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54화 (54/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4화

54화. 1차 수확기(3)

그 말에 다들 지영을 봤다가, 다시 황석을 바라봤다.

“갑자기?”

이성진이 사과를 오물거리며 한 말에 지영은 여전히 황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유를 설명했다.

“갑자기는 아니고, 예전부터 생각해본 거야. 석이가 받은 제안 솔직히 너무 아깝잖아. 오디션도 없이 바로 캐스팅되는 건데.”

“어, 그건 그렇지? 나도 그때 좀 알아봤는데, 그 감독님 캐스팅 엄청 깐깐하시대. 조연도 진짜 미팅 3번씩 하고 뽑는다던데?”

역시 이성진.

이런 쪽은 바로바로 알아보는 성격다웠다.

TV를 보던 친구들이 전부 엉덩이를 움직여 동그랗게 원으로 만들어 앉았다.

“그거 말고 이유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역시 강한결.

확실히 맥을 바로 짚고 들어왔다. 저렇게 운을 띄워주면 대화가 확실히 쉬웠다, 지영은 이선영이 말했고, 자신도 고민 중이던 걸 바로 풀어놨다.

“한결아. 우리 유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유도? 음, 이대로 계속 간다고 치면 적어도 서른까지는 하지 않을까?”

그래. 실제 선수들도 보통은 서른쯤을 은퇴로 생각한다.

“그럼 그 후에는?”

“음…… 아아. 이해했어. 미래를 생각해서 최소한 경험이라도 해보자는 거구나?”

머리도 좋고, 눈치마저 좋았다.

자신이 굳이 전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솔직히 큰 도움이 됐다.

진짜, 사기캐릭터다.

“응. 우리 서른 넘으면 아마도, 갈 길이 갈릴 거야. 한결이 너도 그렇고, 효중이도 그렇고. 성진이도, 석이도, 나도 그렇겠지?”

“넌 뭘 하고 싶은데?”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은퇴하고 나서도 유도계에 남아 있을 것 같진 않아.”

진심이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유도에 진심을 다할 생각이었다.

“음…….”

지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미래.

아직 그 미래라는 걸 논하기엔 지영을 포함해 전원이 너무 젊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벅차해야 할 시기였다.

‘애초에 우리 나이대면, 서른쯤의 미래는 생각도 안 할 거야.’

지금은 솔직히 성적을 내냐, 못 내냐. 그것만 생각할 나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가기에는, 지영의 정신적 나이가 너무 많았다.

이제는 고1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큰 위화감이 없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스물일곱이던 정신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짧은 수명.

목숨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운동선수의 수명이 그렇다는 얘기였다.

체조선수처럼 극단적으로 짧진 않지만, 유도선수의 수명도 보통 다른 종목 선수들과 비슷하다.

이건 항상 지영도 고민이었다.

유도계에 남아 있건, 아니건 그건 개인의 선택에 따라 갈리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이 왔을 때 선택의 폭은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지금이었다.

조금이라도 어릴 적에,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갈라놓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굳이 방송 쪽 사람과 친분을 트고, 예전이라면 거절했을 임스테이 같은 프로에 나간 것도 그런 이유야. 가능하면 우리의 장점을 살려보자는 거지.”

장점이라면, 외모와 성적, 그리고 실력이다.

“음…… 석이 생각은 어때?”

“난 잘…….”

황석은 따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서 굳이 다 같이 있는 지금, 이 말을 꺼낸 지영이었다. 여론의 흐름. 황금세대 전원이 푸시를 좀 해주면, 충분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근데, 지영아. 너는 만약 그런 제의 오면 할 거야?”

임효중 나이스.

딱 시기적절하게 들어온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들 의외라는 얼굴이 됐다.

“나중 생각해 보면 나쁠 건 없어 보이잖아? 그리고 솔직히 재미도 있을 것 같고.”

“재미?”

“응. 매일 운동, 수업, 운동, 수업. 시합, 운동, 수업. 이게 우리 일과잖아. 솔직히 너무 틀에 맞춘 생활이라 좀 지겹기도 하잖아. 그러니 석이처럼 짧게 출연하는 거라면, 그런 제의가 오면 나도 해본다고 할 거야.”

“…….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또 예상 못 했는데. 난 네가 그런 건 질색하는 줄 알았거든.”

지영은 임효중의 말에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본래라면 그렇다.

회귀라는 걸 안 했다면, 분명 지영은 임스테이고, 다큐고 뭐고 다 거절했을 거다. 그때의 자신은 지영이 솔직히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 번 촬영에 몇 날 며칠이고 계속해서 시간을 뺏기는 게 아니라면, 지영도 한 번쯤은 해볼 용의가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면 짧게 짧게 시간을 빼서 해볼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석이를 설득하려면 나도 해본다고 대답해 줘야 흔들리지.’

너에게만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나도 그런 제안이 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해본다고 할 거다. 너만 시키는 게 아니다. 이런 인식을 줘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석의 표정이 좀 전과는 달라졌다.

“정말?”

“응.”

“그럼…… 해볼게.”

역시.

순진한 내 친구.

지영은 그런 속내를 숨기면서 잘생각했다고 말했다. 황석이 연기에 재능이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일단 해볼게라고 대답했으니 미래에 유도를 그만두고 고민해볼 만한 직업 중 하나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잘생각했어.”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리 유도선수로 길어야 앞을 10년 조금 더 할 거고, 대학교 올라가면 정말 그땐 유도에만 올인할 건데 나중엔 일반적인 회사생활은 꿈도 못 꿀 거 아니야. 그러니 지금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아니. 넌 회사생활도 잘해.

지영은 그런 속내는 당연히 숨겼다.

회귀 전에는 치료가 끝나고 다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머리가 굳지 않았고, 그 결과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잘 적응도 했다.

초기에야 치료 때문에 한은정이 대학을 포기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런 문제가 지나간 이후 그가 회사생활을 못 하지는 않았다.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해? 내가 직접 해야 돼?”

마음을 굳히자, 적극적으로 나오는 황석.

결정 전까지는 장고에 들더라도, 결정하고 나면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다. 이게 이 친구의 장점 중 하나였다.

‘너희들, 꼭 내가 다 성공시켜 줄게.’

기회는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걸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지영은 그런 황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선영 누나한테 연락 왔었거든. 신윤호 PD님이 누나한테 너 해볼 생각 정말 없냐고 한 번 더 물어봤대. 그래서 지금 너한테 물어본 거야.”

“아, 진짜?”

“응.”

아마 자신이 모르는 것을 예술 하는 신윤호 PD는 봤을지도 모른다. 오늘 수업 중 쉬는 시간에 신윤호 PD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그 감독은 배우의 내재된 재능을 부드럽게 끌어내는 데 특화된 감독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인을 발굴하는 쪽으로는, 대한민국 감독 중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 이혜린이 대박이지.’

군대 예능에서 뻥 떴다가, 신윤호 PD의 응답 시리즈에 합류하며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은 이혜린의 캐스팅도 사실 부정적인 말이 많았지만 판을 까보자 그가 옳았음이 온 천하가 알게 됐다. 그만큼 신인 발굴에 있어서는 신윤호 PD가 최고였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석을 픽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이게 중요했다.

그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PD가 두 번이나 물어봤다는 게.

이쯤 되면 자신이 보지 못한 무언가가, 황석에겐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와, 이제 그럼 배우 황석이야?”

이성진의 초를 치는 말에 황석의 얼굴에 대번에 부끄러움이 스며들었다. 그러자 임효중이 바로 제압했고, 황석은 멋쩍고 부끄러운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럼 그건 너한테 맡길게. 근데, 오디션 이런 거 없이 바로 진짜 그냥 찍는 거야?”

“아마…… 그럴 것 같긴 한데, 대본은 그래도 읽어보라고 하지 않을까? 아무리 적극적으로 픽했다고 해도 국어책 대사 읽기는 좀 그렇잖아.”

“……나 연기 못하는데.”

“괜찮아. 지금 저기 TV에 나오는 사람들, 처음엔 다 못했어.”

연기를 못 한다는 말에 대답해준 건 지영이 아니라 강한결이었다. 시작은 누구나 서툴다는 걸 각인시켜준 거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는 강한결.

“우린 유도 뭐 처음부터 잘했나? 다 노력하고 하니까 지금 이 정도까지 왔잖아. 연기도 마찬가지일 거야. 틈틈이 공부해 봐. 그럼 분명 잘하게 될 거야.”

사람을 위로하고, 조이고, 앞으로 끌고 가는 건 역시 강한결이었다.

그런 특기가 있는 강한결의 말에 황석은 그제야 좀 안심하는 얼굴이 됐다.

“걱정마. 다 잘될 거야.”

“응, 알았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황석을 향해 지영도 웃었다.

‘걱정 마. 내가 다 잘 되게 할 테니까.’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삶이다.

가족도, 친구도.

어쩌면 자신이 회귀를 한 건 함께 다 같이 행복해 보라고 시켜준 게 아닐까? 지영은 그런, 제법 타당성 있는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황석의 연기자 데뷔 건은 이쯤에서 마무리가 됐다. TV를 함께 보다가 방으로 들어온 지영은 이선영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내 동생!

시끌벅적하다.

그리고 평소보다 텐션이 높다.

“술 마셔요?”

-어! 저번에 임스테이 너 소개시켜 주면서 얹어놨던 빚이 하나 있거든? 그거 지금 써먹는 중이지! 흐흐!

“아…… 절 팔았네요?”

-팔기는! 다 너 잘되라고 이 누나가, 어! 마! 어!

뭐라는 건지…….

알코올에 뇌가 지배당한 사람의 기분은 역시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지영은 얼른 용건만 전달하려고 했다.

“누나, 석이 출연해 보겠대요.”

-어? 진짜? 오예! 빚 하나 더 챙기겠다! 흐흐! 바로 전달해 줄게!

“네.”

-참, 지영아.

“네?”

-이석도 회장, 사임할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는데 그런 얘기가 돌더라?

“아 그래요?”

뭐, 그렇구나.

하는 느낌밖에 없었다.

복수를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아쉽지만, 반대로 이우진과 다음엔 제대로 해볼 수 있겠단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응. 아마 이달 내로 사퇴할 것 같아. 앞으로 너 판정으로 곤란할 일은 없을 거야.

“네, 고마워요, 누나.”

-고맙기는? 이번엔 나 뭐 한 것도 없어. 오랜만에 취재 좀 해보려고 하긴 했는데 알아서 나가버린 거니까. 좀 싱겁긴 하다, 나도.

“그래도요.”

이선영에게는, 대회를 갔다 오며 선물 하나 준비해야겠단 생각이 곧장 들었다. 그때 보니까 가방이 많이 낡았던데, 적당한 걸로 하나 사다 줘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받았으면, 그만큼 돌려주는 것. 굳이 기브 앤 테이크를 철저하게 따지자는 게 아니라 이게 지영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네! 아 알았어! 들어갈게! 지영아, 나중에 또 통화하자. 알았지? 끊는다!

“네, 들어…….”

뚝.

누가 이선영을 불러서, 통화는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됐다.

전화를 끊은 지영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다음은 자연히 이석도 회장에게 생각이 나아갔다.

“왜 그만뒀지?”

솔직히 지영은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회장직을 사퇴하는지, 솔직히 아쉽기도 했고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뭐, 그만뒀다니까.”

이제 제대로 시합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 이빨 사이에 낀 이물질이 빠져나간 청량함도 느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공부하자.”

지영은 잡생각은 그만하고, 노트와 교과서를 펼쳤다.

지영이 시합 일주일 전 정도가 아니라면 절대 빼놓지 않는, 복습의 시간이었다. 11시가 넘어, 12시가 다 되도록 공부를 한 지영은 침대에 누워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금요일이 됐고, 금요일 점심나절부터 임스테이 관련 검색어가 실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워낙에 시즌 1이 성공적이어서, 시즌 2에 대한 기대감에 방영 전인데도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그런 기대 속에 6시쯤 첫 손님으로 메인 예고편에 나온 지영과 친구들의 이름도 실검에 스윽, 합류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