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82화 (282/322)

282화 - 끝나지 않은 과거(1)

쾅! 콰콰쾅!!

전장을 뒤덮는 끔찍한 폭음.

“끄아악!”

“사, 살려줘!!”

폭음을 뚫고 수많은 비명들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그 비명은 오롯이 엘란두르의 병사들에게서 터져나왔다.

자그마치 27만의 병사들에게서 터져나오는 비명.

아니, 이제는 27만이 맞는 건가.

전황을 지켜보던 엘란두르의 가신들은 모두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누가 봐도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들어있었다.

지평선을 뒤덮던 강대한 대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의 왕국에 준하며, 가히 제국을 향한 반역조차 떠올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콰콰콰쾅!

콰아아앙!

그러나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엘란두르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같은 수 십만의 병력이 아니었다.

제국의 힘도 아니고, 왕국의 힘도 필요치 않았다.

고작 수 천.

일개 백작령 규모조차 되지 않는 수 천의 전력.

아무리 잘 쳐줘도 5천을 넘지 않는 루벤의 전력.

30만의 대군이 고작 5천도 채 되지 않는 전력을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도학 병기가 통하지 않는 루벤의 방벽.

방벽 안 쪽에서 날아드는 괴랄한 공성 병기.

전장을 휘젓는 말도 안되는 이상한 전차.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화살의 소나기.

전방위를 초토화 시키는 마법들의 향연.

하나의 존재가 능히 일개 군단과 맞먹는 데스 나이트 그리고 원귀.

그렇기에 이건 루벤이 죽음을 부르짖는 결사의 항전가 아니었다.

처절함? 절박함?

사지가 잘림에도 달려드는 악독함?

아니,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이길 수 없어··· 이길 수 없다고.”

“도, 도망쳐!”

압도적.

루벤은 압도적으로 엘란두르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루벤의 힘에 엘란두르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런···.”

“에런 단장은. 에런 단장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 부사령관인 에런은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럴 수록 병사들을 다독여 지휘를 해야하건만.

에런은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부사령관인 에런마저 부재 중인 상황.

계급에 따라 다음 통솔권자는 다름 아닌 엘란두르의 가신들이었다.

그리고 엘란두르의 가신들은 한 두명이 아니었다.

엘란두르 산하, 16명의 남작과 9명의 자작.

대다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남은 수는 많았다.

그 때문일까.

“후퇴해야하오! 지금 당장 후퇴해야하오!”

“말도 안되는 소리! 아직 우리 병력들이 건재하오!”

명령이 하나로 모이질 못하고 나뉘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령관. 다수의 머리.

그것은 곧 내부의 분열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소리요! 이대로 궤멸할 때까지 싸우자는 거요!?”

“조금만 더 버티자는 말이외다! 루벤도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하오! 이대로 물러나면 애써 타격을 줌에도 회복할 시간을 주게 되지 않소이까!”

“대체 언제까지 버티자는 말이오! 이러다 우리가 다 죽소이다!”

어느 것 하나 엘란두르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도 승리의 징표가 보이질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전장의 판도를 뒤엎을 방도는 딱 하나.

“가주께서는. 가주께서는 어디 계시지?”

엘란두르의 가주, 듀라크 엘란두르.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듀라크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듀라크는 시안과 격렬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가주께서 시안 백작을 잡을 수만 있다면···.”

루벤의 총사령관, 시안을 잡으면 끝난다.

이 불리한 전황을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었다.

듀라크는 대륙 제 1의 검이자 이 대륙의 절대 강자.

높은 확률로 이 전장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다.

······ 라는 생각이 떠오르던 찰나.

사아아아아─!

일순간 사방으로 짙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원체 어둠으로 물들어있던 어둠의 숲이었다.

그러나 어둠에 어둠을 덧칠하듯, 칠흑의 어둠은 어둠의 숲 전체를 감싸안았다.

쿠구구구구구궁─!

그와 동시에 공간 전체가 크게 떨려왔다.

떨리는 공간 사이로 어떤 흉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끄윽···!”

“아으윽···!”

가신들의 입에서 격통 어린 신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공간을 장악한 존재감에 전신이 짓눌리는 것만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비단 가신들 뿐만이 아니었다.

“허헉···! 커헉···!”

“하흑···!”

수 십만에 달하는 엘란두르의 병력들.

그들 모두가 짓눌리는 존재감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엘란두르의 병사들이 하나같이 숨을 헐떡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수준이 되는 병사들은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버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터벅.

조용한 발걸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전장 사이를 가로지르며 나지막히 울려퍼져나갔다.

그러나 발걸음이 이어질 때마다.

전신을 내리누르는 존재감이 더욱 거세어졌다.

“커흑···!”

“컥···!”

정신이 점멸하며 의식이 저만치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신들은 힘겨운 시선을 들어보였다.

이를 까드득, 깨물며 이 기운의 정체를 확인했다.

흐릿한 시야로 보인 것은 한 명의 인간.

그리고 두 마리의 어떤 형상이었다.

칠흑의 어둠 사이를 거니는 루벤의 총사령관.

거칠게 포효하는 흑사자.

만물 위에 군림하는 드래곤.

시안은 전장 위를 군림하듯 걸음을 내딛었다.

가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계속해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엘란두르의 그 누구도. 움직임을 내보일 수 없었다.

전장을 압도하는 단 한 명의 존재.

그렇기에 저 존재를 대적할 수 있는 이 또한 단 한 명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듀라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듀라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안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계속해서 엘란두르 내부를 휘저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듀라크가··· 패배했다.

엘란두르의 총사령관이, 루벤의 총사령관에게 패배했다.

물론 총사령관이 당했어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전투와 전쟁은 달랐으니까.

그러나 여기 모인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투와 전쟁.

그 어느 것하나 엘란두르의 승리는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이 힘. 이 존재감.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시안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그렇게 시안이 엘란두르의 가신들 앞에 서 보였을 때.

수 백년의 아성(牙城).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모두가 고개를 젓던 불가능함이.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강대함이.

땡그렁.

털썩.

루벤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

루벤과 엘란두르와의 전쟁.

대륙의 모든 이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루벤의 패배를 점쳤던 말도 안되는 전쟁.

그러나 정작 들려온 소식.

“루, 루벤이··· 루벤이 이겼다고···?”

그것은 대륙과 세상 전체를 발칵, 뒤집어버렸다.

“무슨 소리야 그게? 루벤이 이겼다니?”

“루벤이 엘란두르를 꺾었다는 말이야?”

“말도 안되는 소리를.”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함이 정확했다.

이건 말이 안된다는 말조차 말이 안되었으니까.

30만 대군. 엘란두르라는 이름.

여기에 무슨 부차적인 설명이 더 필요할까.

애초에 승패 자체가 정해진 전쟁이었다.

그런데 들려온 소식은 그 예상을 아득히 빗나가고 있으니.

“적당히 하게. 적당히.”

“아니, 진짜라니까!”

“어허! 더 이상으로 말을 꺼낸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가만히 있지 않곘네.”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루머도 그럴 듯해야 루머라는 이름이 붙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이번 소식의 불씨는 크게 확산되지 못하고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소식의 불씨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자그마한 불씨는 끝내 거대한 화마로 피어올랐다.

[엘란두르의 30만 대군 궤멸]

[루벤의 피해 전무(全無)]

대륙과 세상을 강타한 충격적인 소식.

“······”

“······”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없이 숨길 수 없는 경악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이,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어딜 가나 관련한 내용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숨길 수 없는 경악을 드러내었다.

그렇기에 가히 대륙 전체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결과.

그 중에서도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이것.

“루벤의 피해가··· 전무하다고?”

전무(全無)한 루벤의 피해.

보통 전쟁의 피해를 상정할 때, 전무(全無)라는 표현은 절대 쓰지 않는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 엘란두르의 30만이라는 대군.

그 대군 중 1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가정하자.

이 또한 실로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기에 전무(全無)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피해가 미미하다. 혹은 경미하다.

이렇게 표현할 뿐이었다.

전무(全無)란 문자 그대로 완전히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단 한 명의 사상자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전쟁에서 그러한 일은 결단코 불가능했다.

확률로만 따지면 0%였다.

0%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0%.

존재하지 않는 확률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들려온 소식은 전무(全無).

“······”

“······”

대륙 전체가 경악으로 뒤덮인 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역시나 드래곤 장비로의 무장.

드래곤 본으로 만든 검은 오러 블레이드 급의 절삭력을 지녔다.

드래곤 피부로 만든 방어구는 오러의 타격조차 막아내는 내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런 훈련조차 하지 안은 평범한 이를 오러 유저급의 기사로 만들어버리는 드래곤 장비.

그런 드래곤 장비를 모두 보급받은 루벤의 전력.

그야 말로 대륙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무(全無)한 피해는 불가능했다.

전쟁에는 눈먼 화살이라는 것이 있었고.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

그렇기에 루벤의 피해가 전무(全無)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③<뮤리엘의 성소 > (1,500,000 M)

[건설 효과] - 영지 내, ‘치료 상태’에 있는 영지민들은 죽음에 이르지 않습니다.

.

.

150만 마일리지에 달하는 <뮤리엘의 성소>.

그 성소의 사기 적인 효과.

물론 어디까지나 ‘치료 상태’ 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었다.

또한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 치료 상태의 조건을 충족시키기란 불가능한 일.

그러나 전쟁터가 루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루벤에는 세계수, 인스티즈가 자생하고 있었으니까.

생명의 나무라 불리는 세계수, 인스티즈.

인스티즈는 그 위명에 걸맞게 무수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뮤리엘의 성소>와 맞물린 효과는 이것.

〈영지 내, 모든 생명체들의 회복 속도가 +7,000% 상승합니다.〉

세계수, 인스티즈의 가호 아래 모두 치료 상태에 있는 효과나 다름 없었다.

그로써 사망자는 전무(全無).

목숨이 위험한 중상자들은 모두 병동으로 옮겨져 무사히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륙의 사람들이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전무(全無)한 피해라는 사실 뿐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그게 무슨···.”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대륙을 강타한 경악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그 경악이 가리키는 진실은 두 가지.

루벤의 승전.

그리고 대륙 제 1의 검이 무너졌다는 것.

이 대륙의 절대강자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대륙 전체가 발칵, 뒤집혀진 가운데.

어둠의 숲에 위치한 루벤.

시안은 가만히 시선을 들어 루벤의 풍경을 바라봤다.

전쟁의 여파로 인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루벤의 방벽 안쪽으로는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루벤 주위의 풍경.

어둠의 숲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있었다.

솔직히 어둠의 ‘숲’이라는 말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이제는 어둠의 ‘평야’라고 하지 않나 싶을 지경이었다.

시안은 그런 어둠의 평야를 가만히 바라봤다.

병사들은 전쟁의 후처리로 인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단 병사들 뿐만 아니라 루벤의 영지민들 모두가 나서고 있었다.

잔해를 치우고, 뒤집어진 땅거죽을 메우고.

피로한 사람들의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안도감과 일말의 기쁨이 깃들어있었다.

전쟁에서의 승리.

어찌 환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안은 그런 루벤의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을까.

뒤 쪽에서 문득,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감각으로 느끼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니,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몸이 알아서 반응하기도 했거니와.

“여기서 뭐해?”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청순한 목소리는 누군지 뻔했으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나.

시안을 이렇게 편하게 부르는 이는 한 명밖에 없을테니까.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백금발의 여인, 아리아가 시안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바라본 아리아의 얼굴은 정말이지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새하얀 피부 위로 다크 써클이 내려앉아있었고.

찰랑거리던 백금발은 푸석해져있었다.

신성력으로 인해 굳이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아리아였건만, 알게 모르게 이번 전쟁으로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 같았다.

아리아는 시안의 옆에 자리해보였다.

“괜찮아?”

그리고는 다짜고짜 시안에게 물었다.

무엇이 괜찮냐는 말도 없이, 아리아는 시안에게 물었다.

시안은 그저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괜찮지 않을게 뭐가 있어. 우리가 이겼잖아.”

“뭐, 그건 그렇지.”

아리아는 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푸석해진 아리아의 외모였건만, 아리아의 미소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시안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아리아 또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안과 아리아는 서로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전쟁의 후처리를 하고 있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있잖아. 너를 잘 몰라.”

아리아가 뜬금없는 말을 꺼내왔다.

시안은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아리아를 바라봤다.

“엘란두르에 있을 때의 너를 말이야.”

그러나 아리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안이 아닌 앞선 풍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생아니, 천하의 둔재니. 그런 말은 들었지만 자세히는 몰라. 그때 당시 네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어떤 고통을 겪어왔는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은 생각도 잠시.

“나는 신성 제국의 성녀야.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있었지.그래서 너처럼 역경과 고난 같은 것은 없었어. 언제나 떠받들어졌거든. 지난 번에 내가 성녀 따위는 별로 바라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아리아는 잠시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다른 이가 듣는다면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겠지. 그건 나도 인정해. 내가 성녀로서 받아온 것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사실 난 더 무서웠던 거 같아.”

아리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내 본 모습을 알면, 나에게서 성녀라는 껍데기를 벗겨내면. 그래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줄까. 떠받들어줄까. 너도 알다시피··· 내 성격이 썩 좋지는 않잖아.”

“알고는 있네?”

“······ 야, 이럴 땐 아니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냐.”

아리아는 서운한 듯 입을 비죽거렸고.

시안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리아는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내가 버려질까, 그것이 매번 두려웠어. 그래서 더욱 내가 아닌 성녀로서 살아왔던 거 같아. 무너지지 않도록. 무너진 내 모습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지 않을 테니까.”

“한 편으로는 무너지고 버려진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위안을 삼은 적도 있었어.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을 보면서 힐난하며 위안을 삼기도 했었어. 그리고 나는 저렇게 무너지면 안돼. 라며 내 자신을 더욱 다독였었지.”

그렇게 아리아는 아리아가 아닌 성녀로서 살아갔다.

천성과 다름에도 고결함이라는 가면을 쓰며 살아왔다.

그런 의미로.

“여기 루벤은 참 이상했어. 여긴 다들··· 뭐랄까, 나사가 하나씩들 빠져있었거든.”

아리아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이들이었지.”

인간들은 엘란두르로부터.

드워프들은 같은 동족으로부터.

다크 엘프는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수인족들은 역사로부터.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루벤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어. 사람들에게 버려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곧 그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지.”

아리아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따라가 바라본 시선에는 전장의 후처리를 하고 있는 루벤의 사람들이 비쳐보였다.

고되고 피곤에 찌든 얼굴.

그러나 그 속에 깃들어있는 기쁨.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 버려진 모습들이 너무도 좋더라고.”

버려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 모습이.

무너져도 다시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 버려져도 괜찮구나. 무너져도 괜찮구나.”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버려져도, 무너져도 이렇게나 행복할 수 있구나.

“난··· 그 동안 사람들에게 버려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는데 말이야.”

그렇게 악착같이 성녀로서 살아왔었다.

사람들에게 버려지지 않고자 가면을 쓰고.

무너지면 안된다고 다독이며 불안에 떨었다.

그런데 정작 아리아가 본 루벤.

정작 무너지고 버려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곳.

여기 루벤의 영지민들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았는데.

모두가 나사 하나씩 빠져 망가지고 무너진 것 같은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뭐야.”

이리도 행복할 수가 있구나.

“난 있잖아. 여기 루벤이 좋아. 이곳에 있으면, 무너지고 버려져도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거든.”

성녀로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성녀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져도 된다.

성녀, 아리아가 아니어도 된다.

아리아 리뉴 사피에르 라는 여자로서 살아도 된다.

버려지고 무너져도.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누구든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여기, 루벤이라는 영지가 바로 그 증거.

이윽고 아리아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난 잘 몰라. 엘란두르에 있을 때의 너를.”

그렇게 아리아는 시안을 똑바로 마주 바라봤다.

“네가 저번에 나한테 말했었지. 듀라크는 너의 아버지이고, 너라는 사람의 시작점이라고.”

그리고 시안은 그런 듀라크를 베어내었다.

시안의 아버지이자 시안이라는 존재의 시작점을 베어내었다.

그렇게 시안은 자신의 시작점을 베어내었다.

시안이라는 존재의 뿌리를 뽑아내었다.

괜찮을거라 생각했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건만.

“······”

시안은 왜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에 휩싸여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는 그런 시안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아니, 아리아가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야. 너의 시작은 듀라크가 아니야.”

아리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시안은. 시안 엘란두르가 아니야.”

버려진 자들의 성지, 루벤을 가꾼 이.

무너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이.

“루벤의 영주, 시안 루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시안이야. 그렇기에 네 뿌리는 엘란두르가 아니야. 네 존재의 시작도 듀라크가 아니야.”

시안 루벤이라는 이름.

그 이름의 뿌리와 근원.

“여기 루벤과 루벤의 사람들이지.”

아리아는 그렇게 말을 끝마쳤다.

시안은 그런 아리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리아는 시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평소 티격태격하던 때와는 달리 아리아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아리아의 눈을 바라보다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네가 그런 말하니까 굉장히 어색한데.”

“왜? 내가 뭐 어때서?”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네 성격이 썩, 좋지 못하다고.”

“이씨! 누군 걱정돼서 한 말인데.”

흥!

아리아는 그렇게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찰랑거리는 백금발이 시안의 시야를 어지럽혀왔다.

휘날리는 백금발로 묘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시안은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리아가 이런 말을 해준 이유.

아리아 답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준 이유.

시안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전장을 정리하며 분주히 움직이는 루벤의 사람들.

왜인지, 기분이 홀가분한 건 무슨 이유일까.

공허했던 마음이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는 이유는 대저 무엇일까.

“무엇보다 넌 너무 혼자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 사이로 아리아가 새침하게 말을 걸어왔다.

“힘들면 주위 사람들에게 좀 기대. 정 기댈 사람이 없다 싶으면···.”

나한테 기대도 괜찮고··· 흠.

아리아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며 시선을 흘겨보였다.

시안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넌 신성 제국의 사람이면서 뭔.”

“이럴 땐 그냥 알겠다고 하는 거야!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없어요.”

아리아는 뽀루퉁한 표정과 함께 입을 비죽거렸다.

그 모습에 시안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아리아에게 처음으로.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해보였다.

“······ 응? 뭐라고?”

그러자 아리아가 눈을 크게 떠보이며 물어왔다.

듣지 못했다기 보다는··· 마치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태도였다.

“너 방금,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봐. 응?”

역시나 그런 것 같았다.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이렇게.

엘란두르와의 전쟁은 승리로 막을 내렸다.

듀라크라는 과거의 시작점을 끊어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 있었다.

아직 끊어내지 못한 과거가 있었다.

시안은 터벅, 걸음을 옮겼다.

“야! 갑자기 어디가는데!”

그러자 아리아가 놀라 소리쳐왔다.

시안은 계속 걸음을 내딛으며 답을 해보였다.

“미래.”

“미래?”

역시나 이해하지 못한 듯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안은 그저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끊어내지 못한 과거.

천 년전부터 이어져 온 아르나이즈들의 싸움.

그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악마와 결탁한 엘란두르.

비록 엘란두르는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제국 동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싸움의 끝을 봐야만 했다.

시안은 그렇게 말없이 걸음을 내딛었고.

“그게 뭔 개소리야?”

아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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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동부에 위치한 엘란두르 후작령.

그 후작령에 위치한 엘란두르 저택의 이사벨 집무실.

“설명해라.”

이사벨은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내뱉어지는 이사벨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무뚝뚝함 혹은 냉담함.

이사벨의 말투와 표정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도려내어져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저, 저도 이게 어찌된 일인지···.”

레이첼은 그 어떤 변명의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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