 천재로 돌변한 채로 지영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신지는 오른쪽 자세다. 하지만 신지에게 자세는 의미가 없었다. 어느 쪽으로 서던 정상급 선수처럼 기술을 걸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건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선수에 맞춰 자세를 바꾸는 건 두 선수 다 똑같이 할 줄은 알지만 시작은 그래도 주력 자세로 섰다. 그래서 신지는 오른쪽, 지영은 왼쪽 자세였다.
신기하게도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원광, 우석, 그리고 비봉의 코치들과 선수들. 그리고 저쪽에 아직 무리에 합류하지 않은 이노우에 코세이와 밖에서 대기 중인 중량급 선수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일본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 미야모토 신지.
본래 한국에서까지 그렇게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지영의 시합 영상으로 이제는 웬만한 고등부 유도 선수들도 전부 아는 선수가 됐다. 그리고 그런 미야모토 신지를 상대하는 건 바로 지영이다.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 강지영.
이 두 선수의 격돌은 아무리 연습이라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툭.
그런 시선은 신지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선 때문에 집중을 못 하는 성격들은 아니라 차분하게 잡기 싸움 뒤 예전에 시합 때처럼 서로 가슴 깃과 어깨 깃을 내준 뒤 탐색전에 들어갔다. 마사루와는 다르게 힘에서는 거의 동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사루보다 해볼 만하다는 건 아니다.
기술은 물론이고 시합을 풀어가는 것 자체가 일단 마사루와는 급이 달랐다. 방심하면 언제고 한판을 던질 수 있는 선수.
그러니 방심 그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선수.
그래서 지영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상태였다.
툭, 툭툭.
가슴 깃을 툭툭 쳐서 모두걸기.
발이 움직이는 그 찰나를 노리는 모두걸기. 그 모두걸기에 아주 조금이지만 지영의 중심이 흔들렸다.
역시 타이밍이 좋다.
보통 선수들은 그냥 배운 대로만 해서, 기술이 들어와도 아예 몸이 움직이지도 않을 때가 있는데 신지는 정확하게 발이 움직이는 순간을 노려서 모두걸기를 걸었다. 전부 그 정도는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이렇게 적당히, 중심 흔들기용 기술로 상대를 흔들 수 있는 건 경지에 오른 선수들이나 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서 연결로……. 업어치기. 지영의 중심이 잠시지만 흐트러진 걸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영은 신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순간 자세를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리면서 낮췄다. 그러곤 오른발을 쭉 뻗어 매트를 단단하게 지탱했다. 여기서 당겨가거나, 밀리면 그대로 넘어간다.
업어치기는 상대를 앞으로 넘긴다고 생각하지만, 바짝 붙은 상태에서 상대가 버티면 옆으로 밀어서 넘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일단은 등에 실렸을 때의 얘기다.
지영이 처음에 납작 엎드린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일단 업히면 신지는 어떻게든 지영을 넘길 실력자다. 그래서 지영은 등에 업히지 않고 어깨를 신지의 옆으로 비집어 넣어 미는 것도, 굴러서 던지는 것도 막았다.
그리고 역시 신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태세를 바꿔 지영을 강하게 밀어왔다. 그래서 지영은 아예 안쪽으로 파고들어 납작 엎드렸다. 이미 기술을 막는 입장에서 괜히 객기부리면서 까불다가는 그냥 그대로 밀려서 등이 매트에 닿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방어는, 적당히란 게 없다.
어설프게 방어했다가는 시원시원하게 하늘을 나는 게, 발 유도다.
결국 지영의 방어에 기술은 무위로 돌아갔다.
다시 일어난 신지의 눈빛은 정말이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이거지, 이런 게 유도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히카리도 잘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진짜 긴장했어야 할 정도로.
마사루도 잘했다.
일본의 정통 유도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줬을 정도로.
신지는 달랐다.
그냥 이 인간은, 자신과 비슷했다.
그래서 재밌었다.
강자와의 시합이 목마름을 느끼는 지영에게, 지금 이 순간 신지의 존재는 축복이었다.
갈증을 날려준 오아시스이기도 했다.
이번엔 지영이 먼저 움직였다.
좀 전에는 유효 공격을 빼앗긴 거다. 언제나 시합에 임하는 자세로 본다면, 여기서 한 번 더 기술을 받거나 밀리면 무조건 지도다. 지영이 마사루에게 썼던 전술과 같은 걸 들고 왔다면 신지는 이번에 무조건 강하게 밀고 나올 거다.
그래서 그런 신지보다 더 강하게 움직여야 한다.
먼저 지도를 뺏기는 건 시합 전체의 흐름을 생각하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엔 공격적으로. 방어 유도는 잠시 버려야 할 때다.
지영이 공세로 나오자 이번엔 신지가 잠시 버티다가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맞받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지영의 신장과 리치를 생각하면 그게 좋은 판단이 아니라는 걸 그 짧은 순간 깨달은 것 같았다. 지영의 팔은 길다. 지영이 가슴 깃을 내주고도 너무 수월하게 어깨, 등판 깃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이 긴 리치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도에서도 팔이 긴 건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만약 지영이 가슴 깃을 잡고, 상대가 못 들어오게 막으면 팔이 짧은 선수들은 지영의 가슴 깃에 손도 가져다 댈 수 없었다. 그 정도의 차이가 나게 만드는 게 바로 지영의 긴 리치다. 그래서 지영은 이번엔 어깨가 아닌 가슴 깃을 잡았다. 그리고 툭. 신지가 했던 것처럼 툭. 뒤로 물러나면서 가슴 깃을 털었다.
그러자 움찔하며 지영의 손을 뜯어내려고 하지만, 지영의 악력은 잡고 있던 도복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걸 찬스로 여긴 지영이 갑자기 파고들며 오른손을 쭉 뻗었다. 목표는 소매가 아니다.
바로 반대쪽 가슴 깃.
유도에서는 양 소매 깃을 잡는 것도, 양 가슴 깃을 잡는 것도 반칙이다.
하지만 잡자마자 반칙은 아니고, 그 상태로 계속 잡고 있으면 반칙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한 10초 정도?
하지만 바꿔 말하면 10초의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지영은 도복을 잡자마자 다시 스텝을 뒤로 뺐다. 그리고 빠지는 척하며 안다리. 양 가슴 깃을 다 잡고 있으니 신지는 속절없이 끌려왔다. 하지만 안다리는 다리를 슬쩍 들어 가볍게 피했다. 물론, 안다리가 목적이 아니었다. 지영은 이렇게 다리를 들기를 바랐으니까.
원을 그리며 안다리를 쓸었던 왼발이 멈추며 다시 매트를 찍고, 오른발이 뒤로 회전했다.
그리고 허리후리기.
파앙!
도복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시원하게 찼다.
하지만 역시 신지는 신지다.
그 짧은 틈에 지영의 의도를 읽고는 오히려 지영의 뒤로 바짝 붙어서 허리후리기 각에서 빠져나간 뒤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지영은 왼손을 목 뒤로 넣어서 되는 대로 잡은 뒤, 그대로 감아치기로 변형했다.
감아치기는 허리후리기와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건, 기술을 걸 때 아예 앞으로 엎어지듯이 넘어가며 상대를 감아 던지는 기술이다. 그래서 보통은 헤비급에서 체중을 이용해 자주 쓰는 기술이기도 했다.
일단 말려가면 데굴! 아무리 용을 써도 막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경량급에서는 안 쓴다는 얘기는 아니다. 실제로 주력으로 쓰는 선수도 있다. 하지만 경량급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 이유는 체중으로 감을 정도로 걸어도, 워낙에 재빠르니 그 각에서 빠져나가는 게 헤비급보다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지도 빠져나갔다.
감기기 전에 지영의 어깨를 앞으로 쭉 민 다음, 발로 매트를 찍어 강하게 저항했다.
이렇게 방어 자세에 들어가면 무릎이 아작 나지 않는 이상은 웬만해선 던지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영은 힘을 풀었다. 이런 자세에서 억지로 힘을 주면, 기술을 건 지영이나 신지나 둘 다 부상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기는 게 목적이라지만, 신지나 자신의 몸이 상하면서까지 승리하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다시 일어난 두 사람.
생각은 멎었다.
이성은 살아 있지만, 서로 상대에 집중하는 모드로 들어섰다.
다시 맞붙는다.
서로 원하는 깃을 잡고, 끌고 당겨서 기술을 건다.
머리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완벽한 허벅다리.
지영의 몸이 붕 뜨긴 하지만 시합 때처럼 도복을 끊어서 기술을 피했고, 지영의 허벅다리를 신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피했다.
신지가 기술을 걸면 지영은 방어하고, 지영이 기술을 걸면 신지가 방어하고.
둘은 계속해서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신들린 것처럼 보였다. 워낙에 치열해서 마치 합을 맞춘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이렇게 부른다.
무아지경.
그런 두 사람의 무아지경은 주변의 시선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일본의 천재와 한국의 천재가 맞붙으니 안 그래도 시선이 궁금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신들린 모습을 보여주니 더더욱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술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삐이이! 소리에 멈췄다.
“훅, 후욱. 후욱.”
“하아, 하아, 후우우…….”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숨을 몰아쉬는 지영과 신지.
그런 상태로 서로를 보던 둘은 어느 순간 웃었다. 만족스러운 대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곤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려 매트 밖으로 나갔다.
결과?
승부는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