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화
5화. 전국체전(1)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흘렀다.
어느덧 금요일.
지영은 오전 운동을 끝내고 짐을 다 챙긴 다음, 씻고 체중계에 올라갔다.
72, 70.
회귀한 지도 모르고 처먹어서 77㎏까지 올라갔던 체중을 겨우겨우 다시 돌려놨다. 덕분에 월화수목, 지난 4일간 미친놈처럼 땀복에 파카까지 입고 뛰어야 했지만, 지영은 그조차도 좋았다.
그런 지영의 모습에 이성진이 저 새끼 저거, 귀에 꽃만 꽂으면 진짜 광놈이가 따로 없을 텐데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체중은 다 뺐고, 오늘은 시합장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오늘이 원래 회귀 전엔 자신을 뺀 나머지 황금세대가 버스전복사고로 몰락하는 날이지만 지영은 이미 대책을 준비해 놨다. 사실 대책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사고를 피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기억을 되짚은 결과, 임효중과의 대화에서 사고를 피할 힌트를 찾았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임효중은 당시의 사고가,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한 스포츠카를 피하려다가 난 사고라고 했다. 코너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한 스포츠카가 선을 침범했고, 이를 피하려다가 버스는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렇다면, 이 사고를 피할 방법은 간단했다.
“그쪽으로 안 가면 돼.”
버스를 운전하실 기사님은 분명 루트를 잡아놨을 게 분명했다. 그럼 그 루트를 피하든가, 아니면 시간 자체를 피하면 된다. 후자는 만약 루트를 바꾸지 못했을 경우에 써먹을 생각이었다.
이 후자를 실행하는 방법도 간단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한 다음 휴게소에 들러서, 시간을 벌면 된다. 화장실에 한 10분쯤 앉아 있으면 인과는 확실하게 변할 테니 말이다.
“슬슬 출발하자!”
방 밖에서 강한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지금 나가.”
짐을 빼서 버스에 싣고, 학교에 들러 교장, 이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오른 지영은 긴장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긴장감 때문에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출발하자마자 강한결에게 다가갔다.
“한결아. 기사님한테 원래 가려던 국도 말고, 고속도로 타자고 해.”
“어? 왜?”
“그냥, 느낌이 안 좋아. 알지? 나 감 좋은 거. 오늘 국도 감 안 좋아. 이대로는 안 돼.”
누가 이 대화를 들으면 어서 되지도 않는 약을 파냐고 하겠지만 원래 지영은 감이 좋았다. 그리고 그건 황금세대 전원이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지영의 유도 스타일은 분명 감에 의존하는 감각적인 부분이 매우 발달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신내림이라도 받았냐?”
“돌았냐?”
신내림 말고, 회귀했다.
언제나 진지한 친구답게, 강한결은 지영의 눈빛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코치님한테 말씀드리고, 다른 길로 가자고 할게.”
“고맙다.”
“고맙기는. 이런 게 내 역할인데.”
강한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코치에게 말을 전하고, 다른 길로 가자고 권했다. 코치 임대성은 지영을 잠시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기사에게 가서 길을 바꿔줄 걸 요청했다.
다른 학교 애들한테 들어보면 본래 이런 요청은 선수가 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지영이 속한 연희고는 워낙에 자유로웠다. 그래서 엘리트 운동부보단 그냥 클럽 활동 쪽에 가까워 이런 요청이 가능했다.
지영이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도, 이렇게 해도 괜찮다는 걸 알아서였다.
‘일단 한고비 넘겼어.’
이제는 지켜볼 때였다. 본래 가려고 했던 길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올라,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올해 체전 유도 경기가 열리는 곳이었다. 2시간을 30분쯤 달려, 문경에 도착했다.
아무 일도 없이, 정말 무탈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로 잡은 리조트에 내리며 지영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허무하네.’
이렇게 쉽게 피해질 사고였는데, 이걸 피하지 못해서 황금세대가 몰락했다니…… 정말 어이가 없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자, 숙소에 짐 풀고, 쉬고 있어.”
“네.”
강한결이 대표로 대답하고, 지영을 포함한 다섯은 체크인을 하고 바로 숙소로 올라갔다.
시야가 탁 트인 거실에 가방을 내려놓자, 긴장이 탁 풀렸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사실 그 장소를 피했는데도 사고가 나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솔직히 긴장한 지영이었다.
그런 긴장이 무사히 도착하고 나니까 정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긴장이 풀리면서 진까지 같이 쭉 빠져 버렸다.
바닥에 털썩 누운 이성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계체 몇 시지?”
“일곱 시에 하겠지.”
이성진의 질문에 강한결이 짐을 풀며 대답했고, 7시란 말에 모두가 거의 동시에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염병, 세 시간이나 남았네.”
이 중에서 가장 체중을 많이 빼는 이성진이 푸념을 내놓았다. 이성진의 신장은 178인 지영보다 조금 작았다. 그런 만큼, 누구보다 체중을 많이 뺐다. 한 번 시합 나가면 기본 8㎏은 빼고 나가다 보니, 가장 힘들어하는 것도 이성진이었다.
“조금만 참자. 계체 끝나면 마음껏 먹어도 되잖아.”
“그래 봐야 어느 정도지. 내일 재수 없게 뽑기에 걸리면 폭망이잖어.”
시합 전에 불특정 몇 명을 뽑기로 뽑아 다시 개체를 하는데, 여기서 일정 이상 체중이 오버가 되면, 이때도 실격패가 된다. 그래서 계체가 끝나도 마음껏 먹지도 못한다.
“그게 어디냐? 자자, 짜증 가라앉히고, 조금만 기다리자.”
강한결은 이성진의 짜증을 부드럽게 받아줬다.
그리고 그런 강한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이성진은 한숨과 함께 투정을 멈췄다. 사실 체중감량은 그 혼자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강한결은 물론이고 지영, 임효중, 심지어 황석까지 전부 체중감량을 했다.
임효중이 가장 적은 5㎏ 정도고 나머지고 거의 고만고만했다. 지영만 해도 항상 6에서 7은 빼고 나갔다.
“미안타, 브라더들. 좀 예민해서 그래.”
“그놈에 예민, 어떻게 시합장만 오면 예민해지냐?”
임효중의 타박에 이성진은 흐흐 웃으며 쏘리쏘리를 남발하더니, 화살을 지영에게 돌렸다.
“그래도 지영이보단 낫잖아? 쟤는 완전 그날 급으로 오잖아.”
“그건 예외고.”
“어? 왜?”
“그건 좋은 의미로 예민한 거니까.”
음음.
인정.
말수가 적은 황석도 그건 인정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지영은 피식 웃었다.
저 말도 오랜만에 듣는다.
쓸데없는 농담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6시가 다 될 때쯤 코치의 연락이 와서 예비 계체를 하러 시합장으로 떠났다. 30분쯤 버스를 타고 가 시합장에 도착하자, 이미 각 시도의 선수들이 거의 다 나와 있었다.
체육관 문을 열고 황금세대가 입장하자, 곧바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다, 황금세대.’
‘와, 부원 다섯이서 출전하는 체급이랑 단체전 전부 먹는 게 말이 되냐?’
‘난 놈은 난 놈들이지.’
‘아 씨! 나 첫판 이성진인데 계체 탈락했으면 좋겠다…….’
모두의 이목이 몰렸다.
초등학교 6학년, 화려한 데뷔를 해서 지금까지 거의 무패에 가까운 성적을 보이고 있는 황금세대는 모든 선수들의 기피 대상 1호였다.
“야, 지영아, 구혁이 너 X나 노려본다. 큭큭!”
이성진이 툭툭 치며 턱짓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부산 대표 구혁이 자신을 승부욕 터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혁.
부산체고 3학년.
중학교 때도 이름을 날렸던 구혁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총 세 개의 금메달과 하나의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한번은 2학년 때였고, 2번째가 올 초에 있었던 YMCA배, 다른 하나는 하계였다. 은메달 하나는 용인 총장배에서 지영과 결승에서 붙었고, 지영에게 2분 만에 시원하게 한판으로 날아갔다.
그런 구혁과 지영은 이번에 첫판에서 맞붙었다.
사실상 결승전이라 불리는 1회전 중 하나였고, 예선 1회전 가장 마지막 경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시원하게 던져버려.”
“실력은 지영이가 위일 거다. 걱정 안 해도 돼.”
황금세대의 응원을 들으며 지영은 구혁에게서 시선을 거뒀고, 예비 계체를 진행했다. 체중은 문제없었다. 이어 7시에 본 계체가 시작됐고, 무사히 통과한 지영은 다시 리조트로 돌아와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딱 체중에 맞춰 저녁을 먹은 뒤, 긴장을 풀겸 주변을 산책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회귀 후 첫 시합이지만, 이상하게도 눕자마자 잠이 바로 왔다.
이윽고 밝은, 시합 날.
스르륵, 귀신처럼 잠에서 깬 지영은 몸 여기저기를 돌리며 컨디션을 체크했다.
좋았다.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최고의 몸 상태였다.
아침을 챙겨 먹고, 씻은 지영은 아버지의 유품이자 선물인 도복을 꺼냈다.
첫 경기는 흰 도복.
잠시 말없이 그 도복을 쓰다듬던 지영은 바지를 입고 상의는 스포츠백에 넣어서 시합장으로 이동했다.
시합장으로 가는 황금세대는 조용했다.
아니, 고요했다.
시합 전날, 저마다의 방식으로 긴장을 풀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 명상과 이미지 트레이닝 중점으로 긴장감을 풀었다. 버스가 멈추는 느낌이 나서 눈을 떴더니 어느새 시합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지영은 가방을 스탠드로 올려놨다.
이미 가족들과 학교 관계자분들이 와서 자리를 맡아 놓고 있어서 빠르게 가방을 놓고 내려올 수 있었다.
“지영아, 컨디션 괜찮니?”
“네.”
오늘은 항상 입던 장사복 말고, 나름 신경 써서 옷을 입고 오신 어머니의 물음에 지영은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아들의 시합에 긴장을 많이 한 어머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했다.
“엄마는 아들 몇 등 해도 상관없으니까, 다치지만 말자. 알았지?”
“네.”
고개를 끄덕인 지영은 다른 황금세대의 부모님, 가족들에게도 인사를 하곤 경기장으로 내려왔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지만 오늘은 시합이 있는 날이라, 회포를 풀 시간이 아니었다. 시합장으로 내려온 지영은 다 같이 몸을 풀었다.
경기장을 뛰고, 버피, 팔벌려뛰기, 쪼그려 뛰기, 제자리 뛰기, 밀어 올리기 등으로 몸을 예열시키기 곧장 익히기로 들어갔다. 한바탕 빡세게 익히기를 하고 나자 몸에서 열이 후끈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그 열기가, 지영을 아주 오랜만에…… 익숙한 세상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왔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지영을 바라보던 강한결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몸을 풀던 모두의 시선이 지영에게로 향했다.
“안 오면 어쩌나 했다.”
“이거, 전원 우승 각 날카롭게 섰는데? 큭큭!”
“음…….”
임효중의 말이, 이성진의 말이, 황석의 탄성이 아련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부유감이 들더니, 선수들의 기합과 경기 진행 안내 멘트, 체육관에 모인 사람들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지영의 그 날.”
큭, 지영이랑 붙는 애들은 불쌍해서 어쩌냐들?
그런데.
그게 뭐냐고?
지영은 원래 시합 전,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질 때가 있었다.
얼마나 예민해지냐면, 마치 주변 모든 게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인 세상이 되는데, 이때의 지영은 진짜 무섭다.
공수가 가장 완벽한 강한결이 그런 지영을 향해, 무결점의 유도 같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때의 지영은 뭔가 신들린 것 같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왔다.’
지영의 그 날이라고 친구들이 부르는 건, 지극히 감각이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지영의 이름이 여자 같아서 그날이라고 빗대어서 놀리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 돌입하기를 모두가 조금씩은 원했다.
기이하게도 지영의 그 날이 오면, 선수들의 경기력이 확실히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게임, 소설을 좋아하는 이성진은 이게 말도 안 되는 버프라면서, 혹시 너 마법사 아니냐고 진지하게 물었을 정도로 이는 극적인 효과를 보였다. 물론 지영은 마법사도 아니고, 버피인가 뭔가를 쓸 수 있는 게임 속 캐릭터도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무리 미신 같고 착각 같다고 해도 이를 모두가 체감한다는 것.
“…….”
눈을 뜬 지영의 앞에, 황금세대가 씩,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을 향해 지영도 웃었다.
자, 이제 미래를 바꿀 시간이다.
아니, 스스로 개척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