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 고백
“안에 있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엘레나의 목소리에 시안은 곧장 답을 해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문득.
여기 엘레나, 본인 방이 아닌가?
본인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오다니.
그 아이러니함에 시안은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이윽고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태양빛을 닮은 금발의 여인, 엘레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화사한 분위기와 차가운 인상.
그 대비되는 묘한 매력의 미인은 여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윽고 시안을 발견한 엘레나가 속눈썹을 치켜뜨며 물어왔다.
“저를 찾으셨다고···.”
“아, 그것이···.”
시안은 살짝,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흘렸다.
상황만 본다면 시안이 찾아온 건 맞았다.
그러나 딱히 이유가 있어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콘라드의 부탁으로 찾아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곧이 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떠나기 전에 황녀님 얼굴을 한 번 뵙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떠나신다는 건··· 다시 루벤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러자 엘레나가 약간 놀란 눈을 떠보였다.
시안이 이렇게 갑자기 떠난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예.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가 빨리 움직여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엘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고 별 다른 물음이 없는 것을 보니···.
엘레나는 무슨 상황인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사, 지금 황궁이 발칵 뒤집혔는데 모를 수가 있나.
“언제 떠나실 생각이세요?”
“이 자리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까 합니다. 말씀 그대로 떠나기 전, 황녀님을 뵙고자 찾아온 것이니까요.”
“그래도 이번엔 제 생각이 나셨나 보네요. 예전에는 그냥 휙하니 떠나시더니. 아니면 혹시 오라버니가?”
“설마요. 순전히 황녀님이 생각나서 찾아온 겁니다.”
정곡을 찌르는 엘레나의 말.
그러나 시안은 내색 하나 하지 않으며 손을 휘저어보였다.
엘레나는 그런 시안을 바라보다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단 자리에 앉죠. 설마 정말로 제 얼굴만 보고 떠나실 생각이셨던 건 아니죠?”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하지만 이 역시 곧이 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 그럴··· 리가요.”
시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엘레나와 마주하며 앉은 자리.
“반역과 관련하여 황궁이 난리가 난 건 알고 있어요. 정황상 엘란두르가 저지른 일로 보이긴 한데··· 전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엘레나는 생각에 잠긴 듯,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려보였다.
“너무 대놓고 저질렀어요. 이건 현재 엘란두르 상황에 맞지 않아요. 후작 부인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는데···.”
이어진 엘레나의 말에 시안은 조금 놀라보였다.
시안조차 이런저런 퍼즐 조각들을 맞추고 나서야 눈치챌 수 있었건만.
확실히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여러모로 현명했다.
“제 생각도 황녀님과 같습니다. 해서 그 일과 관련하여 제가 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백작님이 직접이요?”
“네. 제 영지에 뛰어난 정보원이 있습니다. 과거, 그림자 달의 길드장이었죠.”
“그림자 달이라면··· 암흑가를 지배한 길드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림자 달이 암흑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은 듣긴 했는데··· 백작님과 함께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황녀의 신분임에도 제국 정세에 빠삭한 모습까지.
어떤 의미로는 황태자인 콘라드보다 뛰어난 면모가 돋보였다.
“해서 정보가 조사되는 대로 전하와 함께 이후의 일을 논의할 생각입니다. 그 때 동안 전하께서 폐하를 설득시켜 시간을 벌어주시고요.”
“음··· 확실히 지금 섣불리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겠네요.”
엘레나는 금방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저도 오라버니를 도와서 폐하를 설득해볼게요. 이쪽은 걱정마시고, 백작님은 백작님의 일을 하세요.”
“감사합니다 황녀님.”
“감사는요. 되려 저희가 감사해야죠.”
엘레나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시안 또한 화답을 하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러면 황제를 설득하는 일은 문제가 없었다.
콘라드 혼자라면 조금 걱정되었지만, 엘레나가 도와준다면 정말 걱정없었다.
“그럼 저는 바로 움직여 보겠습니다.”
시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를 설득하여 시간을 버는 것은 말 그대로 시간을 버는 것.
그것이 시간을 지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자리를 일어나려던 찰나.
“그런데 성녀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엘레나가 문득, 시안에게 물어왔다.
그리고 그런 엘레나의 물음에 시안은 잠시 멈칫거렸다.
“아리아는···.”
생각해보니 아리아가 문제잖아?
본래 예정대로라면야 신성 제국으로 돌려보내면 그만이었다.
가기 싫다 떼를 써도 억지로 보내버릴 생각이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현재 신성 제국은 황혼 교파의 수중에 떨어진 상황.
정확히는 그럴 것이라 추정되는 상황.
최악의 경우엔 악마들에게 점령당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아리아를 신성 제국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거기에 파면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아리아가 신성 제국으로 가면 어떤 위험한 일이 펼쳐질지 몰랐다.
이제는 아리아가 돌아가겠다 하더라도 되려 뜯어말려야했다.
“음··· 아무래도 같이 루벤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시안은 고민 끝에 그렇게 답을 해보였고.
“그런가요···.”
엘레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침묵이 조금은 불편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나.
“현재 상황에 알맞지 않은 질문이지만···.”
엘레나가 조심스레 시안에게 물어왔다.
“백작님께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백작님은 성녀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황에 알맞지 않다··· 는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거진 뜬금없는 수준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저번에 아리아도 묻지 않았었나?’
생각해보니 아리아도 그랬던 거 같았다.
시안에게 엘레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그리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 반대로 엘레나가 아리아에 관해 묻고 있었다.
“뭐··· 절친한 친우라고 생각합니다만.”
“성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아리아가 말입니까? 음··· 아리아 입장에서는 저를 웬수라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시안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시안이 아리아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야 뭐···.
친구는 무슨 웬수로 생각할 여지는 충분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럴 때 보면 정말··· 백작님이 왜 과거에 천하의 둔재라 불리셨는지 알 것 같아요.”
엘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점이 매력이긴 하지만요.”
이윽고 엘레나가 시안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태양빛의 금발과 어우러진 화사한 미소.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넋이 놓아지는 미모였다.
그렇게 멍하니 엘레나의 미소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저도 이번에 같이 루벤으로 가면 안 될까요?”
“······ 예?”
시안은 정말로 넋이 놓아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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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앉은 묵직한 정적.
그 정적 속에서 엘레나는 가만히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안은 이걸 뭐라 답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안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 수가 있었다.
“황녀님께서도 루벤으로 오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안되나요?”
시안은 다시 한 번 이걸 뭐라 대답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황녀님께서 폐하를 설득시켜주신다고···.”
“그건 이미 설득하고 온 상황이에요.”
“예?”
엘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애초에 폐하께서도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계세요. 반역에 대하여 상당히 분노하고 계시지만, 이성은 여느 때보다 냉철하신 상태죠.”
그 말은 즉.
발루아가 또한 엘란두르의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엘란두르를 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기사, 발루아가는 이 드넓은 제국을 통치하는 군주.
이 대륙의 실질적인 패자였다.
분노로 이성을 잃을 정도로 발루아가는 어리석지 않았다.
“다만, 언제까지 기다려주실지에 대해서는 계속 설득을 해야겠지만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을 마쳤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의 상황은 걱정 없다는 말.
“그럼 방금 전에 설득하겠는 말씀은 왜 하신 겁니까?”
“그냥 백작님께 점수를 좀 따고 싶어서요.”
“제게요?”
“네. 백작님과 결혼하려면 부지런히 점수를 따야하지 않겠어요?”
시안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결혼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결혼은 여전히 부담스러우신가요.”
“부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혹시 성녀님이 걸리시는 건가요?”
시안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혀버렸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아니면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요?”
“아뇨.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이 나왔으니 솔직히 하는 말이다만.
엘레나는 더 없는 상대였다.
외모면 외모. 지위면 지위.
성격이면 성격. 가문이면 가문.
이 대륙에서 엘레나보다 좋은 신붓감은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시안이 보아온 엘레나는 정말이지 현명했다.
막말로 루벤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더없이 충분했다.
하지만.
“부담이고 뭐고를 다 떠나서. 전 아직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그럼 연애부터 시작해봐요.”
“······”
시안의 이해가 엘레나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다.
지금 보이는 단호하다 못해 확고한 엘레나의 모습.
엘레나답다면 엘레나 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의 엘레나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황녀로서의 의무감에 묶여 결혼을 ‘제안’ 하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렇기에 시안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게 이런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처럼 황가에 도움이 되고자─.”
“아뇨.”
엘레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백작님을 많이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시안은 제대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멍한 시선으로 비치는 엘레나의 얼굴과 표정.
저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심임을 알 수 있었으니까.
“지금 제 모습이 보시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 가슴 떨려 죽을 것 같아요. 굉장히 용기를 내고 있어요.”
그렇기에 저 말이 상당한 진심임도 알고 있었다.
말투 하나하나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고.
엘레나의 가녀린 어깨 또한 떨리고 있었으니까.
처음이라 서툴다는 표현.
그 표현이 가슴으로 와닿는 모습이었다.
“지금 결정해달라는 말씀은 아니에요.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고요. 무엇보다 지금 상황이 결혼이니 연애니, 하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저도··· 이번에 백작님과 같이 루벤에 가도 괜찮을까요?”
엘레나는 용기내어 시안에게 고백했고.
“······”
시안은 역시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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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으로 돌아가는 채비는 빠르게 마쳤다.
애초에 빨리 움직일 필요도 있었거니와.
황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마친 이후였으니까.
다만 딱 하나.
주전관에서 찍어내는 골드가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정확히는 시안 몫의 골드가 아직 다 주조가 되지 않았다.
하기사, 수 십억에 달하는 골드를 그 짧은 시간안에 찍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뭐, 이것도 짧은 시간은 아니긴했다.
그러나 수 십억을 찍어내기엔 역시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주전관은 밤낮없이 골드를 찍어냈고.
거기에 시안의 몫을 우선적으로 찍어낸 덕분일까.
“나머지 잔금을 모두 확인했어요 영주님.”
아멜리아의 마지막 계산을 끝으로 모든 골드를 받아낼 수 있었다.
때문에 떠나는 시기가 약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시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황궁을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안은 아멜리아와 아리아.
“황녀님은 왜 따라오는 거야···?”
그리고 황녀, 엘레나와 함께 루벤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리아가 엘레나를 힐끗거리며 물어왔다.
표정 또한 왜인지 뾰루퉁해져있는 아리아였다.
“이번에 같이 루벤에 가기로 했어.”
“그러니까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아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와다다다, 물어왔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아니, 그렇잖아! 갑자기 황녀님이 왜 루벤으로 와? 이 난리통에 말이야. 안 그래요 아멜리아?”
아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아멜리아에게 물었다.
그 모습에 시안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와 아멜리아.
백금발과 적발의 미녀.
물론 한 명은 미녀를 뛰어넘는 초월의 미녀였지만 아무튼.
두 미녀의 조합을 지켜보자니 상당히 묘했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아리아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왔다.
여러모로 성녀라 그런 지 아리아를 어려워하는 아멜리아였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 이거에요. 황녀님이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요.”
“확실히··· 폐하께서 흔쾌히 허락해주신건 좀 의외였긴 했어요.”
이어진 아멜리아의 답.
그리고 그건 솔직히 시안도 의외였다.
엘레나가 루벤에 오고 싶다고 했을 때.
시안은 차마 직접적인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높은 확률로 반대 의사가 내비칠 것을 예상했었으니까.
콘라드야 뭐, 그렇다 치자.
하지만 황제 선에서 분명 거절할 것을 예상했었다.
분명 노발대발하며 놈팽이니, 썅놈의 것이니.
온갖 욕설이란 욕설은 죄다 내뱉으며 안된다 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허락해주셨단 말이지.’
물론 표정 자체는 떨떠름한 표정이긴 했다.
정확히는 이를 뿌드득, 가는 얼굴이긴 했다만.
그래도 발루아가는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시안. 넌 알고 있잖아. 무슨 이유인데? 대체 뭐 때문에 황녀님이 따라오는 건데?”
아리아가 짐짓 뿔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물어왔다.
뒤쪽으로 아멜리아 또한 궁금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시안은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봄에.
그리고 뒤쪽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엘레나를 바라봄에.
“그냥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런 줄 알아.”
터벅, 아리아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행여 아리아가 달라붙을까.
“루카스! 누가 경계 중에 연애질하래? 똑바로 안 서?”
한쪽에서 로라와 꽁냥거리는 루카스에게 화풀이를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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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제국, 루테아.
신을 섬기는 자들이 모여 이룩한 국가.
샤를롯 제국과 더불어 대륙의 2강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강대국이었다.
샤를롯 제국의 로열 나이츠와 비견되는 신성 기사단.
그리고 신의 힘을 사용하는 사제들과 성기사들.
여기에 샤를롯 제국 못지 않은 드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사실상 샤를롯 제국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국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를롯 제국과는 다른 면모들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신을 섬기는 국가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신성 제국의 신민들은 신(神) 아래 모두 어리숙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신성 제국에서 가장 핵심이라 할 만한 곳.
또 그 여느 곳보다 신성하고 또 성스러운 장소, 교황청.
“성녀께서 끝내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황청의 대회의실에 나지막한 보고가 들려왔다.
“충분한 경고를 했음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라히르 추기경을 심하게 폭행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대로 계속 성녀를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에 따라 회의실에 모인 한쪽 인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었다.
바로 흰 법복과 붉은 자수를 놓은 황혼 교파의 사제들.
“이는 교단을 무시한 것으로 사료된 바, 성녀를 파면해야함이 마땅합니다.”
황혼의 사제들은 모두 뜻을 모아 소리쳤다.
그리고 그런 황혼의 사제들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
“듣자하니 정황과 증거가 뚜렷하다고 합니다.”
“저희야 이렇게 보고로 듣지만, 성녀께서는 직접 두 눈으로 보고 판단한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에서도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 우선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흰 법복과 푸른 자수를 놓은 여명 교파의 사제들이었다.
“그리고 파면이라니요. 파면은 그리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명의 사제들은 황혼의 사제들의 말에 반박하며 소리쳤다.
그렇게 두 교파는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다.
아리아를 지지하는 여명의 사제.
아리아를 끌어내리려는 황혼의 사제.
그 어느 하나 물러서지 않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렇게 대회의실은 한동안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만들 하시게.”
일순간 중후한 음성이 낮게 깔려왔다.
그와 동시에 떠들썩하던 대회의실이 일순간에 잠잠해졌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
넓적한 귀와 자글한 주름.
하얀 수염과 더불어 인자한 모습의 노인.
“두 의견이 조율되지 않는 것 같으니··· 부족하나마 내가 결단을 내리겠네.”
신성 제국의 교황, 성(聖) 아나리스토.
교황의 말에 대회의실의 사제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교황은 좌중을 한 번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만히 두 의견을 들어본 바, 둘 모두 합당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네. 허나, 모두가 합당하다고 하여 둘 모두를 선택할 수는 없는 법.”
교황은 크게 숨을 들이 삼켰다.
작은 긴장이 깔리며, 다시 한 번 교황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현 시간 부로 아리아 리뉴 사피에르.”
그리고 이어진 한 마디.
“그녀에 대한 성녀직을 파면하는 바이네.”
대회의실에는 크나큰 충격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