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8화
8화. 전국체전(4)
매트를 발로 밟는 순간, 들끓던 뭔가가 싹 가라앉고, 다시 평상시의 정신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오자 앞에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구혁이 보였다.
구혁.
-73 체급의 강자.
지영과 체급의 금메달을 양분한 선수.
그런 선수가 전의를 불태우는 게 보이자, 지영은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꼭 넘어서겠다는 의지. 그 의지를 보는 것조차 좋았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로 심판이 들어섰다.
선수 입장. 인사하고. 하지메!
후…….
합!
기합은 짧고, 강렬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정신이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차분해졌다.
구혁은 오른쪽 잡이.
반대로 지영은 왼쪽 잡이였다.
“지영아, 업어치기 조심!”
코치 임대성이 밖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황금세대 때는 거의 코칭을 안 했는데 시합 중 지영에게 외쳤을 정도면 임대성도 구혁을 확실히 강하게 본다는 뜻. 그리고 그건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실수나, 방심으로 날려버릴 수 있겠나.
자세를 한껏 낮춘 구혁이 소매 깃을 먼저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구혁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잡기 싸움에 굉장히 공을 들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지영은 이제는 사장된 방어 유도를 구사하는 스타일. 그래서 지영은 잡기 싸움에 힘을 빼지 않았다.
손쉽게 소매 깃보다 더 중요한 가슴 깃을 잡자, 구혁은 곧장 견고하게 받친 다음 도복을 털었다. 툭툭! 툭! 업어치기를 할 때 기본적으로 상대의 무너트리는 기울이기가 가미된 털기. 과연 정상급 선수답게 힘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지영은 거의 미동이 없었다. 이미 상대가 가슴 깃을 잡고 터는 거야 너무 익숙해서, 이 정도는 그냥 맞춰줄 수 있었다.
지영이 미동도 하지 않자 구혁은 다시 소매 깃을 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페이크겠고.’
진짜 노리는 건.
‘말아업어치기’
소매 깃을 노리는 척하다가, 그대로 몸을 비틀어 양 가슴 깃을 잡고 그대로 상대를 말아 메치는 기술. 최민후 선수의 전매특허인 말아업어치기는 이제 웬만한 선수는 전부 구사할 줄 아는 업어치기였고, 지영도 당연히 알았다.
“이익!”
구혁이 힘을 쓰는 소리를 들으며 지영은 그냥 툭, 도복을 뜯었다.
정상급 선수다운 힘과 속도, 기술이지만 이미 알고 있던 지영은 회전하는 순간 같이 따라가면서 방어를 했다. 이 경우 회전이 충분히 먹히지 않아 도복이 상대에게 말리지 않게 되고, 기술은 그냥 나가리가 된다.
지영이 좀 끌려가서 업히기라도 했으면 유효한 공격이 됐겠지만 너무 손쉽게 방어했기 때문에 수비적이라고 지영에게 반칙을 줄 수도 없었다. 물론 기술 방어 한번 했다가 반칙이 들어가지도 않고 말이다.
마데!
심판의 그쳐 선언.
지영은 제 자리로 와 도복을 고쳤고, 시합이 재개됐다.
하지메!
시작과 동시에 구혁이 다시 빠르게 다가왔다.
‘반칙을 노리는구나.’
여기서 잡기 싸움을 포함해 조금만 공세로 나오면 지영에게 반칙이 들어올 확률은 음…….
‘70%쯤.’
심판 셋이 있으면 이런 경우 둘은 반칙을 준다는 소리다. 그래서 지영은 빠르게 뻗어오는 손을 툭 치고, 안으로 들어가며 모두걸기를 쓸었다. 촤아아악! 가볍게 들어간 지영의 모두걸기에 구혁의 몸이 붕 떴다.
하지만 워낙에 중심이 좋은 선수라 뒤로 떨어지는가 싶었는데도 몸을 돌려 겨우 엎드려 위기를 모면한 구혁이었고, 지영은 그런 구혁을 잠시 보다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굳히기를 할 의시가 없다는 뜻이었다.
구혁이 일어나자 심판은 따로 마데 선언을 하지 않았다.
경기는 그대로 속행.
한 번씩 주고받은 사이 이미 40초나 지났다. 경기 시간은 4분. 이 4분은 엄청 긴 것 같지만 반대로 엄청 짧기도 했다. 잡기 싸움 좀 하고, 기술 몇 번 걸면 2, 3분은 그냥 순식간에 지나가니 말이다.
모두걸기에 대차게 당할뻔한 구혁은 조금 신중해졌다.
그리고 그런 구혁을 상대하는 지영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툭툭, 상대가 깃을 노리면 잡혀준다. 딱, 가슴 깃까지만. 구혁이 가슴 깃을 다시 한번 잡자, 지영은 상대의 목깃을 잡았다. 그리고 툭 끌었다.
순간적인 타이밍에, 지영의 힘까지 더해지자 구혁의 몸이 일순 앞으로 쭉 딸려왔다. 그걸 본 지영은 그대로 오른쪽 발을 골반을 틀어 들어가며 매트를 찍고, 그대로 허벅다리 모션을 넣었다. 그러자 움찔한 구혁은 매트에 얼른 엎드렸다.
다시 굳히기 상황.
하지만 지영은 그냥 깃을 놓고 일어나 도복을 고쳤다. 그러면서 시선은 임대성에게. 임대성은 국대 출신 코치였다. 워낙에 황금세대가 잘해 멘탈 케어, 생활, 훈련적인 부분도 일정 부분 맡아주지만 다른 운동부 코치처럼 권력을 행사하지도, 자기 스타일대로 황금세대를 굴리지도 않았다.
그런 임대성은 연희고 유도부를 지영이 회귀하기 전까지도 맡고 있었는데, 황금세대가 나가고 연희중에서 올라온 선수들로, 황금세대만큼은 아니지만 한 해에 한 번은 꼭 우승기를 들어 올리는 유도계 신흥명문으로 키운 능력 있는 코치였다. 회귀 전엔 워낙 다들 알아서 잘해서 그런 임대성 코치는 별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임대성 코치는 능력이 있는 코치다.
그런 코치를 그냥 마치 매니저처럼 쓰는 건, 인력 낭비의 끝이었다.
“좋아! 소매 깃만 주지 마! 업어치기만 방어하면 뭐 없으니까!”
임대성의 코칭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합을 제대로 읽고 있었다. 지영도 코치를 오래 했기 때문에, 만약 지금처럼 경기가 흘러갔으면 당연히 저렇게 코칭을 했을 거다.
하지메!
시합이 시작됐다.
여기서 다시 한번 기술을 받거나, 기술에 들어가기 전 방어 자세를 취하면 반칙이라는 걸 직감한 구혁이 이번엔 다시 공세로 나왔다. 그러나 지영은 그에 맞불을 놨다. 파바박! 파박! 손속이 순식간에 몇 합이나 이어졌다. 그러다 구혁이 지영의 가슴 깃을, 지영은 구혁의 등판을 잡았다.
툭툭! 뒤로 물러나며 깃을 터는 구혁.
‘업어치기 모션에 안 뒤축.’
이미 일주일간 구혁의 영상은 확실하게 살펴봤다. 그리고 회귀 전에도 구혁은 국가대표 1진까지 했었던 몸. 그의 시합 스타일은 이미 지영의 머릿속에 전부 있었다.
휙!
아니나 다를까, 역시 업는 척하다가 흔히 낚시걸이라 부르는 안 뒤축 기술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지영은 그 순간 구혁이 노리던 왼발을 쭉 빼며, 오른 발로 모두 걸기를 쓸었다. 그리고 치는 순간 지읏기.
“억!”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지영이 모두걸기로 되치기를 하자 구혁의 상체가 쭉 밀리며 넘어갔다. 하지만 역시 정상급 선수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그 짧은 순간 억지로 허리를 틀어서 등으로 쿵! 떨어지는 건 모면하는 구혁.
구혁이 넘어간 모양새를 본 심판이 손을 어깨선을 따라 가로로 쭉 펼치며, 와자리! 절반을 선언했다. 그러자 심판을 올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구혁.
후.
아까웠다.
조금만 제대로 지읏기가 들어갔거나, 아니면 구혁의 반응이 조금만 느렸어도 이건 무조건 한판이었는데. 하지만 아쉽진 않았다. 어차피 점수는 땄으니까. 지영은 이번에도 굳히기는 하지 않고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잘했어! 지금처럼! 소매만 안 주면 돼! 소매만!”
지영은 그 코칭에 고개를 끄덕이곤, 전의를 다시 불사르는 구혁을 바라봤다.
구혁.
좋은 선수였다. 앞으로 5년 뒤에 있을 올림픽에서 입상도 하니까, 실력 면에서도 최고는 맞았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지영은 본래 실력도 정상급인 선수였다. 거기에…….
‘10년이란 세월.’
그는 아주 많은 경기를 봐왔고, 사고도 당했고, 코치도 하면서 경험, 연륜이라는 걸 쌓았다. 유도는 실력 차이가 상당히 나지 않는 이상 이성적으로 시합을 풀어가기 힘든 스포츠 중 하나였다. 유도는 복싱, 레슬링만큼이나 초근접 투기 종목이라서, 일단 도복을 잡고 있으면 이걸 해야겠다, 저걸 해야겠단 같은 생각은 아득히 날아간다. 그럼 어떻게 경기를 하냐고?
평소 자신의 몸에 쌓아둔 체력과 기술로 승부를 낸다.
뭐, 다른 스포츠는 안 그러겠냐만은, 유도는 시간도 짧아서 더더욱 여유가 없는 스포츠였다. 하지만 지영은 지금 상당히 이성적이었다.
구혁은 잘하는 선수였다.
기술은 물론 체력도 현 고등부 최강을 논할만한 선수가 바로 구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대가 지영이다. 10년이란 시간을 회귀한 바람에 이제는 경험, 연륜까지 갖춰버린. 이게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정말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메!
시합이 재개됐다.
구혁은 다부진 표정으로 빠르게 지영에게 붙었다. 그리고 지영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유도 경기에서 가장 한판이 많이 나올 때가 이기고 있다가 수비적으로 할 때, 그리고 점수에서 지고 있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 때, 이 두 가지 경우에 한판이 가장 많이 나왔다.
그래서 지영은 어차피 2분 정도 남았으니, 화끈하게 맞붙어 주기로 했다.
‘업어치기.’
가슴 깃을 잡자마자 팽이처럼 뒤로 빙글 돌아 다시 말아업어치기를 걸어왔다. 하지만 지영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몸의 중심축이 이미 뒤로 슬쩍 빠져 있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회전을 도복 깃이 말리는 정방향으로 따라가서 기술을 피했다. 기술이 실패하자 구혁은 즉각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지영은 그런 구혁을 차분하게 맞받았다.
훅, 후욱.
뻗는 손속에 짧게 끊어 뱉는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3분 정도 지나면 누구나 체력이 슬슬 떨어질 때가 온다. 유도 선수는 보통 새벽에 1시간을 체력운동을 하는데도, 고작 4분 경기를 체력 저하 없이 끝내는 게 불가능했다.
황금세대 중, 가장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강한결도 실력이 비슷한 임효중이나 황석과 붙으면 자유연습 5분이 지난 뒤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니까 말이다.
그만큼 유도는 극심한 체력소모 스포츠고, 구혁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영은 달랐다.
지금까지 지영이 건 기술은 고작 하나. 허벅다리는 모션에서 끝났으니 기술을 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워낙에 상대를 제대로 봐가며 게임을 풀어가다 보니, 구혁은 이미 거친 숨이 절제되지 않고 나오는 중인데도 지영은 차분했다.
심지어 딱 좋은 상태로 몸이 예열되었고, 호흡도 터져서 이 상태라면 구혁과 10분을 해도 체력문제 없이 경기에 임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이 악물고 달려든 구혁이 소매 깃을 기어코 잡았다. 그러나 양 깃 업어치기가 가장 위협적인 선수인 구혁의 마음대로 흘러가게 둘 지영이 아니었다. 툭, 투툭! 손바닥으로 짧게 세 번을 끊어쳐서 소매 깃을 다시 뜯어냈고 그 상태에서 안으로 허벅다리 스텝을 받으며 쭉 파고들어 갔다. 그러자 워낙에 창졸지간 파고든 지영 때문에 움찔하는 구혁.
그게 승부를 갈랐다.
파앙!
한 손으로 등판을 순간적으로 잡으며 들어간 허벅다리 후리기가 구혁의 몸을 그대로 띄웠고. 지영이 상체를 비틀어 내리꽂자 그대로 등부터 쾅! 매트에 떨어졌다.
잇폰!
한판!
우와아!
연희고 학부형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이 있는 관중석에서 들불 같은 환호성이 들렸다.
“후…….”
한 번의 타이밍.
방어 유도를 구사한다고 해서 기술이 별로인 건 절대로 아닌 지영은 한 번 딱 받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시합은 끝났고,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유도의 묘미는 여기에도 있었다.
패자는 울분에 찬 얼굴로 매트에 누워있고, 승자는 그런 패자를 무덤덤하게 내려다본다.
아주 분명한 승자와 패자의 위치.
지영은 그런 승자의 위치에서,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을 느끼면서, 그렇게 회귀 후 첫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