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 시작과 마지막(2)
황궁으로 갈 준비는 빠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물론 전쟁의 후처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수준은 또 아니었다.
애초에 전쟁의 여파는 루벤의 방벽을 뚫어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지난 번에 시안이 현질한 ‘뭐든지 가르쳐 드려요! 아카데미 Lv.1’ 시설.
어느덧 아카데미의 인재들이 속속들이 배출되고 있었다.
루벤의 내실은 차츰차츰 안정을 찾아갔고.
그 과정에서 시안이 거들 일 또한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렇게 시안은 황궁으로 갈 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속도를 내야했기에 인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지만 불가피한 인력은 있었다.
다름 아닌 엘란두르의 가신들을 포로로서 호송해야했으니까.
그에 따라 어느 정도의 병력을 차출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인력을 차출하지는 않았다.
말마따나 인원은 최소한으로 할 수면 좋았고.
솔직한 심정으로 엘란두르가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엘란두르는 거진 몰락 직전까지 몰려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숨어있는 악마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카이의 소식도 없고.’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카이.
그리고 어떤 의미로 듀라크보다 더 위협적이었던 카이.
아직 카이가 남아있기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여러모로 루벤에서 많은 병력을 차출할 수는 없었다.
해서 황궁으로 가는 인원은 시안을 포함한 열 명 내외로 추렸다.
악마와의 연관성을 입증해줄 아리아.
골드 화폐를 찍어내고 팔아줄 아멜리아.
그리고 포로들의 호송을 도맡을 몇몇 흑사자 기사단이었다.
그렇게 떠날 채비를 마친 지금.
시안은 루벤의 앞에서 아멜리아를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보물들을 인벤토리에 담을 일만 남았으니까.
그렇게 아멜리아를 기다리고 있는 그때.
저 멀리, 루카스가 시안을 향해 걸어왔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보였는데···.
“영주님. 이번 황궁 호송 일에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응?”
아니나 다를까 루카스 시안에게 말을 걸어왔다.
“루카스? 네가?”
“네.”
“안돼.”
하지만 시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루카스는 루벤의 경비대장이자 루벤의 방비에 있어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의 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루카스가 없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터였다.
그러나 루카스는 별 다른 지시가 없어도 병력들을 통솔했다.
시안이 듀라크를 홀로 대적하려는 이유를 알아채고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다.
심지어 이번에 에런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보여준 루카스.
어떤 의미로는 켄드릭보다 중요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루카스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특히나 엘란두르의 위협이 끝나지 않은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다.
시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리고 평소의 루카스라면 수긍을 하며 물러났을 터였다.
충직하고 강직한 기사도의 루카스는 주군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합당하다 생각되면 더더욱.
그런데 왜일까.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루카스는 어째 물러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모습. 필시 그 이유가 있어보였다.
“무슨 이유인데?”
“영주님의 충직한 기사로서, 황궁까지 가시는 주군의 안전을 지켜야하는 의무가─.”
“헛소리 말고.”
시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이유인데?”
그러자 루카스가 뜸을 들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성녀님도 영주님과 같이 황궁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번에 성녀님이 떠나시면, 다시 루벤으로 안 돌아오시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황궁으로 갔다가 다시 신성제국으로 가지 않을까 싶은데.”
정확히는 시안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아리아가 다시 루벤으로 오고 싶다고 해도 시안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다고?”
“크흠.”
루카스는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해보였다.
시안의 눈을 피하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그런 루카스의 모습에 시안은 그때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로라 때문에?”
아리아를 보좌하는 여사제, 로라.
아리아가 가는 곳에 당연하다시피 로라가 따라간다.
그렇기에 아리아가 떠난다 함은, 로라 또한 떠난다는 뜻.
해서 루카스는 조금이나마 로라와 같이 있고자 황궁에 따라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잠깐.
“언제는 절대 아니라고 하더니?”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얼씨구?”
뻔뻔한 루카스의 태도에 시안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강직한 면모만 보이던 루카스였거늘.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하더니··· 아니, 잠깐.
“너, 설마하니 로라 따라서 성기사로 전직할 생각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천만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어보였다.
“음···.”
시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주군으로서 수하의 사랑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할 수는 없긴 하다만···.
바로 그때.
“다만,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신다면 루벤에 남아있겠습니다.”
루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안에게 말을 걸어왔다.
“뭔데? 말해봐.”
“영주님께서 성녀님과 연을 맺으신다면, 저는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 뭐?”
시안은 저게 뭔 개소린가 싶었다.
아니, 진짜 뭔 개소린가 싶었다.
“나랑 아리아가 이어지는 게 루카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왜 상관이 없겠습니까. 로라는 성녀님을 보좌하는 사제이고, 저는 영주님을 보필하는 기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 아.”
시안은 그때서야 루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에 루카스가 다시 한 번을 입을 열었다.
“영주님과 성녀님이 이어지시면, 성녀님은 영주님 가문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잖습니까. 따라서 성녀님은 앞으로 신성 제국이 아닌 루벤에서 지내시게 되겠죠.”
“그럼 자연스레 로라 또한 같이 루벤에서 지낼 수 있다?”
“그렇습니다.”
루카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안은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처구니 없는 눈빛과 정신.
루카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녀님은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바라마지 않는 여인이지 않습니까. 아, 물론 전 아닙니다만.”
이번에 큰 전쟁을 겪어서 그런 것인가.
루카스는 마음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무엇보다 성녀님께서도 영주님께 마음이 있어보입니다만.”
“아리아가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진심··· 이십니까?”
“뭐가? 뭐가 진심이냐는 거야?”
“······”
루카스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말만 안했다 뿐, 눈빛만 보면 ‘뭐 이딴 놈이 다 있지?’ 싶은 얼굴이었다.
“이럴 때마다 과거에 영주님이 왜 천하의 둔재라 불렸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째 루카스는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안은 그런 루카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고. 곧 출발할거니까 가서 빨리 준비하고 와.”
그러자 루카스가 약간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보였다.
그리고는 두리번두리번, 저 멀리 있는 긴 적발의 미녀.
황궁으로 운송할 카르제의 보물들을 정리하고 있는 아멜리아의 눈치를 슬금 살폈다.
그냥 말해도 들리지 않을 거리였건만.
루카스는 속삭이듯이 시안에게 말을 건네왔다.
“아멜리아 아가씨께서 들으면 서운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성녀님과 연을 맺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는 따라가는 것보다 솔직한 심정으로 영주님께서 성녀님과 짝을 맺으시는편이 더···.”
“갑자기 아멜리아는 왜 또 서운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준비나 해.”
시안은 루카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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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롯 제국의 수도, 다르칸.
그 다르칸에 위치한 제국의 심장, 황궁.
“곧 시안 백작이 황궁에 당도한다고 합니다 폐하.”
황태자 콘라드는 황제, 발루아가에게 보고를 이어갔다.
대륙을 떠들썩하게 했던 루벤과 엘란두르의 전쟁.
아니, 지금도 대륙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두 가문의 전쟁.
그 말도 안되는 기적과 함께 이 대륙의 진정한 패자(覇者)로서 거듭난 인물.
현 시각 대륙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사내.
“시안. 그 놈이 황궁에 온다라···.”
하지만 황제, 발루아가에게는 다른 의미로 뜨거운 감자였다.
발루아가는 흠··· 하는 침음을 살짝 흘려보였다.
다름 아닌 제국에 존재하는 골드 화폐를 증발시켜버린 주범.
그로써 파탄이 나버린 제국의 경제.
솔직히 직접적으로 검을 들지 않았다 뿐.
사실 상 국가 전복의 반역죄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발루아가는 시안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놈팽이를 넘어선 그 썅놈의 새끼를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 속에 맺혀있는 울분에 화병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왜일까.
“꼭 와야된다고 하더냐?”
그런데 지금은 썩···.
그러니까 지금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일단 첫 번째.
“전쟁이 막 끝난 상황에서 왜 갑자기?”
루벤과 엘란두르와의 전쟁.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를 발칵, 뒤집어버린 압도적인 승리.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것다만.
솔직히··· 발루아가는 약간의 걱정도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러니까 만약 중에서도 만약에.
시안이 훼까닥, 뒤집어지면 어떡할까.
그러니까 시안이 마음 먹고 반역이라도 일으킨다면?
엘란두르의 30만 대군조차 어찌하지 못했다.
그것도 피해가 전무(全無)한 말도 안되는 기적을 이루어내었다.
입장을 바꿔서 엘란두르의 30만 대군이 황가로 쳐들왔다치자.
황가는 루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피해없이 막아낼 수 있을까?
아니, 아무런 피해는 개뿔이 무슨.
30만 대군을 상대로 이겨낼 수 있을지부터 걱정해야했다.
뭐, 이기기야 이길 수는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루벤처럼 전무한 피해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시안은 듀라크를 꺾으며 새 시대의 대륙 제 1의 검으로 거듭났다.
한 마디로 현 시점에서 시안을 어찌할 존재가 없었다.
발루아가는 제국의 황제이긴 했다만···.
솔직한 심정으로 발루아가는 시안이 조금 껄끄러워졌다.
“어떻게, 샤를롯 대제의 검은 수련이 잘 되고 있느냐.”
그래서 발루아가는 황태자, 콘라드에게 물었다.
지난 날, 무려 2억 5천만 골드를 지불하고 복원한 검술.
정확히는 시안에게서 구매한 샤를롯 대제의 검.
처음엔 정말로 샤를롯 대제의 검이 맞는건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시안, 이 썅놈의 것이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언젠가 콘라드가 수련하는 모습을 봤을 때.
발루아가의 의심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꾸준히 수련을 하고 있사옵니다.”
의심 같은 것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바쁜 업무 중에도 틈틈이 수련을 한 콘라드의 수준은 상당히 준수했다.
아니, 준수함을 넘어 말도 안되는 성장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엔 예일과 대등하게 검을 겨루었다고 들었다.”
로열 나이츠 제 2기사단의 단장, 예일.
콘라드는 마스터 중급에 달하는 예일과 어느 정도 검을 섞을 수준까지 올라와있었으니까.
“예일 경이 한 수 물러서 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등이란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물론 예일이 어느 정도 봐준 것도 없잖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성장임은 분명했다.
머나먼 후손일지나 콘라드에게 샤를롯의 피와 재능이 이어진 것일까.
여기에 샤를롯의 검, 조디악 소드(Zodiac Sword)가 더해지니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콘라드였다.
아비로서 드는 주책일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콘라드는 샤를롯의 뒤를 이을 것이라 발루아가는 확신했다.
그렇기에 황가에서 시안과 대적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
“콘라드. 네가 시안, 그 놈과 겨룬다면 어떠할 것 같으냐.”
정확히는 가능성이라도 품은 것은 오직 콘라드 뿐이었다.
“아마 제가 이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정말이더냐?”
발루아가는 눈을 크게 떠보이며 되물었다.
솔직히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었으니까.
농담하는 건가 싶었지만, 콘라드의 눈빛은 전혀 그러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진 콘라드의 말.
“제가 알고 있는 시안 백작은 제게 진짜 힘을 발휘하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그 말은··· 네가 황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콘라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는 제국의 황태자.
황제 다음으로 가는 제국의 2인자였다.
제국의 그 어떤 귀족이 황태자를 향해 진심으로 검을 휘두를까.
아무리 대련이라는 명목이라도 그건 아니었다.
특히나 콘라드가 알고 있는 시안은 참된 귀족.
그게 아니더라도 시안의 성격상 알게 모르게 져줄 터였다.
“황태자라는 직위를 벗어던진다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콘라드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콘라드가 황제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황제에게 보일 수 없는 무례였다.
그러나 콘라드는 개의치 않았다.
정말로 뭔 말같지도 않은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발루아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
그런 콘라드의 모습에 발루아가는 아무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것이 무색할 지경.
한 마디로 시안이 진심으로 검을 뽑아든다면, 막을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저보다는 엘레나를 내세우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엘레나를?”
콘라드의 여동생이자 제국의 황녀, 엘레나.
“설마하니 아내의 본가를 향해 검을 꺼내들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어떤 사내라도 아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폐하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발루아가의 아내이자, 콘라드와 엘레나의 어머니.
제국의 황후는 수 년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발루아가의 황후 사랑은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
오죽하면 지금까지도 후궁 한 명 들이지 않았을까.
제국의 1인자인 황제도 황후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로 콘라드의 말은 시안을 대적하려면, 시안과 엘레나를 혼인시켜야한다는 의미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시안, 그 놈이 철벽을 치고 있다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만··· 책임을 지게 하면 이야기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책임을 지게 한다?”
“사내가 여인에게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콘라드의 말에 발루아가의 고개가 약간 기울어졌다.
그리고 곧 그 의미를 깨달음에 발루아가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너는 지금 오라비라는 자가 여동생을─!”
“엘레나가 제게 직접 한 말입니다만.”
발루아가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 뭔···.”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안 백작만큼 최고의 부마도 없지 않으십니까.”
뭐··· 솔직히 이것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 제국에서, 아니 이 대륙에서 시안보다 적합한 부마. 그러니까 최고의 사위감은 없었다.
외모, 능력, 지위, 성품, 인격.
아. 성품과 인격은 조금 뒤로 빼놓자.
그 놈은 돈이라면 환장하다못해 미쳐있었으니까.
“엘레나를 보내는 쪽으로 하시지요.”
“데릴 사위를 포기하라?”
“괜히 욕심부렸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엘레나가 시안의 아내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시지요.”
황가의 일원을 귀족의 가문으로 보낸다.
보통은 귀족의 가문이 황가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즉, 시안과 엘레나가 혼인을 한다면 ‘시안 루벤’이라는 이름은 사라진다.
시안은 ‘샤를롯’ 이라는 성을 부여받아 황가의 일원이 된다.
그렇게 시안과 엘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루벤’ 이라는 성이 아닌 ‘샤를롯’ 의 성을 갖는다.
하지만 데릴 사위를 포기하면 그 반대가 된다.
엘레나 폰 샤를롯의 이름이 사라지고 ‘엘레나 루벤’이 된다.
둘 사이의 자식 또한 당연히 ‘루벤’의 성을 부여받는다.
한 마디로 황가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일.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지난 천 년의 제국 역사를 살펴보면 없었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 일이 매우매우매우 드물었을 뿐.
그리고 현재 시안의 명성과 입지를 생각하면 솔직히 명분도 충분했다.
하지만 발루아가는 심히 고민이 되었다.
제국의 1인자, 황제로서.
그리고 엘레나의 아버지로서.
발루아가는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모든 것은 엘레나의 의견입니다.”
그런데 엘레나가 그리 원하고 있다니 원.
이러면 어느 것 하나 걸리는 일이 없었다.
정확히는 시안의 마음.
그것 하나만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똑똑.
-폐하, 저 시종장이옵니다.
알현실 밖으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이어진 발루아가의 말에 알현실의 문이 열리며 시종장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윽고 천천히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그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지금 막 시안 백작이 황궁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지금 말이더냐?”
“그렇다고 하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시종장의 말.
발루아가와 콘라드의 두 눈이 잠시 마주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 그것이···.”
시종장이 상당히 난감한 눈치로 말을 흐려왔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싶던 찰나.
쿠우우웅···!
갑자기 황궁 전체가 크게 떨려왔다···?
마치 거대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황궁이 크게 떨려왔다.
정말 지진이라도 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던 찰나.
“시안 백작이 이대로 들어오면 황궁이 무너진다고 하여 밖에서 알현을 요청하온데···.”
시종장이 알 수 없는 말을 해왔다.
이에 콘라드가 시종장에게 물었다.
“황궁이 무너진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보물들을 가져왔는데 그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가, 지반이 버틸 수 없다고 하옵니다···.”
그에 따라 콘라드와 발루아가의 고개가 동시에 기울어졌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봐, 똑같이 물음표를 찍는 두 사람이었다.
심지어 말을 내뱉은 시종장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말을 이었다.
“제 아둔한 머리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역시나 시종장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쿠우우웅···!
다시 한 번 떨려오는 커다란 진동.
“잠깐.”
그와 동시에 발루아가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정말이지 끔찍하고도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이었다.
다름 아닌 보물들을 가져왔다는 말.
그리하여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는 말.
“이 진동이 설마··· 보물의 무게 때문에···?”
발루아가는 말을 내뱉고도 이게 뭔 개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대체 어느 정도의 보물을 가져와야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일단 발루아가의 상상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제국의 황제로서 수많은 보물들을 접하고 봐온 발루아가였다.
이 제국에서 발루아가보다 많은 보물들을 접한 이는 없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상상이 불가하다.
단순 보물의 무게 만으로 쿠우우웅···!
이렇게 황궁 전체를 진동시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물들을 가져와야 얼추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가능할리가 없지 않은가.
일반적인 상식이라면 당연 그러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시안이라면···?
말도 안되는 기적의 행보를 이어가는 어떤 미친놈이라면···?
쿠우우우웅···!
다시 한 번 떨려오는 크나큰 진동.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발루아가가 시안을 만나기 싫었던 그 두 번째 이유.
“······”
이번엔 대체 무슨 사건 사고를 몰고 온 것일까.
발루아가는 벌써부터 머리가 심히 아파오고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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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 돌아온 황제의 알현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뵙─.”
“쓰잘데기 없는 예의는 되었다.”
발루아가는 가벼운 눈짓으로 말을 일축시켰다.
이에 시안은 뻘쭘한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발루아가는 그런 시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황궁의 지반이 다 무너질 것 같다며 오라가라할 때는 언제고. 멀쩡히 잘만 있구나.”
“제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황궁의 지반이 무너질 것 같으니 지금 당장 제가 황궁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윽고 시안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가 어찌 지엄하신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오라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번지르르 한 입은 여전하군.”
발루아가는 콧방귀를 뀌어보였다.
그리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말하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뜸 들이지 말고 말하라. 대체 무슨 사건들을 몰고 왔는지 말이다.”
매도 빨리 맞는게 낫다고.
발루아가는 괜히 뜸 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발루아가의 생각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시안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해올 뿐이었다.
“다른 이가 들으면 제가 사고만 치는 사고뭉치인 줄 알겠습니다.”
“그럼 아니란 말이냐?”
발루아가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아니, 진짜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그동안 이 썅놈의 것 때문에 골머리를 썩혔던 사건 사고가 도대체 몇 개란 말인가!
그런데도 저딴 뻔뻔한 소리나 내뱉고 있으니!
일순간 말없이 삭혔던 울분과, 분노와, 분통과, 분함과, 부아들이 한 순간에 치밀어올랐다.
“네가 지금까지 행동한 일들을 보고 그딴 소리를─!”
“폐, 폐하. 진정하시옵소서.”
콘라드는 발루아가를 붙잡으며 이런저런 눈짓을 해보였다.
그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결국 참아라, 였다.
후우, 그래. 참아야지.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지만 딸내미가 그리 죽고 못산다니.
하나 뿐인 딸내미를 시집 보내야하는 아비라면 참아야지.
“말··· 하라.”
발루아가는 이를 빠드득, 갈며 말을 이었다.
“사고를 몰고 온 것은 아니오나··· 폐하와 전하께 말씀드릴 것이 있기는 있사옵니다.”
그러자 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발루아가는 긴장 어린 눈으로 이어질 시안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끝내 시안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을 때.
“크게 3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사온데···.”
그것도 무려 세 가지 사건이라는 말이 들려왔을 때.
“······ 염병할.”
발루아가는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