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8화
48화. 청소년 선발전(4)
두어 달?
그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승아는 부쩍 큰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으차. 승아 많이 컸네?”
“응! 나 밥 엄청 잘 먹는다?”
“잘했네. 앞으로도 편식하면 안 돼요?”
“응!”
지영은 밝게 대답하는 승아를 안아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그게 또 좋은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승아였다.
“얘가 진짜! 얼른 이리 안 와!”
그런 승아를 보며 선미 씨가 기겁했다.
지영은 지금도 시합을 앞둔 상태라 얼른 와서 승아를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승아는 그게 또 싫은지 지영의 품으로 몸을 돌려 그를 꼭 안았다.
지영은 그래도 승아 덕분에 이호석과 편파 판정 때문에 차오르려던 독기가 가라앉고 있어서 고마움을 느끼던 상태라 다가오는 선미 씨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승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요.”
“아니, 그래도, 아, 정말 얘가 진짜…….”
지영의 말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신 선미 씨.
그런 선미 씨의 옆에 처음 보는 분이 계셨다.
지영과 시선이 마주친 의문의 여성. 하지만 지영은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눈치챘다.
‘선미 씨 동생이구나.’
둘이 엄청 닮았다.
나이 차이가 상당한 걸로 아는데 이건 뭐, 선미 씨가 젊어지거나 저분이 나이를 조금 먹으면 둘이 판박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니 딱 봐도, 승아의 이모 되는 분 같았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고개 숙여 먼저 인사를 해오는 여성.
“네, 안녕하세요.”
“네. 승아 이모 한선아예요.”
한선아.
이름이 낯이 익었다.
‘아, 충북 최우수 선수.’
체전이 끝나고 입상자들을 모아 장려상, 지도자상, 우수 선수상 이런 걸 수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최우수 선수를 받은 사람이 한선아였다. 그녀는 충북체고 태권도부고, 이번 체전에 태권도 종목에서 유일한 K.O.승을 거둔 선수였다. 그것도 결승전에서.
그땐 사실 별로 관심이 없어서 쳐다도 안 봤는데, 지금 보니 승아의 이모가 한선아였다.
“저희 언니랑 가족들 구해주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 네.”
꾸벅.
운동선수 특유의 걸걸함이 없다.
물론 전체적인 선은 운동선수였지만 말이다. 인사는 딱 거기까지였다. 지영은 주말에 쉬시는 강한결의 어머니가 가져다준 김밥과 어묵 국물, 바나나를 승아와 나눠 먹었다.
그런 그와 승아를 다들 신기하단 눈으로 봤지만 지영은 이게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김밥 두 줄 중에 한 줄은 승아가, 한 줄은 지영이 먹었다.
그리고 바나나 두 개도 나눠 먹었다.
1시간.
소화 잘되는 음식으로만 부담 없이 먹어주는 게 좋았다. 김밥은 그런 면에서 사실 탈락이지만 간편하게 먹는 걸로는 김밥만 한 게 없었다. 거기에 어묵 국물도 있어서 소화에 문제는 없었다.
김밥을 먹고 식곤증이 올라오는지 살살 조는 승아를 한선아가 조용히 데리고 갔고, 지영의 주변으로 친구들이 모였다.
“지영아. 판정 계속 이렇게 나오면 괜찮겠냐? 나중에 이우진 결승 올라오면 더 할 것 같은데?”
이성진의 물음에 지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우진은 떨어지지 않았다. 지영은 용인대 1학년 다른 에이스와 붙고, 반대쪽 시드에서 이우진과 구혁이 붙는다. 자신의 체급에서 나름 천재 소리 듣던 선수들은 아무도 탈락하지 않았고, 지영과 함께 4강까지 올라왔다.
그중 이우진과 구혁이 A시드에서 준결승을 한다.
이석도 회장이 대놓고 편파 판정을 준다면 실력이 조금은 이우진보다 나은 구혁도 쉽게 이기기 힘들게 분명했다.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기가 차네.’
심판을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이석도 회장의 권력은 정말 막강한 수준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영은 역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괜찮아. 절대 절반을 줄 수 없는 한판으로 이기면 돼.”
“지금처럼 굳히기로?”
“응. 누르기 한판은 절대 절반 줄 수 없을걸?”
지영은 8강도 굳히기로 끝냈다.
이호석은 조르기 한판. 조현준은 누르기 한판, 좀 전 판도 누르기 한판승을 거두고 4강까지 왔다.
“굳히기 상황 자체를 주지 않으면?”
“응? 아, 아아. 그러네.”
황석의 말에 강한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팍 찌푸리며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그 말에 지영도 잠시 아차 싶었다. 굳히기 시간을 주는 건, 심판 재량이다. 예전에는 서서 던지는 쪽을 발달시키려고 일부러 굳히기 시간을 짧게 줬었다. 하지만 요즘 국제유도 추세가 굳히기에 제법 긴 시간을 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국내대회도 굳히기에 제법 시간을 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도 심판 재량이었다.
한창 굳히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상태에서 그쳐 선언을 하면, 지영으로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유도는 사실, 심판의 영향이 꽤 대단하다.
펜싱이나 태권도 호구처럼 전자 기기가 들어가 점수를 내는 게 아니라서 더욱 그랬다. 심판을 제외하면 부심이 둘이나 있지만 그 전체가 마음을 먹으면 비슷한 실력의 선수들끼리의 시합은 이미 한쪽이 승률 99%를 자랑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유도라는 스포츠의 고질적인 문제.
‘생각해 보면 회귀 전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어.’
초등학교 대회를 나가보면, 딱 봐도 말도 안 되는 판정들이 보이는 경기가 많았다. 이런 경우는 보통 학교 자체가 힘이 있는 경우였다. 아주 애매한 판정이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게임에서 이 힘이 작용하면, 답도 없었다.
지금 현재는 이석도 회장이 대놓고 지영을 저격하는 상황.
이걸 엎으려면 이석도 회장을 날리거나, 아니면 지영의 시합에 이석도 회장의 반대쪽에 서 있는 심판이 배정되어야 하는데…….
‘그럴 리가 없겠지.’
그건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상황을 해결해 줄 동아줄이 내려왔다.
“지영아.”
“네, 어?”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이선영 기자였다.
이선영이 그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김선욱과 함께 두 칸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누나 여기 웬일이세요?”
“나? 중계 준비랑 너 인터뷰 따러 왔지.”
“인터뷰? 중계요? 선발전 이거 중계 나가요?”
그런 소린 못 들었는데?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파는 게 방송국이고, PD들이야. 너, 그때 너 찍어간 3화짜리가 시청률 얼마나 나왔는지 확인도 안 했지?”
“네, 뭐…….”
“고작 충주 방송이 시청률 19%. 3화는 25%.”
“…….”
“인터넷으로는 얼마나 봤을까? 충주 MBS 채널에 올린 너 영상 3화 총 합쳐서 천만이 넘어. 이런데 방송국이 안 움직이겠니?”
아아…….
움직인다. 지영이 그쪽으로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뭔가를 만드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화, 드라마, 예능, 음악, 그림, 조금 마이너로 내려가면 도자기, 철기, 이런 걸 만드는 사람들이 그랬다.
좋게 말하면 장인정신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과에 목숨을 걸었다고 봐도 좋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연예인도 아닌 일반 학생이자, 운동선수인 지영의 영상이 그렇게 잘 팔렸다면 당연히 가만히 있을 방송국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 시합이 있네?
그것도 아시아 청소년 대회 선발전이?
방송국이 안 움직일 리가 없었다.
이미 지영으로 인해 재미를 똑똑히 봤는데, 다시 한번 노를 저을 기회를 그냥 날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선영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려, 본사가 움직여 중계권을 땄지. 체전 때 기억하지? 그거 생각하면 돼.”
“아…….”
“그런데, 뒤에서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 뭔가 곤란한 상황 같은데, 누나가 잘못 들었나?”
하여간 진짜.
대단한 사람이다.
기척도 없이 스윽 들어와서 지영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일단 경청, 문제가 생긴 걸 알고는 적당한 타이밍에 다시 스윽 개입했다. 지영은 이선영을 믿기 때문에 지금 처한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그러자 이선영은 눈을 반짝인 뒤 으스스한 표정으로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살쾡이 같았다.
“이석도 회장이…… 가문 프랜차이즈 회장이었지, 아마? 이 양반 안 그래도 말 많은데 정신 못 차렸나 보네?”
가문.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가봤을 중식 프랜차이즈 가문과 한식 프랜차이즈 가정, 그리고 일식 가화와 치킨, 족발 프랜차이즈까지 가지고 있는, 잘나가는 프랜차이즈 기업이었다. 그곳의 대표가 바로 이석도였다. 전 용인대 총장 뒤로는 계속 기업의 회장이 유도회 회장을 맡아왔다.
“석훈아. 누나 오랜만에 펜 좀 잡아야겠다.”
“어휴……. 이제는 더 쫓겨날 곳도 없습니다, 누님.”
“뭐, 잘리면 프리랜서로 뛰지 뭐. 그리고 아무리 지방이라지만 MBS가 가문 프랜차이즈에 밀릴 정도는 아니잖아? 오히려 골로 보내면 보냈지. 됐고, 내일부터 저 집안 좀 파봐.”
“에휴, 네네. 알겠습니다.”
으쓱.
김석훈은 어깨를 으쓱하곤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이선영이 지영을 보며 말했다.
“저쪽 봐봐. 저기 카메라 세팅하는 거 보이지?”
“네? 네. 아, 보여요.”
“아마 저기 돌아가기 시작하면, 체전 때 엄청 뭇매 맞아서 편파는 못 할 거야. 그때도 욕 오지게 먹었잖아?”
“하하, 그랬죠.”
“그러니 심판 문제는 해결됐을 거야. 대신, 이따가 끝나고 인터뷰 좀 해주라.”
“인터뷰요? 알았어요. 근데 저는 많이 했는데, 더 할 게 있어요?”
“너 포함, 황금세대 전체. 야, 너 말고 다른 애들도 엄청 궁금해하거든? 뭐 너만 잘난 줄 아니?”
이선영의 말에 지영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선영과 연이 닿아 그런 다큐 아닌 다큐를 찍은 거지, 자신의 친구들도 절대 꿀리지 않는 스타성을 가지고 있었다.
“뭐야. 우리 지영이, 자기만 잘난 줄 알았어? 호호!”
이선영이 놀리기 시작하자 다른 친구들도 대번에 거기에 동참했다.
지영은 착, 귀를 닫았다. 반응해 주면 정말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전화가 와 이선영이 자리를 피하고, 강한결이 웃으며 지영에게 말했다.
“잘됐다. 저 기자님 때문에 잘 해결되겠어.”
“그러게.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솔직히 이선영이 여기 올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그런데 그녀가 오고, 지영이 찍었던 다큐 아닌 다큐 때문에 방송사가 중계하러 오면서 상황이 반전될 기미가 보였다.
“미치지 않은 이상, 체전 때 그렇게 욕 처먹고 또 그 짓을 하진 않겠지.”
“어쩌면 첫판부터 그렇게 편파 판정한 게 오늘 방송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
“어떻게든 지영이를 예선에서 떨어뜨리려고?”
이성진의 말에 임효중이 답하고, 이성진이 되묻자 그 대답은 진중한 황석에게서 나왔다.
“아마 방송이 나가는 걸 오늘 보고 받았을 거야. 회장은 보통 자잘한 실무에는 신경 쓰지 않잖아. 그래서 부랴부랴 널 떨 준결승 전에 떨어뜨리려는 거지.”
“음, 석이 말이 일리 있네.”
뭐, 더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 이건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니까.
하지만 상황이 풀렸다는 건 확실했다.
강한결이 시간을 확인하곤, 도복을 챙겨 일어났다.
“자, 준비하러 가자.”
“어, 벌써 1시네. 끄응! 자, 금메달 따러 가보실까?”
“또 또 입방정. 그러다 신지혁 만나기도 전에 날아간다?”
“너나 그 입! 요망한 입! 부정 타면 다 강한결 네 책임이다!”
“지면 실력이지.”
“어, 말이 다른데?”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도복과 짐을 챙기는데, 승아가 일어났는지 쪼르르 달려왔다. 안아달라는 것처럼 달려와 살짝 안아서 올리자, 승아가 볼에 뽀뽀를 했다.
승아의 뽀뽀에 지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놀랐다. 슬픈 일이지만, 지영의 볼을 입술로 훔친 건 아마 어머니를 빼면, 승아가 두 번째였다.
27년 인생, 통틀어서.
“오빠 금메달!”
해맑은 승아의 미소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금메달 따올게.”
“약속!”
“응, 약속.”
약지를 걸어 도장까지 찍어준 뒤, 지영은 다시 경기장으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와 몸을 풀기 위에 매트 위로 올라선 순간, 지영의 눈은 변해 있었다.
승아에게 따뜻하게 웃어주던 선한 오빠가 아닌, 시합을 앞두고 독기가 올라온 선수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