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 폭풍전야(1)
카일의 손에 들려있는 스마트 폰.
그 어떠한 과정도 없었다.
기억의 재생과 함께 카일의 손에는 스마트 폰이 들려져 있었다.
설마하니 잘못 본 것인가?
시안은 눈을 비비며 시야를 바로했다.
그러나 카일의 손에 들린 건 분명한 스마트 폰이었다.
그렇다면 기억이 끊긴 것인가?
그러니까 카일이 스마트 폰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끊어진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것이 유일했다.
그러나 기억의 흐름이 끊긴 것 같지는 않았다.
시안이 보지 못한 기억이 하나 있을 뿐.
‘스마트 폰을 그 공간에서 얻어왔다···?’
이건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새하얀 백광만이 가득했던 공간.
그 안에 있던 정체 불명의 사내.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다.
카일을 잠식한 교만의 악마가 잠잠해진 것도.
갑자기 카일의 스마트 폰이 들려있는 것도.
모두가 그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뜻이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공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카일은 아니었다.
직접 그 공간에서 어떤 일들을 행하고 나왔다.
그 정체 불명의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
어느덧 진정이 된 카일은 가만히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차분하게 내려진 시선은 손에 들린 스마트 폰을 향하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는 카일의 눈빛.
이윽고 화아아악!
새하얀 빛무리가 다시금 시안의 시야를 덮쳐왔다.
#
시야를 덮치는 빛무리와 함께 시안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수많은 가정들이 떠올랐고.
다시 수많은 가정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진실은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은 느낌.
머릿속이 혼돈으로 가득찬 것만 같았다.
그런 멍한 정신 속.
시야를 덮쳤던 빛무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윽고 보인 것은 어떤 동굴이었다.
동시에 어딘가 익숙한 동굴의 풍경이었다.
‘여긴···.’
시안이 스마트 폰을 처음 발견했던 곳.
고블린에게 쫓기다 들어온 그 동굴.
그 동굴 깊숙한 곳에 카일은 홀로 서 있었다.
카일은 스마트 폰이 아닌 검을 가볍게 말아쥔 서 있었다.
스마트 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옷 안 쪽으로 넣어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에 두고 온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카일은 스마트 폰이 아닌 검을 들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안배뿐이다.”
그리고 카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감각을 확장해도 그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는 오로지 카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카일과 그 카일의 기억을 엿보는 시안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카일에게는 카일 혼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쾌검(快劍)은 극한의 빠름을 추구하는 검이다. 개방의 거지들이 음식을 탐내듯. 허나, 그것은 자연의 본성이요, 삶을 위한 자연의 움직임이다.”
그럼에도 카일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콰아아아아아─!!
카일의 기세가 끓어올랐다.
전신으로 짙은 마(魔)가 피어오르며, 동굴의 공간을 격동시켰다.
그리고 다시 그 순간.
‘······!’
시안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 무언가가 시안의 몸을 훑고 지나간 듯한 느낌.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두 눈으로 보이지 않았고, 증폭된 감각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쐐애애애액!
한참 뒤에야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환검(幻劍)은 상대의 눈을 현혹하는 검이다. 눈을 속이고 귀를 막아 혼란을 유발한다. 가짜를 진짜로 현혹시켜 검의 허초를 만들어 낸다. 허나, 천하는 이미 공(空)이요, 허(虛)이니. 현실은 모든 것의 허상이라. 하여 생명의 잉태를 본질로 삼아 세상을 피워내니. 화산은 이를 두어 개화(開花)라 하며, 매화검결의 극(極)이라 말한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카일의 말.
그와 동시에 카일의 모습이 일순간 어둠으로 화하며 사라졌다.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카일의 보법, 마혼무영보(魔魂無影步).
일순간 모습을 드러낸 카일의 신형 위로, 한 줄기 검격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스쳐지나간 검격 위.
알 수 없는 꽃향기가 코 끝을 살며시 찔러왔다.
“둔검(鈍劍)은 느린 검이다. 하지만 느리다고 하여 수가 없는 건 아니다. 극과 극은 닮는다. 강하지도,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지만 그 어느 것보다 완벽한 정도(正道)를 걷는다. 일체의 변화와 잔재주를 배제한 검. 종남파는 이를 두어 중도(中道)의 검(劍)라 칭한다.”
카일은 다시 검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아주 느릿하게 검이 휘둘러짐에, 시안은 차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일의 검은 눈에 선히 보일 정도로 느릿하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분명 한 발자국만 옆으로 피하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전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묵직한 중압감에 숨통이 조여오고있었다.
‘이건···.’
그렇기에 시안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마혼수라검의 최상급 과정.
엑시드(Exceed)의 경지에 닿기 위한 검.
지금 카일은 시안에게 직접 마혼수라검을 가르치고 있었다.
“강검(强劍)은 검에 무게를 싣는 검이다. 도(道)는 숨어서 이름이 없으나, 깨달음이 더해질수록 그 무게가 더해지니. 나를 이루는 천하와 닿아 내가 곧 천하가 된다.”
그래, 카일은 지금 시안을 가르치고 있었다.
여전히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카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일은 눈앞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 장면을 볼 것이라는 것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중검(重劍)은 무거움을 담은 검이다. 그 무거움은 다름 아닌 마음(心)의 무게. 그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중(重)의 마음(心)을 일컬어 불가에서는 부처의 마음이요, 부동심(不動心)이라 한다.”
카일은 자신의 검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석해주었다.
“유검(流劍)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잇는 검으로 도가의 묘리가 담겨 있는 검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色)과 공(空)은 다르지 않으니. 수상형식, 역부여시. 천하를 구성하는 오온 또한 그러하리라.”
하나하나 해석함과 동시에 뜻을 풀어 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패검(覇劍)은 유가의 묘리를 더한 검이다. 패기(覇氣)라 함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힘으로 천지(天地)에 들어찬 기운이라. 그 무엇도 맞설 수 있는 기상으로서 이는 의(義)를 쌓아 생김으로 꾸준한 수련이 필요한 검이다.”
이윽고 터져나오는 기세는 시안의 정신을 움켜쥐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카일의 검.
쾌(快), 환(幻), 둔(鈍), 강(强), 중(重), 유(流), 패(覇).
마혼수라검의 최상급 과정이자 모든 검술(劍術)의 기본이 되는 검.
시안이 모바일 영주를 통해 보았던 검이었다.
그러나 지금 카일이 설명하는 검은 아니었다.
카일이 직접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검은 단순히 검술의 기본이 아니었다.
검술을 넘어 이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듯한.
마치 온 천하를 담아내는 듯한 검(劍)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완성한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이다.”
카일은 그렇게 검을 멈추었다.
“그리고 내가 완성하지 못한 검(劍)이기도 하다.”
동시에 시안을 향해 시선을 들어보임에.
시안은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카일이 검을 가르치듯 보이는 행동.
지금 카일의 시안을 가르치듯 하는 말들.
‘이게 무슨···.’
그 난해함을 넘어서 카일의 행동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안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카일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혼란스러운 정신 속.
띠링!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최상급 진행률 72.1%(+3.2%)]
《인과를 소모하여 해당 기억을 다시 시청할 수 있습니다.》
《해당 기억을 다시 시청하시겠습니까?》
시안은 망막 위로 수많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
루벤의 영주성 Lv.4에 위치한 대회의실.
현재 대회의실에는 루벤의 영지민들을 대표하는 모든 이들이 모여있었다.
인간을 대표하는 그레이슨.
드워프를 대표하는 세미르.
다크 엘프의 세라와 수인족의 카리스까지.
말 그대로 루벤의 영지민을 대표하는 모든 이들이 한데 모여있었다.
그리고 루벤을 총괄하고 책임지는 존재.
한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대회의실의 상석에 앉아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성 제국의 병력들이 루벤을 향해 진격해올거에요.”
제국의 황녀, 엘레나.
현재 루벤은 엘레나의 지휘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본래라면 응당 시안이 했어야할 일이었다.
루벤의 영주인 시안이 저 자리에 앉아 모든 이들을 지휘해야만 했다.
그러나 현재 시안은 공석인 상태였다.
그 대리인으로 엘레나가 통솔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이는 당연하게도 시안의 뜻이었다.
얼마 전, 시안이 한스에게 찾아와 했던 말.
‘엘레나 황녀님께 전권을 위임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신성 제국과 전쟁이 임박한 것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현재 카이의 행방이 묘연해.’
카이 엘란두르.
현 시대에서의 교만의 악마.
만일 시안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아니, 아니다.
이제와 추측이라는 말은 그만하자.
카이는 이 시대에서의 교만의 악마다.
동시에 신성 제국을 움켜쥔 실재하는 신(神)이다.
물론 카이가 교만의 악마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말자.
카이는 교만의 악마다.
정말로 실재하는 신(神)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신(神)이 되려는 자는 확실했다.
따라서 교만이 갖는 신격.
‘그 강함이 어떠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애초에 신의 존재는 불분명했고.
있다고 한들, 한낱 피조물이 볼 수는 없었으니까.
따라서 교만이 갖는 신격.
카이가 갖는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교만의 악마는 카일과 버금가는 존재야.’
따라서 그런 교만의 악마를 품고 있는 카이.
아마··· 카일과 대적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카일은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이 세상의 절대자였다.
그런 카일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현재와 과거, 고금(古今)이라는 시간을 통틀어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카이를 막아야 해.’
그러나 시안은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역시나 냉정히 말하면 지금은 힘들었다.
‘시간이 필요해.”
그렇기에 닿아야만 한다.
신화 속의 경지, 엑시드(Exceed).
천 년전, 대륙을 구원한 아르나이즈들과 같은 반열에 서야만 한다.
‘아마··· 시간에 맞춰서 못 돌아올 수도 있어.’
신성 제국이 루벤에 닿았을 때까지도.
루벤과 신성 제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까지도.
시안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해서 황녀님께서 루벤의 지휘를 부탁할까 해.”
그래서 시안은 자신의 공석을 엘레나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한스는 그런 시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련님···.’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지 못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이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꼭 황녀님이어야만 합니까.’
그러나 그 대리인이 왜 엘레나란 말인가.
물론 엘레나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또한 황녀로서 수준 높은 통찰력을 지닌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은 온실 속의 화초일 뿐이었다.
황궁이라는 곳에서 곱게 자라온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현실은 온실이 아닌 냉혹한 야생이었다.
따뜻한 온실과는 차원이 다른 차디찬 곳.
엘레나는 그런 야생에서의 경험이 없었다.
황궁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은 많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야생은 지식이 많다고 하여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온실 속에서 익힌 지식들이 날아드는 검을 막아주지는 않으니까.
굶주린 짐승들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않으니까.
하물며 이번엔 그 무엇도 아닌 전쟁이었다.
죽고 죽이는 냉혹한 현실의 참상을 고스란히 담아낸 전쟁.
엘레나를 그런 험악한 일의 책임자로 맡긴다?
솔직히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이번만큼은 시안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나를 믿어. 황녀님은 충분히 잘 해줄거야.’
하지만 시안의 생각은 확고했다.
시안이 엘레나에게서 무엇을 본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안의 의지는 확고했고.
한스는 끝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안은 자리를 비웠고.
엘레나가 그 자리를 대신한 지금.
“전쟁에 앞서, 가장 먼저 이사벨 후작 부인의 이목을 속일 필요가 있어요.”
한스는 그 걱정과 불안이 얼마나 기우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사벨 후작 부인은 반역을 통해 이목을 엘란두르로 집중시켰어요. 동시에 황가가 나설 명분을 막아버렸죠. 이쪽에서 다행히 계획을 알아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에 끌려가는 척 움직일 거예요.”
엘레나는 한스의 예상보다 더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을 선보였다.
“우리가 후작 부인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그리하여 후작 부인이 짜놓은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안심하도록 만들거예요.”
그리고 그에 따른 대책까지도 완벽했다.
“황가 쪽에는 오라버니께 제가 은밀히 연락을 해두었어요. 조만간 황가에서 엘란두르를 처단하기 위한 출정식이 있을 거예요.”
엘레나는 단순한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었다.
군주라는 씨앗.
엘레나는 여제(女帝)의 자질을 품은 씨앗이었다.
그 씨앗이 그저 온실 속에서 길러진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되려 온실 속에서 길러진 것이 다행이었다.
갓 태어난 새끼 드래곤도 성체 오우거를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온실 속에서 무사히 성체가 된 드래곤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한스는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았다.
엘레나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지금 한스에게 있어 엘레나는 시안을 대신하는 책임자.
이 순간만큼 엘레나는 루벤의 안주인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루벤의 대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에 맞춰서 루벤 쪽에서도 움직임을 내보여야해요. 그래야 이사벨 후작 부인이 착각할테니까요. 루벤은 신성 제국이 쳐들어 온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우리는 이사벨 후작 부인. 당신이 짜놓은 판에 잘 놀아나는 중이다. 이렇게 말이죠.”
엘레나는 대회의실에 모인 이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설마하니 자신의 계획이 간파당했다는 생각은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만큼··· 치밀한 계획이었으니까요.”
엘란두르의 내정을 총괄했던 이사벨.
말로는 수없이 들었지만 직접 본 이사벨은 확실히 무서운 자였다.
“해서 일을 서두를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엘레나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엘레나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여 계획을 수정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솔직히 시간을 벌어야하는 것은 이쪽 루벤이었다.
애초에 체급 자체가 말이 안되는 전쟁이었다.
대륙의 패자로서 제국의 반열에 든 제국.
반면에 루벤은 어둠의 숲에 위치한 변방의 작은 영지였다.
당연히 불리한 것은 루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밍기적밍기적 전쟁을 끌어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러지 않았다.
“신성 제국과의 전쟁을 앞당길 거예요.”
루벤이 어떤 곳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루벤이 어떤 저력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힘을 보유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엘란두르의 30만 대군을 단 한 명의 사상자 없이 패퇴시킨 곳.
대륙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력이 잠들어 있는 곳.
“신성 제국은 우리가 엘란두르를 향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병력을 이끌고 진격해올 거예요.”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저희가 빠르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저쪽도 준비할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죠.”
안달나는 건 저쪽이라는 뜻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쪽도 시간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엘란두르가 멸문하기 전에 루벤을 없애야했으니까.
만일 루벤보다 먼저 엘란두르가 멸문을 당한다면.
그로써 황가라도 끼어든다면.
골치가 아파지는 건 저쪽이었다.
따라서 이쪽에서 빠르게 움직인다면 신성 제국도 허겁지겁 움직인다.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도 못하고, 병력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조사도 안해볼 것이 뻔했다.
루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루벤에 황녀라는 또 다른 반역의 명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우리는 준비가 안된 신성 제국을 역으로 삼킬 거예요.”
그렇게 스스로가 세운 계략에 되려 걸려들 것이다.
이는 이사벨의 계획을 먼저 간파하고 되려 역으로 파놓은 함정.
바로 그때.
“황녀님.”
대회의실 한 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루벤의 정보부장, 다이애나가 서 있었다.
얼마 전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다만.
금방 회복한 것인지 상태가 멀쩡해보였다.
엘레나는 그런 다이애나를 바라봤고.
다이애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황가에서 엘란두르에 대한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그에 따라 황가의 로열 나이츠가 엘란두르를 향해 이동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다이애나는 약간 놀란 눈치로 말을 이었다.
“신성 제국이 루벤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다이애나의 말에 대회의실의 모든 이가 놀란 눈을 떠보였다.
엘레나의 예측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했으니까.
“모두들 준비하세요.”
엘레나가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냉철한 눈빛으로 대회의실에 모인 이들을 바라봄에.
“백작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그 어떤 누구도 루벤 땅을 밟지 못할 겁니다.”
여제(女帝)와도 같은 위엄.
그리고 그런 엘레나의 모습 때문일까.
대회의실에 모인 루벤의 대표들의 얼굴에는 어느덧 긴장이 사라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