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6화
26화. 합동훈련(5)
금요일.
연희고는 금요일 오전 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 오전 수업을 빼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합 일주일 전이 아니면 모든 수업에 들어가야 해서 이는 뭐 그리 특별하거나, 부조리한 일도 아니었다.
재단 측이 학생의 학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거야 어차피 중학교 때부터 전부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전 훈련은 충북체고와 청석, 그리고 보성, 경민, 부산체고 이렇게 다섯 개 팀이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지영은 회귀 이후 어제가 땀을 흘리며 훈련한 첫날이기 때문에, 몸이 근질근질했다.
백 명이 넘는 선수가 뿜어내는 기합과 열기.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선수들의 투지.
지영은 어제, 수없이 많은 도전자를 받았다.
강자와의 훈련이 실력을 올리는 데 최고기 때문에, 지영을 포함한 입상권 선수들은 아예 끝날 때까지 예약이 꽉 차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도전자를 받아 연습하면서 지영은 내색은 안 했지만 정말로 즐거웠었다.
가끔은 실수나 제대로 기술에 걸려 한판을 날아간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두꺼운 도복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땀 흘려 운동을 한다는 게 이렇게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달은 지영이었다.
그래서 수업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붕 뜬 마음으로 오전 수업을 끝내고, 지영은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다.
식당 입구에 도착하자 학생들과 인터뷰 중인 이선영이 보였다.
“오늘도 촬영해요?”
사실은 어제 청주유도회관에도 있었다.
거기 관중석에서 지영이 훈련하는 걸 전부 담아갔다. 사실 촬영이 시작되면 되게 불편할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이선영은 지영을 직접적으로 담지 않고 멀리서만 담았다.
어제도 훈련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서, 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 전원의 인터뷰를 따 가긴 했었지만 그게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 지영 군. 그럼요? 오늘이 3일째인데. 오늘 오후에도 훈련 가죠?”
“네, 가야죠.”
“후후, 우리도 오늘 따라갈 거예요. 그냥 어제처럼 훈련하면 돼요. 아셨죠?”
“음, 네.”
그냥 평소처럼 하라고 하니, 지영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뒤에 기다리고 있는 애들도 있어서 지금은 물어볼 여건이 되지 않았다.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교실에서 잠시 토막잠으로 체력을 회복한 지영은 오후 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그래 봐야 수업 하나였지만 말이다.
2시쯤 숙소로 내려와 챙겨놓은 짐을 가지고 다시 청주유도회관으로 향한 지영은 도복을 갈아입고 매트에서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본 훈련 시작 전에도 준비운동은 하지만, 그래도 관절이나 골반은 지금 최대한 풀어주는 게 좋았다.
2시 30분.
속속 선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학교가 지척에 있는 청석고 선수들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청석고는 3학년이 전부 나가고, 1, 2학년이 주축이었다. 거기에 같은 재단의 대성중에서 올라온 중3을 받아서 이제 팀을 다시 갖춰가는 중이었다.
그런 청석고의 2학년이자, 주장이 된 임철웅이 다가왔다.
“연희고 아이돌들 왔네.”
연희고 아이돌.
요즘엔 황금세대 말고, 저렇게 낯 뜨거운 말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에 익숙해서 지영도 그렇고 그냥 다들 덤덤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강한결이 대표로 그에게 인사하자 그는 사람 좋은 미소로 끄덕여 주고는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마치 큰 비밀을 풀어놓는 것처럼 말했다.
“오전에 분위기 살벌했다.”
“어, 왜요?”
“보성 코치 어제 열 받았는지 야간부터 애들 죽도록 굴리더니 오전에는 아예 잡더라. 오늘 오전에 진짜 곡소리 났어.”
“아…….”
그런 경우가 있기도 했다.
지영도 회귀 전, 그러니까 중학교 시절에 청석고와 대성, 충북체고가 곡소리 나던 걸 몇 번이나 경험했었다. 연희고는 청주에 있고, 청주에는 유도부가 있는 학교가 제법 있었다.
중학생도 못 이기냐!
와! 뻗어!
빠따는 기본이고, 뺨도 수차례나 맞아서 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는 이걸 넘어가 줘야 하나 하고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지영은 최선을 다했고, 당시 고2 선수는 코치를 경찰에 신고하고 결국 운동을 그만뒀다. 그리고 코치도 폭력으로 문제가 되어 그만두게 되었다.
폭력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코치가 잘못한 게 맞다.
하지만 마치 그 시발점을 자신이 끊은 것 같아 기분이 진짜 별로였었던, 그런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보성 오늘 연습 제대로 안 하면 아마 오늘 잠도 못 잘걸? 그리고 거기 코치가 니들 찍을 거 같으니까, 조심해.”
“네. 감사합니다, 선배.”
“감사는 무슨. 잡자고 하면 그냥 설렁설렁해. 괜히 다치지 말고.”
“네.”
임철웅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는 다르지만 함께 운동한 형이고, 지금도 어제 보성고를 박살 낸 연희고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좋은 사람.’
아까웠다.
연희고로 왔으면 좋은 선배고, 따르고 싶은 선배가 되었을 텐데.
그가 돌아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보성고가 들어왔다.
“와우, 얼굴 봐라, 얼굴 봐.”
이성진이 비아냥인지, 걱정인지 모를 톤으로 보성고 선수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임효중은 그냥 하아, 한숨을 내쉬었고 강한결과 황석, 그리고 지영은 그냥 조용히 들어서는 선수들의 낯빛을 살폈다.
‘갔네, 갔어…….’
확실히 맛탱이가 갔다.
낯빛이 거무죽죽한 게, 코치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딱 봐도 감이 잡혔다. 몇몇은 연희고를 보고는 이를 가는 모습도 보였다.
김세건도 당연히 그중 하나였다. 눈 밑이 검게 죽은 게, 딱 봐도 오전 굳히기 시간에 몇 번이나 졸려간 모습이었다.
유도 선수들이 흔히 죽은 꽃이라고 부르는 검버섯 비슷한 게 눈 아래 파바박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조심해야겠다. 쟤들 진짜 이 악물고 덤비겠네.”
강한결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김세건에게서 시선을 떼고 스트레칭을 마저 이어갔다.
차례대로 충북체고, 부산체고, 경민고가 들어서고 운동이 시작됐다.
준비운동, 구르기, 그리고 익히기 순으로 돌고 자유 연습 시간이 됐다. 지영에게 선수가 몰리려는 찰나, 보성 코치 장호선이 지영을 불렀다.
“강지영!”
“……네.”
설마 잡자는 건가?
뭐 코치가 선수를 잡는 거야 어차피 전지훈련 중에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보성 애들을 거의 죽기 전까지 돌린 코치가 부르니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강한 선수와 붙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다른 의도로 한판 하자고 하는 건 사양인 지영이었다.
하지만 직접 하자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너 우리 애들 좀 잡아줘라. 야, 김세건!”
“네!”
김세건이 도복을 고치며 달려왔다.
시선은 역시 지영에게로. 이를 가는 게 보였다.
‘아 피곤하네, 진짜…….’
지영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번에 눈치챘다.
이런 경우가 왕왕 있었다. 연희고라고 전지훈련을 안 가는 게 아니었다. 당장 올해 여름만 해도 임대성 코치의 모교인 우석고로 전지훈련을 갔다 왔었다. 거기서 지영은 진짜 진이 쫙 빠지는 소아다리를 경험했다.
소아다리(そう-あたり).
당연히 일본어고, 전원이 시합에 참가한다는 뜻이다.
이걸 유도에 적용하면, 한 선수가 상대 선수 전원을 돌아가며 계속 상대한다고 보면 된다. 이건 진짜 피곤한 일이었다.
일단 소아다리가 시작되면 심적 여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호흡조절을 못 해 금방 체력이 바닥나고, 심리적인 압박으로 종종 공포마저 느낄 때가 있었다. 그때 느꼈던 소아다리는 진짜, 두 번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지영은 유도를 즐기고 싶지, 고통 속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오히려 역으로 소아다리가 걸려버렸다. 보통은 자신의 팀 선수 하나를 소아다리로 굴리지, 다른 팀 선수를 굴리지는 않았다.
우석에서 지영이 소아다리를 한 건, 당시 너무 의욕이 없어서 임대성 코치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기 위해 주문한 벌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보성 코치가 지영을 소아다리를 굴리는 모양새였다.
이는 당연히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코치를 등지고 한숨을 내쉬는 사이, 삐! 자유 연습이 시작됐다.
악!
김세건은 시작과 동시에 곧장 기합을 내지르곤 달려들었다.
‘뭐, 까짓거…….’
해주지, 뭐.
보성 코치가 잘 모르는 게 있는데, 지영은 이런 종류의 도발을 받아는 주지만, 곱게 넘어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탁! 타닥!
역시 가볍다.
호 불어서 날아갈 것 같진 않지만 하체가 워낙에 힘이 없었다.
‘쉽지, 이런 종이 인형은.’
가슴 깃을 잡은 지영은 김세건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 * *
보성 코치 장호선이 하나 착각한 게 있다면, 바로 자신의 팀 실력이었다.
보성이 잘하는 팀인 건 맞다.
지금 당장 체급별, 무차별 단체전에 나가도 입상권 안에는 반드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 팀이다.
하지만, 그 개개인의 ‘천재’의 영역에 있는 지영만큼은 아니었다.
이 실력 차이는 그래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4시 30분.
벌써 1시간째 자유 연습. 30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딱 9판을 소화했다. 본래 경량급 중량급으로 나눠서 하는데, 지영만 쉬지 못하게 연달아 9판째였다.
“후…….”
하지만 지영은 온몸으로 열기를 내뿜으며 아직도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아다리가 토나 올 정도로 힘이 드는 건, 실력이 비등했을 때다. 그래야 체력적으로, 심적으로 부담스러워 나중에는 바닥을 개처럼 기게 된다.
하지만, 고등학생 소아다리에 중학생을 던져놓으면 그건 의미가 없었다.
지금이 그랬다.
지영은 회귀 이전의 기억, 경험을 고스란히 가진 상태다. 거기에 다시금 유도를 할 수 있다는 현실 자체가 그에게는 ‘즐거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심적으로 압박이 될 일도 없고, 실력에서도 우위에 있다 보니 보성만 죽어라 깨지는 상황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영은 단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 어제는 제대로 걸리면 괜히 버티다가 다칠까 봐 적당히 넘어가기라도 했는데, 오늘은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방어 유도.
버티는 것만큼은 자신 있는 지영이었다.
그래서 오후 연습은 마치 지영 혼자만의 ‘쇼’처럼 변해버렸다.
장호선 코치의 마지막 실수는, 이때 시작됐다.
본인이 직접 등판한 것.
9판을 연달아 한 선수를 직접 상대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지켜보고 있던 임대성 코치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서려고 했지만, 지영은 오히려 그런 임대성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야지.’
확실하게 눌러줄 참이다.
명문 보성의 졸업생이고, 용인대를 졸업하고 실업팀에서 활약하다가 은퇴 후 코치가 된 장호선은 분명히 지금까지 상대한 그 어떤 선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리고 그게 오히려 지영의 호승심을 일깨웠다.
마지막 연습.
삐! 소리와 함께 연습이 시작됐다.
가벼운 자세로 다가온 장호선의 깃을 잡고, 잡혀준 결과. 아주 묵직했다.
‘역시 힘이 달라.’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차이가 엄청나듯, 다시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힘 차이도 엄청났다. 중등부, 고등부 선수들이 그 위로 진학했을 때 처음 가장 애를 먹는 게 바로 이 힘 차이였다.
기술, 체력도 체력이지만 일단 힘에서 턱도 없이 밀리면 유도는 메치기 정답이 절반쯤은 날아가는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그런 힘 차이를 지영은 잡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바위.
혹은.
탱크.
장호선은 과연, 명문의 코치를 할 만한 피지컬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유도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스포츠다.
힘으로 바짝 잡아당겨 유리하게 잡았다고 곧장 허벅다리를 차와서, 지영은 슬쩍 피하며 기울이기와 동시에 빗당겨치기를 넣었다.
방심.
이 정도면 국가대표가 아니라 국가대표 할아버지가 와도 못 피한다.
쿵!
볼 거 있나. 무조건 한판이다.
고등학생이라고 얕본 대가는, 개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