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 전무후무의 전력(1)
카르제의 보물들을 모두 털어낸 이후.
루벤의 모든 인력들은 보물들을 처리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어차피 현질하기 전까지 별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음에도 사실 어디까지나 보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 보물들을 골드로 바꿔야 현질을 하든 뭘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아멜리아가 골드를 벌어와야 다른 일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해서 남녀노소,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가 상업 지구에 투입되었다.
그럼에도 일거리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진짜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100억 골드라니···.’
정녕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단위인가 싶었다.
시안도 수 십억 정도는 거뜬할 것이라 생각 했었다.
그러나 100억 골드가 넘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기사, 카르제님이 모아온 보물이니까.’
욕심 그득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드래곤이, 무려 천 년이란 세월 동안 모아온 보물이었다.
10년에 1억씩만 모아도 100억이었다.
드래곤과 천 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얼추 수긍이 가는 금액이기도 했다..
《깨꼬닥.》
그래도 미친 금액인 건 변함 없었지만.
아멜리아와 함께 정신이 끊어져버린 모바일 영주.
그런데 정작 점검의 알림창은 뜨지 않았다.
저렇게 깨꼬닥, 하는 요상한 알림창만 떠오를 뿐이었다.
아무래도 기절한 척, 수작을 부리는 모양인데···.
어차피 지금 당장 현질할 골드는 없으니 뭐.
시안은 스마트 폰을 다시 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영주성 내 위치한 시안의 집무실.
집무실의 풍경으로 3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수인족의 대족장, 카리스.
루벤의 정보 부장, 다이애나.
드워프의 족장, 세미르.
카리스는 다이애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애나를 바라보는 카리스의 두 눈빛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냐는 듯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다이애나가 카리스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빠랑은 관련 없는 일이야.”
이윽고 다이애나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카리스는 여전히 다이애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래 전, 떠나보내야만 했던 여동생.
이번 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잠시.
다이애나는 말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오랜 만에 만난 가족간의 해후도.
잘가라는 그 흔한 작별 인사도.
그 어느 것도 없이 다이애나는 떠나버렸다.
헌데 지금 시안의 집무실에 다이애나가 떡하니 있으니, 카리스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에 시안이 부차설명을 해주었다.
“다이애나님은 루벤의 정보 부장입니다. 말씀처럼 수인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카리스님의 관할도 아니고요.”
“그 말씀은···.”
“카리스님과 같은 루벤의 영지민이라는 뜻이죠.”
시안을 향하던 카리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윽고 시안을 바라보던 눈빛이 쉼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아니, 루나는 수인족보다는 인간에 가까웠다.
카리스의 여동생으로서 같은 용인족의 혈통이었지만 루나는 용인족의 힘을 잘 발휘하지 못했다.
용(龍)의 특색보다는 인간의 특색이 더 짙게 나타났다.
그래서 수인족들의 사회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언제나 배척되었고,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카리스가 나섬에도 해결할 수 없었다.
루나는 수인족이 아닌 인간과 어울리는 여인이었의까.
결국 루나는 수인족의 사회를 떠났고.
카리스는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그것이 루나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일테니까.
하지만 가슴 한켠으로는 떠나보내지 못했다.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아픔이 카리스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평생을 가도록 만날 수 없음에.
가족을 잃은 아픔은 언제나 카리스를 괴롭혀왔다.
그리고 지금.
비록 같은 수인족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다.
아마 평생을 가도록 같은 수인족이 되지는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같은 루벤의 영지민으로서.
같은 루벤이라는 터전에서라면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
카리스는 시안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말마따나 카리스님과 관련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시안은 그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시안은 시선을 돌려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말입니다. 루벤의 정보 부장에게 한 가지 일을 좀 부탁드려고 합니다.”
“말씀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다이애나의 모습에 시안은 곧장 입을 열었다.
“엘란두르의 뒷조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엘란두르의 뒷조사라면···?”
“음지에서 행해진 엘란두르의 수작들을 의미합니다. 이번 수인족들의 일과 더불어 살인, 비리, 횡령 등등. 양지로 드러나서는 안되는, 엘란두르가 행한 각종 범죄 행각들을 조사해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 감추어진 엘란두르의 행각들.
시안은 그 행각들을 모조리 조사하여 파헤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했다.
엘란두르의 만행을 더 이상 지켜볼 수도 없었거니와.
『[영지 퀘스트] - ‘저 엘란두르, 순 나쁜새끼에요!’
▶장막 속에 감추어진 엘란두르의 진실.
그 진실을 파헤쳐 온 세상에 엘란두르의 추악함을 밝히세요!!』
-보상: DLC 개방.
.
.
다름 아닌 영지 퀘스트.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함도 있었다.
해서 시안은 다이애나에게 그 정보를 부탁했고, 다이애나는 쉽사리 답을 해오지 않았다.
엘란두르의 뒷조사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멀리 갈 것도 없었다.
그림자 달이 엘란두르를 잘못 건드려서 해체 직전까지 몰리지 않았는가.
제국 최고 정보 길드도 엘란두르 앞에서는 한낱 정보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안이 지시한 것은 벌집을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멸문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보아온 루벤이라면, 충분히 뒷감당이 가능할테니까.
무엇보다.
“이미 대다수는 저희가 가지고 있습니다.”
뒷조사가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네?”
“엘란두르가 음지에서 행한 일들. 그 일들을 그동안 누가 처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시안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가의 정점에 올라있었던 그림자 달 길드.
엘란두르가 음지의 행각을 벌일 때,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그림자 달을 이용했다.
애초에 시안의 암살 의뢰도 그림자 달에서 수행하지 않았는가.
물론 모든 의뢰를 그림자 달에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의뢰가 그림자 달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따로 모아놓은 정보가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은 없다는 말씀은 암흑가, 베네르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주시면 그림자 달이 모아온 정보를 가져오겠습니다.”
“음···.”
시안은 잠시 고민했지만 사실 고민할 건덕지도 없었다.
“그러시죠.”
시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암흑가에 가시는 김에, 남겨두신 미련도 같이 가져오시죠.”
그러자 다이애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겨둔 미련이라니?
다이애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안에게 물었다.
“미련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암흑가에 남겨둔 것이 정보만 있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예를 들면 남아있는 길드원이나··· 거둬들인 아이들 같은 경우요.”
그러자 다이애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림자 달의 수장, 다이애나.
그림자 달이 해체 직전까지 몰렸다고는 하나, 해체는 아니었다.
길드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는 하나, 남아있는 이들은 존재했다.
그 험악한 암흑가에서 다이애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나, 다이애나가 거둬들인 아이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여전히 암흑가에 남아있었다.
그건 다이애나의 미련이었고.
또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신원 검사를 해야하긴 해야겠지만··· 뭐, 어련이 알아서 해주실라고요. 제국 최고 정보 길드의 신원 검사보다 정확한 게 어디에 있다고.”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신원 검사만 하시고, 모두 루벤으로 데려오세요.”
다이애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잠깐의 정적.
이윽고 다이애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이애나.”
루나라는 이름이 아닌.
달, 사냥, 순결을 상징하는 이름.
그런 다이애나의 은발은 달빛을 품고 있었다.
“이제는 그림자 달의 길드장이 아니라 루벤의 정보 부장입니다. 그러니 부디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다이애나는 시안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다이애나.”
시안은 그저 작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자, 그럼 이 문제는 해결되었고.”
시안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다이애나 옆, 카리스와 세미르를 바라봤다.
카리스는 다이애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몰랐던 것 같았다.
그림자 달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말이다.
다이애나가 인간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카리스는 잘 몰랐던 눈치였다.
그리고 세미르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안을 바라보는 세미르의 두 눈빛에는 수많은 감정이 얽혀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시안은 모르지 않았다.
“제가 약속드렸잖습니까. 반드시 구해주기로.”
시안의 말에 세미르가 입을 벙긋, 거렸다.
그러나 차마 목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정적이 흐르고.
“기약없는··· 약속이라 생각했었소.”
세미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께서 헬렌을 구해주겠다 약조하셨을 때. 솔직히 기약없는 약속이라 생각했었소.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평생을 기다려도. 내 수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소.”
드워프의 생은 인간보다 기나, 세미르는 늙어있었다.
평균 수명을 따졌을 때 세미르의 남은 삶은 길어야 30년 안팎.
“언젠가 영주께서 헬렌을 구할 수 있다하더라도. 그 시간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소.”
그럼에도 세미르는 기다리겠다, 그리 말했었다.
대륙에 마지막 남은 드워프의 시간은 그렇게 멈춰버렸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고, 그렇기에 한 명쯤은. 한 명쯤은 기다림을 삶보다 길게 남겨놓고 가는 삶도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세미르의 두 눈동자에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곧.
눈동자 안으로 자그마한 무언가가 맺히기 시작했다.
“감사···드리오. 말로는 이 마음을 차마 표현할 수 없음이 한탄스러울 정도로. 나의 그 어리석음이 한없이 원통할 정도로.”
세미르는 시안을 향해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영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오. 정말로···.”
그리고 고개를 숙인 세미르의 얼굴 아래로 툭.
맑고 투명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런 세미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안도 참··· 마음이 밍숭맹숭해져왔다.
비단 지금 세미르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세미르를 비롯한 수많은 루벤의 영지민들.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면 시안은 가슴 속의 무언가가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는 후작가의 둔재, 망나니.
그리고 지금은 루벤의 영주.
괜시리 쑥쓰러워지는 이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괜히 쑥쓰러우니까 고개 드세요 세미르.”
그럼에도 세미르는 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안은 계속해서 세미르를 설득했고, 그렇게 한참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있고서야 세미르는 고개를 들어보였다.
“그보다 세미르. 아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수인족들도 우리 루벤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수인족들이 살아갈 거처를 어찌해야할지···.”
이번에 영지민이 된 수인족들은 거진 수 천명.
당연히 그들이 살아갈 거처를 새로이 지어야했다.
그리고 주거를 짓는 일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질하면 되었으니까.
곧 아멜리아가 벌어올 골드는 그 무엇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
다만, 무분별하게 주거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주거만 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지난 날, 다크 엘프들을 받아들일 때와 똑같은 문제였다.
이종족들은 그들만의 생활 방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다크 엘프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지 않았는가.
해서 시안은 루벤 전역을 싸그리 뒤엎어버려야했다.
다크 엘프들이 살아갈 환경을 개선한 새로운 청사진을 다시 만들어야했다.
그리고 지금.
“확실히··· 영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했소.”
세미르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청사진을 작성한 것 역시 세미르.
다크 엘프 때와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을 세미르는 모르지 않았다.
해서 시안은 세미르에게 새로운 청사진을 부탁하려던 생각이었다.
수인족들도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루벤의 청사진을 말이다.
물론 어마어마한 골드가 필요하겠지만···.
뭐, 어떠한가.
초기화든 뭐든 그냥 현질로 찍어누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청사진을 새로이 작성해달라는 말씀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오.”
세미르는 의외의 말을 꺼내었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지난 번, 다크 엘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청사진을 작성할 당시. 영주께서라면··· 왜인지 데려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소.”
“데려올 것 같다니요? 누구를···?”
“수인족들 말이오.”
세미르는 너털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물론 말이 안되는 생각이었소. 수인족들은 수 백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으니까. 이제는 기록으로서만 남아있는 종족들이니 말이오. 그런 수인족들을 영지민으로 데려온다니. 말이 안되는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미 말이 안되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더구려. 다크 엘프들. 그리고 세계수부터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오. 해서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고 있음에도··· 강행했소이다.”
“그 말씀은···?”
“조금만 수정 작업을 거치면 되오.”
웃음 짓는 세미르의 답에 시안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이윽고 세미르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공간만 마련했다 뿐, 구체적인 사항들을 적용한 것이 아니오. 영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수인족들은 그 속에 다양한 종족들이 있지 않소.”
용인족, 귀인족, 견인족, 묘인족 등등.
수인족 안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있었다.
대충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들의 수만큼 있다 보면 되었다.
그리고 그 동물들은 저마다 제각각의 환경이 있었다.
“그들마다 각기 다른 주거 환경을 일일이 계산할 수는 없었소. 해서 그 사항들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수인족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그러면서 세미르가 카리스를 바라봤다.
“부탁드려도 되겠소?”
“당연히··· 아니, 되려 저희가 부탁을 드려야하는 입장입니다.”
카리스는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안.
이러면··· 굳이 루벤을 뒤엎을 필요가 없었다.
번거롭게 다시 초기화할 필요가 없었다.
한 마디로 현질할 골드를 어마어마하게 아낄 수 있었다.
“역시 세미르.”
시안은 세미르를 향해 엄치를 척, 치켜들었다.
“영주께서 주신 은혜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오. 무슨 일이든, 어떤 일이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시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수행하리다.”
세미르는 결연한 표정으로 답을 해왔다.
어찌나 결연한 지, 시안이 지금 죽으라 명령하면 진짜 이 자리에서 자결할 것만 같았다.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험한 일은 제가 할테니까, 세미르는 그저 남은 생을 헬렌과 행복하게 사시면 됩니다. 설마하니··· 헬렌을 과부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시안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세미르는 그저 고개를 깊이 숙여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세미르.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시오. 무엇이든 할테니.”
단호하게 들려오는 세미르의 답.
시안은 으익,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드래곤의 사체도 다룰 수 있으신가요?”
그러자 뭐든지 하겠다는 세미르의 말과는 달리.
세미르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그저 물음표를 찍는 세미르의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아무래도 시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사, 뜬금없이 드래곤의 사체라니.
심지어 드래곤은 지금 모두 멸종한 상태였다.
아니, 멸종하지 않았다한들 드래곤은 그 육체를 남기지 않았다.
혼(魂)과 백(魄)의 일체.
천 년전에 드래곤은 분명 실존했으나, 현재 대륙에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드래곤 사체를 다룰 수 있냐니?
그런 세미르의 의문도 잠시.
“그러니까 그게··· 아니, 아니다. 직접 보여드리는 것이 빠르겠네요.”
시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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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100M에 이르는 압도적인 크기의 금빛 생명체.
그러나 그 어떤 생명의 신호도 느껴지지 않는.
“맙소사···.”
진짜··· 진짜 드래곤이었다.
세미르는 쩌억, 벌어지는 입을 닫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경악에 경악을 넘은 충격만이 뇌리를 잠식할 뿐이었다.
시안은 그런 세미르를 바라보다 천천히 카르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실, 시안은 카르제의 육체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카르제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카르제의 육체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시안은 굳이 카르제의 육체로 만든 장비, 그러니까 드래곤의 장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일단 노에미의 유산, 소울 오브 드래곤(Soul of Dragon)으로 시안의 신체는 이미 드래곤이나 다름 없었다.
여기에 드래곤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 하트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시안은 이미 완연한 드래곤이나 다름 없었다.
피부 자체가 드래곤 스킨이고.
골격 자체가 드래곤 본이거늘.
여기에 굳이 드래곤의 장비들을 덧댈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애초에 초월 장비의 성능이 더 좋았다.
드래곤 본으로 만든 검보다, 멸살(滅殺)의 검이.
드래곤 스킨으로 만든 갑옷보다, 불멸(不滅)의 갑옷이 더 좋았다.
그렇기에 시안은 카르제의 육체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카르제의 생각은 달랐다.
카르제는 시안에게 자신의 육체를 사용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로써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남겨달라, 그리 말을 남겼다.
해서 시안은 고민을 거듭했고.
끝내 생각한 것은 이것.
현재와 과거, 고금(古今)이라는 시간을 통틀어.
“병사들의 장비를 드래곤의 장비로 업그레이드할까 합니다.”
루벤을 대륙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강의 전력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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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동부, 엘란두르 후작령에 위치한 엘란두르 저택.
그런 저택에서 위치한 듀라크의 집무실.
“루벤을 칠 준비를 하라?”
듀라크는 나지막히 말을 내뱉으며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듀라크의 앞에 서 있는 새햐안 백합을 닮은 머리색의 여인.
“아무래도 이번 수인족의 일도 있기도 하니까요. 이미 성물을 확보한 터라 급할 건 없긴 한데···.”
레이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해보였다.
“황가가 끼어들면 가주께서 곤란하시잖아요?”
듀라크는 레이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내가 왜 네 말을 듣는지 알고 있나?”
듀라크가 툭,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어진 기나긴 정적.
그 정적 속에서 듀라크는 가만히 레이첼을 바라봤다.
이어 정적이 지루함으로 바뀔 때 쯤.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듀라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네 도움은 상당히 유용했다. 허나, 어디까지나 도구로서의 유용함이었다.”
이어진 듀라크의 말에도 레이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듀라크가 한 말.
그 안에 깃든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니까.
쉽게 말해 주제를 알고 설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선을 넘지 말라는 뜻이었다.
레이첼은 속으로 이를 까득, 씹었다.
계획이 틀어져 변동된 지금.
누르비아와 굴네리아가 소멸한 지금.
레이첼은 듀라크에게 대항할 수 없었고.
칼자루를 쥔 것은 엘란두르였으니까.
그리고 레이첼에게 엘란두르의 힘은 반드시 필요했다.
“······ 명심할게요.”
레이첼은 끝내 입을 열었다.
“성물의 해방은. 어떻게 되었지?”
“아직이에요. 아무래도 깃들어있는 힘이 평범한 힘은 아니다보니 시간이 좀 걸리네요. 그래도 곧 완전한 해방을 맞이할 거예요.”
레이첼의 답에 듀라크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집무실의 창문 밖, 보이는 엘란두르 저택의 풍경.
그런 듀라크의 옆으로 총관, 레리트가 다가왔다.
듀라크는 여전히 창문 밖에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모든 가신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려라.”
그리고 이어진 듀라크의 말.
“루벤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때가 되었다고.”
듀라크의 두 눈은, 그 여느 때보다 가라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