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 황궁의 망나니
발루아가는 정말이지 그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로서 내뱉을 수 없는 욕지거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황제의 체면이고, 위엄이고, 나발이고 .
그딴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시안.
살며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고르고 있는 시안.
그 동안의 경험상 저 썅놈의 것에게는 체면, 위엄.
이딴 시덥잖은 나발들을 들이밀면 안되었으니까.
물론 황제로서 배포와 아량을 보여야만 했다.
그러나 저 썅놈의 것에게만은 아니었다.
그랬다간 제국 전체가 거덜날테니까!
하물며 이번엔 무려 세 가지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거덜나는 것도 3배일테고!
그러니 배포, 아량, 위엄, 체면. 그런 건 고려하지 않는다.
그건 그러니까··· 그래, 한낱 염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로서의 자세는 갖추어야 하는 법.
발루아가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말하라.”
일단 들어나 보자.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루벤은 엘란두르와 큰 전쟁을 벌였습니다.”
들려온 시안의 말에 발루아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를 경악시킨 그 전쟁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모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상세히.
“저는 듀라크 후작··· 과 검을 맞대었고, 끝내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시안이 듀라크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알다 못해 그 과정의 순서까지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투 속, 듀라크 후작이 악마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뭐라?”
그러나 이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악마의 힘?”
“그렇사옵니다.”
발루아가는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콘라드 또한 상당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발루아가의 입이 열렸다.
“그 말은.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뜻이더냐?”
“현재까지 정황으로는 그렇다고 생각되옵니다.”
단호한 시안의 대답에 발루아가는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혀버렸다.
솔직히 믿기 힘든 말이나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일단 시안은 듀라크와 직접 검을 맞댄 존재.
게다가 악마가 대륙에 재림했다는 사실을 발루아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증거는?”
그러나 그것이 시안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엘란두르와 악마가 결탁했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시안의 말에서만 비롯된 증언이지 않은가.
제국의 황제로서 한쪽의 말만 듣고 편협하게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
역시나 그 사실을 시안도 모르지 않다는 듯.
“이번 전쟁의 말미에 루벤은 엘란두르의 가신들을 포로로 붙잡아 심문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뭐, 뭐라?”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다름 아닌 엘란두르의 가신들이지 않은가.
이는 내부 고발과 동일한 신뢰성이 있었다.
아니, 내부 고발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 모두 황궁으로 호송했으니, 심문하시면 제 말이 사실임을 밝힐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진 시안의 말.
“또한 아리아··· 아니, 신성 제국의 성녀 또한 그 일을 보증하겠다고 저와 같이 황궁에 왔사옵니다.”
“허어···.”
발루아가는 참다 못한 탄성을 터트렸다.
엘란두르의 가신들의 증언.
신성 제국 성녀의 증언.
이 정도면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다짜고짜 확정지을 정도는 아니나 황가가 나설 명분은 충분했다.
“하여, 소신은 엘란두르의 전면 조사를 요구드리는 바이옵니다.”
황가가 직접 나서서 엘란두르를 대대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허나, 어디까지나 그 증거가 확실시 되었을 때의 일.”
발루아가는 시안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그러자 알현실의 문이 열리며 로열 나이츠의 기사가 들어왔다.
시선을 들지 않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느껴지는 기세를 보면 단장급의 인물이었다.
“지금 바로 시안 백작이 호송한 이들을 심문하라. 또한 신성 제국의 성녀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말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이윽고 로열 나이츠가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발루아가는 알현실의 문이 닫힘과 동시에 시안에게 말했다.
“그 이후의 일은 심문이 끝난 뒤에 이어가도록 하지.”
엘란두르의 만행에 관련한 보고가 남아있긴 했었지만···.
그건 황제가 아닌 다른 대륙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
황제가 움직인 지금 굳이 꺼내들 필요는 없었다.
시안은 뜻을 받겠다는 듯,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시안의 모습에 발루아가의 물음이 들려왔다.
“첫 번째 안건은 되었고··· 두 번째는 뭐지?”
“그것이···.”
시안은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흐려보였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면서 시선만은 발루아가를 힐끔, 보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입을 열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난처한 척하는 저 어줍잖은 연기.
이게 진짜다. 진짜가 왔다.
발루아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양심에 찔려서 차마 나는 입을 열지 못하겠다는 듯.
그런데 굳이. 구우욷이 먼저 물어본다면 말은 하겠다는 듯.
“이게 참···.”
저 당황하면서도 난처한 능글맞은 연기!
발루아가는 절대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안에 담긴 내용을 결코 듣고 싶지 않았다.
보나마나 정신이 아찔해지는 사건들이 튀어나올테니까.
해서 발루아가는 당장이라도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이만 가보거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 내 진짜···.
“말··· 하라.”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너무도 원통할 뿐이었다.
발루아가는 끝내 말을 씹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시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 현재 제국에 유통되는 골드 화폐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일순간 발루아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하니 그 말이 저 놈의 입에서 먼저 나올지 몰랐으니까.
네 놈이 그 주범이자 제국 경제 파탄의 원인이지 않은가.
자백하려는 것도 아니고 지금 무슨···.
아니, 그건 일단 그렇다 치자.
“하여, 골드 화폐를 주조하심이 어떠한지···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걸까.
발루아가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지금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발루아가는 다시 한 번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꾹, 눌러참았다.
정말이지 꾹꾹, 눌러 참았다.
여전히 이 썅놈의 것에게 보내는 것은 아까워죽겠다.
그러나 엘레나가 그리 좋다고 하니 어쩐단 말인가.
황녀로서의 의무감에 사로잡혀 정략 결혼만 생각하던 아이였다.
어떻게 보면 만들어진 황가의 인형처럼 보였던 아이였다.
그런 딸이 처음으로 좋아하는 남자였다.
아니, 좋아함을 넘어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솔직히 시안만큼 적합한 사위도 없긴 했다.
가끔 제정신이 아닐 때 죽여버리고 싶은 것만 빼면.
“제가 듣기로 화폐 유통량이 부족하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에 제국 경제가 아작이 났다고···.”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발루아가는 속으로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게 지금 네 입에서 나오는 소리더냐?
······ 라고 외치고 싶은 말을 꾹, 눌러담았다.
그리고 그런 발루아가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아니, 정확히는 발루아가의 울그락불그락한 표정을 눈치챈 콘라드.
“시안, 자네의 말처럼 현재로서 화폐를 주조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네.”
콘라드가 한 발 나서며 발루아가 대신 답을 해보였다.
“허나, 여러 복잡한 사정은 제쳐두고서라도 큰 문제가 하나 있네. 주전관에서 골드를 주조할 황금이 부족하다는 것이지.”
당장이라도 골드 화폐를 찍어내야하지만 그 재료인 황금이 없었다.
화폐를 찍어낼 원재료가 없으니 당연히 화폐를 만들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황금이 아닌 철로 만들자니 화폐 가치가 나락을 간다.
그러면 치명적인 인플레이션에 경제 자체가 재기 불능이 되어버릴 터.
오우거를 쫓아내려다 드래곤을 불러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이러지도 못하는 상황이거늘.
“그 황금을 제가 공급하겠습니다.”
“시안, 자네가 말인가?”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콘라드는 살며시 고개를 저어보였다.
“현재 제국에 부족한 화폐는 어마어마하네. 최소 억 단위의 골드가 필요한 상황이지. 그에 따른 황금이 적지 않거늘, 아무리 자네라도···.”
개인이 모을 수 있는 보물의 양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나 그것이 황금에 한정짓는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이는 직접 확인해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
시안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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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 브라헤의 상단주, 아멜리아.
아멜리아는 다르칸의 한적한 곳, 마차에 앉아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시안은 황제를 알현한다며 떠나갔지만 아멜리아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와의 알현은 꿈도 꾸지 않았다.
아무리 아멜리아가 제국의 거대 상단, 루벤 브라헤의 상단주라고한들.
제국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대상인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들.
황제 앞에서는 한낱 잡상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물론 정말로 잡상인 취급을 받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황제는 그야말로 제국의 1인자.
그런 황제를 알현한다는 것은 대상인 정도로는 안되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재력으로는 황제의 발 끝에 미칠 수가 없었다.
황제는 그런 재력을 초월하는 권세와 권위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런 의미로 영주님은 참···.”
아멜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그극, 쩌적.
마차 밖에서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 바라본 그곳엔 아니나 다를까 쩌저적, 땅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작디 작은 주머니의 무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조만간 땅 자체를 폭삭, 주저앉게 만들어버릴 것 같았다.
위치를 옮겨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저건··· 도무지 인간이 건드릴 수 있는 무게가 아니였으니까.
저걸 건드릴 수 있는 존재하는 딱 한 명.
“영주님이 빨리 오셔야할텐데··· 언제쯤 오시려나.”
아멜리아는 그렇게 시안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있는 이곳은 사람이 쉬이 다니지 않는 음습한 곳이었다.
수도, 다르칸이라고는 하나 모든 지역이 발전되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낙후된 지역이 없는 영지는 전 대륙에 루벤밖에 없었다.
뭐, 어쨌든 지반을 무너뜨리는 저 주머니.
저 주머니 때문에 어딜 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있을 수 있는 곳이 이렇게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
분위기가 상당히 음습하긴 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루카스와 흑사자 기사단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으니까.
아멜리아는 장부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차 밖에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알현을 마치고 돌아온 듯 싶었다.
아멜리아는 정리하던 장부를 황급히 마무리했다.
그리고 마차의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감과 동시에 갸웃.
아멜리아의 고개가 좌측으로 기울어졌다.
마차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이는 역시나 시안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멜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안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한 두 명의 인물.
존재만으로도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아우라.
별 다른 기세가 없음에도 괜히 위축이 되는 존재.
“화, 화, 황제 폐하?!!”
아멜리아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그리고 부릅, 시야로 보이는 옆,
“화, 황태자 전하?!?!?”
아멜리아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떠졌다.
황제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또한 황태자는 또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사람 하나 다니지 않은 이 음습한 곳에 대체 왜?!
물론 황궁 근처에 위치한 곳이라 올 수 있기는 개뿔이 무슨!
황제가 누군데 여기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황태자랑 같이!
아멜리아는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아멜리아의 머릿속.
황제와 황태자는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멜리아가 끝내 제국의 1인자와 2인자를 마주했을 때.
“아? 아아···?”
아멜리아는 그만 고장이 나버렸다.
그리고 그런 고장난 아멜리아의 모습 때문일까.
“이 여인은?”
콘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제 영지에서 운영하는 루벤 브라헤 상단의 상단주, 아멜리아입니다. 전하와는 이미 안면이 있었습니다만···.”
“나와 말인가? ··· 아, 지난 번에 서부에서 보았던 브라헤 가문의 영애를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루벤에 오셨을 때도 마주친 적이 있으셨을 겁니다.”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아멜리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초점 풀린 눈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는 모습.
“아무래도 아멜리아가 고장··· 아니, 많이 당황한 것 같습니다.”
시안은 슬쩍, 아멜리아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핫!”
그러자 아멜리아가 번쩍, 고쳐졌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며 예를 갖추었다.
“지, 지엄하신 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뵈, 뵈어요···!”
고개를 푹, 숙인 아멜리아의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가녀린 아멜리아의 어깨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 없군.”
콘라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잡아먹지 않으니 두려워 말게. 내가 그리도 어려운가?”
“황태자 전하시지 않습니까. 거기에 황제 폐하께서도 계시고요. 아멜리아가 아니더라도 두 분 앞에선 누구나 저럴 것입니다.”
“음···.”
콘라드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본인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자네는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가?”
“착각이십니다. 지금도 충분히 어렵습니다만.”
이에 콘라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퍽이나 어려워 하는군.”
대답은 발루아가의 입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네가 말한 황금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발루아가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저기, 아공간 주머니에 담겨있습니다만···.”
작디 작은 주머니 하나뿐이었다.
정확히는 우그극, 쩌적─! 하는 소리를 자아내는 주머니.
그로써 지반이 내려앉고 있는 기이한 광경.
보아하니 저 주머니의 무게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저게 말이 되는 건가?
그러니까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대체 얼마의 무게를 지녔기에 저 주머니에 지반이 통째로 주저앉나··· 싶은 그때.
“아멜리아. 이번에 가져온 황금이 어느 정도이지?”
“그, 그것이··· 여러 보석들을 제하고 황금만 가져온 터라 마, 많지는 않아요. 골드 화폐로 주조한다 했을 때의 가치는···.”
아멜리아가 떨리는 눈과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 30억 정도···.”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뭐가 그렇다는 건데?
발루아가의 표정이 그대로 붕, 떠버렸다.
콘라드 또한 얼굴에서 얼이라는 것이 빠져버렸다.
그런 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여, 1골드 주조에 필요한 황금을 1.5골드에 판매할까 하옵니다만···.”
시안의 입에서 색다른 개소리가 내뱉어졌다.
제국에서 통용되는 골드 화폐는 황금으로 만든다.
하여, 1골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황금의 비용.
그건 당연하게도 1골드의 가치보다 낮았다.
그래야만 법정 통화로서의 효용성을 가졌으니까.
법정 통화의 효용성은 액면이 원가를 넘어야만 했으니까.
이게 뭔 개소리냐 싶지만 간단한 말이었다.
1골드를 만드는데 필요한 황금의 양이 1골드보다 더 많다고 치자.
그러니까 1골드 화폐에 들어있는 황금의 가격이 1.5골드인 셈이다.
그럼 그 1골드를 녹여서 황금으로 팔아 제끼면 더 이득이지 않은가.
1골드를 다시 황금으로 녹이면, 1.5골드에 팔아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도 과거, 제국에 이와 관련한 사건이 있었다.
1,000만 골드에 달하는 금화를 녹여 1,200만 골드 어치의 금(金)을 얻어 팔아 이득을 챙긴 사건.
당연히 관련한 이들은 모두 붙잡혔지만 언제고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일.
그 이후로 화폐에 들어가는 황금의 양이 조절되었다.
황금만이 아니라 다른 금속들을 화폐에 미량 혼합하였다.
그렇게 1골드 화폐의 가치를 1골드보다 낮추었다.
매년 물가 상승률에 따라 그 비율을 달리 하지만, 0.5골드 내지 0.6골드 선에서 지켜졌다.
이것이 바로 법정 통화의 효용성은 액면이 원가를 넘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다른 말로 화폐가 화폐로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물적 자산으로 가치를 지니면 안 된다는 뜻.
어쨌거나 1골드는 그 자체의 값어치가 1골드보다 낮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들려온 시안의 말.
“좀 과하시면 1.3골드까지는 어떻게···.”
그야말로 색다르고 참신한 개소리라 할 수 있겠다.
“미, 미, 미, 미치셨어요?!”
그에 따라 아멜리아가 다급히 소리쳤다.
저것이 어떤 참신한 개소리인지 그 누구보다 아멜리아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막말로 골드를 골드로 주고 팔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가를 상대로!
그것도 황제와 황태자의 면전에다가!
아멜리아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발루아가와 콘라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
“······”
두 사람의 어이는 이미 하늘로 승천해있었다.
이건··· 이건 그야말로 돈에 미친놈이었다.
이건 미치다 못해 영혼까지 팔아먹은 놈이었다.
뭐?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되어 있다고?
하!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시안, 이 놈이야말로 악마와 결탁되다못해 영혼까지 팔아먹은 놈이었다.
이런 놈에게 엘레나를 보내는 것이 맞는 걸까?
뭐, 엘레나가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밥을 굶어 허덕이는 일은 결코 없겠구나.
발루아가는 그런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렇게 멍한 정신.
“하, 하지만 그럴 수는 없네. 그랬다간 남는 게 없지 않은가.”
콘라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마따나 1골드를 1.5골드에 판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 말은 즉, 1골드를 1.5골드로 산다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는 1골드를 주조함과 동시에 0.5골드의 빚이 생기는 꼴이었다.
화폐 유통량을 풀기는 커녕, 빚만 잔뜩 얹는 격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시안 또한 모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저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 일에 제 잘못도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시안이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현재 제국에 유통되는 골드가 부족한 현상.
그로써 제국 경제가 파탄이 나버린 이 일.
그 일에 시안의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정당하게 물건을 팔아서 얻은 수익으로 행한 일이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그 어떠한 불법의 과정도 없었다.
그러니 시안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었고.
협상이란 본디 앞서 후려치기가 있어야 하는 법.
“1골드 당 0.8골드에 판매하겠습니다.”
시안은 새로운 제안을 꺼내보였고.
콘라드는 잠시 침음을 삼켰다.
이러하다면 황가 측에서는 0.2골드의 이익이 발생한다.
1골드를 주조하면 0.2골드의 순 이익이 발생한다.
무려 20%의 순익이며, 이러면 황가에도 남는 골드가 있었다.
이를 30억에 투영하면 20%, 6억 골드.
앉아서 먹는 꽁돈이자, 어마어마한 수익.
그러나 이건 황가가 수익이나 올리자고 하는 사업이 아니었다.
파탄난 제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함.
즉, 6억 골드에 달하는 화폐를 다시 제국에 유통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화폐 부족 현상을 완벽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충분한 유통량이었다.
파탄난 경제를 어느 정도 안정화 시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다른 한 쪽의 손해가 있어야만 했다.
정확히는 시안이 20%의 손해를 보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돈에 미친 놈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놈이 결코 그럴 리가 없었다.
발루아가와 콘라드의 시선이 가만히 시안에게 향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 있댄다.
그리고 그것은 시안이 발루아가에게 앞서 말한 3가지 용건 중 마지막.
“폐하의 조디악 소드를 잠시 빌려주십사 합니다.”
아르나이즈 전당에 들어가기 위한 조디악 소드(Zodiac Sword).
“그 대가로 1골드를 0.8골드에 넘기겠습니다.”
한 마디로 조디악 소드 대여비를 내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
발루아가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진짜, 진짜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조디악 소드는 무려 아르나이즈 샤를롯이 사용한 검.
샤를롯 대제때부터 이어온 황제의 징표였다.
황제를 상징하는 징표는 당연하게도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오로지 정통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
그런 조디악 소드를 빌려달라니.
이런 미친 놈은 진짜 태어나 처음이었다.
아니, 천 년에 달하는 제국의 역사를 뒤집어 이 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발루아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빌려준다는 개념을 들이밀 것이 아니었으니까.
황태자인 콘라드 또한 황제의 허락 없이는 사용이 불가하거늘.
그런데 뭐?
한낱 귀족 따위가 조디악 소드를 빌려달라?
당연하게도 불가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했다.
그런데 이 놈은 무슨···.
“그··· 0.75골드. 1골드에 0.75골드까지 해드리겠습니다.”
흥정이나 하고 나자빠져있으니 원.
발루아가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한 일이었다.
이는 돈의 문제가 아니다.
황가라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자, 황제의 품격과 위엄이 걸린 일이었다.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가 돈 따위에 움직인다?
이는 결코 허락할 수도, 허락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제국에 닥친 경제 위기가 심각하다고 해도.
자칫 제국이 무너질 수 있는 중대한 위기라도 해도.
저 돈이면 당장 그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해도.
아무리 사적인 용도가 아니라 제국과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라고 해도.
이는 결단코 허락해서는 안되는 일.
발루아가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고.
와르르르르르르.
“1골드당 0.7골드. 그러면 조디악 소드를 빌려주도록 하지.”
역시나 거절하기엔 너무도 큰 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