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 카일의 일지(4)
소리만이 들려온 일격.
그것은 누르비아의 인지가 따라가지 못했다.
또한 시안의 눈과 감각 또한 따르지 못했다.
누르비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누르비아와 달리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누르비아와 시안.
둘 모두 감각으로 쫓아가지 못한 것은 동일했다.
하지만 시안은 알 수 있었다.
지난 날, 모바일 영주에서 보았던 카일의 검.
잔상과 궤적조차 따르지 못하는, 극한의 쾌검(快劍)
스르륵, 누르비아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상반신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리며, 그때서야 누르비아가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
찢어져라 부릅, 떠지는 누르비아의 두 눈.
‘너무 다르잖아.’
시안도 마찬가지로 놀란 눈을 떠보였다.
모바일 영주에서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분명 같은 검이고, 같은 사람이거늘.
직접 본 카일의 검은 전혀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또한 카일을 쫓아가려면 아직도 멀었음을.
시안이 펼칠 수 있는 검은 말 그대로 흉내에 지나지 않음을.
시안은 다시 한 번 되뇌일 수 있었다.
갈라져 떨어진 누르비아의 상반신이 허우적거렸다.
상반신을 잃은 하반신은 비틀거리다 털썩, 주저앉았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면 응당 죽음을 맞이해야할 모습이었다.
【어, 언제···.】
그러나 누르비아는 그렇지 않았다.
부릅, 떠진 눈과 당황 어린 표정을 짓고 있으나 누르비아는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산해경(山海經)의 마물인가.”
그런 누르비아를 향해 카일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윽고 잘려진 누르비아의 몸이 기워붙어지기 시작했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스스로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서로의 짝을 맞춰갔다.
하지만 다시 스르륵, 쿵.
【재생이··· 안돼?】
잘려진 두 단면은 서로 맞붙지 못하고 허물어질 뿐이었다.
본연의 몸체에 입은 타격 때문인 것일까.
그런 면도 없잖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시안은 궁극적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일이 다루는 마(魔)의 힘.
누르비아의 존재를 이루는 악(惡)보다 한 차원 위의 힘.
【이, 이 힘은···!】
근원의 마(魔).
누르비아라는 악(惡)은 본연의 마(魔)에 환원되어 흩어질 뿐이었다.
【자, 잠깐!】
누르비아가 당황하며 다급히 소리쳤다.
카일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누르비아를 내려다봤다.
아니, 처음부터 카일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내, 내 말좀 들어봐! 자, 잠깐···!】
그러나 누르비아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누르비아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뒷걸음질 쳐보였다.
그러나 잘려져버린 상반신은 그저 허공만을 휘저을 뿐이었다.
대항한다. 싸운다.
그런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쳐야한다. 혹은 구걸해야한다.
악마들의 군주라는 위명이 무색하게 누르비아는 생명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윽고 터벅, 카일이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와 함께 피어오른 마기에 누르비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질려갔다.
그리도 다시 터벅, 카일이 한걸음 더 앞으로 내딛었을 때.
【네 본래의 세계로 도, 돌려보내줄게!】
우뚝.
내딛던 카일의 발걸음이 뚝, 하니 멈춰섰다.
카일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감정은 동요하고 있었다.
피어오른 마기가 흔들리고 있었고.
누르비아를 바라보는 무덤덤한 눈빛 또한 얕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그런 카일의 동요를 알아챈 것일까.
누르비아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우, 우리 또한 원래는 이 대륙의 존재가 아니었어!】
“우리?”
카일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자 누르비아가 마구잡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우리! 나 말고 다른 군주들이 있어!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이라고! 네가 어, 어떻게 이 대륙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이 대륙에 왔어!】
스스로가 이 대륙에 왔다는 말.
그 말은 즉.
【다시··· 다시 돌아갈 방법도 알고 있어!】
카일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굳어져있었다.
그리고 시안은 카일의 기억을 엿보고 있음에, 시안은 어렴풋하게나마 카일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
카일은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동요하고 있었다.
누르비아의 말이 거짓일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르비아는 카일이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또한 누르비아는 인간이 아닌 마물의 종류였다.
여기에 본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
“······”
카일이 흔들릴 이유로는 더없이 충분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누르비아는 끊임없이 카일에게 속삭였다.
인간이 가장 갈망하고 절실해하는 욕망.
그 욕망의 달콤함은, 실로 악마의 속삭임이나 다름 없었다.
카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움직임 또한 없이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묵직한 정적이 흘러갔다.
그렇게 정말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뭘 하면 되지?”
카일은 누르비아를 향해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누르비아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나를 따라와.】
누르비아의 악의 어린 미소가 지어진다.
그와 함께 화아악!
하얀 빛무리가 다시금 시안의 시야를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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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가 사그라들고 보인 광경.
아니, 시안은 빛무리가 사그들기 전부터 모종의 기운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건 실로 형용할 수 없는 악의(惡意)이자 또 악(惡)이었다.
또한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빛무리가 사그라들기전부터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바로 잡힌 시야.
그곳엔 도합 7명의 존재가 있었다.
일단 흑발의 미남자, 카일.
그런 카일의 앞에 있는 악마 군주들.
일곱 가지의 대죄(The Seven Sins).
그 죄에서 깨어난 일곱의 악마.
그러나 이곳에 모인 것은 여섯의 악마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과거, 시안이 한 번씩 대적했던 악마들이었다.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Nurbia).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Luxuria).
탐욕의 악마, 그리디아(Greedia).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Gullneria).
질투의 악마, 엔비리아(Enviria).
분노의 악마, 이라리아(Iraria).
도합 여섯의 악마들.
다만 탐욕의 악마, 그리디아는 직접적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디아에게서 느껴지는 악의는 상당히 익숙했다.
바로 다크 엘프의 마을에서 다이슨을 타락으로 이끌었던 힘.
인스티즈에 깃들어있던 광기의 마력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그 힘이 바로 탐욕의 악마, 그리디아였던 것 같았다.
그로써 처음 루벤을 습격했던 나태의 악마.
신성 제국에서 마주했던 색욕의 악마.
다크 엘프들의 마을에서 대적한 탐욕의 악마.
수인족들의 왕국에서 맞붙은 탐식의 악마.
마지막으로 루벤과 엘란두르와의 전쟁.
듀라크안에 내재되어있던 질투와 분노의 악마.
이곳에 모여있는 악마 6군주 모두, 시안이 대적했던 군주들이었다.
그리고 일곱 가지의 대죄에서 깨어난 악마는 모두 일곱.
‘하나가 부족한 것 같은데?’
시안이 대면한 적이 없는 악마.
일곱 가지의 대죄 중 첫 번째 죄악.
‘아, 교만의 악마는 나중에 나왔었다고 했지.’
시안은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날, 황궁의 도서관에서 확인한 샤를롯의 기록.
그것에 따르면 교만의 악마는 가장 마지막에 등장했었다.
그것도 대륙의 명운을 건 최후의 전투에서 말이다.
‘그때 아마··· 카일이 교만의 악마를 대적했었다지?’
더하여 오로지 카일만이 교만의 악마를 대적할 수 있었다고 했었다.
그렇게 카일은 끝내 교만의 악마를 베어내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카일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적혀있었다.
‘카일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라···.’
솔직히 믿기는 않았다.
모바일 영주에서 보았던 카일의 강함 때도 그러했고.
직접 카일의 기억을 지켜보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다.
드래곤 카르제의 표현처럼 지금의 카일은 죽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물음이 절로 들었으니까.
그런 카일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 악마.
대체 교만의 악마는 어떤 존재일까.
이야기로만 들어봤던지라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악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이 대륙의 인간이 아니군.】
탐욕의 악마, 그리디아와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의 목소리였다.
【흐응···.】
그 뒤를 이은 교태 섞인 비음은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
루슈리아는 카일을 끈적한 눈빛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이런 강함을 지닐 수 있는거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군.】
이어진 질투의 악마, 엔비리아와 분노의 악마 이라리아.
【보아하니, 다들 인정한 것 같네. 일일이 물어보기 귀찮으니까 찬성한 것이라 생각할게.】
마지막으로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악마가 섞여있는 목소리였지만 각자의 죄악에 따른 특색 때문일까.
시안은 각기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어 누르비아가 카일에게 말했다.
【우리를 도와주면 너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줄게.】
누르비아의 말과 함께 군주들이 모두 카일을 바라봤다.
집중된 시선 속에서 카일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또는 묵묵히.
그러나 그 눈빛에는 뭘 도와주면 되냐는 듯한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에 누르비아가 악의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대륙에 우리의 대의를 방해하는 귀찮은 놈들이 있어.】
누르비아는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카일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안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천 년전, 대륙을 구원한 아르나이즈.
【조만간 그 년놈들을 싸그리 죽여버릴까해. 그때··· 네가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그럼 너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줄게.】
누르비아의 말을 끝으로, 모든 악마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카일에게 향했다.
탐욕, 탐식, 질투, 분노, 색욕, 나태.
갖가지 감정이 섞인 군주들의 시선이 카일에게 향했다.
단순히 바라보는 것임에도 세상 모든 죄악을 담아낸 듯한 광기가 느껴졌다.
그 광기에 시안 또한 잠시나마 정신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카일은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이 말하는 대의가 무엇이지?”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파괴.】
들려온 답은 다름 아닌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의 것이었다.
카일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루슈리아가 교태 섞인 몸짓을 내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어떻게 대의가 될 수 있냐··· 그리 묻는 거 같은데?】
루슈리아의 목소리에는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성적인 욕망을 갈구하는.
이성이 절여지는 듯한 무한의 쾌락.
【이 세상의 존재들은 우리를 지옥의 악마라 불러.】
루슈리아는 교태 가득한 목소리를 내비쳐보였다.
【하지만 그거 알아? 이 광활한 어떠한 차원에도 지옥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야. 원래 지옥은 없어. 스스로가 지옥을 만드는 것이지. 바로 삶이라는 고통 속에서 말이야.】
그 순간, 카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시안의 눈으로 흐릿한 광경들이 겹쳐 떠올랐다.
어떤 기억의 장면이 눈앞으로 겹쳐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비현실적인 일이었으나,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여기는 카일의 기억을 투영한 가상의 현실.
지금 시안의 눈에 겹쳐보이는 것은 카일이 느끼고 떠올리는 기억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정말이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맞바꾸어 끼니를 해결하는 광경.
길거리 끝마다 아이들의 인육이 걸려있는 풍경.
살고자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오늘의 죽음이 내가 아님을 안도하는 비루한 삶.
【이게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겠어?】
카일이 원래 세계에서 보고 경험했던 기억.
삶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옥은 삶에서 비롯돼. 생명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이어나가는 순환의 이치. 하지만··· 생명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러하다면 죽음 또한 없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할 생명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삶이라는 것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하다면 지옥 또한 없을 것이다.
지옥은 삶 속에서 만들어지기에, 기생할 삶이 없는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망가진 순환의 고리를 끊으려 하는거야.】
죽음을 맞이할 생명 자체를 파괴한다.
지옥을 가꾸어갈 삶 자체를 파괴한다.
그로써 고통도, 아픔도, 슬픔도, 원한도, 애환도, 통곡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만든다.
【새로운 낙원. 그것이 우리들의 대의다.】
마지막 말은 본노의 악마, 이라리아가 장식했다.
“······”
그리고 카일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악마 군주들의 속삭임과도 같은 이야기.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음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지금 카일의 심정과 생각.
시안의 시야로 흐릿하게 보이는 카일의 기억.
현령에게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하고 자결한 딸.
그런 딸 아이를 묻고자 언 땅을 파냄에 손톱이 까지고 깨져 흐르는 피.
향리의 폭리를 고발했다는 죄목으로 관아에 문초를 당해 아들을 잃은 아픔.
유곽에서 태어나 아비의 얼굴을 모르고, 어미에게도 버려진 여아.
그렇게 밤낮으로 거칠게 사내에게 당해지는 나날들.
한 마을에 지독한 흉년에 들이닥쳐 아사자가 속출하고 길거리마다 인육이 걸려있는 참혹한 풍경.
천하(天下)에 들려오는 비명은 이리도 많았다.
그리고 그 비명들은 소리 없이 묻혀버렸다.
악마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옥이란 곳은 없다.
스스로가, 삶이 지옥을 만드는 것일 뿐.
삶이란, 그 자체로서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저들의 말처럼 삶이 없다면.
저들의 말처럼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온 천하를 마(魔)로 물들이다면.
세상을 마도천하(魔道天下)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면.
그 잡다한 비명들도 사라지지 않을까.
비명을 위해 검을 들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더 이상 고통 받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까.
“······”
카일은 아무런, 정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화아아악!
시안의 시야로 새하얀 빛무리가 시야를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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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불타올랐다.
대륙을 덮친 군주들의 힘은 가히 초월적이었다.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음에 끝없는 악(惡)은 세상을 끝내 집어삼켜버렸다.
그러나 난세에는 영웅이 탄생한다고 하던가.
아르나이즈들이라 불리는 영웅들이 군주들에게 결사항전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지금 시안의 시야로 보이는 풍경.
“하악···! 하악···!”
샤를롯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엘로디··· 정신 차려요 엘로디!”
뮤리엘은 죽은 것인지 모를 엘로디에게 절박하게 신성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노에미, 네 드래곤 스킨으로··· 커헉! 장비를 만들었다면 어떠했을까 싶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고려해보도록 하지.”
모르크루와 노에미는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상태는 역시나 만신창이나 다름 없었다.
【이제 모두 끝이야.】
그리고 드리우는 악(惡).
여섯의 악마 군주들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피를 향한 끝없는 갈증.
굶주림의 욕망들.
덩어리 지어져 끓어오르는 악의(惡意)들에 정신이 찢겨져버릴 것만 같았다.
저 끔찍한 악에 아르나이즈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여섯의 악마 군주들이 웃었다.
기쁨과 환희같은 감정의 파편들이 담긴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들의 대의는 이로써 완성이 된다.】
쇄도하는 악의 힘.
저항할 수 없는 죽음에 샤를롯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어떤 아르나이들조차 드리우는 죽음에 대항할 수 없었다.
오직.
번쩍!
한줄기 섬광만이, 죽음을 향해 쇄도해갈 뿐이었다.
푸화확!
시뻘건 선혈이 시야 가득히 흩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여섯의 군주가 비틀거리며, 샤를롯을 향했던 악의 힘이 허무하게 소멸해갔다.
샤를롯의 두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비단 샤를롯뿐만 아니라 뮤리엘, 모르크루, 노에미.
휘청거리는 여섯의 군주들 또한 당황 어린 눈을 떠보였다.
이윽고 샤를롯이 고개를 들어 천천히 앞으로 바라봤다.
다른 아르나이즈들과 여섯의 군주들도 시선을 들어보였다.
그런 모두의 시선에 보인 흑발의 미남자, 카일.
【네, 네가 왜···!!】
악마들 사이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카일은 아무런 답을 해보이지 않았다.
그저 검을 옆으로 길게 늘어뜨릴 뿐.
샤를롯의 앞을 가로막으며 홀연히.
경악 어린 악마 군주들을 바라보며 오연히.
“처음엔, 나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았다.”
카일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생명이 없으면 죽음도 없고, 삶이 없으면 지옥도 없다.”
마도천하(魔道天下).
마(魔)로 물들어진 천하는 그런 곳일 것이다.
그 어떠한 고통도 없는 곳이고.
그 어떠한 아픔도 없는 곳이고.
그 어떠한 원한도, 애환도 없는 곳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어떠한 비명도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곳은 실로 낙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잡다한 비명이 없는 무(無)의 세계.
그곳은 카일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낙원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카일이 터벅,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걸음을 내딛음과 동시에 시선이 여섯의 군주를 훑는다.
절대자의 시선이 닿음에 여섯 군주들은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카일의 시선이 주변을 향했다.
피로 물들인 전장.
사지가 잘려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
악마에 대항하고자 싸우던 이들이었다.
악마와 싸우며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던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이 광경은 참으로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실로 끔찍한 현실과 다름 없었다.
이곳엔 참으로 비통한 비명만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이곳은 가히 지옥(地獄)이라 부름직했다.
카일이 그토록 베어내려했던 지옥.
이곳은 그 끔찍한 지옥이었다.
그렇기에 카일은 이 지옥을 베어고자 했다.
여섯 군주의 말처럼 생명이 없다면 고통도 없다.
삶이 없다면 지금의 지옥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비명이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카일이 바라마지 않던 낙원(樂院)일 것이다.
그러나 카일은 검을 들어 베어내지 않았다.
이 참혹한 지옥을 끝내고자 검을 들지 않았다.
처음엔 낙원으로 가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 생각했었다.
처음엔 비명을 부르짖는 저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카일은 하나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목숨을 던져가며 카일을 구했던 왕대주.
천하를 할퀴는 검이 아니라, 천하를 담아내는 검이 되어달라는 말.
그리하여 주위를 둘러봄에 펼쳐진 지옥의 풍경.
이것이 정말 낙원으로 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한들.
“이 끔찍한 과정의 종착점이.”
내딛는 발걸음.
“어찌 낙원일 수 있을까.”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낼 수 없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자.
힘없는 자들의 울분을 대신하여 부르짖는 첫 번째 검.
콰아아아아아─!!
카일의 검은, 더 이상 천하를 할퀴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