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 카일의 일지(3)
시야를 가득 메운 하얀 빛무리.
시안은 가만히 눈을 감아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에 지켜본 광경은 카일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하나.
‘카일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니···.’
이에 관해 여러가지 사연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카일이 시안과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카일은 무림이라는 세계에서 천마(天魔)라 불리던 절대강자였다는 것.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광경을 지켜봤음에도 시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어디까지나 카일의 기억이었다.
카일의 기억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현실.
그리고 기억이란 본디 왜곡되고 미화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시안이 본 광경이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방금 그 광경은 결코 왜곡되고 미화될 수 없는 장면이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시안도 어렴풋하게나마 추측은 하고 있었다.
‘카일에게서 이질적인 면모들이 보이긴 했었지.’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시안이 배우고 있는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카일의 검은 대륙의 검술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했다.
‘일단 이름부터가 너무도 생소했으니까.’
또한 지나온 대륙의 역사 동안 대륙은 검술에 관련한 연구가 수도 없이 이루어졌다.
이에 거진 나올 수 있는 검술의 형태는 모두 나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카일의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은 달랐다.
대륙에서 볼 수 없는 완전한 새로움.
처음엔 카일의 뛰어난 경지에 따른 결과라 생각했었다.
물론 그것도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그러나 다른 세계의 것이라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래서 샤를롯이 배울 수 없었던 건가?’
지난 날, 시안이 황궁의 도서관에서 확인한 샤를롯의 기록.
샤를롯이 작성한 카일의 비망록에서 샤를롯은 카일의 검을 배우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샤를롯은 카일의 검을 배울 수 없었다.
‘그때 이유가 뭐라고 했었더라?’
인과의 제약 어쩌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땐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 인과가 카일의 본래 세계.
즉, 다른 세계와 관련한 무언가인 것 같았다.
뭐, 아무튼 샤를롯이 카일의 검을 배울 수 없었던 것도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문제는 왜 나는 배울 수 있냐는 건데···.’
이건 좀 의문이긴 했었다.
샤를롯과 마찬가지로 시안은 이 대륙의 사람이었다.
이 대륙에서만 나고 자란 토박이.
애초에 시안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샤를롯은 배울 수 없었지만, 시안은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모바일 영주 때문이라는 건데.’
이건 이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카일과 모바일 영주.
그 둘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카일도 모바일 영주를 몰랐던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카일의 세계에서도 모바일 영주는 없었다.
스마트 폰이라는 것도 없었고, 카일은 관련한 것들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카일과 모바일 영주는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
그래야만 시안이 모바일 영주를 통해 마혼수라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설명이 된다.
그렇다는 건.
‘카일이 모바일 영주를 만난 것은 이쪽 대륙에서의 일이라는 뜻이잖아.’
그러하다면 이곳에서 카일이 모바일 영주를 만난 것은 언제인가.
이에 대하여 다른 아르나이즈들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카일의 과거를 알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아니, 되려 기존의 의문만이 짙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을 해결해줄 열쇠.
화아아아악!
감긴 시야로 빛무리가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살며시 뜬 시야로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솔직히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 처음보는 풍경이었으니까.
그러나 방금 전, 카일의 세계에서 느꼈던 이질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처음보지만 친숙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여긴 의심할 여지 없이 시안이 살고 있는 대륙이었다.
그것도 천 년전의 대륙.
“커헉···!”
일순간 카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가로 왈칵, 토해지는 피.
카일의 몸이 휘청거렸다.
카일은 검을 바닥에 꽂으며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세웠다.
피가 낭자한 전신은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솔직히 시체가 걸어다닌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도 이런 힘이 느껴진다니···.’
지금조차 드래곤의 본능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도망치라며 쉼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시안은 참···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여긴···.”
정신을 차린 카일이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로 젖은 두 눈에 시야가 바로 잡히지 않아보였다.
그럼에도 카일은 이곳이 자신의 세계가 아님을 알아챈 것 같았다.
시안이 자신의 대륙임을 알아챘던 것처럼.
카일은 가만히 시선을 내려보였다.
앞선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일까.
카일은 오랜 시간 동안 말이 없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만이 공허히 들려올 뿐.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잊지··· 않을 것이다.”
카일이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나는··· 나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바라본 카일의 눈빛엔 증오가 담겨있지 않았다.
배신으로 말미암은 분노 또한 보이지 않았다.
오직 슬픔.
어쩌면 그리움.
“너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온 천하를 마(魔)로 물들이겠다는 약속.
세상을 마도천하(魔道天下)로 만들겠다는 왕 대주와의 약속.
그렇기에 이것은 복수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배신자를 처단하고자 하는 심판 또한 아니었다.
“나는··· 나는 반드시···.”
카일은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돌아갈··· 것이다.”
털썩.
카일은 끝내 정신을 잃었고.
다시 한 번 시야 가득히 빛무리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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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를 가득 덮은 빛무리는 금방 사그라 들었다.
그리고 다시 보인 광경은 어떤 마을의 풍경이었다.
정확히는 마을이었던 것의 풍경이었다.
“키에에에에에엑!!”
그러나 지금은 마을이 아니게 되어버린 풍경.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부서진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었고.
마을 사람들이라 추정되는 것들이 온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키에에에에에엑!!”
그 사이로 들려오는 흉측한 괴성은 이 참상의 원인을 충분히 이해하게 해주었다.
‘악마···?’
천 년전, 대륙을 혼란에 빠뜨렸던 악마(惡魔).
시안은 괴성 속에 깃든 악의(惡意)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동시에 떠오른 생각은 ‘악마 군주?’ 였다.
그러나 시안은 금방 생각을 털어내었다.
악마 군주라하기엔 느껴지는 악의가 미약했으니까.
선명한 악의는 있으나 그 강대함은 미약했다.
그렇기에 저것은 단순한 악마라 지칭할 수 있었다.
악마들은 마을을 처참히 유린하고 있었다.
널브러진 마을 사람의 육편을 씹으며 기쁨과 환희와 같은 감정을 터트리고 있었다.
눈으로 차마 보고 있기에 끔찍한 풍경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생기는 사라지고 오로지 죽음만이 남아있는 풍경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향해.
번쩍!
한줄기 섬광이 번쩍였다.
푸화확!
시뻘건 선혈이 시야 가득히 흩뿌려졌다.
시안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섬광이었고.
그렇기에 누군의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대단하긴 하네.’
시안의 감탄과 동시에 쿠웅!
한 마리의 악마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윽고 흑발의 미남자, 카일이 그 앞으로 서 보였다.
아까 전과는 달리 카일의 상태는 꽤나 준수해보였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카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카일이 이 대륙에 온 이후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시점인 것 같았다.
카일은 한 자루의 검을 들어 꿰뚫린 악마의 시체 위에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카일의 등장과 더불이 악마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윽고 도륙이 나있는 동족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내질렀다.
키에에에에에엑─!!
수 천의 악의가 공명하며 죽음을 윽박질러왔다.
어둠의 숲에 기거하는 마수를 들이밀 것이 아니었다.
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던 천 년전의 악마(惡魔).
그러나 카일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악마 군주들조차 감히 카일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런데 평범한 악마들이 뭘 어쩐단 말인가.
물론 악마(惡魔)라는 개념이 어찌 평범할 수 있겠냐만은.
번쩍!
카일의 검 앞에서는, 모두가 평범할 뿐이었다.
카일은 순식간에 마을을 습격한 악마들을 정리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또 그리 많은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
악마들을 베어내는 카일의 얼굴에는 두 가지 감정이 담겨있었다.
사람들을 유린한 악마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자책.
그렇게 카일은 마을의 모든 악마들을 처단했다.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은 마을을 떠나,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마을을 떠나가던 그때.
“이, 이름이라도 알려주시오!”
카일의 뒤쪽으로 크나큰 외침이 들려왔다.
‘어···?’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은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무래도··· 카일의 힘 때문인 것 같았다.
저 강대한 힘에 존재가 묻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또한 시안의 감각도 카일의 힘을 경계하느라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나?’
시안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확인한 얼굴.
‘황태자 전하···?’
시안은 순간 눈으로 본게 맞나 싶었다.
또한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싶었다.
황태자 콘라드가 대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시안의 머릿속으로 크나큰 혼돈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봄에, 금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저 사내는 콘라드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상황은 카일의 기억을 재구성한 가상의 현실.
한 마디로 무려 천 년전의 일이다.
현 시대의 황태자인 콘라드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콘라드처럼 보이는 사람은 있을 수 있었다.
콘라드와 거진 빼다박은 것처럼 닮은 이.
아니, 콘라드가 빼다박은 것처럼 닮아있는 이.
‘샤를롯이구나.’
콘라드의 오랜 선조이자. 아르나이즈의 리더, 샤를롯.
저 사내는 다름 아닌 샤를롯이었다.
‘그런데 샤를롯이 왜 여기에···?’
자연스레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안은 금방 이 상황이 무엇이고 또 언제였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이거 샤를롯이 카일과 처음 만났을 때였나 보네.’
황궁의 도서관에서 보았던 카일의 비망록.
샤를롯이 카일을 관찰하며 작성한 기록에서 지금의 상황과 똑같은 일이 적혀있었다.
악마에게 유린당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
그리고 샤를롯이 복수를 위해 검을 잡게 된 계기이자 이유였던 사건.
‘이때가 그때였구나.’
시안은 상황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걸음을 멈추어 서 있었다.
이름이라도 알려달라는 샤를롯의 말.
그 말을 곱씹는 것일까.
카일은 가만히 샤를롯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이 확인한 카일의 비망록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비망록에 적힌 카일의 이름은 알 수가 없었다.
적혀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무슨 글씨인지 도무지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지워진 글자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글자인 것인지 시안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카일은 샤를롯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까먹을 수 있냐 싶었지만··· 앞선 카일의 기억을 본 바 시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일은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교주 혹은 천마.
카일은 자신의 세계에서 스스로가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카일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샤를롯의 기록에는 끝내 적혀있지 않았던 이름.
“강일(强逸).”
카일은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나갔다.
#
카일이 샤를롯과의 첫만남도 잠시.
카일은 그 이후로도 계속 홀로 대륙을 누볐다.
당연하게도 그 이후로 샤를롯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홀로 다닌 카일은 그 일을 알지 못했으니까.
카일이 아르나이즈들과 합류한 것은 가장 마지막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카일은 그 이후로 샤를롯과 아르나이즈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천 년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시안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샤를롯이 모르크루 아니면 노에미와 만나고 있을 때인 거 같은데.’
대륙에 전해지는 신화 이야기.
샤를롯이 악마들과 싸워가며 아르나이즈 동료들을 모은 모험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으니까.
샤를롯이 어떻게 아르나이즈들을 동료로 만들었는지.
어떠한 사건과 더불어 그들과 함께하게 되었는지.
그것에는 눈물을 머금지 못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다수 있었다.
시안도 어렸을 적, 그 이야기에 가슴을 설렜던 적이 있었다.
언젠가 샤를롯처럼 되고 싶다며 세실에게 호기롭게 소리친 적도 있었다.
‘어쩌다보니 샤를롯이 아니라 카일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아이들이 아르나이즈들에 환장하는 이유가 있었다.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륙의 베스트 셀러로서 남아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카일이 그 이야기를 알리가 있나.
당연하게도 카일의 기억에는 투영되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되면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뭐, 어쨌든.
카일은 여전히 홀로 대륙을 누볐다.
그리고 그런 카일의 발걸음에는 두 가지 목적이 담겨있었다.
첫 번째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그리고 두 번째는···.
푸화학!
이 대륙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없애고자.
악마들에게 유린당하는 대륙.
세상에는 수많은 비명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일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명의 종류에 차이가 있을 뿐, 비명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카일은 그런 이들을 위하여 움직였다.
악마들을 찾아내어 베어내고 또 사람들을 구해내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그러했듯이.
지금의 대륙에서도 카일은 사람들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다만, 원래 세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마교의 교주이자 천마(天魔), 강일(强逸)은 사람들의 비명을 대변했다.
그들을 위한 검이 되어 천하를 할퀴었다.
그러나 이 대륙의 이방인, 카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살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카일은 천하를 할퀴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때문일까.
시안은 카일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을 위한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카일은 무언가 조금씩 달라져갔다.
착각일수도 있었다.
아니, 아마 착각일 것이다.
“······ 엄마말 잘 듣거라.”
그러나 시안은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카일은 그렇게 두 가지 목적을 지니며 대륙을 누볐다.
그리고 그때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평범하게 악마들을 찾아내 베어내고.
사람들을 구하는 여느 때의 날.
카일이 그들을 만난 것은.
【흐응···.】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느껴지는 끝없는 사념(死念).
먹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검붉은 악의(惡意).
일곱 가지의 대죄(The Seven Sins).
교만, 탐욕, 질투, 분노,색욕, 탐식, 나태.
그 죄에서 깨어난 일곱의 악마.
【참 특이한 인간이네?】
‘누르비아?’
카일이 악마 7군주 중 누르비아를 만난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누르비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카일에게 다가왔다.
당연하게도 이때는 헬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안은 누르비아라 확신할 수 있었다.
모습만 달라졌다 뿐 느껴지는 기운은 확실히 누르비아의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기운은 훨씬 강대했다.
역시나 성물의 제약도 없고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기에 누르비아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나 외모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저것을 여성이라 규정하는 것이 맞는 걸까.
애초에 악마에게 성별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보이는 바에 따라, 바라는 소원에 따라.
악마는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아마, 저것이 누르비아라는 악마의 본연체인 것 같았다.
【왜 너한테서는 내 본연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지?】
누르비아는 카일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카일은 그런 누르비아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인과의 형태가 달라. 이런 경우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는데···.】
누르비아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 씨익.
【너, 이 대륙의 인간이 아니구나?】
카일을 향해 악의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면서 누르비아가 카일의 목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누르비아의 표정은 마치 귀엽고 신기한 애완 동물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런 누르비아의 모습을 지켜보며 시안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흘렸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지금 카일에게 비아냥거리는 누르비아의 모습.
정말이지 참신하고도 참신한.
서걱─!
신종 자살의 방법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