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4화
24화. 합동훈련(3)
삐!
5분으로 맞춰놓은 타이머가 날카로운 전자음을 내며 작동됐다.
하!
으아!
각자 기합을 넣고는 곧장 상대와 맞붙는 수많은 선수들.
지영은 그런 이들을 잠시 보다가, 구혁을 바라봤다. 구혁은 지영을 빤히 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내도 잘 부탁한다.”
부산 특유의 사투리가 섞인 대답으로 지영의 인사를 받아준 구혁이 빠르게 다가왔다.
지영보다는 좀 작은 신장. 하지만 지영보다 훨씬 단단한 육체는 확실히 중심이 좋았다. 턱, 파바박! 구혁은 잡기 싸움에 능한 선수. 자신처럼 업어치기, 허벅다리 등 손기술과 허리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선수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발기술은 두 종류의 기술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그래서 지영은 이번엔 제대로 잡기 싸움을 해줬다. 이것은 연습. 시합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선수를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잡기 싸움에서도 우위에 서고, 기술 자체에서도 우위에 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걸 연마하기 위해서 구혁은 딱 알맞은 상대지.’
이런 좋은 선수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고등부로 따지면 전국에서도 고작 서넛이다.
그런 선수가 자신과 다시 맞붙고 싶어 와줬다는 것에 정말 감사하고, 고마웠다.
툭!
서로 가슴 깃을 잡은 상태에서 들어오는 안 뒤축. 그걸로 상대의 중심을 잠시나마 무너트리고, 그대로 업어치기. 몸에 익은 자연스러운 연결기술. 하지만 지영은 이미 안 뒤축을 치고 구혁의 중심이 뒤로 가는 순간부터 말아업어치기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작정했는지, 힘이 상당하다.
그냥 간을 보는 용도로 들어온 기술이 아니라 제대로 던지려고 들어온 기술이다. 구혁의 손에 말려들어 간 도복 깃의 방향으로 몸이 끌려간다. 이대로 있으면 이건 얄짤없이 한 판이다. 대비하고 있었는데 왜 당하냐고?
유도가 그렇다.
알고도 못 막는 기술이 있는데, 지금 같은 경우 그런 말을 쓴다. 충분히 대비했음에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힘과 기술, 타이밍이면 딱 저런 말을 써도 되는 상황이 된다. 지영은 거의 주저앉듯이 중심을 낮추며 상대의 목깃을 잡아 찍어눌렀다.
그러자 굳건하던 상체의 중심이 무너지며, 기술도 같이 풀렸다.
후.
위험했다.
자유연습은 따로 굳히기가 없어서 일어나 바로 도복을 고쳤다. 그리고 누가 신호를 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눈치껏 시작. 5분은 제법 긴 시간이지만 그쳐가 없는 5분은 또 금방이다. 다시 자세를 잡고 부딪치는 둘.
유도는 엄청나게 화려하진 않았다.
근접전으로 붙어서 파바박! 빠르게 손속을 교환하다 도복을 잡으면 기술을 거는, 그런 스포츠다. 그래서 UFC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복싱처럼 현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도는 치열함, 처절함이 있었다.
악착같은 느낌.
어떻게든 넘겨야만 이기는 승부.
다른 스포츠처럼 시간을 길게 주는 것도 아닌, 투기 종목 중에서는 씨름과 비슷하게 짧은 경기다. 자신이 그간 쌓아 온 모든 게, 이 경기 시간 4분에 판가름이 난다.
안 다리, 중심을 무너트리는 용도가 아닌, 제대로 들어온 기술. 지영의 중심이 뒤로 밀렸다. 하지만 오른발을 뒤로 쭉 빼 중심을 잡고, 팔을 안쪽으로 쭉 넣어 등판을 잡으며 중심축을 회전시켰다.
팡!
그리고 허리후리기.
등판만 잡고 있었지만 구혁은 이미 안다리를 걸기 위해 중심을 지영 쪽으로 가까이 붙여놨기 때문에 이 기술을 피할 수가 없었다.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공중에서 회전해 같이 매트 위에 뚝 떨어졌다.
“하…….”
“…….”
넘어간 구혁은 한숨을, 지영은 그냥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나 다시 도복을 고쳤다. 실력 차이가 났다. 두 번 상대해보니, 어떻게 상대를 넘겨야 할지 감이 오는 지영이었다. 하지만 구혁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팡.
양손으로 매트를 툭 때린 뒤 일어나 다시 지영에게 덤벼드는 구혁.
자유연습은 한판을 던져도 끝이 아니다. 무조건 5분을 다 채우는 훈련이다. 그래서 한판이 아닌 수십 판을 던져도 5분간은 연습이 계속된다.
툭툭!
이번엔 좀 더 적극적이다.
구혁은 지영에게 틈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정말 빠르게 움직였다. 자세를 극단적으로 낮추고, 밀어붙이고 오는 불도저 스타일. 본래는 이런 스타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나오는 건, 이런 식으로라도 한 번 넘기겠다는 뜻. 그게 아니라면 연습에서 우위를 잡겠다는 뜻.
무작정 밀면 반칙이지만, 정확하게 상대를 조금씩 밀어내면, 그건 잡기 싸움의 우위로 심판은 본다. 그래서 아무리 연습이지만 밀려서는 안 된다.
‘이런 게 하나씩 쌓이면, 버릇이 되는 거니까.’
연습인데 뭐.
하는 안일한 생각이 실전에 저도 모르게 나올 수도 있었다. 이는 지영이 회귀 전, 코치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지도했었다. 그러니 그렇게 가르친 자신이 그럴 수는 없었다.
지영도 본격적으로 맞받았다.
대신 힘대 힘으로 맞붙는 게 아닌,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방향으로 갔다. 밀고 들어온다는 건 중심이 앞에 있다는 뜻. 지영은 가슴 깃을 잡고 털며 구혁의 다리를 공략했다. 중심이 아무리 낮아도, 밀고 들어오는 포지션이면 당기면서 치는 발기술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유도는 상대의 힘을 이용해 중심을 무너트리는 걸 기본으로 하는 스포츠.
유도의 기본을 지금 지영은 펼치고 있었다.
상대를 밀어내려다, 역으로 상대에게 끌려가자 구혁은 급히 자세를 바로 잡고 가슴 깃을 잡은 지영의 손을 쳐낸 뒤 물러났다. 그걸 보며 지영은 툭, 투둑. 보폭을 넓게 밟아 들어가며 목깃을 선점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스윽. 그걸 기다렸는지 역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세를 빠르게 낚시걸이가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워낙에 빠르게 들어온 낚시라 지영은 제대로 대응도 못 해보고 그대로 기술에 걸려 뒤로 쿵! 쓰러졌다. 누가 봐도 한 판. 아주 오랜만에, 천장이 보였다.
‘노렸네.’
이야.
이 정도까지 미끼를 던질 정도다. 이는 구혁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지영은 생각했다. 실력이 비슷하지 않으면 기술을 걸기도 전에 지영에게 한 판으로 이미 날아갔을 테니 말이다. 방심하진 않았지만, 이번엔 구혁의 노림수에 진짜 제대로 당했다.
주먹을 움켜쥐며 나이스! 하는 표정으로 일어나는 구혁을 보며 지영은 역시 유도는 이래서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잘해도, 상대의 기술이 뛰어나면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스포츠. 실력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없는 스포츠. 뭐,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이렇게 제대로 넘어가 천장을 보는 순간 속에 있던 뭔가가, 훅 깨어나는 느낌이 지영은 좋았다.
지영이 일어나 다시 도복을 고치는 순간, 삐이이! 타이머가 울었다.
아쉽다.
이제 제대로 해보고 싶어졌는데 5분이 끝나버린 게.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빠르게 달랠 수 있었다.
구혁의 뒤에서 이우진이 다가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5시. 정규훈련 시간이 끝났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후. 어후, 힘들다, 힘들어.”
정리운동을 마치고 팀별로 모이자마자 털썩 주저앉는 이성진. 괜히 오버를 하는 게 아니라, 황금세대 전원이 이성진과 비슷하게 주저앉았다. 이들의 훈련은, 정규훈련 시간에 체력을 거의 전부 빼버린다.
눈치 살살 보면서 설렁설렁하는 게 아니라, 훈련 때만큼은 진짜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서 전념하는 것. 다른 말로는 노력이라 부르는 것을 훈련에서 한 번도 빼먹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한 환경에서도 이들의 천재성은 빛을 발했다.
“어디랑 할려나?”
“부산체고 아닐까?”
“경민이랑 할 것 같은데?”
“난 보성! 보성 애들이 재밌지!”
운동이 끝났는데도 내려가지 않는 이유는 이제 본 게임, 연습 시합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도팀이 전지훈련을 가는 이유는 자유연습을 포함한 훈련도 목적이지만, 실제로 팀의 전력을 알아볼 수 있는 이 연습게임이 진짜 목적에 가까웠다.
이때는 감독이나 코치가 돌아가면서 다른 팀의 심판을 봐주고, 세 개의 팀이 한 번에 연습 시합을 치른다. 아마 보성, 경민, 부산체고도 연희고와의 연습 시합이 주목적이라고 봐야 했다. 코치들이 상의가 끝났는지 각 팀으로 돌아왔다.
지영도 임대성이 걸어오자 바로 일어나서 일렬로 줄을 섰다.
“우린 보성이다. 내일은 경민, 토요일에 부산체고랑 할 거고. 일요일은 오전에 볼 차고 끝내기로 했다. 한결아. 난 심판 봐야 하니까 사이드는 네가 봐라.”
“네, 코치님.”
“다들 다치지 말고, 억지로 버티지 마라. 연습 시합이니까. 알았냐?”
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짧고 굵게 답했다.
자유분방한 것 같은 연희고지만, 능력 있는 코치의 말에도 네, 그럴게요. 하고 시건방진 대답을 할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임대성이 청석고와 경민의 연습 시합 심판을 보러 가기 위해 빠지고, 잠시 뒤 보성고가 중앙의 경기장으로 왔다. 이미 멤버가 정해졌는지 선수 다섯을 빼고 전원 편하게 앉는 보성고. 다섯 명의 선수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지영도 줄을 맞춰 자연스럽게 보성고 선수들과 마주 보고 섰고, 충북체고 감독 선생님이 심판을 보기 위해 두 팀의 사이로 들어섰다.
인사.
악수하고.
인사.
퇴장.
66, 이성진이 가장 먼저 시합을 시작했다.
연희고는 55, 60이 없어서 보성고도 66 주전선수를 내보냈다.
보성고.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한 고등학교를 꼽으라면, 아마 1번으로 꼽힐 게 바로 보성고였다. 보성은 언제나 명문이었다. 창단 이후 지금인 2020년대까지도 보성은 언제나 유도계에서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모두가 잘 아는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 선수도, 보성 중고 출신이었다.
그 외에도 정부경, 최용신, 장성호 선수 등, 아주 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올해도 회장기 단체전 우승컵과 우승기를 들어 올리긴 했지만, 딱 한 팀에게만 이기지 못했다.
그게 바로 연희고였다.
연희고가 우승기를 들어 올린 추계대회에서 결승에 만난 보성은 황금세대 5인에게 전원 한판으로 지면서 체면을 제대로 구겼다. 그리고 전국체전에서도 보성에서 나온 서울 대표들은, 아무도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그러한 스토리가 명문을 직접 이곳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선수들의 눈빛이 살벌했다.
추락 중인 명문의 자존심.
그걸 연습 시합에서라도 조금이나마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성진아. 조심해라. 눈빛 장난 아니다.”
그걸 사이드를 볼 강한결도 알아보고 바로 주의를 줬다. 그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이성진. 다소 까불거리는 느낌이…… 아니. 평소에는 핵인싸처럼 매우 까불거리지만, 도복을 입었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진지해지는 게 귀공자라는 걸 아니, 다들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시작!
시합이 시작됐다.
상대 선수는 지영이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회귀 전에는 봤을 테지만, 그건 10년 전의 기억이니 당연히 기억에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래 보성고 주전이 나가고, 이제 막 주전이 된 선수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체전에서도 본 적이 없던 선수기 때문이었다.
고작 한 체급 아래지만, 잡기 싸움이 굉장히 스피디했다.
진짜 복싱선수가 잽을 던지는 것처럼 근거리서 휙휙 손이 날아다니는데, 보고 있으면 절로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순간.
퍽!
“악!”
보성 선수의 엄지가 이성진의 눈을 찌르는 사고가 발생했다.
움찔, 그에 저도 모르게 일어선 지영.
부상?
하필 눈을?
사고 때, 유리 파편이 안구에 깊숙이 박혀 한쪽 시력을 빼앗겼었던 이성진인데? 물론 그걸로 이성진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다신 눈을 뜨지 못 했으니까.
트라우마가 급속도로 되살아났다.
턱.
그리고 그런 지영의 소매를, 황석이 급히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