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 시작과 마지막(1)
카일도 그랬냐는 아리아의 물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물음에 레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런 레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아리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카일도 혹시 뮤리엘을 싫어했어?”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아 쫌! 그냥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
-이 기지배가 진짜 뭐 잘못 먹었나.
레아는 귀를 살짝 틀어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가볍게 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글쎄? 그닥 좋아하진 않았던 거 같긴한데··· 싫어하지도 않았지? 애초에 카일이 누굴 싫어한다거나 하지는 않았어.
“······ 그래?”
-아니, 이건 갑자기 왜 묻는건데 대체.
그러자 아리아가 살짝, 뜸을 들였다.
레아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고, 이내 아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인지···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 이 년아. 너 혼자만 지껄이지 말고 알아듣게 좀 말해봐.
레아는 끝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리고 그때서야 아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안은 카일의 후계자잖아.”
-그런데.
“그리고 저번에 네가 그랬잖아. 시안과 카일은 상당히 닮아있다고.”
-그것도 그런데.
“그때··· 카일도 그랬어?”
처음과 같은 질문이자 물음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것이 조금은 다른 의미임을 레아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막 그런 감정 때문이 아니라··· 그게 그러니까···.”
-언젠가, 떠날 사람처럼 보인단 말이지?
“······ 맞아.”
아리아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때 너도 카일을 붙잡지 못했던 거야?”
천 년전, 홀연히 떠나버렸던 카일.
당시의 레아는 떠나가는 카일을 붙잡지 못했다.
떠나야만 했던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갑자기 그건 또 왜 궁금한데?
“그냥···?”
-그냥은 무슨. 이제 와서 숨길 게 뭐가 있다고. 됐으니까 말해봐. 갑자기 그건 왜 또 궁금한 건데?
레아의 말에 아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금방 아리아가 입을 열었다.
“엘란두르와의 전쟁은 끝이 났고. 이제 점점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져.”
이제 남은 것은 악마들과의 싸움뿐이었다.
엘란두르 내에 숨어있는 악마의 씨앗을 제거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나이즈들로부터 시작된 싸움이었다.
천 년전부터 이어온 싸움이었고.
아르나이즈들조차 끝내지 못한 싸움이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온 싸움은 그 후예들이 이어가고 있었다.
천 년전의 아르나이즈들과 똑같은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가온 마지막 싸움.
이게 마지막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세대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싸움일 것이다.
하여, 이것이 천 년전부터 계속해서 이어온 싸움이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무한의 반복이라면.
그리하여 아르나이즈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해야만 한다면.
“이 모든 일의 끝에서··· 시안도 우리를 떠나버릴까봐. 카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안도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릴까봐···.”
아리아는 답지 않은 진지한 눈빛으로 레아를 바라봤다.
“그게··· 좀 궁금해서.”
그렇게 아리아는 말을 끝마쳤고.
레아는 그런 아리아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내려앉는 정적.
정적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카일은···.
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처럼 언젠가 떠날 사람처럼 보였어. 마치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자신이 본래 있어야할 곳이 따로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만일, 시안도 카일과 같은 길을 걸어간다면···.
레아의 초점 없는 회백색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다시 한 번 내려앉는 정적.
그러나 이번에는 정적이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거야. 설령 예전과 같은 일이 생긴다해도. 이번엔 예전처럼 무력하게 떠나보내지 않을거라고.
이내 레아는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아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너. 갑자기 그걸 묻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만일 시안을 낚아채려는 생각이걸랑, 꿈 깨셔. 아니, 아니다.
레아는 고개를 거세게 흔들며 말을 정정했다.
-대기표 뽑고, 천 년 기다려 이 년아.
“나이 먹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혹시 모르니? 너도 500년쯤 살면···.
“네네. 가슴이 커서 참으로 좋겠네요.”
아리아는 레아의 말을 바로 끊어버렸다.
레아의 표정이 잠시 멍해진 것도 잠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오늘따라 얘가 왜 이래 진짜?
“네가 그랬잖아. 이제 와서 숨길 게 뭐가 있냐고.”
-에휴, 그래라. 뭔데 이 년아. 뭐가 또 궁금한데.
“뮤리엘 있잖아.”
-뮤리엘이 왜.
“사실 카일을 좋아했었지?”
-그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야?
레아는 진짜 무슨 개소리를 하냐 싶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질문이었으니까.
예상은 커녕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왜 답이 없어?”
-말 같지도 않은 걸 물어봐야지. 아니,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보는 건데?
“궁금하니까. 그래서 뮤리엘은 카일을 좋아했어? 안 좋아했어?”
독촉하는 아리아의 물음에 레아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이걸 대답을 해야하는지가 의문스러웠다.
오늘따라 아리아, 이 년이 왜 이런단 말인가.
레아는 말없이 아리아를 바라봤다.
아리아 또한 그런 레아를 말없이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레아는 굳게 다문 입을 끝내 열어보였다.
-직접적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 하지만 여자의 직감이라고 해야할까.
“그건 뮤리엘도 카일을 좋아했다는 뜻?”
-아마.
“어쩐지.”
아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못 봐서 그러는데. 카일은 어떤 여자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었어.
“네네. 그러시겠죠.”
-이 년이 진짜라니까. 아니,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고작해야 20년 넘은 네가 천 년전의 일을 어떻게 알아?
“여자의 직감.”
-······
“아니면 내가 정말 뮤리엘의 환생일지도 모를 일이지.”
아리아의 말에 레아는 그만 표정이 벙, 쪄버리고 말았다.
그런 레아의 모습에 아리아가 푸흡,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동안 네가 나한테 한 행동을 생각해봐. 견제란 견제는 엄청 하더구만. 그럴 때마다 뮤리엘이 어쩌고. 뮤리엘이 저쩌고.”
-네가 뮤리엘이랑 좀 닮아야 말이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뮤리엘은 같은 여자가 봐도 진짜··· 진짜 너어어무 예뻤어.
“나보다?”
-그래, 너보다 더.
“뭐야. 나랑 닮았다면서 어떻게 나보다 예쁠 수가 있어?”
-뮤리엘은 얼굴만 예쁘지 않았으니까. 성격이 누구와는 달리 자애로운 성녀이자 여신이었다니까? 특히나 눈웃음을 지을 때는 진짜···.
내가 남자였다면 막, 막 그냥···.
레아는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소리쳤다.
“어째,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누구라고는 말 안했는데 왜 찔리는 지 모르겠네?
아리아와 레아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이번엔 아리아가 먼저 금방 표정을 풀어보였다.
“하지만 결국 네가 이겼잖아.”
-내가 이겨? 뮤리엘을?
“카일과 약혼했었다며. 그럼 뭐, 끝난 싸움이지.”
-그러면 뭐하니. 정작 결혼도 못하고 카일은 떠나갔는데.
레아는 살짝 침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레아의 모습에 아리아는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으며, 다시 한 번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다시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누누히 말하지만, 난 뮤리엘이 아니야.”
-누가 뭐래?
“그러니 뮤리엘과는 다를거야.”
그리고는 휙, 하니 떠나가는 아리아였다.
백금발을 찰랑거리며 도도하게 걸어가는 것이 참···.
-저 년이 진짜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래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다.
레아는 그렇게 떠나가는 아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렇게 멍하니 또 말없이.
떠나가는 아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 옛날 생각나네.
레아는 아련하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담긴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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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성 Lv.4에 위치한 시안의 집무실.
“여기, 말씀주신 엘란두르에 관련한 자료들입니다.”
시안은 다이애나가 건네는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다름 아닌 엘란두르가 음지에서 행한 일들을 정리한 보고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시간이 걸릴 줄 알았거늘.
다이애나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었다.
“수고했어. 길드원들이랑 아이들은?”
“원하는 자에 한하여 루벤으로 데려왔습니다.”
“문제는 없었지?”
“네.”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안은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신원 검사를 했을라고.
“그레이슨에게 이미 말해놨으니까, 아이들 데리고 가면 안내해줄거야.”
루벤의 영지민들 중 인간들을 대표하는 그레이슨.
그림자 달의 길드장인 다이애나는 수인족이었다.
그러나 다이애나 밑에 있던 길드원들과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인간들이었다.
같은 루벤의 영지민이지만 종족마다 살아가는 환경은 달랐다.
그리고 루벤에도 고아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고아원과 관련한 시설들 또한 잘 구비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시안이 잘 현질해둔 상태였다.
“관련해서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한스에게 말하면 처리해줄거야.”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
다이애나는 진심을 담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시안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두툼하다 못해 전문 서적과도 같은 보고서.
“이게 엘란두르들이 행한 일들이란 말이지.”
시안은 한장, 한장 보고서를 넘겨가며 그 내용을 확인했다.
워낙에 빼곡히 적혀있는 탓에 그 내용을 온전히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흘겨보는 눈으로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살인, 비리, 횡령, 납치, 고문, 폭행, 감금, 절도··· 참 많이도 해먹었다.”
대상은 평민들부터 시작해 귀족까지 신분을 막론했다.
그 건수만 무려 1,472건에 달했다.
많을 것이라고는 예상은 했다만 예상보다도 훨씬 많았다.
심지어 듀라크가 가주가 된 이후부터 정리된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사벨이 엘란두르의 내정을 총괄하게 된 이후부터 집계된 일들.
듀라크는 그 이후로 가문의 일에 손을 떼다시피 했다.
한 마디로 이사벨이 저지른 범행 건수만 1,472건이라는 말이었다.
“암흑가의 범죄 도시는 베네르가 아니라 엘란두르였구만.”
이 정도면 악마와 결탁했다는 사실조차 애교 수준으로 보일 정도였다.
“핵심은 이사벨이었던 건가.”
그리고 사실상 엘란두르라 할 수 있었던 존재가 바로 이사벨이었다.
결국, 이사벨을 잡아야만 엘란두르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증거가 이리 명백했으니 남은 건 하나.
황궁으로 가서 황태자와 의논할 일만 남아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수고했어 다이애나.”
그렇게 시안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다이애나의 분위기가 살짝 이상했다.
뭔가 싶은 생각도 잠시.
“저···.”
다이애나가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꺼내왔다.
상당히 고민하는 표정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걸 말해야하나. 정확히는 말해도 되나.
다이애나는 심히 고민하며 섣불이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심히 궁금했지만 시안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다이애나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다이애나가 품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보였다.
시안은 종이를 받아들었고, 받아든 종이는 앞선 보고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엘란두르가 저지른 수 천개의 만행들 중 하나.
그 하나의 사건이 적힌 보고서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 왜 따로 챙겨서 보여주는 걸까.
시안은 그 보고서를 차분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
다이애나가 왜 그렇게 주저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은 단순했다.
십 수년 전, 엘란두르에서 그림자 달에 독(毒)의 구입을 희망했다.
희망하는 독의 유형은 두 가지.
흔적이 남지 않는 독(毒).
추적이 불가할 정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독(毒).
그림자 달은 끝내 조건에 맞는 독을 구해다 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림자 달과 엘란두르의 거래는 끝이 났다.
하지만 정보 길드 답게 호기심을 참지 못했던 것일까.
그림자 달은 엘란두르가 그 독을 어디에 사용했는지를 조사했다.
그 목적과 의도가 수상한 요구였으니까.
그리하여 보고서 마지막에 적혀있는 독의 사용처.
[세실이라는 여인에게 사용된 것으로 사료됨.]
짧디 짧은 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엘란두르를 확실히 조사할 수 없었던 것일까.
추측성 또한 깃들어있는 문장이었다.
“······”
그러나 시안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보고서에 적힌 세실이라는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시안의 어머니였으니까.
따라서 이 보고서의 내용은 단순했다.
시안의 어머니, 세실은 독살 당했다.
의뢰인은 이사벨로서, 이사벨이 세실을 독살했다.
그리고 그 독을 구해다준 것이 바로 그림자 달 길드.
“죄송합니다··· 영주님.”
지금, 눈앞의 다이애나였다.
다이애나는 어느샌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안은 보고서를 내려보이며 무릎을 꿇은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이걸 왜 내게 알려주었지?”
그리고 물었다.
“숨길 수 있었다면, 숨길 수 있었을텐데.”
맞는 말이었다.
다이애나는 이 사실을 충분히 숨길 수 있었다.
보고서를 시안에게 건네지 않았으면 되었으니까.
혼자서 보고서를 폐기하고 그렇게 입을 꾹, 다물면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사실이었다.
“숨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수인족의 왕국에서 시안이 보여준 모습 때문일까.
엘란두르와의 전쟁에서 시안이 보여준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루벤의 영주로서, 보여준 시안의 모습 때문일까.
모르겠다.
다이애나는 그저.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시안을 속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이애나는 말없이 무릎을 꿇어 앉았다.
그 어떤 책망도 받겠다는 듯, 죽음을 각오하고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
묵직한 침묵이, 시안의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침묵을 비집으며 시안이 집무실의 탁자에서 일어났다.
터벅, 무릎을 꿇고 있는 다이애나 앞에 서 보였다.
그와 동시에 파직─! 시안의 손에서 흑뢰(黑雷)가 튀어올랐다.
어느덧 쥐어진 멸살의 검에 쐐액!
말 그대로 벼락같이 멸살의 검이 다이애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멸살의 검은 순식간에 다이애나의 목덜미에 닿았다.
서늘한 검날이 목덜미를 파고들며, 붉디 붉은 선혈이 다이애나의 하얀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이애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항할 수 없었을 뿐더러, 저항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우뚝, 멸살의 검이 일순간 멈춰섰다.
뚝, 뚝. 흘러내리는 핏방울.
멸살의 검은 다이애나의 목덜미를 조금 파고든 상태에서 멈춰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목이 잘릴 것만 같은 살벌한 곳.
그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며 멸살의 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살며시 눈을 떠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싸늘한 시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이 검으로 너를 죽인다면.”
이윽고 들려오는 시안의 말.
“그건 내가 죽인 것일까. 아니면 내 손에 쥐어진 멸살의 검이 널 죽인 것일까.”
다이애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입을 자체를 열 수가 없었다.
말을 하고자 조금이라도 입을 연다면.
목구멍의 성대를 약간이라도 움직인다면.
그대로 목이 베어져나갈 것 같았으니까.
“대답해.”
“여, 영주님··· 입니다.”
그러나 재촉하는 시안의 말에 다이애나는 끝내 입을 열었다.
역시나 멸살의 검이 다이애나의 목덜미를 더 파고 들어왔다.
그에 따라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더 짙어졌다.
달빛은 품은 다이애나의 은발은, 어느덧 피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시안의 물음에 대한 다이애나의 답.
당연하게도 그건 시안이 죽인 것이다.
멸살의 검은 어디까지나 검이었을 뿐이니까.
검 스스로가 다이애나를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검을 휘두르는 자가 있어야만.
검을 휘두른다는 의지가 있어야만.
비로소 살인이라는 행동이 이루어진다.
검은 단순히 도구일 뿐, 행동의 책임은 오롯이 사람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대체 왜···.
“마찬가지야.”
이윽고 시안이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다이애나, 넌 지금 내 손에 쥐어진 멸살의 검과 다를 바 없었어.”
시안의 시선은 다이애나가 아닌, 멸살의 검에 닿아있었다.
“그 검을 쥐고 휘두른 건, 이사벨이었고.”
그림자 달이라는 검을 쥐고 휘두른 것.
검자루를 손에 쥐고 휘두른 것은 이사벨이었다.
그렇기에 세실의 죽음은, 이사벨의 잘못이다.
결코 휘둘러진 검에게 잘못을 전가할 수는 없었다.
검으로 살해를 당했다고 하여, 검을 만든 대장장이의 탓을 할 수 없듯 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시안의 책임도 없잖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실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
천하의 둔재라는 사실. 듀라크의 눈에 들지 못했다는 사실.
그로써 가문에서 버림받아야만 했다는 사실.
시안이 가문에서 버림받지 않았더라면 세실은 죽지 않았을테니까.
이사벨이 쉽사리 세실을 건들지 못했을테니까.
그러나 그건 말도 안되는 억지다.
어줍잖은 자책이자, 어떤 의미로는 오만이다.
사람이 사람을 살인함에 있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사람을 죽인 살인자뿐.
“그 외에는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서걱─!
섬뜩한 절삭음이, 다이애나의 귓가로 들려온다.
다이애나는 시안이 검을 휘둘렀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시야 아래.
다이애나의 은발이 흩뿌려지듯 떨어져내릴 뿐이었다.
잘려져 단발이 된 다이애나의 은발은 달빛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져 내린 은발은, 피로 물든 적월(赤月)을 품고 있었다.
“너는 루벤의 정보부장이자, 루벤의 영지민이야.”
시안은 멸살의 검을 흩어버렸다.
“나는 루벤의 영주고.”
다이애나를 바라보며, 시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루벤의 영주로서, 세실의 아들로서.”
그리고 루벤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으로서.
비록 듀라크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피가 이어져있던 가족에게는 정작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너를 용서해.”
시안은 다이애나를 용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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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가 떠나간 시안의 집무실.
시안은 집무실 창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다이애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단발이 된 다이애나 모습.
그 모습은 상당히 낯설지만서도 꽤나 어울렸다.
그리고 바라보는 다이애나의 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시안이 용서를 한다고는 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일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그렇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다이애나에게도 그리고 시안에게도.
시안은 가만히 떠나가는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사실··· 시안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눈치를 채고 있었다고 함이 정확하겠다.
이사벨이 세실을 죽였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물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세실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또한 엘란두르 내에서도 세세한 수사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한낱 평민의 죽음.
그저 그 정도로만 여길 뿐이었다.
어린 시안은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리를 높여 저항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한스만이 소리 높여 목소리를 내었지만 역시나 묻힐 뿐이었다.
세실의 죽음은 그렇게 덮어졌다.
그러나 시안은 이사벨이 세실을 죽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최소한으로도 연관은 있을 것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이사벨이 직접적으로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듀라크로서 모든 과거를 끊어냈다고 생각했건만···.
“내게도 아직 남아있는 과거가 있었던 건가.”
이사벨이라는 악연의 과거.
시안은 내려앉은 눈으로 저 멀리, 사라지는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다이애나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림과 동시에 시안 또한 창밖에서 시선을 돌렸다.
“······ 에이.”
그리고 엉켜있던 생각을 떨쳐버렸다.
지금은 한낱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어찌 한낱 감상일 수 있겠다만···.
솔직히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다.
무엇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다.
그 어떤 경우에도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다.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다.
과거에 붙잡혀 있을 때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엘란두르를 무너뜨리고 그리하여 이사벨을 잡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시안이 해야할 일이었다.
그로써 천 년전부터 이어온 싸움.
아르나이즈들과 더불어 시안까지.
끊어내지 못한 마지막 남은 과거를 청산하는 것.
비록 이것이 마지막일지는 모르겠다.
끊임없는 무한의 반복 속, 거쳐가는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안이 할 수 있는 마지막일 것이다.
시안의 세대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일 것이다.
카일이 마주한 진실.
천 년전부터 이어온 악마와의 싸움.
그 마지막이 시작되는 곳, 황궁.
“가볼까.”
시안은 천천히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