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화
2화. 회귀(1)
으음…….
덜커덩! 몸이 튕기는 느낌에 지영은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소름이 일시에 전신으로 내달리면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과 함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익숙한 의자의 뒷모습이었다. 시내버스의 비닐 같은 파란 의자 시트. 눈에 들어온 건 분명 의자 시트였다. 삐익. 그다음으로 들려온 건 시내버스 벨을 누를 때 나는 소리였다.
“……뭔데?”
꿈인가?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분명 또 소녀를 구하고…… 전신이 짓밟히는 느낌을 받은 것 같은데? 그다음은 어떻게 된 거지? 끔찍한 고통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느낌이 옴과 동시에 거의 의식이 단절됐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몸이 좀 찌뿌둥하고, 힘이 없는 걸 빼면 아픈 곳은 없었다.
그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지영은 익숙한 횡단보도 앞이라 본능적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리고 나서 깨달았다.
“어, 음… 어, 뭐지. 꿈인가……?”
툭툭, 툭툭.
아프지 않았다. 발바닥으로 땅을 몇 번 쳐봤는데도 발목에 시큰거리는 통증이 올라오지 않았다. 첫 번째 사고가 났을 때, 두 번째 차량이 지영의 발목을 완전히 밟고 가면서 뼈가 제대로 으스러졌다.
선수 생명은 고사하고, 완전히 걷지도 못할 뻔한 걸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을 전부 털어 3번에 걸쳐 뼈 접합 수술을 하고, 볼트를 박아 고정해서 겨우겨우 걷는 게 가능했던 지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지면을 밟자 단단한 하체가 반응할 정도였다.
뭐지, 뭔데?
지영은 지금 이 상황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려 10년간 제대로 걷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체크 하다가 너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어깨에서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개꿈이네.”
그래서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렇게 움직이는 건 꿈에서나 가능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이게 그냥 리얼한 꿈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꿈도 일 년에 한두 번씩 꾸니까, 그런 거라 생각했다.
“승주야. 꺄르르! 아하하!”
이 웃음소리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지영의 고개가 천천히, 고장 난 인형의 목처럼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소녀를 보았다. 유모차, 배가 나온 임산부, 그리고 7살쯤 된 여자아이. 이 독특한 조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왜? 지영이 유모차에 탄 아이에게 하얀 곰 인형을 흔들고 있는 아이를 구하려다가 다쳤기 때문이었다.
“꿈……이지? 근데 왜…….”
이런 꿈을……. 하필 이때 꿈을?
사고 이후 단 한 번도 꾸지 않았었다. 꿈을 꾸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깨어 있을 때도 그때를 생각하며 괴로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꿈에, 그때 기억이 투영되어 있었다. 지영은 자각했다.
자신은 차에 지였고, 이는 주마등과 비슷한 종류의 꿈임을.
화가 나고, 서글퍼졌다.
저 임산부와 아이, 승주라는 아이까지.
이 사건은 너무나 슬픈 사건이었다. 지영이 아이를 겨우 구했지만, 뒤따라온 차량이 지영……의 발목을 밟고 핸들을 돌리는 바람에 임산부를 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구했지만 저 여인은 구하지 못했다. 유모차는 임산부가 본능적으로 밀어서 지영이 구한 소녀와 승주란 아이만 살았다.
“마지막 꿈이니까…… 다 구하고 가라는 거냐?”
하…….
진짜 너 너무 잔인한 거 아니냐……?
화가 났다.
하지만 지영의 혼잣말을 들은 여자아이가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신호가 떨어졌다. 지영은 그때 본능적으로 움직여서 아이와 임산부를 잡았다.
“어? 누, 누구…….”
“어, 엄마…….”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지영은 자신을 보는 둘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주춤거리는 둘을 잡아서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어어 하며 끌려오는 임산부와 여자아이. 임산부와 아이의 눈빛에 지영의 행동으로 인해 공포가 물들 때쯤, 부아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주운전 트럭.
“귀신같이 나타나네…….”
빌어먹을 꿈.
빌어먹을 음주운전 개X끼…….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트럭이 횡단보도를 바람을 일으키며 슝 지나갔고, 저 삼거리 앞에 전봇대에 처박혔다!
쿵!
꺄아아!
으악! 피. 피해!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전봇대가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인도에 있던 사람들도 난리가 났다. 두둑, 두둑, 전선이 출렁이기 시작하자 지영은 아이와 임산부를 바로 뒤에 약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놀란 눈빛으로 지영을 따라온 두 사람.
꿈이지만 두 사람을 무사히 구했다. 하지만 쓴웃음이 났다.
“처음에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트럭이 전봇대를 받는 사고는 났어도…… 자신도 무사했을 거고, 임산부도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니 이게 현실이면 좋았을 텐데.
어어, 당황한 사람들 틈에서 지영은 그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꿈이니까, 이제 곧 깰 거다.
아까 의식을 잃기 전에 당한 사고가 있으니까…….
“천국에 보내줘라. 그래도 좋은 일 두 번이나 했잖아.”
“어, 아저씨. 천국 가요?”
“응? 음, 모르겠는데 아마 그러지 않을까?”
곰돌이를 안은 아이의 질문에 지영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둘이나 구했는데, 지옥에 가는 건 좀 억울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저…… 감사합니다. 저희를 구해주시려고 한 것도 모르고…… 정말 감사합니다.”
임산부가 부푼 배를 손으로 안은 채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꿈이니까 인사를 받는 것도 좀 귀찮았지만 워낙에 얼굴에 감사함이 가득해서 지영은 일어나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우연찮게 보여서 저도 너무 과격하게 당겼네요. 임산부신데. 죄송합니다.”
실제로 횡단보도 옆에 봉고차가 잠시 정차해 있어서 음주 트럭이 보이지 않기도 했다. 지영이 두 사람을 구한 건, 저 말을 한 뒤에 앞으로 나서다가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뇌리에 각인이 된 사건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 제가 감사하죠. 저랑 승아, 승주, 승현이를 전부 구해주셨는데요.”
“하하…….”
그래 봐야 꿈인데요, 뭐.
그때 구해주지 못해서 좀 미안했어요.
이 말은 도로 속으로 삼킨 지영이었다.
도로는 난장판이었다.
지영이 다시 고개를 숙이자 아이 엄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거는지 잠시 멀어졌고, 승아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지영의 옆에 찰싹 앉았다.
“아저씨!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곰돌이도 고맙대요!”
“그래? 그런데 나 아저씨 아닌데? 이제 고등학생이야. 승아 엄마보다 훨씬 어려.”
“어? 진짜요? 근데 왜 우리 아빠처럼 생겼어요?”
“…….”
어우 야, 아무리 주마등 같은 꿈이라지만 그건 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지영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기도 할 거다. 그때 당시의 지영을 투영시킨 꿈이면, 지금 지영은 체전을 1주일을 앞두고 있던 상태다.
-73㎏을 뛰는 지영은 시합에 나갈 때마다 적어도 7㎏에서 9㎏은 빼고 나간다. 워낙에 근육량이 많고, 신장도 커서 4㎏ 정도 이후부턴 진짜 몸에 수분을 쥐어짜야지만 겨우겨우 체중을 맞출 수 있었다.
체전 일주일 전인 지금은 적어도 2㎏ 정도는 남겨 뒀을 때니까, 아마 피부는 완전히 맛이 갔고 눈도 퀭한 게, 사람 몰골이라 보기에는 힘든 상태였다. 그러니 승아의 눈엔 완전 아저씨처럼 보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좀 억울했다.
하지만 뭐.
‘꿈이니까. 그런데 이 꿈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지? 이렇게 긴 꿈은 또 처음이네.’
마지막이라고, 생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길게 이어주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 엄마가 다가왔다.
“저, 혹시 이 근처 사세요?”
“네? 네. 저 시장 안쪽에 살아요.”
원래는 청주에 살았다.
하지만 2년 전에 부모님은 본래 두 분의 고향인 충주에 내려오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어머니 혼자 저 시장 안 작은 점포에서 채소 장사를 하시며 살고 계셨다.
“아 저도 근처에 살았어요. 지금은 결혼하고 청주에 사는데, 오늘 친정 내려온 길이라…….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저녁 대접을 해도 괜찮을까요? 은인이신데 이렇게 보내는 건 정말 너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아니요. 괜찮아요.”
꿈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저분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무리 꿈이지만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런 대접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 있으면 귀찮게 굴 것 같아 지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승아가 힝! 하고 울상을 했다.
“안녕, 다음에 또 보자.”
다음 생이라는 게 있으면.
“힝…… 아저……. 아니아니! 오빠 이름이 뭐예요?”
“나? 지영. 강지영이야. 예쁘지?”
“네! 우와! 내 친구 중에도 지영이 있는데! 지영이는 이쁜데!”
“하하…….”
이 녀석, 끝까지 가슴에 비수를…….
그래도 사고 전까지는 아이돌 대접받던 자신인데, 이 아이의 심미안은 지극히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흐릿한 미소로 승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지영은 손을 내렸다. 초등학교 유도부 코치였던 지영이다. 아무리 어려도 신체 접촉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러자 승아가 내리려는 손을 잡아 자신의 머리에 턱 올렸다.
“히……!”
“…….”
그래, 그걸로 마음은 좀 풀렸다.
그래서 흐릿한 미소 말고 진심으로 웃어준 지영은 약국을 나섰다. 이미 경찰차 두 대에 119가 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영은 관심이 별로 없었다.
“어차피 꿈인데…… 화를 내서 무엇하리.”
노인네처럼 중얼거린 지영은 신호가 끊겨서 어수선한 길을 건너서 집으로 향했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있는 정육점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에 순간 배가 꼬로록 울렸다.
‘너무 리얼한 거 아니냐……?’
꼴깍.
정육점은 마트처럼 항상 싱싱한 고기를 구워 시식하게 해주곤 하는데, 그게 이 정육점의 인기 비결이었다.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뒤져보는 지영. 낡은 지갑에서 2만 원이 나왔다.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니까.”
비록 꿈이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꿈을 이제는 좀 즐겨볼 생각이었다.
“어, 지영이 아니냐. 시합은 어쩌고?”
음…….
여기서부터는 새로운 영역이다.
지영은 정육점 주인아저씨의 말에 순간 대답이 궁색해졌지만, 이내 적당히 대답할 거리를 찾았다.
“어머니 보려 잠깐 내려왔어요.”
“그래? 살 빼느라 힘들다고 들었는데 이런 거 보면 네가 참 효자다. 어휴, 우리 준식이가 네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꼬.”
“하하, 나중에 효도하겠죠.”
실제로 효도한다.
코인 대박을 터뜨려서 말이다.
그걸 아는 지영이지만 굳이 얘기해 줄 필요는 못 느꼈다.
“삼겹살 이만 원어치만 주세요.”
“어? 너 지금 살 빼는 중 아니냐?”
“괜찮아요.”
꿈이니까요.
놀란 기색이던 주인장은 지영이 괜찮다고 하자 마지 못해 삼겹살을 썰어줬다. 이 꿈을 꾸기 전에도 항상 지영이 오면 반 근은 더 주던 아저씨는, 오늘도 역시 반 근을 더 주셨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복 받으실 거예요. 꼭.”
“하하, 그래. 고맙다.”
그렇게 인사를 한 지영은 맛있는 삼겹살의 ‘무게감’을 느끼며 어머니의 가게로 향했다. 하지만 안 계셨다.
“어, 지영이 왔네? 엄마는 지금 배달 갔어. 좀 전에 갔으니 30분쯤 걸릴 거야.”
“네, 감사합니다.”
배달을 가신 어머니.
솔직히 조금 긴장했다. 어머니를 보자마자 꿈이 끝날 것 같아서.
‘조금의 여유가 더 생겼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가게의 뒷골목, 작은 주택으로 들어온 지영은 퀴퀴한 채소 냄새도 정겨웠다. 살아생전, 계속 맡고 싶던 냄새지만 이제는…… 맡기 힘든 냄새라고 생각했다.
지영은 지갑과 학교 체육복 상의를 대충 던져두곤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올려 구웠다. 그리고 오늘 온다고 해서 어머니가 해두었을 잡곡밥을 퍼서, 배를 채웠다.
그래, 배를 채웠다.
삼겹살 두 근, 밥 두 공기.
배 터지게 먹고 작은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런데 졸음이 왔다.
‘어, 어…… 안 되는데…….’
아직 어머니 못 봤는데.
하지만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수마는 단숨에 지영을 덮쳤고, 그렇게 지영은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깬 지영은, 새로운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