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 아르나이즈 전당(2)
『[현재 다운로드 중인 DLC 컨텐츠] - 카일의 일지』
시안은 화면 위로 떠오른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확히는 ‘카일의 일지’ 라는 것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난 날, 시안이 황궁의 도서관에서 보았던 ‘카일의 비망록’.
그것과 얼핏 비슷해 보이나 이는 개념 자체를 달리했다.
비망록이라 함은, 어느 사건 혹은 어느 인물을 관찰한 결과를 기록하는 문서를 의미했다.
따라서 ‘카일의 비망록’은 카일 ‘이’ 쓴 것이 아니었다.
카일 ‘을’ 기록한 문서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시안이 확인해 본 바.
카일의 비망록은 아르나이즈 샤를롯이 카일을 보고 기록한 일지였다.
그러나 지금 떠오른 화면, 카일의 일지.
‘카일이 쓴 거다.’
이는 카일이 쓴 것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카일을 보고 쓴 것이 아니다.
카일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일지라 할 수 있었다.
천 년전, 카일이 겪었던 모든 일들.
카일이 느꼈던 감정과 이유.
그리하여 카일은 왜 아르나이즈 동료들을 떠나야만 했는지.
약혼한 레아를 외면하고 왜 홀연히 떠나야만 했는지.
어째서 그들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는지.
왜 홀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했는지.
시안이 쫓고 궁금해하던 것들이 이 일지에 적혀있을 터였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일이 직접 기록한 일지니까.
[Downloading··· 38%]
스마트 폰 화면 위로 다운로드의 진행 상황이 나타났다.
그리고 상당히 방대한 분량인 것일까.
다운로드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시안은 말없이 다운로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르나이즈 석상에 이런 장치가 있었다니···.”
콘라드는 신기한 눈으로 주변의 석상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Downloading··· 100%]
[DLC 컨텐츠 - ‘카일의 일지’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끝내 다운로드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시안은 곧바로 홈에서 스마트 폰을 빼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다운로드 한 ‘카일의 일지’를 터치했다.
꾹.
터치와 함께 화면이 바뀌며, ‘Loading···.’ 이라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모바일 영주가 점검 중이라 안될 줄 알았건만.
DLC 컨텐츠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운로드가 완료된 건 별개의 것인 걸까.
점검과 상관이 없이 카일의 일지가 실행되었다.
시안은 떨리는 마음으로 로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로딩이 끝났을 때.
[Error: 해당 컨텐츠를 불러올 수가 없습니다.]
에러가 났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응? 하는 생각도 잠시.
곧 화면 위로 무수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사용 중인 기기는 DLC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DLC 패키지 구매 후에 이용해주십시오.]
[DLC 컨텐츠 - ‘카일의 일지’ 를 종료합니다.]
.
.
.
그러면서 픽, 하니 스마트 폰이 꺼져버렸다.
스마트 폰 화면으로 비치는 검은 화면.
“뭔소리야?”
시안은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종료된 카일의 일지.
당최 무슨 소리인가 싶어 시안은 다시 한 번 카일의 일지를 실행시켰다.
꾹, 하는 터치와 바뀌는 화면.
이윽고 ‘Loading···.’ 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또한 알림창의 숫자가 100%를 달성했을 때.
[Error: 해당 컨텐츠를 불러올 수가 없습니다.]
[사용 중인 기기는 DLC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DLC 패키지 구매 후에 이용해주십시오.]
[DLC 컨텐츠 - ‘카일의 일지’ 를 종료합니다.]
.
.
에러창과 함께 픽, 하며 화면이 꺼져버렸다.
보이는 건 검은 화면 속, 비치는 시안의 얼굴뿐이었다.
시안은 그렇게 아르나이즈 전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지금 당장 뭘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해서 시안은 혹시나 싶어 다른 아르나이즈 석상들도 살펴봤다.
하지만 건진 것은 없었다.
설마하니 각 후예들의 힘이 필요한 것인가?
그런 생각에 시안은 콘라드에게 샤를롯의 석상에 힘을 불어넣어보라 부탁을 해봤다.
그러나 역시나 샤를롯 석상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결국 얻을 수 있는 건 카일의 일지 하나.
아마 이게 카르제가 남긴 유언이자 퀘스트의 내용인 것 같았다.
퀘스트가 클리어되지 않았지만··· 이는 점검 중이라 그런 것일터.
아마 점검이 끝나면 클리어가 될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 이상으로 전당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해서 황궁에 위치한 어딘지 모를 커다란 방.
정확히는 황궁의 귀빈실.
시안은 귀빈실에 비치된 쇼파에 앉아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푹신하면서도 허리를 받쳐주는 것이 상당히 편안했다.
“그래도 루벤의 것이 더 좋긴하네.”
하지만 루벤에서 만든 드워프제만은 못했다.
뭐, 어쨌든.
“흐음···.”
시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모종의 이유로 실행되지 않는 카일의 일지.
그리고 그 모종의 이유는 이러했다.
“사용 중인 기기가 지원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저게 개념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기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스마트 폰으로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모바일 영주를 실행시키는 기기.
그것은 스마트 폰밖에 없었기에 이렇게밖에 생각이 되질 않았다.
만일 이 추측이 맞다면 시사하는 바는 하나였다.
“스마트 폰 말고도 모바일 영주를 실행시킬 수 있다는 건가?”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생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게 뭔데?”
하지만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니까 스마트 폰 이외의 다른 기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애초에 시안은 이 스마트 폰조차 자세히 알지 못했다.
스마트 폰은 이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으니까.
누가 만든 것인지, 어디에서 만든 것인지.
또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나마 시안이 알고 있는 사실은 두 가지.
이 대륙에서 만든 물건이 아니다.
아르나이즈가 남긴 아티팩트다.
이 정도만이 시안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기기라 함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스마트 폰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스마트 폰에도 버전 업그레이드가 있는 것인가?
아니 그럴 거면 사용 중인 기기라 하면 안되잖아.
“그러고보니··· 이와 관련해서 모바일 영주가 뭐라 했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그랬었던 것 같다.
모바일 영주가 DLC에 관해서 설명을 할 때였나?
끄대 지원 기기 어쩌고를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 뭐라 그랬더라···?”
시안은 가만히 생각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바일 영주의 말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DLC란 한 마디로 정의하면 확장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 모바일 영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콘탠츠들이 추가되는 것이죠!’
‘신규 콘텐츠 추가 및 다양한 편의 기능 추가!’
‘지원 기기의 다양화를 통한 유저 편리성 증대!’
‘그야말로 모바일 영주2라 해도 무방하죠!’
.
.
DLC에 관련하여 모바일 영주가 했던 설명의 일부였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해서 당시에도 ‘자잘하게 털어먹겠다.’ 그 정도로만 이해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지금와서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지원 기기의 다양화를 통한 유저 편리성 증대!’
지원 기기의 다양화.
어째 지금의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DLC를 구매하면··· 지원 기기의 다양화를 얻을 수 있다는 건가?”
만일 그러하다면 DLC를 구매하면 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로써 ‘카일의 일지’를 실행할 수 있는 것.
“문제는 DLC를 어떻게 구매하냐는 건데···.”
말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시안은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영지 퀘스트] - ‘저 엘란두르, 순 나쁜새끼에요!’
▶장막 속에 감추어진 엘란두르의 진실.
그 진실을 파헤쳐 온 세상에 엘란두르의 추악함을 밝히세요!!』
-보상: DLC 개방.
.
.
바로 영지 퀘스트에 관련한 보상.
그 보상으로 DLC의 개방이 있었으니까.
애초에 위에서 언급한 모바일 영주의 설명도 이 퀘스트를 받았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결국, 카일의 일지를 실행하려면 영지 퀘스트를 깨야한다는 거지.”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지 퀘스트의 달성 요건.
바로 온 세상에 엘란두르의 만행들을 고발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상당히 막막하게만 느껴졌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악마와 결탁한 엘란두르.
거기에 다이애나가 정리한 1,472건에 달하는 추악한 범죄행각들.
무엇보다.
“아리아가 어디에 있으려나···.”
성녀, 아리아의 증언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
황궁에 위치한 또 다른 귀빈실.
황궁의 귀빈실 답게 상당한 고풍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단아한 인테리어.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는 2명의 여인.
그런 2명의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미(美).
아찔한 미(美)의 아우라에 귀빈실의 분위기는 그 의미를 갖지 못했다.
마주 앉은 탁자 위로 각종 다과와 더불어 따끈한 차(茶)가 놓여져있었다.
“직접 맞이해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리고 들려온 청순가련한 목소리.
2명의 여인 중 한 명, 백금발의 여인 아리아가 살짝 놀란 눈치로 입을 열었다.
아리아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보였다.
수수하게 내려앉은 백금발.
고고한 몸짓에서 느껴지는 기품.
찻잔을 홀짝거리는 아리아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음··· 차 향이 굉장히 좋네요.”
차를 홀짝인 아리아가 살짝 눈을 치켜뜨며 찻잔을 내려다봤다.
농담이나 빈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았다.
그렇기에 이건 괜찮다라는 말로 표현할 것이 아니었다.
아리아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루벤에 있었으니까.
아리아의 입맛이 루벤에 길들여져있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리아는 상당히 놀란 눈으로 찻잔에 담긴 차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를 향해 앞선 여인이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시고 신성 제국의 성녀님이신데요. 대우에 결함이 있어서는 안되죠.”
태양빛을 닮은 금발과 더불어 느껴지는 화사한 분위기.
그러나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인상에 쉬이 찾아볼 수 없는 미(美)의 소유자.
“그보다 제가 직접 우려낸 차인데··· 다행히 입에 맞으시나보네요.”
제국의 황녀, 엘레나가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리아는 다시 한 번 놀란 눈을 떠보이며 답했다.
“어머. 황녀님께서 직접 우려신거라고요? 황녀님께서 다도(茶道)에 조예가 이리 깊으신 줄 몰랐어요.”
“취미로 약간씩 배운 정도라 조예가 깊다고는 못해요.”
“취미로 배운 정도가 이 정도면, 상당한 재능이 있으신데요?”
“과찬이세요. 무엇보다 재료가 워낙에 좋은 영향이 있어요. 무려 루벤에서 공수해온 찻잎이거든요. 요즘 제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찻잎인데··· 시안 백작님이 특별히 제게 선물해주셨거든요.”
그러면서 엘레나는 살며시 시선을 내려보였다.
긴 속눈썹이 가라앉으며, 숨길 수 없는 기품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엘레나가 슬쩍, 아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다름 아닌 시안 백작이 특별히 선물해주었다는 말.
그건 아주 넌지시, 시안과 관련한 친분을 선보인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아, 어쩐지요.”
아리아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그저 차분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엘레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지어지는 눈웃음.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황홀한 눈웃음은 잠시 엘레나의 넋을 빼놓았다.
“어딘가 익숙한 맛인가 싶었어요.”
익숙한··· 맛?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숙한 맛이라는 것.
그건 이 차를 많이 마셔봤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리아는 신성 제국의 성녀였다.
그리고 이것은 샤를롯 제국에서만 유통되는 찻잎.
애초에 쉬이 공수할 수도 없는 초인기 품목이었다.
엘레나도 시안의 선물이 아니었다면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라는 생각도 잠시.
엘레나는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에 시안 백작님의 영지에 있으셨다고···.”
“네. 한 지붕 아래서 시안과 같이 생활 했죠.”
이어진 아리아의 대답에 엘레나의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다름 아닌 아리아의 말.
그건 지난 번에 엘레나가 아리아에게 사용했던 표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한 지붕 아래서 생활했다는 것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음을.
아리아는 그저 그 표현과 의미를 그대로 되돌려준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이렇고 저런 것이 행해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 없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지붕 아래서···.”
그런데 왜··· 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엘레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작 저런 도발에 흔들리면 안된다.
이러니 저러니 그저 루벤에서 같이 지낸 것에 불과했으니까.
이런 걸로 발끈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었다.
엘레나는 탁자에 놓인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몸짓을 과장하며, 새하얀 목선을 살며시 드러내었다.
그러자 엘레나의 목에 걸려있는 화려한 목걸이가 살짝, 아래로 흘러내렸다.
엘레나는 흘러내린 목걸이를 정리하는 척, 같이 흘러내린 금발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태양빛의 금발이 조신하게 정리되며, 엘레나의 귀에 걸려있는 귀걸이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 모든 과정에서 푸른 다이아가 박힌 반지가 껴있는 손을 강조했다.
그것도 ‘약지’에 껴있는 반지를 더없이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엘레나는 그것들을 내보였고.
자연스럽게도 그것은 아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못 보던··· 장신구들이네요?”
“네? 아, 이 장신구들이요?”
엘레나는 살짝, 놀라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시안 백작님이 선물해주신 거예요. 황궁의 세공사들이 어찌나 감탄하던지···.”
그러면서 엘레나가 본격적으로 이리저리 장신구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확실히··· 아름답긴 아름다웠다.
장신구도 장신구였지만 장신구를 착용한 엘레나의 미모가 너무 아름다웠다.
물론 아리아와 비교한다면 한 수 접어줄 것이다.
아리아의 미(美)는 기준을 초월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엘레나가 못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만일 미(美)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면, 엘레나는 그 한계선까지 닿아있다고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미(美)로써 둘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런 미모에 장신구가 더해지니··· 아리아가 봐도 너무 예뻤다.
농담이 아니라 엘레나의 장신구는 현재 아리아의 장신구와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았다.
보아하니··· 루벤의 대장장이자, 모르크루의 후손인 세미르.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것 같았다.
더불어 사용된 보석들은 카르제의 보물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카르제의 보물은 아리아가 직접 관여한 일.
어쩌면 그래서일까.
“조, 좋아보이긴··· 하네요.”
답을 하는 아리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려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안이 보기엔 그래보여도, 센스가 참 좋죠. 저도 이번에 시안에게서··· 핫!”
말을 하던 아리아가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나아가 실수를 했다는 듯, 두 손으로 가볍게 입을 틀어막아보였다.
“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해보이는데···.
“······”
아주 가관이었다.
엘레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안 백작님이 이번에도 성녀님께 선물을 주셨나봐요?”
“네, 네? 아뇨.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아리아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그러나 누가봐도 그렇다는 모습이었다.
“시안이 황녀님께 절대 말하지 말라고··· 어맛.”
“······”
엘레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리아의 연기 같지도 않은 연기도 있었지만 특히나 저 말.
정확히는 시ㅣ안이 황녀님께 말하지 말라는 무엇.
그건 둘 만의 비밀이 있다는 뜻이었다.
뭐, 그건 그럴 수 있었다.
둘만의 일이 있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걸 왜 엘레나한테 말하면 안되냐는 말이다.
대체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독, 엘레나한테만 비밀로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것은 아닐 터였다.
남녀간의 비밀.
그것도 다른 여인에게 말해서는 안되는 비밀.
그것이 어찌 평범한 것일 수 있을까.
엘레나의 생각은 어떤 부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엔 엘레나가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귀빈실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또한 묘하디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엘레나가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는 이 대륙에서 가장 고결하신 사제시잖아요.”
“과찬이세요. 교단에는 저보다 더 고결하시고 신실하신 사제분들이 많은걸요.”
“겸손하시네요.”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저는 그저 신성력만 강한 사제일 뿐이에요.”
아리아는 다시 한 번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다시 봐도 황홀한 미모였지만 엘레나는 이번엔 홀리지 않았다.
저번에 봤을 때는 투박한 곰이었건만.
이제는 아주 여우가 다 되어 있었다.
그것도 정말 위험한 여우가 말이다.
엘레나는 마주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혹시 그 때문인건가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성녀님께서 다른 사내와 연을 맺지 않는 이유요.”
그러자 아리아의 몸이 멈칫, 거렸다.
갑작스러운 찌름에 생각이 덜컥, 굳어져버렸다.
그 위로 엘레나의 말이 재차 들려왔다.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싶어서요. 이렇게 아름다우시고 단아하신 성녀님이신데. 그 동안 아무와도 연을 맺지 않으셨잖아요?”
엘레나는 순수히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교단의 사제는 혼인이 허락되지 않는 건가요?”
“아뇨··· 교칙으로 정해진 것은 없어요.”
“그럼 왜···?”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아리아는 쉽사리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걸 뭐라 대답해야할까.
아니, 이걸 대답을 해야하는 걸까?
이걸 물어보는 의도는 대체 뭐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런 혼란하고 복잡한 아리아의 머릿속.
“성녀님은 시안 백작님을 좋아하시나요?”
내리꽂히듯 들려온 엘레나의 말에 아리아의 생각은 끝내 고장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