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68화 (268/322)

268화 - 끝나지 않은 싸움(1)

건물 안 쪽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아리아의 외침.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가 성큼거리며 튀어나왔다.

카르제의 둥지에서 돌아온 직후 어디갔나 했더니.

여기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그 상태로 들어오려고?”

아리아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왜?”

“왜냐니? 그걸 몰라서 물어?”

그러자 아리아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시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1층이잖아.”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야?”

아리아는 정말이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걸 보고 그런 소리가 나와? 여기 건물 죄다 무너뜨릴 일 있어?”

그러면서 시안 뒤쪽의 풍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아리아의 손가락을 따라 돌아본 곳.

그곳엔 거리 곳곳마다 박살이 나다못해 뒤집혀진 땅거죽을 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시안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행해진 일이었다.

인벤토리에 담겨있는 카르제의 보물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탓.

루카스는 몸무게가 드래곤이 되었냐고 물었지만 아리아는 알고 있었다.

카르제의 둥지에서 직접 저 광경을 봤으니까.

왜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리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1층···.”

“됐고. 그거 여기다 두고 들어와.”

“뭐? 안돼!”

아리아의 말에 시안은 허리춤의 인벤토리를 손으로 감싸안았다.

눈을 홱, 치켜뜨며 무슨 일이 있어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관철시켰다.

“······”

아리아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짜 얘는 참···.

돈만 관련되면 왜 이러나 모르겠다.

어떨 땐 세상 그 어떤 이보다 믿음직스럽다가도.

이렇게 돈만 관련되면 아주 생떼를 쓰는 어린 아이가 되어버렸다.

아니, 생떼만 쓰면 다행이게?

아주 그냥 한 대 줘패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패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울화통이 치미는데 큰 몫을 했다.

지금 느껴지는 시안의 존재감.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시안을 패버릴 수 있을까.

아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걸 누가 가져간다고 그래? 아니, 가져갈 수는 있대?”

농담이 아니라 그냥 줘도 가져갈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저 무게를 들고도 움직일 수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져갈 수 있지. 넌 물욕을 잘 모르는 사제라서 모르겠는데, 이 세상은 돈이면 그 어떤 불가능도 다 가능해.”

그런데도 저러고 있으니 원.

뭐, 사제라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 저건 그런 개념이 아니지 않나?

진짜 돈만 관련되면 왜 이러나 싶었다.

“아무튼. 그거 매달고는 못 들어오니까. 그렇게 알아.”

“뭐? 그걸 왜 네가 결정···.”

“내가 여기 환자들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시안은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책임자가 그런다는데 무슨 토를 달까.

솔직히 따지고 들면 아리아의 말이 틀리도 않았다.

“제가 여기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영주님.”

그러자 옆에서 루카스가 말해왔다.

이쯤되면 고집을 피우는 것도 좋지 않았다.

“······ 알았어.”

시안은 불멸의 갑옷에 매달은 인벤토리를 바닥에 떨구었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앙!!

지면이 통째로 주저앉아버렸다.

“······”

“······”

아리아와 루카스의 표정이 그대로 붕 떠버렸다.

대체 얼만큼의 무게길래 저러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저걸 들고 멀쩡이 움직였다고?

특히나 루카스는 이걸 지킬 필요가 있나···?

아주 심히 의심이 들 뿐이었다.

#

건물 안으로 들어온 시안은 왜인지 발걸음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한 느낌이었다.

모래 주머니··· 아니, 보물 주머니를 풀어헤치니 정말 세상 살 것 같았다.

“후우! 살 것 같다. 빨리 현질해서 없애버리든가 해야지 원. 무겁기는 엄청 무겁네.”

“그러게 진즉에 두고 다니면 좋았잖아.”

“무슨 소리. 그러다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거기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넌 알잖아.”

“아니, 그러니까 그걸 대체 누가 훔쳐간다고 그래?”

아리아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보다 너는 그걸 대체 어떻게 들고 다니는 거야?”

“못 들건 뭔데.”

“그야 당연히··· 아니, 아니다.”

아리아는 그냥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더 이상 따지고 들어봤자 머리만 아플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깨어난 두 사람 보러 온 거지? 따라와.”

아리아는 그저 걸음을 빨리 해보였다.

시안은 아리아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훑어보였다.

수많은 환자들로 꽉, 들어찬 내부.

얼핏 치료소와 같으면서도 루벤의 치료소와는 달랐다.

일단 현질로 업그레이드한 루벤의 치료소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루벤의 치료소가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정확히는 분위기가 자체가 아예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약초와 소독약의 냄새로 가득한 루벤의 치료소와는 달리, 이곳은 신성의 기운으로 가득차있었으니까.

더 이상 신성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속을 다 게워냈을 터였다.

그런데···.

‘좀 미묘한데?’

그런 것치고도 꽤나 느낌이 묘했다.

보아하니 아리아가 건물 전체에 신성을 부여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그간 아리아에게서 느껴지던 신성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간 아리아의 신성은 반사되는 빛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빛이 직접 내리쬐는 느낌이 들었다.

보다 본질적이고, 보다 강대한 느낌.

그리고 보다 뮤리엘과 가까워진 느낌.

시안은 금방 그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설마··· 신어(神語)를 사용한 거야?”

“역시,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아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시안은 놀란 눈을 떠보이며 물었다.

“그 사이에 사용법을 익혔다고?”

“처음엔 애먹었는데, 원리를 아니까 그렇게 어렵진 않더라고.”

“뮤리엘 이후로 천 년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못했다면서?”

“나는 잘 되더라고. 괜히 내가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는 게 아닌가봐.”

이제는 스스로 인정해버리는 아리아였다.

뭐, 나쁜 의미가 아니기는 했으니까.

“그보다 시간되면 글자 읽는 법 좀 알려줘. 혼자서 해석하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더라고.”

신어(神語)는 무려 천 년전에 소실된 언어이자 글자였다.

글자를 해석하고 읽는 것은 카르제의 유지를 이은 시안만이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아리아가 활용하고 있는 것부터 말이 안 되었다.

그래서 시안은 조금 아쉬울 뻔했다.

“얼마?”

“······ 뭐?”

아리아의 사고가 잠깐 정지했다.

설마설마 하는 것도 잠시.

“선물은 선물이고. 과외비는 별도. 시간 당으로 해서 선제시.”

“······”

“그래서 얼마?”

아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정확히는 아리아의 어이가 하늘 높이 승천했다.

“농담이야.”

하지만 곧 들려온 시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라본 시야로 시안이 피식, 웃음을 짓고 있엇다.

“노, 농담 맞지?”

그때서야 아리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지만 왜일까.

“두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시안이 확답을 해오지 않았다.

마치 말을 돌리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사람처럼 성큼, 앞서가고 있었다.

‘아, 아니겠지. 설마.’

아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 간을 걸었을까.

“저기구나.”

무언가를 발견한 듯 시안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멈춘 시안의 시선으로 세 명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사색에 잠겨있는 헬렌.

그리고 다이애나와 함께 있는 카리스.

확실히, 둘에게서 그 어떤 악의(惡意)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의 정신을 잠식한 군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시안은 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 해서 이렇게 된 거야.”

“그래서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다이애나와 카리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주로 다이애나가 이야기를 하고, 카리스는 그 이야기를 듣는 쪽에 가까웠다.

같은 용인족의 남매라고는 하는데···.

솔직히 생김새로는 전혀 남매 같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의 특색을 지닌 용인족(龍人族), 카리스.

반면에 다이애나는 인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음?”

다가온 인기척에 카리스의 시선이 시안에게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다이애나 그리고 사색에 잠겨있던 헬렌 또한 시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이어진 다이애나의 인사.

카리스가 다이애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분이···?”

“시안 백작님이셔.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해준 사람.”

다이애나의 설명에 카리스가 놀란 눈을 떠보였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하며 입을 열었다.

“다이애나에게 모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인족들을 위해 힘써주신 것도. 그리고···.”

카리스는 차분한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안 안에 깃들어있는 거대한 존재감을 느낀 것일까.

“수호자님의 힘을 계승하셨다는 것까지도요.”

카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다기보다는 할 말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정작 카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했다.

“······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모든 의미를 함축한 듯한 인사.

카리스는 진심을 담아 시안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파벨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저 혼자서 한 일이 아닙니다.”

시안은 멋쩍게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파벨이라면···.”

“귀인족의 장로님 말입니다. 원래는 같이 오기로 했는데, 수인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다고 요 앞에서 헤어졌습니다.”

시안은 작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몸은, 어떻게 괜찮으십니까?”

“예. 덕분에··· 몸 상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카리스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애초에 용인족의 몸이 튼튼하기도 했거니와.

아리아의 신성이 육체의 부상을 모두 치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무리하시면 안됩니다. 아시다시피 정신의 피해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다만, 악마에게 잠식되었던 정신은 필히 회복의 과정이 필요했다.

거기에 진(眞) - 아수라(阿修羅)의 타격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중에서 가장 심각한 이는 따로 있다고 볼 수 있었다.

100년이 넘도록 악마에게 굴복하지 않고 싸워온 여인.

“헬렌님은···.”

“저도 괜찮아요.”

시안의 물음에 헬렌이 미소로 화답해보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 미소에는 힘이 서려있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누르비아에게서 해방된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회복할 터.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저···.”

일순간 헬렌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려왔다.

“그이는··· 아니, 세미르는··· 잘 지내고 있나요?”

헬렌이 떨리는 표정으로 시안에게 물어왔다.

세미르와 헬렌.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으나 악마에 의해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둘.

100년이 넘도록 이어진 기다림.

시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잘 못 지내고 있습니다.”

시안의 대답에 헬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안은 다시 말을 이었다.

“헬렌이 떠나고 지금까지. 세미르는 헬렌만을 기다리며 한시라도 잘 지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자 이번엔 헬렌의 표정이 멍해졌다.

“제 영지민이 매번 울상을 짓는데, 영주로서 가만 두고 볼 수가 있어야죠. 구해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었고. 농담이 아니라 저 헬렌님 구하느라 진짜 고생 많이했습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죽을 뻔했습니다.”

헬렌은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했다.

이어 시안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아뇨. 지금 인사는 받지 않겠습니다.”

시안이 그런 헬렌을 막아세웠다.

“제대로 된 인사는 루벤으로 돌아가 세미르와 함께 받겠습니다. 제 영지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요.”

“아···.”

헬렌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시안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려왔다.

이윽고 작고 투명한 무언가가 헬렌의 눈동자에 맺히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커져가며 또륵.

헬렌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무언가엔 그 어떠한 악의(惡意)가 없었다.

그 어떠한 광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순수함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 감사해요. 정말··· 정말로 감사드려요···.”

헬렌은 그렇게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

소리내어 울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묘해진 분위기.

시안은 손을 휘휘, 내저어보였다.

그리고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그보다 카리스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시안은 카리스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왜일까.

“······”

카리스는 답이 없었다.

다름 아닌 지금 보이는 광경.

악마에게 잠식되었던 헬렌이라는 여인.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떠한 사정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루벤의 영주, 시안.

수인족의 대족장, 카리스.

두 사람은 한 집단을 이끄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현 상황을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헬렌이라는 여인과 했던 약속이 무엇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아마 기약없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아니, 행할 수 없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약속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을 거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으니까.

또한 지키지 않아도 누가 뭐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낱 영지민과의 약속. 그냥 잊어버려도 그러려니 했을 약속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지켜내었다.

잊지 않고 가슴 속에 품어 흘리지 않았다.

반면에 카리스는 지키지 못했다.

악마에게 잠식되어 수인족들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의 시안은.

‘제 영지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요.’

인간들의 대족장은 자신과 달랐다.

“······”

카리스는 굳어버린 듯 멍하니 있었다.

“카리스님?”

“······ 아, 네. 말씀하시죠.”

이어진 시안의 물음에 카리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밀려오는 상념을 떨쳐내며 시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들려온 시안의 물음.

“어쩌다 악마에게 잠식되신 것입니까?”

수인족들의 사건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아직 모든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루벤은 여전히 엘란두르와 전쟁 중이었고.

또 두 군주를 소멸시켰다고는 하나 성물은 빼앗겼다.

무엇보다 언제고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악마 군주들.

이 끝나지 않은 싸움을 시안은 다시 이어가야만 했다.

시안의 물음에 카리스는 잠시 생각을 해보였다.

그리고 금방 답을 해보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안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그런 시안의 의문을 알기라도 하듯이 카리스가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악마들이 수인족들을 찾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처음엔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누군가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고 있다.

정보원으로부터 그 사실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 백년동안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수인족.

그러나 대족장쯤 되면 세상과 통하는 연결점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결점이었을 뿐.

당연하게도 수 백년 전에 사라진 수인족들을 찾는 움직임은 수상하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카리스.

조사에 착수했고, 끝내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저기 계신 헬렌··· 이라는 분을 말입니다.”

카리스는 손가락으로 헬렌을 가리켰다.

헬렌은 크게 당황하며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헬렌 뿐만 아니라 다이애나와 아리아 또한 크게 당황해보였다.

오직 한 사람.

“누르비아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시안만이 그 말의 의미를 정정해주었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카리스 또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이는 헬렌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으니까.

그리고 스스로가 악마에게 잠식되어본 바 둘은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누르비아와 마주하게 된 카리스.

누르비아는 다짜고짜 카리스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래도 수인족의 대족장은 대족장인 것일까.

“저는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카리스는 누르비아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누르비아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누르비아는 결국 카리스를 놓쳤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르비아는 수인족들의 왕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아마··· 저를 통해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인족들의 왕국으로 돌아온 카리스.

카리스는 이 일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악마가 수인족들의 왕국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당시엔 확실하지 않은 사실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당시, 누르비아가 악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어떤 강대한 적이 수인족들을 노리고 있다.

이 사실만을 인지했을 뿐이었다.

“해서 저는 수호자님을 찾아갔습니다. 강대한 존재가 수인족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역시나 카르제는 카리스의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카리스.

“그러다 문득. 제안이 왔습니다. 정확히는 넌지시 정보를 흘리더군요. 마치 제가 보란 듯이 말입니다.”

조건을 하나 들어준다면 수인족들을 건드리지 않겠다.

그러니 잠깐 이야기를 해보자.

카리스는 고민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누르비아의 강함을 직접 보았으니까.

“차마··· 제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요.”

수호자인 카르제마저 방관하고 있는 지금.

수인족들을 지켜야하는 대족장으로서 카리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정적이었다.

그렇게 카리스는 누르비아와 다시 만났고.

“그리고 기억이 없습니다.”

그대로 기억이 끊겼다고 한다.

그렇게 끝이 난 카리스의 이야기.

“음···.”

시안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래도 그때인 것 같았다.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에게 잠식된 것은 마지막 누르비아와 만났을 때.

그리고 굴네리아에게 잠식된 카리스의 기억으로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아낸 것 같았다.

‘문제는 어떻게 잠식시켰냐는 건데.’

이야기만 들으면 그냥 뚝딱이었다.

카리스조차 기억이 안날 정도로 순식간에 행해진 일.

누르비아가 절대적인 악인 것 인정한다.

그러나 카리스 또한 강대한 존재였다.

그렇게 뚝딱,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딱 하나.

미리 준비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든 준비를 마친 직후, 카리스를 유인해 굴네리아를 잠식시킨 것.

그러면 가능하겠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아무나 악마의 그릇으로 삼을 수 있는 건가?’

시안이 알기로 악마의 그릇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헌데, 누르비아는 어떻게 카리스가 악마의 그릇임을 알았단 말인가.

뭐, 앞선 전투에서 눈치챘다고 하면 할 말은 없었다.

그럼 굴네리아는 대체 어디서 준비했다는 말인가.

악마들이 봉인되어 있는 곳이 따로 있나?

그런 것치고는 시안이 만나본 악마 군주들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깊어지는 고민.

“저···.”

그 사이로 헬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이 바라보자 헬렌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악마에게 잠식될 때의 이야기를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헬렌이 누르비아에게 잠식된 것은 약 100여년 전.

다름 아닌 세미르와 혼인을 약속한 직후였다.

“저는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어둠의 숲을 잠시 떠났어요.”

드워프와 인간.

이종족간의 결합이고 서로의 종족마다 다른 문화가 있었다.

이에 세미르는 헬렌에게 약속의 증표로 자신의 역작을 만들어주었다.

헬렌은 그 증표를 가지고 어둠의 숲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기억이··· 없어요.”

헬렌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다시 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그때 악마에게 잠식된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 어떤 악마와 마주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저는 악마에게 잠식되었죠. 그게 이상했는데··· 저 이야기를 듣고보니,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어요.”

헬렌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미르가 만들어준 역작이요.”

“세미르의 역작이요?”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헬렌의 말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까.

“세미르가 준 물건 안에··· 누르비아가 잠들어있었단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헬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가능성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세미르가···.”

“아뇨. 세미르는 전혀 몰랐을 거예요.”

이어진 헬렌의 답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세미르가 누르비아에게 헬렌을 넘겼을까.

애초에 그랬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러지는 않았을 터였다.

따라서 세미르도 몰랐다고 함이 옳았─.

‘잠깐.’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시안은 다시 헬렌에게 물었다.

“그 세미르가 만들어준 역작 말입니다. 정말로 세미르가 만든 것이 확실합니까?”

“네. 직접 만드는 것을 제가 봤거든요.”

헬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위대한 선조께서 남기신 유산을 재료로 써서 만들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요.”

그만큼 헬렌을 위한다는 의미였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세미르는 모르크루가 남긴 무언가로 역작을 만들었다.

그래, 모르크루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거···.’

시안은 그때서야 어떤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동안은 헬렌의 존재로 인해 부정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한 가지로 꿰어지고 있었다.

시안이 그 동안 만나본 악마 군주.

혹은 악마 군주와 같은 존재 도합 4명이었다.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

악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크 엘프의 마을에서 인스티즈의 광기에 사로잡힌 다이슨.

마지막으로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

그리고 이 네 명의 악마 모두.

‘아르나이즈들과 관련이 있다.’

일단 신성 제국에서 마주했던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

루슈리아는 뮤리엘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천 년의 세월 속, 루슈리아는 뮤리엘의 몸 안에 잠재되어있었다.

그리고 타락한 엘로디의 힘.

그것은 엘로디의 지팡이 인스티즈(Instiz)에 봉인되어있었다.

그 힘을 사용한 다이슨은 광기에 물들어버렸다.

또한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는 지금 여기 카리스.

용인족이자 노에미의 후손인 카리스에게 잠식되었다.

끝으로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

가설대로라면 누르비아는 세미르에게 잠식되어야했다.

아니면 모르크루와 관련된 무언가에 깃들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가설과는 달리.

누르비아는 평범한 인간, 헬렌에게 잠식되어있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온 헬렌의 이야기.

그 이야기대로라면 원래는 세미르에게 잠식되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우연이 겹치고 틀어져 헬렌에게 잠식된 것.

그리고 시안의 생각이 여기까지 닿았을 때.

띠링!

『[메인 스토리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싸움’』

새로운 퀘스트가 스마트 폰 화면 위로 떠올랐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