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69화
69화. 예능 촬영(4)
저녁은 제주도 흑돼지 바비큐였다.
제주도 흑돼지와 제주도에 여행온 사람들이 90% 먹고 싶은 품목에 넣는다는 대왕 은갈치 구이였다. 물론 그것 말고도 소라를 포함해 해산물도 잔뜩 사 왔다. 그리고 양이 진짜 엄청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놀랍게도, 장세리가 사비로 사 왔다.
고생한 운동부 후배들 마음껏, 양껏 먹게 해주고 싶다고 개인카드로 결제를 해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저녁은 먹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한유진이 옆에서 하나씩 전부 챙겨줘서 지영은 정말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잘 챙겨주는 예쁜 누나. 그런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다시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지영은 이번엔 조용히 빠져나와 바다로 향했다. 제주도의 밤바다. 열일곱. 아니, 이제 열여덟의 감성으로 특별함을 느끼기는 힘들지만 지영은 스물여덟의 정신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힘들었던 기억도 가지고 있어서, 새까만 바다가 주는 마력에 잠깐이지만 흠뻑 취할 정도로 젖었다.
어둠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지영은 일부로 전등이 없는 곳으로 갔기 때문에 더욱 주변이 어두컴컴해 그런 느낌이 한층 강했다.
지영은 그 바다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냥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 평소에도 혼자만의 시간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이런 장소에서, 이런 공간에서 가지는 시간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사색이란 사치.
어차피 여기 온 것 자체가 사치를 부리는 거니까 즐기고 싶은 것, 느끼고 싶은 걸 전부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1시간쯤 시간을 보내니, 몸이 살짝 으슬으슬해졌다. 제대로 차려입고 왔지만 밤바다의 바람과 추위는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괜히 여기서 더 버티다가 감기라도 들리면 사치는커녕 손해만 보는 일이 생길 수 있어 시간도 잘 보냈겠다, 지영은 일어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자 마당은 이미 준비로 한창이었다.
“어? 어디 갔다 왔어요?”
메인 연출인 반은영 PD가 슬그머니 들어오는 지영을 보며 물어왔다.
“바다에 잠깐 갔다 왔어요. 소화 좀 시키고 싶어서.”
“아 그래요? 말하고 가지…….”
정말 아쉽다는 표정으로 반은영이 한 대답에 지영은 그냥 하하…… 하고 짧게 웃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그럼 일단 지영 씨부터 인터뷰할까요?”
“인터뷰요? 네, 그래요. 아 근데 말 편하게 해주세요, 이제.”
“음, 그래도 될까요?”
“네. 편하게 해주세요.”
“음, 그래. 알았어. 그럼 저기서 불 쬐면서 잠깐만 기다릴래? 모닥불만 피우면 세팅 끝나거든.”
“네.”
지영은 얌전히 대답하고 한쪽 드럼통에서 불을 쬐며 제작진이 움직이는 걸 구경했다.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시청률이 제법 나와 그런지 장비들이 정말 엄청 많았다. 일주일에 하루 촬영을 위해, 인력이 수십 명이나 동원된다.
지영이 보기에 적어도 60명은 넘어 보이는 인원이 방송을 위해 전부 움직이고 있는데, 그게 정말 고생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한다.
‘몇 사람을 위해 수십 명이 움직이는 아주 비효율적인 구조.’
이런 게 방송이구나.
그런 방송에서 자신들을 찍기 위해 그렇게 많이 움직였다는 게 지금은 신기한 마음보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반대로 그래서 이번 촬영만큼은 최선을 다해야겠단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대충 시간을 보내다가 가는 건 정말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준비가 끝나고, 반은영 PD가 다시 다가왔다.
“지영 군? 저기 옆에 가서 앉으면 돼요.”
“네.”
반은영이 말한 곳으로 가서 앉은 지영은 자신을 전부 찍는 카메라에 살짝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한두 대가 아니라 마당에 있던 카메라가 다각도에서 자신을 찍고 있으니, 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지영에게 임수진이 다가왔다.
“머리만 조금 손질하면 되겠네요. 가만히 있어봐요.”
“네.”
섬세한 손길로 다시 바람에 흔들렸던 지영의 머리를 차분히 고정해 준 임수진이 빠지고, 반은영이 대본을 살펴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큼큼, 저번 대회 금메달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힘들었는데, 마지막에 그래도 운이 좋았어요.”
인터뷰계의 왕도, 바로 운이 좋았어요.
모든 난감한 질문에 무난하게 답할 수 있는 마법 같은 대답이었다.
“따로 조사해 봤는데, 지영 군이 이렇게 고전한 시합은 처음이라고들 입을 모아 말했어요. 사실인가요?”
오호.
인터뷰가 신선하다.
지영은 솔직히 여기 와서 어떠세요? 선배님들 만난 느낌은요? 예능은 처음인데 기분이 어때요? 이런 걸 물을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왔다. 아마, 굳이 다른 매체에서 하지 않아도 되게, 질문 자체를 엄청 세심하게 준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인터뷰가 짧지는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네, 정말 고전했어요. 미야모토 신지는 저보다 한 살 많은데 실력이 진짜 엄청났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신지 선수를 이겼어요. 이겼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요?”
“음, 좋았겠죠? 그냥 이겨서 좋았어요. 그런 시합을 해서 좋기도 했는데, 그 시합에서 이겨서 더욱 기분이 좋았어요.”
반짝.
반은영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돈다.
뭔가 함정에 빠진 느낌이다. 하지만 지영은 긴장하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이 사람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사악한 느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의적인 편집, 혹은 질문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국내에서는 그런 시합을 하기 힘든가요?”
이건 천재성에 대해 묻는 말.
이 정도로는 곤란하진 않았다. 오늘 하루 대접받는 느낌도 있었고, 지영은 원하는 답을 주기로 했다.
“네. 조금 그렇죠?”
건방진 느낌의 대답이라 처음에 운이 좋았다고 했던 대답과 너무 반대되지만, 지영은 그냥 지금부턴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젊음의 상징인 패기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영이 연예인이었다면 욕을 퍼먹겠지만, 연예인이 아닌 운동선수다. 자신감과 패기가 장착되어 있어야 하는. 이 정도 모습은 괜찮을 거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보다 훨씬 더한 대답을 한 선수들도 수두룩했다.
“지영 씨가 한국에서도 좀 더 큰 무대인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면 해결이 될 문제라고 하던데, 그러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네. 지금은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요.”
“아 학업. 그러고 보니 성적도 정말 만만치 않죠. 그럼 내년 아시안게임은 포기하는 건가요?”
“네. 대신 대학에 들어가면 좀 더 유도에 집중할 생각이에요.”
“그 말은 올림픽은 노리겠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네. 올림픽은 최선을 다해 출전할 생각입니다.”
어느 매체에서도 하지 않았던 속마음 인터뷰.
아마 자신뿐만이 아닌 다른 친구들도 이런 인터뷰를 할 거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이미 얘기가 끝났기 때문에 누구의 입에서도 다른 얘기가 나오진 않을 거다.
“그렇군요. 대답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질문 몇 개만 더 할게요.”
“네, 그러세요.”
“일단 처음은, 우리 ‘좀 노는 언니들’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운동에 대한 질문은 몇 개로 짧게 간추렸다.
하지만 필요한 건 전부 얻었는지 반은영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 반은영을 보며 지영은 생각해 뒀던 답을 꺼냈다.
“일단 아까 유진 누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이 프로그램의 팬이거든요. 친구들이 유일하게 챙겨보는 방송이 예능 몇 개랑 음악방송인데, 그 예능 몇 개 중에 이 프로그램이 있어요.”
“…….”
한 템포 쉬고.
“특히 한결이가 장세리 선배님 팬이고, 다른 친구들도 이 프로그램을 좋아해요. 그게 제안이 왔다는 걸 봤을 때 거절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해요. 덕분에 제주도도 오고. 맛있는 것도 먹고. 무엇보다 존경하는 선배님들을 뵐 수 있어서요.”
이건 진심이었다.
제주도에 시합 때문에 한 번 온 적은 있어도, 그 외에 방문은 처음이었다. 시합 때 왔을 때도 스케줄 문제로 금방 다시 돌아가서 관광은커녕 주변 명소 한 군데를 못 갔었다. 그래서 그것도 고맙고, 그리고 예능인데도 부담스럽지 않게 배려해 준 것도 고마웠다.
그리고 그중 고마운 건 역시 선배님들과의 만남이었다.
한유진도 한유진이지만 장세리는 지영과 친구들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틈틈이 컨디션을 유지하는 법, 멘탈 관리법 등등, 정말 아끼지 않고 조언을 해줬다. 그런 모습이야 장세리가 많은 선수들에게 해줬던 말이지만, TV로 듣는 것과 직접 얼굴 보고 듣는 건 역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불러주신 것에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지영의 진심을 담은 인사에 제작진이 푸근하게 웃었다.
마치 고놈 자식 잘 컸네, 하는 표정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지영보다는 적어도 다섯 살은 기본으로 많으니 동생 같은 느낌도 받는 것 같았다. 좀 더 많은 분은 자식 같은 느낌도 날 거고.
“저희가 감사하죠. 그렇게 많은 프로그램 중에 우리를 선택해 줬는데. 그 점 제작진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그럼 앞으로 목표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째 후다닥 끝내는 느낌이지만,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편집으로 잘 마무리할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그냥 평소처럼 훈련과 공부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봄 시즌부터 다시 시합에 집중하고요.”
“혹시 방송에도 관심이 있나요?”
“오늘 보니까 쉽게 생각하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움직이고, 준비해 주시는데 그냥 재밌을 것 같다고 나오는 건 무례잖아요. 실제로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기도 했고요.”
“…….”
“방송은 재밌긴 해요. 하지만 책임 또한 져야 하는 자리라는 걸 이번에 깨달았어요. 그래서 재밌을 것 같단 생각으로 쉽게 출연을 마음먹진 않을 것 같아요.”
이것도 진심이었다.
방송은 시청률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시청률을 위해서 지금처럼 제작진 수십 명이 움직인다. 그 수십 명이 메인 출연자의 촬영을 보조하고, 메인 출연자들은 그들의 보조를 받으며 시청률이 잘 나오게끔, 잘 해줘야 한다.
그러니 책임이 필요한 자리였다.
지영은 그런 책임까지 아직은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담이 없는 이런 게스트 출연이라면,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운동과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요.”
대신 여지는 두고, 대답을 끝냈다.
그러자 반은영이 감사합니다. 인터뷰 수고했어, 라고 짧게 답을 해줬다.
“끝났나요?”
“응. 이제 안에서 좀 쉬고 있으면 돼. 다른 친구들 인터뷰하고, 그리고 마지막 스케줄 할 거야.”
“네. 고생하셨습니다.”
“응. 수고했어.”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들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가 지영을 반겼다.
“어디 갔다 와?”
“바다 잠깐 갔다가 인터뷰하고 왔어. 너네도 부를 것 같으니까 옷 입고 준비들 해.”
“그래? 알았다.”
물어본 임효중이 바로 일어나서 옷을 챙겨입자 다들 따라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잠시 뒤 조연출이 들어와 강한결을 시작으로 한 명씩 불렀고, 40분쯤 걸려 인터뷰가 끝났다. 그리고 선배님들과 함께 마당에 모였다.
하암.
하품을 하면서 나온 한유진이 지영을 보곤 바로 옆으로 왔다.
“잘 쉬었어?”
“네. 누나는요?”
“늘어지게 자다가 나왔지. 아후, 피곤하다. 나이 먹으니 이제 이 시간만 되면 졸리다.”
“하하…….”
하긴, 한유진은 이제 40이 넘었다,
아무리 매일 운동을 해도 기본적인 체력이 떨어질 나이였다. 그래서 지영은 그냥 웃고 말았다. 모닥불을 피워낸 곳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중앙은 장세리와 강한결이 앉았고, 퐁당퐁당 성비를 섞어서 다 앉고 나자, 하품을 늘어지게 한 장세리가 눈을 번쩍 뜨더니 말했다.
“자, 이제 야식 먹어야지?”
“언니, 또 먹어요?”
“야. 여행은 먹는 거로 시작해서 먹는 거로 끝나는 거야. 은아야. 가서 새우 가져와라.”
네!
핸드볼 김은아가 얼른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아이스박스 하나를 들고나왔다. 그걸 임효중이 받아서 같이 들고 오자, 자연스럽게 다들 일어나서 야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 본래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런저런 고충을 털어놓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은 깨끗하게 빗나갔다.
하지만 장세리는 본분을 잊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야식을 먹으면서 강한결을 시작으로 고충, 고민 등을 들어줬다. 강한결은 중압감을, 임효중도 현재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 등을 고민으로 내놨다. 황석의 차례가 되기 전, 갑자기 이성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고민 있어요!”
“어? 그래. 성진이 고민이 뭔데?”
“어떻게 해야 빌어먹을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
입은 분명 웃고 있지만, 눈빛은 증오, 적개심으로 화르르 불타고 있는 이성진을 보면서 지영은 잠시 얼이 빠져서 그 뒷말을 막을 생각도 못 했다.
“날 낳아주고 지금까지 방치한 엄마란 작자. 제가 지금까지 힘들게 모은 돈 내놓으라고 학교에 찾아와서 깽판 치는 아빠한테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성진의 말이 끝나자 마당에는 모닥불의 온기를 미뤄낸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