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 시작되는 운명(1)
아리아를 말려달라는 콘라드의 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안은 도무지 콘라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봐도 이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앞선 카일의 기억으로 혼란스러운 영향도 없잖아 있었다.
아니, 그런데 그걸 떠나서 이게 뭔···.
“지금 성녀가 깽판을 치고 있네.”
“······ 예?”
혼란을 넘어 생각 자체가 붕, 떠버리기 시작했다.
“깽판···?”
이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아니, 황태자의 입에서 깽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시안은 역시나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세히. 조금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시안은 곧장 콘라드에게 물었고.
“그것이 말이네···.”
콘라드가 상당히 난처한 기색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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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에 위치한 대청전(臺廳殿).
제국의 굵직한 사안들을 회의하는 공간.
일종의 국무회의실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대청전이었다.
그런 대청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황제, 발루아가.
그런 황제의 밑으로 황궁의 대신들이 도열해있었다.
도열한 대신들은 평범한 직책에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경제, 행정, 외교, 사법, 산업, 국토 등.
각 분야를 책임지는 황궁의 최고 관리자들.
샤를롯 제국이라는 국가를 통치하는 핵심 인물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여긴 모인 이들을 사실상 샤를롯 제국이라 칭할 수 있었다.
아마 회의실 한 켠에 있는 한 인물.
그 인물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신성 제국에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지?”
황제, 발루아가의 물음에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엔 정갈한 법복을 입은 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보였다.
“샤를롯 제국의 가장 고귀하신 분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신을 모시는 신실한 사제, 라히르라고 합니다.”
시안이 신성 제국을 방문했을 당시.
아리아와의 트러블로 시안과 만난 적이 있었던 대주교, 라히르.
라히르는 발루아가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 그런 라히르의 모습에 대신들이 하나 둘씩 놀라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교단의 성직자들은 다른 이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신 앞에 모든 만물이 평등하니.
평등한 이들끼리 고개를 숙이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행동.
샤를롯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는 존재는 오직 하나, 거룩한 신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발루아가에게 고개를 숙인다?
대신들은 라히르의 모습에 놀란 눈을 떠보였다.
오직 발루아가만이 짐작가는 것이 있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신성 제국 내에서 비교적 예법에 자유로운 교파가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신을 모시는 신실한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듣자하니··· 대주교에서 추기경으로 승직했다고. 그러고보니, 성직자도 승직이라는 표현을 쓰나?”
“세례를 받았다, 라고 칭합니다만··· 이 역시 신실한 마음이 중요할 뿐.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사옵니다.”
라히르는 이역시 개의치 말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도무지 신을 모시는 사제 같지 않은 행동과 언변이었다.
그 때문에 발루아가는 신성 제국의 사제를 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샤를롯 제국의 능글맞은 귀족.
그것도 수 백년 묵은 구렁이를 대하는 것만 같았다.
“추기경은 무슨 일로 여기 샤를롯 제국까지 찾아왔지?”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에 샤를롯 제국에서 공표한 일에 대한 건으로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사옵니다.”
“제국에서 공표한 일이라면··· 악마와 관련한 일을 말하는 건가?”
“그렇사옵니다.”
라히르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사오나, 섣부르신 판단이 아닌가하여··· 신성 제국은 그에 대한 정식적인 이의를 요청하고자 하옵니다.”
이어진 라히르의 답.
그와 함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라히르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했으니까.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되었다는 황제의 말.
더 나아가 대륙에 악마가 부활했다는 그 증언.
우리는 황제, 네 말을 인정하지 못한다.
지금 라히르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일순간 발루아가의 눈썹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비치는 시선에 제왕의 위엄이 깃들며,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것이 신성 제국의 입장인가?”
발루아가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비쳤다.
차디찬 냉기가 흐르며 대청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을테고···.”
다시 이어진 발루아가의 말.
“책임질 수 있나?”
샤를롯 제국의 1인자가 내뿜는 위엄.
라히르는 살짝 몸을 떨어보였다.
굳어지는 분위기도 잠시.
“제 말에 조금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히르가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과 샤를롯 제국의 입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어찌 타국의 일에 신성 제국이 왈가왈부하겠사옵니까.”
“그럼?”
“폐하의 말씀이 아닌 것. 그것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라히르의 답에 발루아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성 제국의 의견이 하나 섞여있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이어진 라히르의 답에 그때서야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발루아가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향했다.
그런 발루아가의 시선 끝에 보이는 백금발의 여인.
마지 아름다움과 미(美)의 화신과도 같은 여인.
성녀(聖女), 아리아.
발루아가가 슬쩍, 눈짓을 하자 아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라히르 대주교님. 아, 이제는 라히르 추기경이라고 하죠.”
아리아가 실수했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직 입에 붙질 않아서··· 죄송해요.”
“직책은 허울 뿐이죠. 신경쓰지 않으니 개의치 마십시오.”
“추기경이 되시더니··· 분위기도 그렇고 말투도 많이 바뀌신 것 같네요.”
“신을 조금 더 가까이 모시게 되었으니, 그에 따른 행실을 바로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는 성녀님이야말로 떠나 계신 동안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같은 이유라고 해두죠.”
아리아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라히르를 바라봄에, 아리아는 속으로 기가 차질 않았다.
신을 조금 더 가까이 모시기는 개뿔.
저 늙은이가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신을 모신 적이 있기는 하나?
아리아가 보아온 라히르는 사제라기보다는 정치가에 가까웠다.
아마 이번에 추기경이 된 것도 그 일환임이 분명했다.
신성 제국 내의 두 교파, 여명과 황혼.
아리아는 여명 교파.
눈앞의 라히르는 황혼 교파.
본래 황혼 교파의 수장은 레이첼이었다.
그러나 레이첼이 쫓겨나다시피 사라진 이후.
황혼 교파의 수장은 공석이 되었고, 관련한 사건으로 황혼의 입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해서 당분간 황혼 교파 놈들이 설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거늘.
아리아가 자리를 비운 것이 너무 오래되었던 걸까.
아니면 생각보다 라히르의 정치력이 좋았던 걸까.
여러 의미로 저 늙구렁이는 더 교활해졌다.
아리아는 눈으로 미소를 지으나, 속으로는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제게 볼 일이 있으신 것 같던데요.”
“이번에 악마와 관련하여 의견을 내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네. 제가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되어있다고 공언했어요. 더 나아가 악마 부활과 관련하여 여기 계신 황제 폐하의 말씀에 관련한 증언을 했죠.”
“뜻을 철회하십시오.”
라히르는 단호하게 뜻을 내비쳤다.
“싫어요.”
그리고 아리아 또한 단호하게 뜻을 내비쳐보였다.
“성녀님의 의견은 한낱 개인의 의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신성 제국, 전체의 의견으로 포장하여 말씀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신성 제국의 의견이라 말하지 않았어요.”
“성녀님의 지위를 생각하면 신민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교단의 뜻으로 생각할 겁니다.”
“방금은 한낱 개인의 의견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교단에서는 개인의 의견이나, 받아들이는 신민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교황 성하께서 큰 우려를 표했습니다.”
“성하께서는─.”
반박을 하려던 아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성 제국의 1인자라 할 수 있는 교황.
샤를롯 제국의 황제, 발루아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자가 바로 교황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샤를롯 제국의 황제와 같지 않았다.
황제처럼 위엄있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팔랑귀.
교황은 여명과 황혼, 두 교파의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회의에서 나오는 의견에 딱히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 무엇이든 통과시켜버린다.
해서 아리아를 비롯한 여타 다른 사제들이 대신 나서서 의견을 피력해야만 했다.
그 반대인 황혼 교파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렇게 추기경을 비롯한 대주교등.
고위 사제들만 갑론을박을 펼칠 뿐.
교황은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한다.
그리하여 조율된 최종 의견만 교황이 ‘그렇게 합시다.’ 할 뿐이었다.
결국 모든 이들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할 수 있으니.
현재까지 두 교파의 대립에도 별 다른 문제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좋게 에둘러 말하면 이렇다는 뜻이지.
직설적으로 말하면 줏대 없는 팔랑귀였다.
해서 아리아는 교황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가끔은 한 대 쳐버리고 싶었다.
교단의 상황이 그러할진대 이번엔 아리아가 자리를 비웠다.
물론 여명 쪽에도 여타 다른 추기경들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아리아의 목소리가 없는 여명 교파는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뻔한 노릇.
보나마나 라히르의 혓바닥에 놀아났을테지.
이미 교단은 라히르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이제와 아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성하께서 내리신 교단의 성령입니다. 악마와 관련한 성녀님의 의견을 지금 즉시 철회하십시오.”
이미 신성 제국에서 저렇게 결정했다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아리아가 뭘 어쩐단 말인가.
뭐, 샤를롯 제국의 황제.
그러니까 발루아가의 힘을 빌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어디까지나 신성 제국의 일이었으니까.
라히르가 발루아가의 의견은 건드리지 않았듯.
발루아가 또한 신성 제국의 의견을 건드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신의 뜻이에요.”
이런 터무니 없는 억지뿐이었다.
“신의 뜻?”
“지난 날에 꿈을 꿨어요. 신께서 제게 말씀하시길, 악마가 다시 대륙에 부활했으니 힘을 써달라 하셨죠.”
“계시를 받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아리아는 당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같지도 않은 일임은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당연하게도 라히르 또한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라히르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하다면 정식으로 교단과 협력하여 절차를 밟으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성녀님이라도 이렇게 독단적으로는 처리할 수 없습니다.”
“신의 뜻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무엇보다 꿈에서 들은 그 말씀이 신의 계시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라는 증거가 있나요?”
“그 말씀은 별 다른 증거 없이 타국의 귀족을 마녀 사냥 한 것이라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런 궤변은─.”
“그만.”
일순간 발루아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왔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거지?”
그리고 이어진 발루아가의 일침.
그에 라히르와 아리아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샤를롯 제국이었다.
그것도 황제가 눈앞에 있는 국무회의의 공간.
타국에서 그것도 황제 앞에서 서로 잘났다고 논쟁을 벌인 꼴이었다.
이는 실로 크나큰 무례를 저지른 격이었다.
“······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서.”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이에 라히르와 아리아가 발루아가에게 용서를 구했다.
발루아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용서치 않았으나, 이는 신성 제국에 의견을 묻지 않은 내 잘못도 있으니. 이번만은 넘어가겠다.”
발루아가는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또한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이야기를 끝내고자 지켜보았다만. 이대로 가다간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간단하게 정리하겠다.”
이어 발루아가는 먼저 라히르를 바라봤다.
“추기경이 요구하는 바를 말하라.”
발루아가의 말에 라히르가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 잠시 말을 고르듯,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악마와 관련한 문제는 가볍게 접근할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일개 사제 한 명의 의견으로 결정될 사안도 아닙니다. 하여, 성녀직의 위명과 여타 외교적인 문제를 고려한 바.”
라히르는 아리아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단에서는 성녀님께서 해당 발언을 철회하시지 않거나, 혹은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과 관련하여 합당한 이유를 밝히시지 않으신다면.”
그리고 이어진 라히르의 한 마디.
“아리아 리뉴 사피에르. 귀하에 대한 성녀직의 파면을 고려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크나큰 충격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