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0화
20화. 시합이 끝나고 난 뒤(5)
늦은 점심.
지영은 컵라면에 밥을 말아 점심을 해결했지만, 2시간에 걸친 쇼핑 끝에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한은정 때문에 두 사람을 데리고 시내의 적당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한은정이 픽한 메뉴는 여고생이 죽고 못 산다는 즉석떡볶이였다.
다행히 충주 시내에는 즉석떡볶이 전문점이 많았고, 그중엔 오랜 전통을 가진 가게도 있어 그리로 둘을 데리고 갔다. 1층과 2층. 다행히 2층 창가에 자리가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떡볶이집은 데이트 중인 고등학생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주말에 나온 학생들로 매우 붐볐다.
“와, 여기 맛있나 보다. 사람 엄청 많은데?”
“충주에서는 나름 유명하지. 뭐 먹을래?”
“음, 메뉴판 오면 고를게. 참,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 봐. 방송? 뭔 방송?”
지영은 이쪽으로 오면서 슬그머니 방송에 대한 얘기를 꺼냈었다. 어차피 이선영은 자신뿐만이 아닌 황금세대 전원을 찍고 싶어 했다. 그러니 황석이 충주까지 와준 만큼, 의견을 물어보기엔 지금이 딱이었다.
“저번에 나 왜, 교통사고 날 뻔한 분들 구한 건 알지? 그거 기사로도 나갔는데.”
“어어, 봤어. 울 엄마가 너 진짜 잘했다고 입에 막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다니까?”
“…….”
한은정이 신나서 대답하고, 황석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시합이 이슈가 되면서 지영의 예전 선행도 같이 퍼졌는데, 이선영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그 사건도 언급해야 했다.
“그건 뭐, 우연이었고. 어쨌든 그 사건으로 기자님 한 분이 시합장에도 찾아왔었고, 아까 너희 오기 전에도 찾아왔어.”
“그럼 그 기자분이 너를 찍고 싶다는 거잖아? 여기 석이랑 황금세대 전원도 같이.”
“응. 다큐 비슷하게 3부작? 그 정도 찍고 싶으신가 봐. 그런데 확답은 안 드렸어. 이거 찍으면 황금세대나, 우리 엄마 의견도 필요하니까. 사실 톡방에 먼저 말할까 싶었는데 너희가 먼저 찾아왔으니까 온 김에 물어보는 거야.”
지영의 말에 한은정은 손에 턱을 척, 괴고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한은정보단, 지영은 황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생각 어때?”
“지영이 네가 하고 싶다면, 나는 말릴 생각은 없다.”
“너도 촬영 대상이야. 나를 포함해서 황금세대 전원을 찍고 싶다고 했으니까.”
“괜찮다, 그래도.”
“그래? 그럼 너는 찬성인 걸로 안다?”
“…….”
황석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자신의 의견을 확고히 말해줬다. 그사이 알바생이 메뉴판과 물을 가져다줬고, 잠시 대화를 멈추고 메뉴를 골랐다. 하지만 고르는 건 한은정이었다. 두 사람은 이거랑 이거랑 이거 시키자, 하는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짜장 떡볶이 3인분, 만두, 튀김을 시키고 난 다음 폰을 꺼내 다른 황금세대에게도 물어보려는데, 먼저 들어온 메시지가 있었다.
강한결의 메시지였는데, 훈련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 경민 다음 주말에 온다는데?”
“보성도 있다.”
“부산체고도 오네?”
다음 주 목요일 오후 훈련부터 일요일까지 청주로 전지훈련을 오고 싶다는 3개의 팀. 이 세 개의 팀은 명문고였다. 고등학교 유도계에서는 강호 중에 강호로 통하는 곳이기도 했다.
서울 보성.
경기 경민.
부산체고.
뛰어난 선수들을 매해 배출하는 유도계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팀이었다. 그런 팀이 직접 온다? 지영은 그게 신기했다.
전지훈련을 안 가기로 아주 유명한 팀이 있다. 바로, 용인대다. 용인대는 전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유도 명문이다. 대한민국 유도 국대의 절반 이상을 배출하고도 남는 게 바로 용인대였다. 이 대학 유도팀은 그래서 전지훈련을 가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고등부, 대학부 팀이 알아서 오니까 굳이 전지훈련을 갈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국가대표도 용인대로 훈련하러 올 정도였다.
그런 용인대 말고는, 바로 보성과 경민이 있었다.
부산체고는 전지훈련을 제법 다니지만 보성과 경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워낙에 강팀이다 보니 알아서 전지훈련들을 오기 때문에 가기보다는, 팀을 받아서 훈련했다.
그런 두 팀이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청주까지 오겠다고 한 거다. 자존심을 꺾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게, 두 팀의 체전 선발 선수들은 전부 황금세대에게 박살이 났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단 한 명도 황금세대란 통곡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 감히 그런 황금세대를 품은 연희고를 전지훈련 와라, 하고 제안도 던질 수 없었다. 시합 성적은 곧 그 학교의 힘이 되고, 지금 대한민국 유도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팀은 바로 황금세대의 연희고였다.
그러니 보성과 경민, 부산체고가 오는 건 이상한 그림이 아니었다.
“다음 주 훈련 재밌겠다.”
황석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성, 경민, 부산체고 정도면 황금세대도 긴장해야 할 선수들이 제법 있었다.
‘이우진도 있고. 구혁도 오려나?’
지영도 기대가 됐다.
황금세대는 강팀을 선호했다. 아니, 정확히는 강한 선수와 맞붙는 걸 선호했다. 애초에 투기 종목 선수들은 강한 상대와의 연습이 실력을 올리는 데 가장 좋았다. 하지만 지금 충북권에는 황금세대의 상대가 없었다.
오죽하면 황금세대끼리의 훈련이 가장 실력을 올리기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황금세대의 실력이 이렇게 좋은 건 상대가 없어도 그걸 극복하는 개인 훈련, 노력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보단 타고난 천재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강팀이 전지훈련을 온다면 좋은 일이다.
안 그래도 시합에 목마르던 지영이었기 때문에 더욱 기꺼웠다.
잠시 뒤 알바생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왔다.
떡볶이는 정말 오랜만에 먹는데, 확실히 인기가 있는 집이라 그런지 맛은 있었다. 다만 튀김은 좀 별로였다. 하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나쁜 맛도 아니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오자, 한은정은 청주로 돌아갈 것을 천명했다.
“이제 그만 청주로 가보겠습니다!”
“하하, 은정이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흐흐. 간만에 타 지역 오니까 나도 좋았어. 그럼 지영아, 갈게!”
“택시 타는 데까지 같이 갈게.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고.”
“그래, 그럼.”
쫄래쫄래.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걷던 지영은 한은정이 잘 가다 말고 천원샵으로 빠지자 잠깐 황석을 불렀다.
“석아.”
“응?”
“너한테 만약, 아주 좋은 기회가 있어. 이 기회는 정말 돈이 되는 기회야. 너라면 어떡할래?”
“음…… 그게 고민이 되나? 나라면 당연히 그 기회를 살릴 거다. 돈은 있어서 나쁠 게 없으니까. 특히 지영이 넌 돈의 유혹에 흔들리지도 않을 거고.”
“그렇지?”
“설령 네가 흔들린다고 해도, 우리가 막아줄 거니까 걱정 마라.”
“하하, 그래. 그럼 너도 주식계좌 하나 터놔.”
“주식?”
“응.”
황금세대는 믿을 수 있다.
이놈들을 못 믿는 건, 부모님을 못 믿는 것과 진배없다 생각하는 지영이었다. 그러니 혼자보단, 다 같이 잘되고 싶었다. 엄청난 부자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돈이 있는 것과 없는 건 황석이 말한 대로 차이가 매우 크니까 말이다.
“알았다.”
황석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한은정을 기다리는데 이번에도 뒤에서 누가 저……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었다. 이번엔 디자인 고가 아니라, 예고였다. 예고 학생 셋이 연습장과 펜을 들고 서 있는데, 표정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네?”
“저, 강지영 선수…… 맞죠?”
“네, 맞아요.”
“저, 그……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인이요? 아, 이름이라도 괜찮죠? 제가 사인이 없어서.”
“네! 네!”
지영은 군말 없이 연습장을 받아 사인을 해줬다. 그러자 그 아래. 성민아. 수술 잘하고 꽃길만 걷자! 라고 써달라고 해서 그렇게 적어줬다. 수술할 얼굴은 아니었으니 누군가에게 주려고 사인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게 세 명을 해주고 나니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그리고 몇 여중생이 용기를 내 다가오자 너도나도, 지영과 황석을 아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영은 잠시 당황했지만 황석과 함께 사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지영아. 우리 이렇게 유명했었나?”
“방송 때문인 거 같은데? SNS도 많이 퍼졌고.”
“음…….”
황석은 그런가 보다 하는 얼굴로 사인을 마저 해줬다. 그 시간은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작 10명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인을 해주고, 흐뭇하게 지켜보던 한은정과 도로로 가 두 사람을 택시에 태워 배웅했다.
“지영이 안뇽! 톡 할 테니까 씹지 말고!”
“그래, 와줘서 고맙다. 석이도 잘 가고.”
“…….”
고개를 끄덕인 황석은 손을 흔들곤 바로 창문을 올렸다.
그러자 출발하는 택시. 그 택시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지영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계셨다.
“어 지영이 왔구나. 점심은. 점심은 먹었니?”
“네. 석이랑 은정이 와서 시내서 좀 먹고 들어왔어요.”
“그래? 잘했네. 저녁은 고기 볶아줄까?”
“좋죠. 참,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무슨 말?”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채소를 정리하다 마시고 몸을 돌려 흙 묻은 손을 옷에 툭툭 터시는 어머니. 흙 묻은 손은 거칠다 못해 갈라져 보였다.
원래 이맘때의 지영은 저 손을 볼 여력이 없었다. 사고 전에도, 어머니의 얼굴과 손을, 옷을, 먹는 걸 보려고 했던 적이 없었다.
남다른 천재성을 가졌던 지영이지만, 부모에게 대하는 것만큼은 이맘때 학생들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지.’
이미 회귀 전에도 자각했고, 회귀 이후에는 더 잘 보이게 됐다. 건강한 몸이 있고, 10년의 기억이 있으니 이제는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더 커진 지영이었다.
지영은 일단 방송 얘기부터 꺼냈다. 자신은 물론, 황금세대를 찍고 싶단 얘기에 어머니는 잠시 고민하시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하고 싶으면 해.”
“그래도 될까요?”
“응. 그런데 집은 안 찍었으면 좋겠다. 집이 원체 더러워야지. 호호.”
역시나 그러실 줄 알았다.
지영은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채소를 파는 집엔 흙과 먼지는 어떻게 해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영이 없을 땐 혼자 계시니, 고단한 하루를 끝내면 바로 씻고 주무셔도 하루의 피곤이 가시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날 잡아서 집을 밀어도, 며칠 뒤면 금방 원상 복귀됐다.
이건 어머니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여력 자체가 없으신 거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엄마도 막 TV에 나오고 그런 거야?”
“아마 인터뷰도 하고 막 그러지 않을까요?”
“어머어머, 미용실에 갔다 와야 하나? 호호!”
그래도 아들이 잘나가 방송도 나온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기분이 절로 좋아진 어머니를 보면서 지영은 두 번째 용건을 꺼냈다.
“어머니.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
“부탁? 뭔데? 용돈 필요하니?”
“아니요. 용돈은 있고요. 저, 주식계좌 만들고 싶어요.”
“어… 어? 응?”
끔뻑끔뻑.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끔뻑이시던 어머니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아들이 해달라면 해줘야지.”
“어, 이유는 안 물으세요?”
“아들이잖아? 난 내 아들이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걸 본 적이 없어. 이번에도 엄마는 그냥 믿을게.”
“…….”
말 잘 듣는 아들.
뭐든지 척척, 알아서 잘하는 아들.
속 한 번 썩인 적이 없던 이런 전적은, 주식이란 민감한 주제에도 프리패스권을 지영에게 쥐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