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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하는 영주님!-304화 (304/322)

304화 - 다가오는 전조(2)

카일이 레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레아는 가만히 집무실의 쇼파에 앉아있었다.

형체가 없는 유령이었기에 딱히 앉는다, 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레아는 쇼파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 여느 때보다 여인스러운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평소 털털한 레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약간의 긴장과 더불어 비치는 떨림.

조신한 모습은 마치 새색시 같은 면모마저 돋보였다.

시안은 그런 레아의 맞은편.

집무실의 책상 의자에 앉아 살며시 시선을 내려보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까.

아니, 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맞는 걸까.

여러가지 생각이 시안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시안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고.

레아는 그런 시안을 재촉해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카일은.”

시안은 끝내 입을 열었다.

“악마를 품고 있었어요.”

그리고 레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초점 없는 회백색의 눈동자 위로 뚜렷한 놀람의 감정이 떠올랐다.

시안은 그런 레아의 눈을 마주함에.

“카일은 그 모든 것을 홀로 감내하려고 했었죠.”

DLC 컨텐츠 - 카일의 일지.

그곳에서 보고 경험했던 모든 진실들을 차분히 이야기해주었다.

이야기는 상당히 길었다.

요약이나 이야기를 넘겨 짚지 않고 본 것 그대로를 모두 말해주었으니까.

그 때문에 이야기는 상당히 길어졌다.

하지만 레아는 그 긴 이야기 동안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추임새나 여타 다른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놀란 눈으로 묵묵히 혹은 가만히.

-······

레아는 시안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

“······ 결국. 카일은 샤를롯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안은 경험한 카일의 기억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물론 마지막은 아니었다.

아직 보지 못한 카일의 기억은 남아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새하얀 백광의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본 정체 불명의 사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테리였다.

“모든 것이 밝혀진 건 아니에요.”

그렇기에 시안이 말한 것은 완전한 진실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아가 궁금해 한 것들. 그리고 카일이 레아에 대한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앞선 부분에 대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카일이 왜 레아를 떠나야만 했는지.

카일이 왜 그러한 행보를 보여야만 했는지.

그리고 카일이 레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

레아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슬퍼하지도 그렇다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왜··· 대체 왜···.

그저 레아는 혼란스러워할 뿐이었다.

차라리. 차라리 배신을 한 것이었다면.

카일이 레아를 버리고 떠난 것이었다면.

개인적인 욕심.

혹은 정말로 다른 여인 때문이었다면.

그 때문에 카일이 레아를 떠난 것이었다면.

-왜···.

아마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터였다.

속 편하게 원망할 수 있었고,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카일은 그러지 않았다.

카일은 진심으로 레아를 사랑했고.

진심으로 이 대륙을 위해 희생했다.

아마 어쩌면.

카일은 이 모든 일의 끝에서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안이 모든 기억을 읽은 것이 아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카일은 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카일은 그러지 않았다.

카일은 떠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이 대륙에 남겼다.

시안이 바로 그 증거였으니까.

카일은 마교의 교주이자 천마(天魔)가 아닌.

대륙의 영웅, 아르나이즈(Arnaiz)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시안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란스러워하는 레아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할 것 같았으니까.

사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시안이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었다.

여긴 시안의 집무실이었고 그렇기에 레아가 자리를 피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시안은 천천히 그리고 말없이.

레아를 두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

집무실 밖으로 나온 직후..

“······ 어디 가지?”

시안은 뭘 해야하나 싶었다.

아니, 막상 나오기는 했다만.

이게 대책없이 나온 터라 딱히 갈만한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막상 할 일을 하자니 할 일도 없었다.

뭐, 루벤의 영주로서 할 일이야 만들면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미에서 인재들이 많이 육성되고 배출된 덕분일까.

“알아서들 잘하고 있으니···.”

현재 시안이 없어도 루벤은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있었다.

“다이애나가 정보를 모아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고.”

해서 엘레나한테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에이, 됐다.”

이것도 금방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여독을 풀며 쉬고 있을텐데 굳이 찾아가 귀찮게 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난 번에 일로 서먹하기도 하고.”

다름 아닌 엘레나의 고백 아닌 고백.

평소 엘레나와는 정말 다른 모습이었다.

결혼을 제안하던 때와는 그 느낌이 상당히 달랐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엘레나를 단 둘이 대면하기에 뭔가 서먹했다.

“그냥 수련이나 하자.”

결국 떠오르는 건 이것 하나뿐.

무엇보다 사실 시안도 생각이 복잡해져 있었다.

신성 제국의 일도 그렇고.

이사벨의 반역 행위도 그렇고.

무엇보다 카일의 기억을 지켜보며 보았던 진실들.

레아도 레아였지만, 시안도 생각이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생각이 복잡할 땐 역시.

“땀이나 빼자.”

아무 생각없이 검을 휘두르며 땀을 빼는 게 상책이었다.

“요즘 수련도 게을리 하기도 했고.”

황궁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한다고 수련할 시간이 없었다.

가뜩이나 밀려있는 마혼수라검의 최상급 진행률이건만.

100%를 달성하려면 부지런히 수련해도 모잘랐다.

“그러고보니 지금 진행률이 얼마였더라.”

한 3%인가 4%였던 걸로 아는데.

마지막 기억으로 듀라크를 제압하며 5%에 달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있기는 했었다.

“확인해보지 뭐.”

시안은 생각난 김에 손을 앞으로 뻗어보였다.

그와 동시에 망막 위로 펼쳐지는 모바일 영주의 시스템 창.

시안은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마혼수라검의 진행률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최상급 진행률 64.7%]

“엥?”

진행률이 뭔가 이상했다···?

시안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시야를 바로해보였다.

그러나 망막 위로 떠오른 알림창의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껐다 켜보고 다시 한 번 확인함에도 변하지 않았다.

자그마치 64.7%

하루 종일 수련해도 0.1% 겨우 올릴 수 있었던 진행률이었다.

그렇게 개고생을 해가며 겨우겨우 올린 진행률이 3%대.

듀라크와의 결전에서 5%까지 그 진행률은 본 바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60%가 넘게 올라있었다.

“이게 무슨···?”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이거 설마···.”

시안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카일의 기억을 봤기 때문인가?”

다름 아닌 DCL 컨텐츠 - 카일의 일지.

그곳에서 카일의 검을 직접 보고 겪은 것.

그 때문에 진행률이 오른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말이 안되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또 마냥 말이 안되는 건 아니었다.

일단 시안은 현재 드래곤의 힘을 흡수하여 오성이 개화한 상태.

시안은 천재를 뛰어넘는 재능의 소유자나 다름 없었다.

그 상황에서 카일의 검을,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일이 직접 사용한 검을 본 것은 어마어마한 수련이 되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되어 검을 견문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따라서 끝을 본 것과 보지 않은 것.

그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진행률이긴 했다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이건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100%의 진행률이 결단코 꿈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혼수라검의 최상급 과정.

그 과정의 진행률을 100% 달성한다는 것.

“엑시드의 경지···.”

그것은 엑시드(Exceed)의 경지에 발을 딛는다는 뜻이었다.

천 년전, 아르나이즈들과 같은 신화 속의 경지.

기나긴 대륙의 역사상 단 6명만이 닿을 수 있었던 경지.

물론 아직 그 경지에 닿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쉬운 길이라는 뜻도 아니었다.

64%는 64%일 뿐. 100%는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여기서 정체되어 진행률이 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지가 이제는 보인다는 것.

신화 속의 경지가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것.

“갑자기 의욕이 샘솟는데.”

시안은 영주성 지하의 개인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신성 제국 루테아.

루테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교황청.

그리고 그 교황청에 위치한 여명 교파의 추기경, 알베르토의 방.

콰앙!

알베르토는 들고 있던 성서를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분노로 물든 손이 파르르, 떨리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예하, 진정하시옵소서.”

방에 있던 사제의 말에 알베르토는 크게 심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럼에도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알베르토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고.

그리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는 마음에 앞선 사제에게 물었다.

“성녀께서는. 성녀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알베르토는 추기경으로서 여명 교파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명의 교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성녀, 아리아였다.

“신성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현재 샤를롯 제국의 시안 백작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리아가 현재 신성 제국에 없었다.

타국에서 다른 귀족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성녀라는 지위의 고위 사제가.

그것도 한 교파의 수장이라는 자가.

대체 이 난리통에 어딜 그리 쏘다니냐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었다.

“다행이군.”

그러나 알베르토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알베르토는 품 속에서 자그마한 서신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앞선 사제에게 편지를 건네며 단단히 당부했다.

“이 편지를 성녀께 전달하게.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신성 제국으로 오지 말라고 전하게.”

“하지만···.”

사제는 머뭇거리며 망설임을 내보였다.

뭐,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일수록 수장이 그 자리를 지켜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알베르토는 단호했다.

“지금 신성 제국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네.”

지금 아리아가 온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으니까.

아니, 되려 아리아가 오면 상황만 악화될 뿐이었다.

정확히는 아리아마저 발목이 묶일 뿐이었다.

썩어버린 신성 제국의 내부.

지금 신성 제국은 안에서부터 썩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부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신체의 고름을 짜내려면 외부에서 바늘로 찔러야하는 것처럼.

신성 제국의 썩은 고름을 짜기 위해선 외부에서 행동해야한다.

“하오나 예하. 그래도 교황 성하께 간곡히 말씀을 드린다면···.”

“지금 그 성하가 문제란 말이네!”

알베르토는 참다 못한 소리를 내질렀다.

아까 전, 교단의 회의에서 있었던 일.

성녀의 파면을 걸고 갑론을박을 펼쳤던 회의.

여명과 황혼.

서로가 물러섬이 없는 치열한 설전이었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 결과가 예정되어있는 설전이었다.

여명은 성녀의 파면만은 면하게 하기 위함.

황혼은 성녀의 파면을 들먹여 여명의 입지를 깎아내리기 위함.

그래, 애초에 황혼은 성녀의 파면이 통과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교파간의 명성이 아닌 교단 전체의 명성이 걸린 일.

황혼으로서도 성녀의 파면은 손해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성녀의 파면이 통과되었다.

다름 아닌 교황, 성(聖) 아나리스토의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성녀는 파면이 되었다.

교황으로서의 결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합당한 권한 행사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결정은 파격적이었으나, 절차 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허나, 교황 성(聖) 아나리스토는 본래 저런 인물이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팔랑귀.

적나라 하게 말하면 줏대 없는 노친네.

교황은 그 동안 단 한 번도 저렇게 결정을 내린 적이 없었다.

여명과 황혼이 치고박고 싸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얼추 합의가 될 때 쯤 ‘음, 그럽시다.’ 하고 말아버릴 뿐이었다.

저렇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적이 단,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성하께서 신(神)의 뜻이라 하더군.”

신의 뜻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으며 성녀의 파면을 통과시켜버렸다.

알베르토 또한 신을 믿는 신실한 사제였다.

그것도 추기경이라는 고위직의 사제.

그렇기에 신의 뜻이라는 말이 얼마나 말 같지도 않은 것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억지라 할 수 있겠다.

별 다른 논리와 명분이 없을 때, 내세울 수 있는 억지.

문제는 신성 제국에서 그 억지는 실로 강력한 무기였다.

그리고 그 억지가 억지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명분이 되어버린다.

“자네는 황혼의 입지가 왜 이렇게 갑자기 강력해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알베르토는 앞선 사제에게 물었고.

“아무래도 성녀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상태이다보니···.”

사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였다.

알베르토는 살며시 고개를 저어보였다.

“지난 날, 황혼은 악마와 관련하여 교단 재판에 회부되어있었다네. 황혼의 수장이었던 레이첼 추기경은 잠적을 감추었고, 그에 따라 황혼의 입지는 그야말로 곤두박질 쳐졌지.”

계속 이어지는 알베르토의 말.

“이 상황에서 성녀께서 자리를 비웠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 상황이 역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제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알베르토는 차분히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성녀께서 자리를 비운 영향은 없잖아 있었겠지.”

영향이 없잖아 있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대세에는 하등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아리아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고 한들.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성녀(聖女)는 어디까지나 성녀(聖女)일 뿐이었으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결단코.

신(神)은 아니었으니까.

이곳 루테아는 신성 제국이다.

신을 섬기는 자들이 모여 이룩한 국가.

그래, 기본적으로 ‘신’을 섬기는 국가다.

그렇기에 신성 제국의 신민들은 물론 교황청의 사제들.

그들 모두가 신(神) 아래 모두 어리숙한 존재들이었다.

샤를롯 제국과는 달리 신성 제국은 결국 모든 것이 신의 뜻으로 통일된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의 신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신께서는 분명 존재하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존재하지 않으신다.

아득한 너머에 존재하시어 우리를 굽어살피실 뿐.

절대로, 결단코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신다.

신께서는 이 세상에 실재하시지 않으신다.

오로지 믿음으로서 존재하실 뿐.

믿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서, 이곳에 살아계신다.

하지만 만일.

정말로 만일에 만일.

“신께서 실재하신다면 어떠할 것 같은가.”

신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친 신성 제국.

오로지 신의 뜻으로 통일되는 이 신성 제국에 말이다.

당연하게도 신의 뜻으로 모든 것이 통일된다.

교리? 윤리? 도덕? 법도?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건 인간들이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신(神)의 뜻 아래.

신(神)의 말씀 하나로 그 모든 것들은 갈가리 찢어진다.

신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하등 의미가 없다.

그리하여 신께서 악(惡)을 보고 선(善)이라 칭하신다면, 그것은 선(善)이 된다.

신께서 간음을 허락하면, 그것은 하나의 교리가 된다.

신께서 매춘을 허락하면, 그것은 세상의 도덕이 된다.

인간들이 규정한 윤리, 도덕, 법도.

그런 것들은 모두 이단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善)에 가까울지라도.

신(神)의 말씀이 그것을 악(惡)으로 규정짓는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이단이자 악(惡)이 되어버린다.

실재하는 신(神)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까.

신(神)의 말씀이 곧 이 세상의 진리나 다름 없으니까.

적어도 이곳, 신성 제국에서는.

그렇기에 신께서는 실재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신께서는 존재하시되 존재하지 않으신다.

저 너머에 군림하여 굽어살피실 뿐이다.

허나, 만에 하나 신께서 실재하신다면.

우리들의 눈앞에 나타나 그 존재를 드러내신다면.

신(神)의 이름 아래 모인 신성 제국.

“성하께서는···.”

아니, 이제는 성하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는 더 이상 교황이라 부를 수 없었으니까.

실재하는 신(神)을 추종하는 광신도들의 수장.

그래, 지금 이곳은 오로지.

“성전(聖戰)을 준비하고 있다네.”

신(神)을 위한 광신도의 집단일 뿐이다.

악마 따위에 홀린 것이 아니다.

차라리 악마였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 존재는 악마가 아니었다.

악마처럼 보이나 실재하는 신(神).

악마와 신.

어쩌면 그 둘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여, 그 숭고한 신의 뜻 아래.

이곳은 하나처럼 움직이는 광신도들의 집단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신성 제국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이미 실재하는 신의 뜻 아래 통일되었으니까.

하여 이 광신도 집단을.

우리들을 구원할 방법은 딱 하나이자 한 명뿐.

“가게나. 가서 성녀께··· 아니, 시안 루벤 백작에게 전하게나.”

시안 루벤 백작.

이 대륙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에게 전해야만 한다.

“신(神)을 죽여만 한다고.”

알베르토는 무겁게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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