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3화
33화. 임스테이(5)
제안은 감사하나, 거절해야 할 때가 있다.
지영은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연기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다. TV에 나오는 배우들을 보면서 와 멋있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은 해봤으니까. 지영도 당연히 사람이라서 배우들의 삶은 어떨까 하는 그런 상상을 당연히 해봤었다.
하지만 그건 딱 상상만이었다.
지영은 자신이 지금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유도.’
방송?
해보고 싶었던 건 맞다.
이 또한 해볼 수 없었던 거니까.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다음 떠오른 건 여행이다.
주식이 잘되면,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2순위, 3순위다.
진짜 원하는 건 유도였다.
지영이 가장 갈망했던 것.
사고 이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자기합리화로 유도장을 찾아간 건, 말 그대로 유도가 그리워서였다. 다행히 코치에도 재능이 있어서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끝끝내 소년체전 금메달 선수를 키워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직접 밟지 못하는 매트를 지켜만 보고 있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괴로웠다. 아무리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고 해도 그게 잘되지 않았다. 지영은 그 감정을 고스란히 품은 채로 회귀를 했다.
그래서 유도가 1순위였다.
그것보다 더 우선되는 게 있다면, 가족의 행복이고.
연기는 애초에 해보고 싶단 마음이 있어도 그게 지영에게 갈증을, 갈망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거절했다. 그걸 예상했는지 이선영도 그 이상 권하거나 하진 않았다. 이선영이란 사람은 그게 참 좋았다.
“기자님.”
“네?”
“이제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사실 좀 답답하긴 했어. 근데 아무리 어려도 막 반말하면 지영 군이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열심히 참았지.”
“하하, 그러셨어요? 그럼 이제는 진짜 편하게 하세요. 저 괜찮거든요.”
“그래. 그렇게 할게.”
씩 웃는 이선영에게 지영은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기자님.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세요?”
“응? 그건 또 뭔 소리?”
“아니, 그렇잖아요. 아무리 제가 그때 승아랑 가족을 구해주긴 했지만 그때 반짝하고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잖아요. 딱히 영상으로만 봤을 때 제가 그렇게 막 임팩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건 보는 사람 관점에 따라 다른 거야.”
“어, 그래요?”
“그럼, 다르지.”
후.
입이 말랐는지 상당히 오래 쓴 가방에서 물을 꺼내 목을 축인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지영 군은 그때 그냥 보였으니까 구했다고 했지?”
“네.”
사실은 이미 한번 겪었기 때문에 몸이 반응한 거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정말 진지하게 정신과 치료를 권해줄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지영은 인터뷰 당시에도 우연치 않게 보여서, 저도 모르게 구했다고 했다.
겸손하면서도 사실을 숨길 수 있는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그래. 그럴 수는 있어. 그런데 그런 학생이 사실은 정말 재능이 뛰어난 유도 선수고, 그 또래의 친구들도 그 친구랑 비슷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외모까지 엄청난데 거기에 인성까지 장난 아니면, 그땐 의미가 좀 변하는 거야.”
“아, 또 그런 거예요?”
“그래. 그런 거야. 지영 군이 올림픽 때만 반짝하는 유도를 하니까 지금 이 정도인 거지, 전 국민이 좋아하는 야구나 축구를 했으면 지금 엄청났을 거야. 알지? 반지의 제왕 안정환 선수. 그 선수 외모는 진짜 그 시절엔 웬만한 미남 배우도 비비기 힘들었을 정도로 넘사벽이었어. 그리고 실력도 최고여서 정말 엄청난 팬덤을 몰고 다녔지. 월드컵 때 당시 소속팀이 이탈리아만 아니었어도 박지성 선수 버금가는 대형 선수로 성장했을 거야.”
“…….”
아, 안정환 선수.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세리에A 소속팀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커리어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확실히, 두 개의 심장을 가졌다는 박지성 선수만큼이나 성공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건 지영도 동의했다. 실제로 그 선수의 일대기를 보면서 지영도 그랬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피겨퀸 김연아 선수도 그래. 실력에 인성 또한 엄청나서 그녀는 피겨 불모지인 한국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 그럼 지영 군. 이 사람들은 외모와 인성, 실력이 엄청났잖아? 그럼 알아서 유명해진 걸까?”
“음, 그러지 않았을까요?”
“땡. 아니야.”
이선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지영은 곧 다른 답을 내놓았다.
“아,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조명하기 시작해서?”
“딩동댕. 역시 머리가 좋다니까? 맞아. 아무리 안정환 선수가 잘생기고 실력이 엄청났어도, 김연아 선수가 피겨의 퀸이라고 불렸어도 그건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조명하지 않았다면 결국 그 정도로 임팩트 있게 터지지 않았을 거야.”
“아…….”
이해가 간다.
누군가의 관심.
스타는 굳이 언론이라는 거대한 것 말고, 그냥 어떤 개인의 관심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관심을 주는 사람을 팬(fan)이라고 한다.
“혹시 지영이 너 하시모토 칸나라고 아니?”
“어, 음. 아니요. 일본 사람 같은데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응. 모를 것 같았어. 이 하시모토 칸나는 천년돌로 불리거든? 천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아이돌이란 뜻이야. 칸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던 무명 아이돌에서, 사진 한 장으로 인생 역전을 해버렸어.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팬이 찍어준 사진 한 장이 이 애의 인생을 바꿨어. 우리나라로 따지면 무명 아이돌에서 지금 최고로 잘나가는 여배우가 된 거지. 정말 한순간에.”
“아…….”
“원래 스타는 이런 관심에서 시작되는 거야. 물론 나는 처음에 강지영이란 학생이 궁금했고, 직접 눈으로 볼 겸 해서 체전까지 찾아간 거고. 그때 생긴 아주 조금의 팬심과 방송국 직원이라 그래도 뭔가 일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지영이 너한테 방송을 제안한 거고.”
음. 이해됐다.
그런 마음이라면, 지영은 자신이 답해야 할 건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그래, 그렇게 그냥 받아주면 돼. 그리고 지금처럼 열심히, 멋지게 해나가면 되고.”
“네. 고마워요, 누나.”
“누나? 오, 이건 좀 기분 좋은데?”
씩 웃는 이선영을 보며 지영은 가만히 웃었다.
역시 고마운 사람이다.
사실은 이모뻘이지만 앞으로 누나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이선영이 물러나자 지영은 일어나서 친구들한테 갔다. 여지없이 따라붙는 카메라. 이번에는 임스테이 서브작가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이 슬쩍 말을 걸어왔다.
“아까 연기는 칼같이 싫다고 했잖아요? 그건 왜 그런 거예요?”
지영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답을 줬다.
“제 길이 아니니까요. 저는 연기의 연 자도 모르고요, 지금 제가 잘하는 건 연기가 아니고 운동이니까요. 그런데 단순히 잘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에요. 저, 좋아해요.”
“네? 뭐를요? 운동이요?”
“네, 유도. 좋아해요.”
“아…….”
지영의 대답에 서브 작가는 작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리곤 슬그머니 물러났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영은 유도가 좋았다.
갈망을 느꼈을 정도로 말이다.
오두막에서 부용 하우스의 중간쯤 올라왔을 때 전화가 왔다.
“어, 한결아.”
-어디야?
“나 숙소 올라가는 길? 넌?”
-나 지금 숙소 오른쪽에 보면 하우스 하나 있거든? 좀 추워서 애들이랑 거기로 들어왔어. 너도 이쪽으로 와. 여기 화목난로도 있고, 되게 아늑하다.
“응, 알았어.”
안 그래도 좀 쌀쌀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강한결이 말한 대로 부용 하우스 오른쪽에 눈 덮인 하우스가 하나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자 친구들이 난로 주변에 모여 불을 쬐고 있었다.
“요! 지영!”
“머리…… 눈싸움했어?”
“어! 흐흐! 효중이 눈밭에서 업어치기 했다가 핵발렸어. 흐흐!”
그럼 당연히 발리지…….
도복을 입었으면 모를까, 중심 하나로 먹고사는 임효중한테 눈밭에서 대들었으면 지영이나 황석도 바닥을 굴렀을 거다.
“지영아. 넌 어디 갔다 왔어?”
황석이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
지영은 그 옆에 앉으며 아래 오두막에 갔다 왔다고 답했다.
“아래 오두막 갔다가 엄마랑 통화하고, 사진 찍어 몇 장 보내드리고, 그러다 올라왔지. 넌?”
“나는 그냥 애들이랑.”
“좀 둘러보고 오지 그랬어? 나중에 은정이랑 오면 좋잖아.”
“음, 은정이랑 오면 은정이가 코스 다 짜서 난 할 필요 없어.”
“아, 하긴…….”
한은정이면, 아마 석이를 자기 입맛대로 끌고 다닐 게 분명했다.
넌 어디 가고 싶어? 바다? 응 그럼 산에 가자! 이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제멋대로여도 황석을 한은정만큼 생각하는 여자도 또 없어서, 지영도 한은정이 고맙고 좋았다.
“시합 공지 올라왔다.”
그때 들려온 강한결의 목소리.
“시합? 무슨 시합? 선발전?”
이성진이 고개를 내밀며 묻자 강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청소년 선발전. 12월 11일에 하네.”
“12월 11일이면 거의 한 달쯤 남았네.”
“아, 살 빼려면 힘든데…….”
원래 이미 하고도 남았어야 하는 시합이었다.
1년 대회 스케줄은 전부 연초에 계획이 잡혀 각 학교로 날아간다. 하지만 청소년 선발전이 있을 시기에 코로나 대유행 조짐이 보여 취소됐었다. 그래서 올해는 안 하나 싶었는데, 12월에 시합을 연다고 공지가 올라왔다.
“그리고 아시아 청소년이 12월 29일.”
“시합 끝나고 거의 바로네?”
“체중감량 때문에 길게 시간 안 주고 차라리 유지하라 이거지.”
강한결의 말에 임효중, 이성진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시합이라.
그것도 아시아 청소년 출전권이 걸린 시합이었다.
“어떻게 할래?”
강한결의 물음에 다들 고민하는 얼굴이 됐다.
보통의 운동부라면 이런 대회는 무조건 출전한다. 하지만 연희고는 특수했다. 올해만 해도 전국체전까지 딱 세 개의 대회만 나갔고, 그 외의 대회는 나가지도 않았다. 심지어 홈그라운드인 청주에서 열리는 직지 컵도 나가지 않은 연희고였다.
이유는 하나.
잦은 감량이 주는 스트레스로 인해 학업과 건강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학교 측도 많은 대회를 나가는 건 권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시합은 중요한 대회 몇 개만 참석하고, 그건 일단 다섯 명이서 결정했다. 그리고 그걸 임대성과 상의하고, 상의 끝에 학교에 전달한다.
한 번의 기회라도 더 잡기 위해서 모든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과는, 궤가 다른 길을 걷는 연희고였다.
‘아시아 선수권이라……. 어머니랑 했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번 12월을 바짝 달리면 어차피 시간이야 충분히 남으니까.’
지영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나는 참가.”
지영이 먼저 운을 떼자, 뒤는 바로 황석이 받았다.
“나도 참가.”
“아, 감량……. 참가요.”
“나만 놀긴 좀 그렇지? 나도 참가.”
“결정됐네. 코치님한테 전원 참가한다고 전달할게.”
마지막 강한결의 대답에 지영을 포함한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지만, 지영은 어차피 좀 더 강한 선수와의 시합에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이미 고등부에서는 사실상 적수가 없다. 그러니 적수를 찾으려면, 대한민국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부나 실업 선수들이 나오는 선발전에 나가도 되지만, 지영은 아직은 태릉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대회는 갈증을 해소할 아주 좋은 대회였다.
단순히 아시아 청소년 대회지만, 여기에는 각 나라의 유망주들이 대거 참석한다.
‘특히 일본 애들…….’
한차례, 과거의 영광을 빼앗겼던 일본이지만 지금은 세계 유도의 강자로 다시금 우뚝 선 일본의 유망주들이 분명 참석할 거다.
‘그런 선수들과 붙어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대만, 중국, 그리고 일본의 선수와 붙을 기회다.
지영은 서서히 뛰는 심장이 주는 긴장감에 절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와, 오늘이랑 내일이 그럼 마음대로 먹는 거 마지막 날이네? 겁나 먹어야겠다 진짜.”
“음, 여기 음식이 넉넉할까?”
“사러 나가야지! 밤에 바비큐 파티도 하고! 먹다 죽어주겠어, 오늘은 아주!”
이성진의 말에는 지영도 찬성이었다.
다음 주부터 당장 감량에 들어가면 식단 자체가 완전히 변하게 된다. 그럼 최소 한 달 이상은 마음껏 먹는 건 꿈도 못 꾸니, 오늘내일 진짜 가능한, 최대한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했다.
이런 마음은 지영뿐만이 아니라 식단 조절에 가장 철저한 강한결도 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끄덕여 이성진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게 갑자기 잡힌 시합 때문에 흡입 욕구를 불태우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그 바비큐 파티, 제가 대접해도 될까요?”
패딩에 안경.
마스크까지.
한없이 수상한 사람이 한 말에 강한결이 대표로 대답했다.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