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67화
67화. 예능 촬영(2)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장세리다.
전 국민이 인정하는 국민 영웅. 스포츠 스타라는 말보다는 그냥 영웅이라는 표현이 진짜 잘 어울리는 골프 여제 장세리는 그 자체로 엄청난 존재감이 있었다. 채를 잡은 것도 아니고, 시합 때처럼 집중한 얼굴도 아니지만 회귀까지 한 지영도 위축될만한 포스가 있었다.
스타의 아우라가 아닌, 영웅의 아우라.
장세리는 그런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원 국가대표를 했었던 실력자고, 그런 실력자들은 특유의 아우라가 있었다. 지영과 친구들이 아무리 고등부에서 압도적인 실력자라고 해도, 세계를 호령했던 선수들이 있는 만큼 아우라는 압도적으로 선배님들이 위였다. 그래서 선배님들의 눈빛에는 자랑스러운 후배를 바라보는 뿌듯함이 있었다. 보통은 일단 외모에 먼저 눈이 가게 마련인데, 그냥 장한 운동부 후배를 보는 눈빛이었다.
일단 그것만 해도 되게 새로운 경험이고, 기분이 들게 했다.
“아, 어서 와요. 어서 와. 우리 자랑스러운 후배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아우라를 가진 장세리가 대표로 지영과 친구들을 맞이했다. 그런 그녀의 옆으로 지영이 팬인 한유진이 있었고, 펜싱의 남선희, 핸드볼의 김은아, 피겨의 곽현정, 수영의 정지인이 차례대로 서 있었다.
“와, 와아! 얘네를 내가 실물로 보다니! 언니! 나나! 저기저기! 끝에 있는 친구! 저 친구 시합 영상 봤어요!”
“저도 봤어요!”
“나도!”
한유진을 시작으로 인사도 하기 전인데 지영의 영상을 봤다며 호들갑을 떠는데, 지영은 거기에 순간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걸 본 한유진이 짓궂게 지영을 놀리기 시작했다.
“자기 얘기 하니까 눈 동그래지는 거 봐! 아, 귀여워!”
하하! 호호! 한유진의 놀림에 그렇게 다들 웃었지만 지영은 그냥 어색한 미소로 입을 꾹 닫았다. 시작부터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볼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일 소녀 감성은 또 아니었다.
“그만 놀려, 이것아! 인사도 안 했는데 넌 뭔!”
“에이, 긴장한 거 같아서 분위기 좀 풀려고 그런 거죠!”
“분위기 두 번 풀면 애 도망가겠다!”
“에이, 안 그래요. 쟤, 쟤가 얼마나 강심인데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는 사이야?”
“아니요? 오늘 처음 보는데요?”
당당하게 모른다고 고개를 젓는 한유진.
그에 지영이 입을 열었다.
“저는 알아요.”
“어? 어떻게 알아요?”
“팬이거든요. 스테이크 다 태워 먹는 거 잘 봤습니다.”
꾸벅.
악!
지영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 인사하자 한유진이 갑자기 지영이 소환한 흑역사에 머리를 부여잡고 쪼그리고 앉았다. 4주인가 3주 전인가 나온 방송으로, 지영이 휴가 첫날 본 재방의 내용이기도 했다. 지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방 더 날렸다.
“참, 그것도 봤어요. 회 뜨다가 걸레로 만든 거.”
“아, 그만! 야아! 넌 팬이라면서 왜 그런 것만 말해!”
“그게 제일 재밌던데요? 기억에 남고.”
“아아! 잊어! 그런 거 재밌는 거 아니야!”
한유진의 앙탈에 장세리가 으하하! 팬 맞네! 하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어색하던 분위기가 좀 풀렸다. 그 웃음이 잦아가자, 앞에서 자매 작가 둘째 임두리가 자기소개라고 스케치북에 적어 오더를 내렸다.
‘이렇게 하는 거구나.’
흐름을 잡아주고, 이어서 뭘 할지 앞에서 전부 지시를 내려준다. 편하지만, 리얼 예능이라고 해서 리얼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영이었다.
“자자, 이제 우리 잘생긴 선수들 자기소개 좀 들어볼까요?”
“네, 그런데 선배님. 말 편하게 해주셔도 됩니다.”
강한결이 대표로 인사를 맞고는, 말을 편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 그래도 될까?”
“네, 그럼요. 저희가 한참…… 아, 안녕하세요. 강한결입니다.”
대단한 놈.
저희가 한참 어려요. 아마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나이에 민감하다 못해 예민한 여자 앞에서 꺼낼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곧바로 자신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카메라에 인사했다.
“오…… 센스!”
핸드볼 김은아가 그런 강한결의 센스를 칭찬했다.
그리고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강한결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끊었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강한결을 시작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성진입니다! 낭랑 18세! 아! 욕 아니에요?”
“하하, 알아. 다, 그런데 보통 남자도 낭랑 18세란 말 쓰던가?”
장세리의 말에 이성진이 씩 웃으며 답했다.
“요즘 같은 남녀평등의 시대에 그걸 따지는 건 의미 없는 거 아닐까요?”
“아 그러네. 실없는 소리 했네. 멋있다, 마인드가 좋아.”
“흐흐, 감사합니다!”
그다음은 임효중이었다.
임효중은 그냥 깔끔하게 안녕하세요, 유도선수 임효중입니다, 하고 소개를 마쳤다. 그리고 그다음이 황석.
황석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어, 어어. 하면서 황석을 보며 고민하는 선배님들. 짝! 장세리가 손뼉을 치며 황석을 가리키며 외쳤다.
“의사 생활! 그 1화에 나왔던 선수!”
“아 맞네! 어디서 봤나 했는데! 와, 배우였어?”
황석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시합 가기 전 찍은 의사 생활이 저번 주 방영을 시작했다. 수요일에 방영한 1화에서, 참 공교롭게도 아이를 구하다가 무릎을 다친 파이터의 역할로 황석이 출연했다. 황석의 대사는 몇 개 없었다.
[무릎이, 많이 상한 상태입니다. 임성태 선수.]
[시합은요? 아니, 운동은 할 수 있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아.]
이게 첫 대사고, 창문을 바라보며 감정을 참아내는 모습이 나온 뒤에 끝.
정말 짧은 씬이지만, 임팩트가 있던 씬이었다. 그리고 황석의 연기를 보며 지영은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황석은 감정을 통제, 절제하는 법을 역시 알고 있었다.
언제나 참고, 참는 성미에 섬세한 성격이 더해져, 아주 제대로 표현이 됐다. 억양이 살짝 충청도 느낌이 났지만 그거야 뭐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사투리 쓰는 정극도 엄청 많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황석이었다.
“이야, 배우도 있고. 얘네 진짜 아이돌 느낌인데?”
“언니, 그래도 얘네 엘리트 체육 하는 얘들이에요.”
“알아. 그걸 누가 몰라?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이제, 그 지영이? 이름처럼 얼굴도 곱네. 고아.”
장세리의 말에 지영은 앞으로 살짝 나서서, 손을 들어 여기라고 신호를 주는 분의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백한 인사.
지영의 인사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반가워요, 반가워. 지영이 입술은 괜찮아?”
“아, 입술이요. 네,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어후, 나도 영상 봤는데 입술 많이 다친 것 같아서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렇게 열심히 시합해준 것도 고맙고, 새해부터 국민들 힘나게 해준 것도 고맙고, 여기 나와준 것도 고맙고.”
지영은 그 말에 그냥 다시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러자 그런 지영과 친구들을 보며 기분 좋게 웃은 장세리가 손을 비비면서 제작진을 바라봤다.
“자, 인사도 끝났고. 이제 우리 뭐해요?”
장세리의 물음에 메인 PD가 일정을 설명했다.
“아침 일찍 움직이느라 다들 시장하실 테니, 저희가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어! 바로 밥부터 먹어요?”
“네. 밥부터 먹습니다. 여기 연희고 아이돌들 원기보충도 해줄 겸, 저 위 식당에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요? 오……. 오늘 뭔가 이상한데? 왜 이렇게 잘 해줘요?”
장세리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PD를 바라보자, PD는 장세리 말고 지영을 보며 대답했다.
“모시기 힘든 분들이었는데, 저희 프로그램을 선택해 준 게 너무 고마워서 오늘은 편하게 가려고 합니다.”
“아 진짜? 하긴, 이 친구들 요즘 인기 많지. 나 하는 다른 프로에서도 얘들 섭외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 하더만. 근데 얘들 소속사도 없고, 학교도 아예 그런 쪽 섭외는 받아주지도 않고, 어디다가 연락해야 할지 몰라서 죽겠다고들 하던데.”
“맞습니다. 요즘 웬만한 아이돌들보다 인기 많죠.”
지영은 크게 체감하지 못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 같긴 했다. 종종 연락하는 이선영이 말해줬다. 그녀가 이후 거절한 프로그램만 해도 다섯 개가 넘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성진의 SNS로 인터뷰 요청도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힘겹게 모셨으니까, 놀고먹고, 얘기하고, 딱 그렇게만 할 겁니다.”
“근데 괜찮겠어요? 방송 분량 걱정은 안 해? 이번에 2회 편성할 거라며.”
“그러니 여러분들이 잘해주셔야겠죠?”
“우리? 우리 뭐?”
“연희고 아이돌에 대해 궁금해하는 시청자들의 니즈를 채워줘야죠.”
“……마냥 노는 건 또 아니구만?”
피식 웃은 장세리가 에이 그러면 그렇지! 하더니 몸을 돌렸다.
“다들 밥 먹으러 가자!”
“네에, 언니!”
“내가 쏘는 건 아니지만 나를 따르라!”
“와!”
그 모습에 지영은 어떡해야 하지? 하는 심정이 돼서 제작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송보경 작가가 손가락으로 따라가라고 쇽쇽 옆을 찔렀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인 지영은 친구들이 스윽 밀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냥 따라가면 된다는데?”
“그래? 와, 예능 어렵다. 엄청 긴장돼.”
천하의 이성진이 약한 소리를 하자 다들 웃기지 말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자 자연스럽게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저번에 임스테이에서 한 번 겪어봤다고 그래도 크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위로 걸어가는 중에 한유진이 옆으로 다가왔다.
“너 진짜 내 팬이야?”
“네. 누나 팬이에요.”
“진짜? 와, 진짜?”
“네.”
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한유진이 세상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짜식! 네가 에이스를 알아보는구나!”
“허당미 때문에 팬 된 건데요?”
“……진짜?”
“농담이에요.”
“아 뭐야 진짜! 너 누…… 아니지. 내가 너한테 누나라고 불리기에는 좀…… 그렇겠지?”
한유진이 세상 심각한 표정이 돼서, 지영답지 않게 또 장난기가 올라왔다.
“그럼 이모라고 불러드려요?”
“어우야…….”
그러자 또 세상 풀죽은 모습이 된다.
진짜 감정에 정말 솔직한 모습. 사실 이런 모습 때문에 팬이 된 지영이었다. 팬을 우상화하는 건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습을 가져서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했다. 지영은 자신이 감정을 보이는 데 있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유진은 지영과는 정반대였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있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모습이 지영은 시원시원하고 좋았다.
“욕먹어도 고! 누나로 하자!”
“네, 누나.”
“입술은? 진짜 괜찮아? 저 위에 있는 식당이면 해물찜 전문점이거든. 좀 많이 뜨거울 거야.”
“네, 거의 다 아물어서 괜찮아요.”
“다행이다. 이따가 많이 먹어. 저기 맛은 진짜 괜찮아.”
“네.”
이 이후로도 한유진은 계속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부담되는 질문들이 아니라 지영은 곧잘 대답하면서 걸어 올라갔고, 어느 정도 올라가자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색 건물이 보였다. 시원한 바다와 잘 어울리는 건물이었다.
“예능은 보통 몇 시까지 찍어요?”
“우리? 일단 12시는 기본이지. 그런데 어째 오늘은 더 늦을 듯?”
“왜요?”
“아까 PD님이 그랬잖아. 시청자의 니즈를 채워주는 얘기들을 끄집어내라고. 그 말은 내가 봤을 땐, 이따가 모닥불 피워놓고 너희들 얘기를 보따리에 가득 담으라는 뜻이야.”
“아…….”
“근데 그렇게 무리시키는 편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민감한 질문들도 아마 알아서 다 편집될 거야.”
“네.”
“넌 누나가 챙겨줄 테니까, 내 옆에 붙어 있어.”
“네. 알겠어요.”
한유진은 마치 어떤 사명감마저 느끼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게 부담스러울 법하지만 오히려 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저 사명감이, 자랑스러운 운동 후배를 챙겨야 한다는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느낌이 딱 왔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식당에 도착.
안으로 들어가자 넓게 상이 네 개가 있었다.
방송 연차가 이제 제법 된 한유진은 들어서자마자 텐션을 올렸다.
“나나 여기여기! 지영아 여기 옆으로 와! 빨리!”
“야 거기 내가 찜했어!”
“그런 게 어딨어요! 앉으면 임자인 게 국룰인데! 지영아! 빨리빨리!”
창가를 두고 왕언니 장세리와 티격태격하는 한유진.
올라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한유진을 보며 지영은 방송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