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다가오는 전조(1)
교황청의 대회의실에 내려앉은 충격.
충격과 함께 숨막히는 정적이 내리깔렸다.
여명의 사제들은 물론 황혼의 사제들까지.
어느 누구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교황 성하!!”
한 사제가 크나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명 교파 소속의 추기경, 알베르토.
알베르토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재차 소리를 높였다.
“파면을 이리 쉽게 결정하시다니요! 지난 역사 동안 성녀직을 파면했다는 전례가 없습니다!”
알베르토는 소리쳤고.
교황은 아무런 답을 해보이지 않았다.
그저 계속 말해보라는 눈빛으로 알베르토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에 알베르토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파면은 중대한 형벌입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죄에도 무게가 있는 것처럼 처벌에도 합당한 무게가 있습니다. 가벼운 죄에 중한 형벌을 내린다면, 그 어떤 신민들이 교단의 교리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성녀의 죄가 가볍지는 않지 않은가.”
나지막히 들려오는 교황의 답.
알베르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가볍지는 않으나 그리 무겁지도 않습니다. 교단의 교칙을 어긴 것도 아니요, 교리를 어긴 이단의 행동을 한 것도 아닙니다. 악마와 관련하여 단지 고집을 부린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까!”
“그 고집이 교단의 명성을 깎아내리고 있네. 교단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만큼 중대한 죄가 어디에 있나.”
“그렇다고 성녀를 이렇게 파면한다면. 고단의 명성과 이미지가 더 깎아내려질 것임을 정녕 모르십니까 성하!”
알베르토를 호소를 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맞는 말이기도 했다.
성녀가 갖는 위명과 이미지.
신성 제국의 신민들은 물론.
전 대륙의 대중들에게 성녀는 그야말로 여신이었다.
인지도만 생각하면 성녀는 어찌보면 교황보다 위에 있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성녀를 파면한다는 것.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합당한 이유라면 모를까.
고작 이러한 이유는 신성 제국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일이었다.
“부디 성령을 철회하여 주시옵소서!”
추기경, 알베르토는 그 부분을 짚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황혼 교파의 사제들은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알베르토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본인들 입으로 성녀의 파면을 꺼내기는 했다만···.
솔직히 이렇게 쉽게 통과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저 성녀의 입지를 깎을 생각일 뿐이었다.
그로써 여명의 힘을 누그러뜨리려던 수작일 뿐이었다.
그런데 교황이 단번에 승인해버리니.
황혼의 사제들 입장에서도 얼떨떨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사제들은 교황이 알베르토의 말을 수긍할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황혼이 목소리를 내면 또 모르겠다.
그런데 황혼이 침묵하는 지금.
교황이 분명 한 발 물러설 것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두 교파의 의견을 조율해가던 교황이었으니까.
“불가하네.”
그러나 교황은 확고했다.
확고하고도 단호한 의지를 내비쳐보였다.
평소와 다른 교황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 눈을 떠보였다.
“신(神)의 말씀이시네.”
그리고 이어진 교황의 말.
그와 동시에 여명과 황혼의 두 사제들이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교황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그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수긍이가면서도 어리둥절한 심정이 들었다.
그러나 추기경, 알베르토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까드득!
알베르토는 이를 뿌드득, 씹을 뿐.
그 이상으로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
루벤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애초에 순탄하지 않을 이유도 없긴 했다만···.
그냥 솔직히 말하면 엘레나와 아리아.
두 여인 간에 별 다른 트러블이 없었다.
엘레나는 애초에 트러블을 일으킬 생각이 없어보였고.
아리아도 처음에만 심퉁해할 뿐, 딱히 그 이상의 제스처는 없었다.
되려 루벤에 다와갈 때쯤.
“황녀님도 레아, 그 원귀한테 괴롭힘을 받으셨나요?”
“괴롭힘··· 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요···?”
둘이 어느 정도 친해진 모습까지도 엿보였다.
“하여간, 그 원귀를 어떻게 해야하는데. 어떻게. 이번에 같이 복수해볼래요?”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제게는 아무래도 오랜 선조분인지라···.”
묘한 공감대도 형성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인이었다.
예상밖의 모습이라면 예상 밖의 모습.
뭐, 어쨌든.
루벤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할 수 있었다.
해서 그렇게 돌아온 루벤.
“돌아오셨습니까 도련님.”
가장 먼저 한스가 나와 시안을 마중했다.
그리고 시안의 뒤쪽으로 엘레나를 본 것일까.
정확히는 아리아와 엘레나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것일까.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오신 겁니까?”
한스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사고라니. 내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그래?”
“그게 아니라면 황녀님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그리고 성녀님도 이번에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스는 당연한 질문을 물어왔고.
시안은 당연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건··· 어쩌다보니.”
“결국 사고를 친 게 맞지 않습니까.”
“사고친 건 아니야. 내가 무슨 사고만 치는 줄 알아?”
“네.”
한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뭐라 한 마디를 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지금 생각보다 바쁜 상황이거든. 그러니까 한스, 네가 영주성에 황녀님이 지내실 방을 안내해드려.”
“네 알겠습니다.”
한스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투덜투덜 거려도 할 일은 제대로 하는 한스였다.
“그리고 가서, 다이애나 좀 내 집무실로 오라고 해줄래?”
“정보 부장을 말씀이십니까?”
“어. 급한 일이니까 지금 바로 오라고 좀 해줘.”
시안은 그 말과 함께 한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본래라면 시안이 직접 엘레나를 직접 안내해야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시급했다.
엘레나 또한 알고 있는 상황이기에 이해해줄 터.
시안은 한스에게 일을 맡긴 뒤 곧장 루벤에 위치한 영주성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영주성 Lv.4
그 안에 위치한 시안의 집무실.
“어떻게 벌써 왔어?”
시안은 이미 도착해있는 다이애나의 모습에 꽤나 놀라보였다.
달빛을 품은 듯한 은발의 여인, 다이애나.
단발이 되어있는 지금의 모습이 더 몽환적이고 아름다워보였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시선을 의식한 것일까.
다이애나가 살짝 부끄러운 몸짓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잘 어울리네.”
시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이애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집무실 책상에 비치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급한 일이라고 하셔서 바로 달려왔습니다.”
“그래도 나보다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시안은 한스에게 명령을 내린 뒤 바로 온 참이었다.
따라서 한스가 엘레나의 방을 안내하고.
이것저것 처리하고 뭐하고.
그 이후에나 다이애나를 찾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즉, 애초에 한스는 아직 다이애나를 찾아가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안이 다이애나를 찾는다는 건 어떻게 알고 미리 찾아왔단 말인가.
“한스님께 해당 내용을 듣기 전에 출발했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영주님이 한스님께 명령하시자마자, 해당 내용이 바로 제게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전 보고를 받고 바로 출발했고요.”
“······”
하여간, 누가 루벤의 정보부장 아니랄까봐.
아주 루벤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수준이었다.
“루벤의 아낙네들 대화 내용도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오늘 벨리 가족의 저녁 메뉴는 옥수수 그라탕이라고 합니다.”
“······”
어째, 루벤에서는 단단히 입조심을 해야할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예상보다 더 정보부가 잘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당장 일을 맡겨도 문제가 없을 터.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다이애나, 아무래도 신성 제국을 조사해야할 것 같아.”
“신성 제국을··· 말씀이십니까?”
다이애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시안은 그와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설명이 끝난 후.
“확실히··· 엘란두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정확히는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이애나는 상황을 금방 이해를 해보였다.
“무엇보다 신성 제국이 움직인다는 것이··· 솔직히 믿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적절한 의문을 표해왔다.
“제가 알기로 황혼 교파는 신성 제국 내에서 그 입지가 상당히 약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 안에 신성 제국을 먹었다는 건 좀···.”
다이애나는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시했고.
시안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동감이야.”
시안 또한 다이애나의 의문에 충분히 공감하니까.
지난 날, 시안이 레이첼을 쫓아낸 이후.
수장을 잃은 황혼 교파는 그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심지어 악마와 관련이 있는 정황마저 뚜렷했으니 말할 건덕지도 없었다.
그렇게 신성 제국은 아리아를 필두로한 여명의 교파가 휘어잡았다.
황혼의 사제들은 눈치만 슬금슬금 보며 명맥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 이후로 여타 별 다른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여명의 사제들이 크게 실수한 사건.
혹은 황혼의 사제들이 재기할 만한 큰 사건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혼의 사제들이 교황청을 휘어잡았다?
아무리 아리아가 자리를 비웠다고 한들 말이 안 되었다.
고작 몇 달만에 신성 제국을 삼켰다는 건 그야말로 불가능했다.
아니, 그래.
황혼의 사제들이 신성 제국을 휘어잡았다고 치자.
어떻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지지고 볶고 당기고 메치고 엎고 뭐든.
어떻게든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샤를롯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건 믿기 어렵습니다.”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또 다른 문제를 넘어 그야말로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다.
아니, 미쳤다고 샤를롯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단 말인가.
어떤 방식으로 황혼의 사제들이 신성 제국을 휘어잡았다치자.
그럼 그들의 다음 행동은 조용히 지내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탄탄히 입지를 다지며, 신성 제국 내에서 떵떵거리는 것이었다.
굳이 그리고 괜히.
샤를롯 제국과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그 이유가 이사벨의 계략에 움직이는 것이다?
타국의 몰락 직전의 귀족의 말 때문에 신성 제국 전체가 움직인다?
이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충분히 의심이 있었고.
그렇기에 반드시 조사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신성 제국과 더불어 엘란두르도 같이 조사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그러면 좋긴 하지만··· 가능하겠어?”
당연히 시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여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
이사벨이 그런 흔적을 남겨뒀을리가 없으니까.
또한 미리 대비를 해두었을테니까.
이사벨은 대놓고 반역을 저지를 정도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자신들을 향한 뒷조사가 들어올 것이라는 것은 뻔하디 뻔한 상황.
이사벨은 이에 따른 대비도 해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시안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건만.
“그림자 달의 다이애나였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루벤의 정보부장, 다이애나는 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아.”
시안은 금방 다이애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바일 영주에서 현질한 정보 시설.
시안이 직접 사용해보지는 않았기에 그 성능을 잘 알지는 못했다.
애초에 시안도 정보에 관련해서는 그닥 잘지 못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시안도 어떻게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영주님이 만드신 정보 시설들이 정말 뛰어나더군요.”
그런데 다이애나가 저런 말을 할 정도니 뭐.
역시나 성능은 확실한 것 같았다.
“어쨌든 가능하다는 말이지?”
“네.”
“행여 시설 성능을 끌어올려야할 것 같으면 말해. 바로 해줄테니까.”
“여기서··· 더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겁니까?”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다이애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째, 시안의 예상보다 시설의 성능이 엄청난 듯 싶었다.
역시 현질이 만능이었다.
뭐, 어쨌든.
“시간은? 어느 정도가 걸릴 것 같아?”
“아무래도 타국이고 또 신성 제국이다보니··· 2주일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엘란두르를 빼고 신성 제국에만 집중하면?”
“그래도 똑같습니다. 신성 제국은 제가 직접 그리고 저만 움직이는 것이라 시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2주일은 걸린다는 뜻.
“시설들의 성능을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는 확인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만··· 정보의 진위 여부 판단을 줄일 수 있다면... 1주일까지는 어떻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허위든 뭐든 다이애나, 네가 가서 직접 정보를 얻는 시간은 필요하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안 또한 마주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해줘.”
“알겠습니다.”
그렇게 다이애나는 집무실을 떠나 밖으로 나갔다.
이제 다이애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러니 그 전에 할 일을 모두 끝내는 것이 좋았다.
다이애나가 떠나고 텅빈 집무실 안.
“레아.”
시안은 나지막히 레아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집무실은 여전히 텅, 비어있을 뿐이었다.
누가봐도 아무도 없는 모습.
그러나 시안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나와요.”
-하하···.
그러자 레아의 작은 웃음 소리와 함께 쑤욱.
집무실 벽에서 레아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백은색의 머리와 고혹적인 외모의 미녀.
천 년전, 카일의 기억에서 보았던 레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역시, 못 속이는 구나. 이제.
레아가 정체를 들킨 사람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느 부분에서 시무룩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뭐, 어쨌든.
“잠깐, 저랑 이야기좀 해요.”
-나랑? 무슨 이야기?
“전에 제게 말씀하셨죠. 카일이 왜 레아를 떠나야만 했는지를 알고 싶다고요.”
그와 함께 우뚝, 레아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레아의 초점 없는 회백색의 눈동자가 시안을 향했다.
그리고 진지한 시안의 얼굴을 바라봄에.
-그건 왜 갑자기···.
레아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려왔다.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황궁에서 확인한 DLC 컨텐츠 - 카일의 일지.
그 카일의 기억에서 알 수 있었던 진실.
천 년전, 카일이 왜 레아를 떠나야만 했는지.
그리고 카일이 레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든 것을 말씀드릴게요.”
시안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