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6화
56화.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1)
홍콩에 도착한 대표팀은 곧장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도복을 챙겨서 다시 시합이 열리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홍콩의 거리는 조용했다.
‘아니, 이 정도면 음울한 거지.’
일이 있었던 홍콩.
하지만 지영은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시합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니까. 숙소에서 시합장까지는 정확히 버스로 20분 정도 걸렸다. 이 정도면 거리상 그리 나쁘지 않은 배정이었다.
시합장에 도착해, 내일 계체에 쓰이는 체중계부터 먼저 올라갔다.
72,90.
예상했던 체중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남자팀이 먼저 체중을 확인하고 곧이어 여자팀도 체중을 확인했다. 문제가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짝짝.
“자, 도복 입고, 준비운동 하자!”
“네!”
이번 청소년 대표팀 감독은 용인대 전기정 교수였다.
대한민국 유도계의 올 타임 레전드. 명예의 전장에도 오른, 진짜 전설적인 유도선수였다. 그가 대표팀 총감독이었고, 남자부, 여자부 코치가 두 명, 유도협회에서 사무적인 일을 처리해 줄 직원 두 사람이 또 함께 왔다.
가방에서 도복을 꺼낸 지영은 등에 KOR 마크가 신기하면서도 어색했다.
충북 마크는 몇 번이나 달아봤지만 이 대표팀 마크는 또 처음이라서,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슴엔 태극마크도 달렸다.
이는 시합을 위해 협회에서 준 도복이었다.
그래서 길이 별로 안 들어 뻣뻣했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 지영은 크게 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태극마크가 달린 도복을 입고, 준비운동을 시작하는 지영은 몸을 풀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경기장은 컸다. 선발전처럼 네 개의 경기장이 있었고, 관중도 상당히 많이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컥, 문이 열리고 통일된 복장의 팀이 들어섰다.
몸을 푸는 시간은 1시간이고, 이 1시간 동안 두 개의 팀이 체육관을 쓴다. 들어선 팀은 같이 시간을 쓸 대만 팀이었다.
다부지다.
“와, 살벌한데?”
이성진이 몸을 풀다 말고 지영에게 소곤거렸다. 지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챠이를 찾았다. 챠이는 중간쯤에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주 옛날 아이돌들이 했을 법한 샤기컷? 그런 머리를 한 챠이는 확실히 포스가 있었다.
신장은 지영보다 조금 작고, 리치는 비슷하다.
긴 신장과 힘을 이용해 허벅다리를 차는 스타일. 특히 맞잡은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핸들 치기는 진짜 조심해야 했다.
신장이 큰 데도 힘도 좋고, 악도 깡도 좋은 선수.
올라가면 준결승에서 붙게 될 선수였다. 그리고 결승은 다행히도, 미야모토 신지다. 지영이 생각하기에 아마 신지는 지지 않을 것 같았다.
대만 팀도 체중을 재고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어차피 서로 주요 선수에 대한 정보는 이미 다 풀렸다. 특히 한국 팀은 중계까지 했다. 그러니 선수들의 특기나 스타일 등은 이미 전부 까발려진 뒤라서 그냥 마음껏 특기 기술로 익히기를 했다.
20분 익히기 뒤 10분 기술 연구.
전기정 교수가 이성진과 잡고 몸을 푸는 지영에게 다가왔다.
“지영아.”
“네? 네, 감독님.”
“너 업어치기는 잘 안 하지?”
안 하는 게 아니라, 별로 기회가 없어서다. 지영은 허리기술 특화 임효중이나, 업어치기 특화 이성진과는 다르게 거의 모든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알았다.
상황에 맞춰, 타이밍에 맞게 거는 기술들이 허리기술, 발기술 등이 많을 뿐이지, 찬스가 오면 깔끔하게 업어치기도 할 줄 알았다.
“하긴 하는데, 키 때문에 그런지 적당한 타이밍이 안 나옵니다.”
“그렇긴 하겠네. 업어치기는 주로 어떤 식으로 쓰지?”
“다 할 줄은 아는데요. 건다면 보통 소매꽂이 쪽을 많이 씁니다. 말아서는 도는 게 아무래도 느려서요.”
“그래? 그럼 한번 보자. 소매꽂이 한 번, 말아서 한 번 해봐.”
업어치기의 장인 전기정 교수가 직접 봐준다고 하니, 이건 아주 좋은 특훈이었다.
축구로 따지면 박지성 선수가 직접 기술을 잡아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런 기회,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지영은 일단 소매꽂이부터 했다.
툭, 아주 짧게 추어올려 겨드랑이 아래 공간만 확보한 채 파고드는 소매꽂이. 이성진의 경우에는 작정하면 아예 쭉 추어올려 상대를 강제로 만세로 만들어 파고들지만 지영에게는 그건 무리였다.
지영이 아무리 타이밍을 잘 잡는다고 해도 유도를 배운 뒤부터 지금까지, 업어치기를 파온 이성진보다 소매꽂이를 잘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영의 업어치기를 본 전기정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각이 좋긴 하네. 그럼 말아서 보자.”
“네.”
홱!
가슴 깃을 잡았던 지영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이성진을 당겨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툭!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이성진을 메쳤다.
“음, 이것도 나쁘진 않네. 근데 확실히 키가 작은 애들한텐 못 쓰겠다. 돌 때 중심이 살짝 뒤로 밀려.”
그 말에 일어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지영. 이는 지영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성진의 키가 큰 편인데도 돌아서 걸려면, 이렇게 중심이 좀 뒤쪽으로 밀린다. 하지만 업어치기 장인이라면, 훌륭한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들었다.
지영의 그런 눈빛을 봤는지 전기정 교수가 피식 웃으며 직접 이성진을 잡았다.
“너, 이렇게 딱 걸어서만 던져?”
“일단은…… 그게 제일 편해서요.”
“아예 빠지는 건?”
“할 줄은 아는데, 아직 시합 때 써본 적은 없습니다.”
말아업어치기는 반드시 상대를 어깨에 걸어야 하는 게 아니다. 아예 빙글 돌아 나온 다음, 말려 들어간 도복을 회전력을 이용해서 상대를 던지는 것도 가능했다.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최민호 선수가 이쪽으로는 정말 장인이었다.
피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몸이 돌아서, 바닥에 메쳐진다. 당시 유도계에서는 정말 센세이션한 기술이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시합 때는 쓰지 말자.”
“네?”
“쟤 봐라. 너 기술 연구하는 거 뚫어지게 쳐다보잖냐.”
“아…….”
이런 페이크를 준다고?
누가 운동하는 선수들이 머리가 나쁘다고 했나? 이런 기믹을 치는 정도가 가능한데. 지영이 보기에도 아주 멋진 술책이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진심으로 몇 번 더 연구해라.”
“넵.”
“그리고 업어치기 넌 굳이 안 해도 돼. 지금처럼만 해도 충분해. 괜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지금 스타일 유지해라. 그럼 넌 최고가 될 거다.”
“네.”
전기정 교수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레전드의 칭찬은 스물일곱의 정신도 있는데, 그냥 기분이 좋았다.
“교수님, 저는요?”
“하하, 너도 지금처럼만 해. 근육은 더 키우지 말고. 넌 지금이 딱이야.”
“넵! 저는 뭐 맞춤 전략 없나요?”
“보니까 66이 제일 약하더라. 고로, 넌 없다. 1등 못 하면 한국까지 헤엄쳐 갈 줄 알아, 넌.”
“……네.”
전기정 교수의 엄포에 찔끔하는 이성진.
그런데 확실히 이번 대회, 66이 선수층이 가장 얇았다. 보통 60, 66, 73은 한국, 일본 전부 전통의 강자들이 자리 잡았던 체급이다.
그리고 유도에서 가장 선수층이 탄탄한 체급이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통, 60, 66, 73, 그리고 81까지. 이 안에 걸치는 선수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남자 평균 키가 173쯤 된다. 그러니 그 플러스마이너스 몇 안에 왔다 갔다 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저 체급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선수층이 가장 단단한데, 이번에 일본 66은 아니었다.
확실히 실력이 떨어져 보이는 선수가 나왔다. 그래도 당연히 전 일본 메달권 선수겠지만, 워낙에 강자를 많이 배출했던 체급이라 좀 아쉬운 실력이기도 했다.
“농담 같지? 넌 진짜 지기만 해라, 어?”
전기정이 다시 엄포를 놓자 이성진이 씩 웃으며, 금메달 반드시 따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전기정 교수는 떠나고 그가 했던 말처럼 소매꽂이, 그리고 말아업어치기를 몇 번 더 연습했다. 그리고 잠시 뒤 밀어 올리기, 버피, 팔벌려뛰기 30회 3세트로 몸을 푼 뒤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몸풀기를 끝냈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저녁, 야간엔 선수들 전체가 모여서 브리핑을 했다.
브리핑이 끝나고, 하루도 끝났다. 다음 날 새벽에 다시 가볍게 운동, 오전에는 휴식, 오후에 몸 풀고, 계체까지 이어졌다.
개체는 당연히 전원 통과.
저녁을 먹고, 다시 브리핑.
시합 날은 정말 필름을 앞으로 감은 것처럼 순식간에 다가왔다.
오전 10시에 짧은 개회식을 시작으로 점심시간 없는, 결승까지 다이렉트로 이어지는 시합 스케줄이다.
“다들 몸 어때?”
“괜찮아. 아니, 괜찮다 못해 아주 최고지!”
대표팀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희고를 제외하고 두 명 이상 온 학교는 손에 꼽았다. 특히 여자팀은 춘추전국시대처럼 모든 체급 선수가 각자 다른 학교였다. 코치들이 시합 준비를 하는 동안 지영은 친구들과 모여, 의지를 다졌다.
“첫판은 이번에도 효중이고, 두 번째가 나, 세 번째 성진이, 네 번째 석이, 그리고 마지막 지영이네. 각자 시합 준비 잘하고, 긴장 놓지 말고. 특히 이성진 너.”
“또또, 넌 왜 만날 나한테만 뭐라 하냐?”
“네가 제일 방심 잘하니까. 다른 애들은 다 잘하고. 자, 연희!”
파이팅!
짧게 아무도 안 보이는 복도에서 조용히, 결의를 다진 지영은 시합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합장은 컸다. 그래서 경기장 네 개 말고, 아예 한쪽에 쭉 떨어진 곳에 선수들이 몸을 풀고 대기할 수 있게 경기장 네 개를 더 만들어놨다.
그곳에서 정확히 10시부터 개회식을 시작으로 시합이 시작됐다.
55와 81이 먼저 시합에 들어갔는데, 임효중은 오늘도 첫 게임이었다.
“임효중 파이팅!”
“파이팅!”
관중석에서 내일 시합하는 여자 대표팀 선수들이 임효중을 응원했다. 임효중은 그런 응원을 받으며 시합에 입장, 시작부터 격렬한 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
임효중의 첫 게임은 중국이었다.
중국의 81 청소년 국대 주전은 차기 국대라 평가받는 선수로, 81에서 일본 선수와 함께 금메달 후보였다.
재밌는 건 임효중은 금메달 후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는 어제 브리핑에서 들은 건데, 일본에서 짧게 낸 기사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전해주며 코치진이 임효중을 살짝 자극하면서 알게 됐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여기 나온 선수들은 국제대회 경험이 몇 번씩 있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연희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솔직히 비행기 타고 외국도 처음 와본 지영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연희고는 경험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지영은 임효중이 질 거라는 예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신장은 비슷하다.
힘은 중국 선수가 역시 좀 더 좋았다.
중국은 힘 유도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보면 거의 다 힘이 장사들이었다. 하지만 유도는 힘이 센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경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중국 선수는 여유도 있었다.
마치, 고작 고1인 임효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 중국 애 꼴을 보니 오래 안 걸리겠네.”
강한결의 말에 지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고. 그리고 한국 고교 유도계에서 임효중은 허벅다리 장인으로 불렸다. 어느 상황에서도, 어떤 자세에서도 허벅다리를 차올릴 수 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런 임효중과 중국 선수는 역시 맞잡은 상태다.
서로 오른쪽이라, 가슴, 소매 깃을 서로 잡고 턱을 상대 어깨에 댄 채 타이밍을 노리는 상황이다.
이런 자세에서는 허벅다리는 잘 안 나온다.
맞잡은 상태에서는 허벅다리 되치기가 잘 나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중국 선수는 모를 거다.
임효중이 사실 제일 좋아하는 자세가 저런 자세고, 저런 자세에서 되치기 걱정 없이 허벅다리를 차는 방법을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툭.
순간적인 발목받치기.
그러자 중국 선수의 중심이 앞으로 조금 쏠렸다. 그리고 그 순간, 스텝을 빠르게 밟아 포지션을 왼쪽 자세로 취하면서 핸들 치기, 이 기술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상대의 겨드랑이를 밀어 올리는 데 성공한 순간, 임효중이 시원하게 뻗은 발이 정확히 중국 선수의 정강이에 걸렸다.
홰액!
콰앙!
매트가 터질 것처럼 큰 소리가 났다. 임효중은 그래도 놓지 않고 넘긴 자세 그대로 곁누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심판은 이미 손을 번쩍 치켜든 상태였다.
잇폰!
한판이다.
시작이 좋았다.
임효중을 시작으로 쭉쭉 경기가 진행됐다.
황금세대.
연희고는 왜 자신들이 황금세대로 불리는지 똑똑히 증명했다. 전 경기 1분 내로 한판을 던지며, 첫 국제대회를 아주 성공적으로 스타트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73체급 순서가 됐다.
지영은 몸을 풀다 말고 눈을 빛냈다.
지영은 B시드. 미야모토 신지는 A시드고, 거기서도 가장 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래서 그는 73의 첫 경기였다.
스윽, 스윽.
매트에 발을 닦으며 들어가는 미야모토 신지를 바라보던 지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렇게 웃은 지영의 시선은 온전히 일본의 천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에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지영은 그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집중한 상태.
이윽고.
하지메!
하!
양손을 마치 메스, 하는 자세로 올리면서 경기를 시작하는 미야모토 신지.
그는 상대 선수가 그 소매를 잡는 순간, 그대로 손목을 말아 당기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빗당겨치기를 꽂았다.
콰앙!
어?
넘어간 선수는 멍하니 천장을 보고, 미야모토 신지는 일어나 별로 흐트러지지 않은 도복을 고쳤다.
그리고 그런 신지를 보면서 지영은, 회귀 이후 가장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