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0화
50화. 청소년 선발전(6)
절반.
시작과 동시에 유리한 고지를 점한 건 맞다.
전쟁으로 치면 높은 능선을 먼저 선점했고, 그 능선 아래서 올라오는 적군을 맞받는 상황쯤 될 거다. 그만큼 절반은 유리하다.
하지만 지영은 자신이 조금도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편파는 없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아니었다.
지금 분명 경기가 중계되고 있을 텐데도, 지영에 대한 압박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씨발! 이건 진짜 너무 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임대성이 폭발했다.
지영은 그런 임대성을 말리지 않았다. 코치는 사실 이런 문제에 강력하게 항의해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선수가 경기 중에 항의해봐야, 퇴장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연희고 임대성 코치! 말이 심합니다!”
“이럴 거면 그냥 AI 심판을 들여! 아니! 박 감독님? 저게 어떻게 절반입니까? 네? 아니 어떻게 저게 절반이냐고요! 저렇게 떨어졌는데 절반을 주면 대체 한판은 어떻게 넘어가야 합니까? 등으로 뚝 떨어져서 갈비, 쇄골 다 박살 날 정도로 처박혀야 한 판 주는 겁니까?”
임대성이 불같이 밖에서 모니터링을 하는 부심에게 항의했다.
그런 임대성의 항의 때문에 시합은 잠시 멈췄다. 그 사이, 지영은 황영길을 살폈다. 역시 제대로 한 바퀴 날아가더니 눈빛이 변했다.
차라리 잘 됐다.
어차피 그냥 기회조차 주지 않고 시합을 끝내려고 했는데, 잘하면 시합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임대성이 저렇게 항의한다고 절반이 한판으로 바뀔 것 같진 않으니, 지영은 다시 시합을 준비했다.
“퇴장! 나가세요!”
그리고 역시 격렬히 항의하던 임대성은 퇴장당했다. 하지만 그냥 나가진 않았다. 정식으로 이의제기를 할 거라고 크게 외친 뒤에야 나갔다. 나가면서 지영을 보는 강대성의 눈빛에는 흥분은 조금도 없었다.
잘해라.
딱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은 눈빛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부러 그런 거다. 퇴장을 각오하고, 강력하게 항의해놔야 다음 판정에 조금이라도 감안이 될 수 있어서 굳이, 일부로 퇴장을 당하며 이렇게 항의를 쏟아낸 거다.
축구 경기에서 이상한 판정을 내린 심판에게 감독이 거칠게 항의하는 것과 비슷한 거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더더욱 판정이 불리해질 수 있어서 사실 임대성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벌어졌으니, 오늘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가문 프랜차이즈? 크긴 할 거다.
하지만 지영이 속한 학교는 연희고.
연희재단 또한, 만만치 않은 곳이니 아마 분명 크게 문제가 번질 소지가 컸다.
하지만 그전에…….
시합이 먼저다.
큼큼, 하지메!
헛기침 뒤에 시작을 외친 심판.
지영은 그 심판의 얼굴을 보고 그가 강원권 심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로 보아 아마도…… 받아먹은 돈이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이제 시합에 집중한다.
지영은 자세를 낮추고 다가오는 황영길에게 가슴 깃을 먼저 줬다. 잡기 싸움 하다가 한 번이라도 쳐내면 분명 지도를 줄 테니, 이건 그냥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시합은 지영에게는 익숙했다.
원래 잡기 싸움을 안 하니까 말이다.
툭, 툭.
가슴 깃을 잡은 황영길이 가슴 깃을 털며, 뒤로 빠졌다.
지영은 그 순간 쫓아가며 모두걸기를 강하게 쓸었다.
붕! 몸이 뜨긴 했지만 애초에 메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지영의 모두 걸기에 중심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메칠 의도가 없다고 했지, 아예 의미가 없는 공격은 아니었다. 이렇게 한 번 공격으로 상대의 중심을 무너트리기 위해 그 빡센 벌크업까지 한 지영이었다.
타이밍을 누구보다 잘 잡는 지영이라 이제는 기술 하나하나가 아주 위협적이었다.
지영은 무너진 황영길에게 바짝 붙었다. 그리곤 가슴과 목깃을 잡고 원을 그리며 당겨서 가슴에 딱 붙였다.
허리기술 선수한테, 이런 식으로 잡히면 솔직히 답이 안 나온다. 뿌리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렇게 잡히면 힘이 압도적으로 좋지 않은 이상 밀어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기술을 방어하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거고, 아니면 아예 매트에 엎드려 굳히기 포지션을 스스로 취하는 것뿐이었다.
황영길은 후자를 택했다.
지영을 뜯어내려다가 안 되겠는지 중심을 낮추면서 무릎을 꿇으려는 찰나, 지영이 움직였다.
허리기술 모션에 그대로 뒤치기. 덧걸이까지 같이 걸었으니 황영길이 움찔했다가 제대로 기술에 걸려 뒤로 굴렀다. 하지만 이번엔 한판은 애매한 정도로 넘어갔다.
그런데 점수가 안 들어온다. 불만이 생겼지만,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절반을 하나 더 주면 한판이다. 거기에 이미 찍혀도 제대로 찍힌 터라 이 기술에 점수를 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이제는 점수를 따려면, 진짜 완벽하게 한판을 날려야 했다.
지영은 굳히기를 포기하고 일어나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시합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어주지.’
이호석이 조르기로 갔다면, 넌 심판의 편애를 받고도 이기지 못한 굴욕을 안은 채로 시합장을 떠나게 해줄게.
하지메!
다시 시작된 시합.
황영길의 얼굴에서 이제 여유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실력이 좋은 선수는 맞다. 실력이 없다면 날고 긴다는 선수만 나오는 체전에서의 우승은 절대로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지영이 피지컬을 단련하며 대학부 선수와 동등해지자, 많은 것들이 차이 나기 시작했다. 일단 여유. 힘들었던 일을 겪었고, 회귀를 했기 때문에 시합에 집중하는 정신상태가 달랐다.
유도는 본능이 지배하는 경기에 가깝다.
자유 연습이나, 시합이더라도 상대가 자신보다 한참 약하면 이성적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게 가능하지만 실력이 비슷하면, 이성적으로 움직이기보다 그간 몸에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본능적인 경기를 하게 된다.
조금만 방심해도 홱 날아가는 상황에서 ‘아 기술 들어오면 막고, 되치기해야지?’ 이런 생각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지독히도 이성적인 선수들은 그게 가능은 하겠지만, 그런 선수는 손에 꼽고 일단 그렇다고 해서 실력까지 좋다는 보장은 또 없었다.
그런데 지영은 실력도 탑 수준인데, 모든 순간에 이성적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선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너무나 잘 보였다. 중심이 뒤로 가면 안다리, 안뒤축, 중심이 앞으로 오면 허벅다리, 업어치기, 굳히기 상황에서도 찰나의 틈을 파고들 수 있는 여유가 그에게는 있었다.
이건 굉장히 강력한 무기였다.
어쩌면 지영을 이 순간, 정말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주된 것도 바로 지금처럼 어떤 순간에서도 가능한 이성적인 사고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특히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해지고 날이 서는 날엔, 지영 특유의 능력이 또 나온다.
뭔가에 씌인 것처럼, 신기가 든 것처럼 시합할 때가 있다. 그걸 그의 친구들은 ‘지영의 그 날’이라고 불렀다. 신기하게도 지금 막, 그런 상태에 진입했다.
무표정한 시선.
그러나 지영은 황영길이 손을 뻗어오는 걸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확인했다.
‘가슴 깃.’
목표는 가슴 깃.
가슴 깃은 내줬다. 여긴 내줘도 상관없으니까.
가슴 깃을 내주고, 어깨 깃을 잡았다.
그리고 안쪽으로 툭 털며 오른발을 집어넣었다. 황영길이 오른발을 넣자 빙글 돌아, 말아업어치기를 걸었다.
분명 그 속도는 빨랐겠지만.
지영의 체감은 느렸다. 그가 왼발을 회전시키며 뒤로 앉는 순간, 지영은 뒤로 물러나며 스텝을 교차해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밭다리.
후리기도 아니고, 걸기도 아닌 그냥 찍기.
상체가 이미 회전 중에 들어간 밭다리. 기술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아 아직 지영을 당기지도 못한 상태에서 걸린 밭다리. 그 밭다리는 황영길의 중심을 순식간에 무너트렸고, 정 자세로 뒤통수부터 매트에 처박혔다.
콰앙!
매트가 터질 것처럼 굉장한 소리가 났다.
본능적으로 낙법을 쳤기에 망정이지, 만약 못 쳤으면 뇌진탕이 왔을 정도로 강력하게 처박혔다.
멍…….
끔뻑끔뻑.
뭔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판단도 못 해 그저 멍한 황영길을 보며 지영은 도복을 놓고 일어났다. 그리곤 심판을 바라봤다.
“…… 잇폰.”
심판의 입에서 나오는 한판 선언에, 지영은 그제야 짧은 그 날에서 풀려나며 아차 싶었다.
‘끝까지 가지고 놀기로 했는데…….’
저도 모르게, 그냥 보여서 밭다리를 찍어버렸다.
마치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아주 탐스러운 과실을 눈앞에 둔 것처럼 참지 못했다.
틈이 보이는 순간, 그냥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해버렸다.
아쉬웠다.
더, 더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한숨을 내쉬며 도복을 고쳤다.
승자 선언이 나고, 밖으로 나오며 시선이 마주친 이우진.
이우진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지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 *
준결승전이 전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체급별 결승전.
이선영은 30분 휴식 시간을 이용해 이곳저곳 파고 다니기 시작했다.
황금세대, 연희고 아이돌들은 아주 훌륭하게 결승까지 안착했다.
하지만 과정은 훌륭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래도 한 달 정도?
유도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접하다 보니 이제 어느 정도가 한판인지는 딱 보면 알 수 있는 경지였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지영의 경기는 최악이었다. 시작부터 너무 확실한 한판이 나왔지만, 그걸 절반을 줬고 두 번째 던진 건 아예 주지도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편파 판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관중석에서, 아주 오랜만에 쌍욕을 입에 담았다.
준결승이 전부 끝나고,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영에게 미안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래도 중계가 시작되면 이전과 같은 편파 판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깨끗하게 그녀가 했던 말은 빗나갔다.
작정했는지, 강지영이란 선수를 죽이는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단순한 기자 정신 말고도, 감히 이제는 친한 동생이 된 지영을 건드린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것만 해도 그녀가 움직일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은 심판과 감독이었다.
‘한 협회가 똘똘 뭉쳤다면 이미 말이 나오고도 남았어.’
그런데 그러지 않은 상태라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나 아니면 엄청 은밀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아주 일부만 썩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세 번째일 확률이 높았다. 모든 협회에는 썩은 간부가 존재하지만, 그에 반대되는 이들도 분명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협회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긴 하는 거니까 말이다.
그렇게 잠시 돌아다니던 이선영은 귀를 쫑긋했다.
“네, 교수님. 아이고, 연희고 아들, 잘하대요. 네, 결승 다 올라갔습니다. 네네. 많이 가져오면 두 개 세 개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장대호도 올라갔고요. 우리 애들 안되겠더만요.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교수님, 협회 이석도 회장 선을 자꾸 넘습니다.”
바로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지 손자 1등 시키려고 아주 발악해대는데 얼마나 꼴사나운지, 오늘 그것도 중계로 다 나갔을 겁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쉬십시오, 교수님.”
용인대 코치다.
용인대 코치는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는 그대로 체육관을 나가 흡연 부스 쪽으로 향했다. 이선영은 잠깐 멈춰서서 화장을 잽싸게 고치고, 입술도 촉촉하게 탈바꿈시켰다. 그리곤 흡연 부스에 입장.
이어서 영업할 때나 태우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가방을 뒤지는 척을 했다.
라이터? 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저, 라이타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게 더 직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