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62화
62화. 새해 휴가(1)
2시간 뒤에 집에 도착한 지영은 짐을 풀고, 어머니 가게로 향했다.
“아들!”
매출 전표? 그런 걸 보며 계산기를 두들기시던 어머니가 지영을 보고는 한걸음에 다가왔다. 하지만 환한 웃음이나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가득하셨다. 지영이 입술을 다쳤다는 얘기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니? 어디 봐봐.”
“괜찮아요. 아침은 드셨어요?”
“얘가, 아침이 문제니? 병원은?”
“이제 가보려고요.”
안 그래도 인사드리고 병원에 갈 생각이었다.
“그래, 엄마가 같이 갈까?”
나이가 몇 갠데?
그 말에 지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혼자 갔다 와도 돼요.”
“그래, 그럼 돈은. 잠깐만 기다려 봐.”
얼른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시는데, 지영은 그건 그냥 받기로 했다. 5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서 챙긴 지영은 괜찮을 거라고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은 걸어서 5분도 안 걸려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전이고, 연말이라 그런지 어르신들이 제법 계셨다.
지영은 접수를 하고는 의자에 앉아 폰을 꺼내 이선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 전 면세점 쇼핑 1시간 정도 여유는 있었다. 그래서 지영은 어머니 선물과 이선영의 선물을 샀다.
아, 고생한 김선욱의 선물도 샀다. 나종석은 애매해서, 사지 않았다.
그 선물을 지영은 오늘 챙겨줄 생각이었다.
충주에 있으면 말이다.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전화가 왔다. 이선영은 역시 톡이나 메시지보단 전화를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네, 누나.”
-지영이니? 목소리가 왜 그래? 자다 인났어?
“아니요. 시합하다가 입술이 좀 찢어져서요. 그래서 좀 꿰매고 안에 거즈 물고 있어서 발음이 별로예요.”
-아 진짜? 많이 다쳤어?
“그냥 조금 찢어졌어요. 누나 어디세요? 충주에 있어요?”
걱정은 고맙지만 지영은 일단 화제를 돌렸다.
-나? 충주에 있지. 나 본가도 충주야.
“아 맞다. 그럼 이따가 시간 나면 잠시 볼까요? 전해줄 것도 있고.”
-전해줄 거? 설마 선물 사 온 거야?
하여간 눈치는 정말 빠르다.
“네, 뭐. 작은 거 하나?”
-점심시간에 보자, 그럼. 12시? 그때쯤 누나가 집 앞으로 갈게.
“네.”
직접 와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은 지영은 30분쯤 더 기다려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의사는 지영의 입술 상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염증도 없고, 잘 아물고 있네요. 드레싱만 하면 되겠네요. 그래도 뜨거운 음식은 조심해야 합니다.”
“네.”
치료를 받은 뒤 처방전도 받아 나온 지영은 약을 사서 다시 집으로 갔다.
시간을 보니 11시, 짐을 좀 풀어놓고, 이선영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지영은 어머니 선물로 사 온 화장품과 가방을 방에 챙겨두고, 빨래 거리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방에 정말 오랜만에 들어왔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다. 오히려 힐끔 본 어머니 본인 방이 더 지저분했다. 지영은 거실부터 청소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청소를 하다 보니 12시가 금방 됐다.
칼같이 12시에 이선영에게 전화가 왔다.
“네, 누나.”
-저번에 인터뷰했던 카페 알지?
“네, 지금 출발할게요.”
-응, 누나도 지금 출발할게. 차대고 하면 10분쯤 걸릴 거야.
“네.”
지영은 전화를 끊고, 쓰던 걸레를 빨아서 널고는 옷을 다시 챙겨 입었다. 패딩,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해 전에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이선영이 들어왔다.
“어서 와요.”
“응, 지영이 오랜만! 아휴, 춥다. 점심 안 먹었지?”
“입술 때문에 못 먹어요. 저는 차나 한 잔 마실게요.”
“그래? 이런, 입술 많이 다쳤어?”
“좀 찢어졌어요. 딱 몇 바늘 꿰맬 정도로.”
실제로는 더 길게 찢어졌지만 뭐 그게 자랑이라고 그대로 말하겠나.
“이런. 아프겠다. 그래서 입술까지 찢어졌는데, 결과는?”
“1등 했죠.”
“오, 역시!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꾸벅 고개를 숙여 축하를 받으면서, 지영은 바로 선물을 내밀었다.
가방이다.
음, 엄청난 고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선물로 나쁘지 않은 가격대다.
“어, 이거 가방?”
“네. 면세점에서 샀어요. 누나한테 받은 것도 많아서 은혜 갚을 겸.”
“에이, 내가 좋아서 한 건데. 그래도 선물이니까 고맙게 받을게. 남치니도 없어서 크리스마스도 그냥 넘겼는데, 흑! 20살 가까이 어린 동생한테 선물을 받아서 그래도 올해는 보람찼다!”
이선영의 너스레에 지영은 그냥 웃었다.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이 차이가 있는데도 함께 있는 게 전혀 어색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풀어봐도 괜찮지?”
“네, 그럼요.”
가방은 중저가 브랜드 거고, 이선영이 평소에 메고 다니던 가방과 비슷한 종류로 샀다. 그렇게 산 이유는 자신이 가방 고르는 안목이 매우 별로라는 걸 알아서였다. 그래서 지영은 가장 무난한 걸로 추천받아서 샀다.
물론 점원에게 기자가 멜 가방이라고 해서 추천받은 제품 중에 하나기도 했다.
“오! 예쁘다! 코디 활용도도 높겠고, 깔끔하고, 지영이 이런 취향이구나?”
“네? 아니요. 그냥 뭘 고를까 하다가 누나가 평소에 메고 다니는 거 비슷한 걸로 고른 거예요. 취향이 아니라, 취향이 아예 들어가지 않은 거죠.”
“오…… 혹시 이 누나가 처음으로?”
“노우. 어머니 가방 먼저 샀습니다.”
“에잇! 아깝다! 퍼스트가 될 수 있었는데!”
“하하.”
하여간 정말.
저런 진한 농담을 이제 고1짜리한테 잘도 친다. 물론 지영은 스물일곱의 정신도 있어서 저런 농담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고마워, 잘 쓸게. 진짜, 진짜 고마워.”
“저도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이런저런 경험도 많이 하고, 좋았어요.”
“후후, 그래? 그럼 좀 더 해볼래?”
“네?”
“일단 밥 좀 시키고. 누나 배고프다.”
와, 흐름 끊는 거 보소?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는 이선영을 보며, 지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프랜차이즈 카페에도 쿠키나 케이크, 이런 걸 팔지만 이런 동네 카페에는 점심 장사도 겸업하는 곳이 제법 많고,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시키고 돌아온 이선영이 지영이 그녀의 선물로 가방으로 해야겠단 생각이 바로 떠오르게 만든 낡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자, 읽어봐.”
“이게 뭔데요?”
“어떻게 알았는지, 나한테 들어온 유도선수 강지영 섭외 목록.”
“네?”
눈을 끔뻑이던 지영은 그녀가 준 서류를 살폈다.
꽤 많았다.
서류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A4용지 두 장에는 주르륵 프로그램명과 섭외 의도 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프로그램의 메인 테마, 콘셉트 등도 적혀 있었다. 그렇게 총 10개 정도.
그중 몇 개는 지영도 아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전부 저 섭외하려고 하는 프로그램이라고요?”
“응. 너 중계 끝나고 하나씩 들어오더니, 나머지 여섯 개는 너 임스테이 나간 이후 전부 들어온 섭외야.”
“헐. 그럼 며칠 안 되잖아요.”
“그렇지? 너희 학교는 이런 거 안 받아준다며?”
“네, 누나가 예외적인 거랬어요.”
연희고는 학생의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학생이 들뜰 수 있는 방송 같은 것도 거절하는 경우가 엄청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예외적으로 지영의 방송을 허가했던 거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이선영이 운이 정말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학교서 안 받아주니 당연히 문의가 어디로 갔겠어? 본사로 갔고, 본사는 나한테 밀고, 나 PD 아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문의했고, 그쪽도 당연히 나한테 토스했고. 그래서 내가 요즘은 정말 매니저가 된 기분이야.”
“하하. 미안해요.”
“미안은. 뭐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어. 이 기회에 그냥 기획사나 차려볼까? 하는 헛바람이 들어서 좀 고생했지만.”
그렇게 또 너스레를 떨어서 지영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이선영.
“그래서 어때, 나가볼 생각은 있어?”
“이거, 다 저 혼자만 부르는 건 아니죠?”
“당연하지. 그 비주얼 덩어리들을 포기하고 하나만 부르는 PD나 작가가 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그냥 쳐내는 게 나아.”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그럼 전원 참가하는 건데, 이건 당연히 친구들한테 물어봐야 돼요.”
“나갈 생각이 있나 보네?”
반짝.
받아놓기는 했지만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영이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이번엔 이선영이 조금 놀랐다.
“저희 2주간 휴가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좀 넉넉해요.”
“이 주씩이나?”
“네. 체전 끝나고 조금 쉬고, 선발전 준비한다고 거의 못 쉬었잖아요. 선발전 끝나고는 바로 이번 시합 준비했고. 그때 임스테이 촬영이 저희 마지막 휴식이었어요.”
실제로 임스테이 끝나고, 지영은 아주 혹독한 벌크업을 시작했다. 벌크업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체중감량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근육을 늘린 뒤 살을 빼서 시합을 나갔고, 그거 끝나고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번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나갔다가 왔다. 거의 두 달을 진짜 쉬지도 않고 달려온 거다.
그러니 2주 휴가는 결코 긴 휴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2주간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건 사실 매우 힘들다. 특히 지영처럼 운동했던,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좀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입술도 아마 일주일이면 많이 아물어서 이것저것 다 먹어도 될 거다.
“그럼 이 중에 어떤 거 해보려고?”
“다행히 여기에 저도 좋아하고, 애들도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네요.”
“그래? 그게 뭔…… 아아. 이거?”
이선영이 손가락으로 콕 찍은 프로그램을 보며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거요. 아무래도 저희가 운동선수다 보니까, 이건 꼭 챙겨 보거든요.”
“그렇겠네. 이야, 이렇게 딱 맞네?”
“네? 뭐가요?”
“사실 여기서 가장 강력하게 푸시 들어온 게 좀 노는 언니들이거든.”
“아 진짜요?”
“응.”
좀 노는 언니들.
현역 선수 2명과 은퇴한 여성 운동선수들끼리 모여 이곳저곳 놀러 다니고, 먹고, 게임 하는 프로그램. 게스트로 스포츠계의 다른 여자 운동선수들을 초대해 그들의 얘기를 듣고, 조언도 해주고 하는 프로그램.
지영도 좋아하고, 친구들도 최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잘됐네요. 이거 솔직히 기회 되면 나가보고 싶었는데.”
“그래? 왜?”
“음, 이런저런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럼 다른 프로그램도 있잖아. 남자 선수들 나오는.”
“있긴 해도 좀 노는 언니들처럼 얘기도 잘 들어주고, 대화 위주로 풀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몸으로 뛰는 프로그램이지.”
“아아, 하긴.”
지영의 나이는 새해가 내일이면 18살이다. 회귀했던 것까지 쳐도 28살이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는 가장 막내가 지영과 동갑이다. 그리고 다른 출연자들은 당연히 그보다 더 많고. 그런 선수들의 경험과 조언은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여기 나간다고 연락해?”
“아니요. 잠깐만요. 그래도 애들한테 물어는 보고요.”
“그래, 얼른 물어봐.”
지영이 폰을 꺼내는 순간 이선영이 시킨 음식이 나왔다. 그녀는 그래도 샐러드와 빵 몇 개를 주문했다. 아마 지영이 못 먹으니 냄새가 진하게 나는 건 피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영이 웃자, 이선영은 그런 지영의 웃음을 봤으면서도 못 본 척하곤 식사를 시작했다.
지영은 폰을 꺼내 바로 단톡방을 확인했다.
이미 몇 개 메시지가 쌓여 있었는데, 첫 번째는 사진이었다.
황석이 무릎 꿇고 손을 든 사진.
벌서는 사진이다.
지영이 석이 왜 저래? 하고 묻자 사진을 올린 이성진이 낄낄 웃으면서 은정이의 선물을 깜빡해서라는 답을 해줬다.
‘아이고…….’
지영은 단숨에 벌서는 이유를 깨달았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친구야…….’
그걸 까먹었으면 벌서는 게 맞았다.
음, 한 3분 정도?
하지만 한은정은 아마 10분쯤 벌을 서게 할 거다. 지영은 석이에게 속으로 애도를 표한 뒤, 용건을 올렸다. 그러자 빠르게 사라지는 숫자. 이번에도 이성진에게서 대답이 가장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자, 무조건 한다고 해.
1등 답변은, 강한결이었다.
좀 노는 언니들을 가장 좋아하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한결이었다.
달력부터 이것저것 전부 다 산, 그는 좀 노는 언니들의 찐팬이었다.
그 팬심이 비록 존경심을 베이스로 시작됐다지만 지영이 보기에 이게, 모든 게 완벽한 강한결의 유일한 인간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