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 그가 남긴 것(3)
용언(龍言)은 드래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었다.
무한의 마력을 담는 드래곤 하트(Dragon Heart).
그 무한한 의지의 기관으로서만 작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르나이즈였던 대마도사 엘로디조차 용언 마법만은 불가능했다.
용언(龍言)의 아류나마 엘로디가 구현해낸 것이 바로 언령(言靈) 마법.
그러나 그 언령 마법조차 현재로서는 사장된 마법이었다.
뮤리엘의 신어(神語)와 같은 이유였다.
엘로디 이후로 그 누구도 사용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뮤리엘의 신어(神語)또한 언령(言靈) 마법의 일종.
용언(龍言)은 그런 언령(言靈) 마법의 최상위 등급이었다.
모든 어둠이 근원의 마(魔)에 기반하는 것처럼.
모든 언령(言靈) 마법 또한 용언(龍言)을 뿌리로 삼고 있었다.
‘미친···.’
시안은 멍하니 그 자리에 박혀버렸다.
용언은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했다.
신어(神語)처럼 언어 자체에 깃든 힘을 발동시킴은 물론, 언어. 그 자체만으로 힘을 구현하기도 했으니까.
‘이러면···.’
마법과 오러를 동시에 사용하는 마검사.
본디 마검사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마법과 오러.
이 두 가지는 서로 병행될 수가 없었으니까.
그 이유는 신성력과 비슷한 이치였다.
오러란 기사들이 행하는 믿음의 결과물이자, 세계와 현상의 법칙 따위는 무시해버리는터무니 없는 힘.
헌데 마법사들은 이미 이해해버렸다.
현상의 준엄한 법칙은 뒤틀 수가 없음을.
그것이 본디 불가능한 일임을.
이미 저 뛰어난 머리로 이해해버렸다.
그러니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저것이 불가능함을 이미 스스로가 단정지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마법사들은 오러를 사용할 수 없다, 라고 함이 정확했다.
오러를 사용하다가도 마법을 배우면.
현상의 법칙을 이해하면, 그 순간 오러는 사라진다.
···.. 라는 것이 역시나 엘로디가 정의 내린 개념.
그러나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용언은 굳이 마법적인 현상을 이해하지 않아도 가능했으니까.
언어만으로 마법적인 현상을 이루어내었으니까.
“......”
시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런 시안을 뒤로 아리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라, 라 - 아크리스··· 오즈 사므···.”
입을 달싹거리며, 방금 전의 시안의 말을 따라하고 있었다.
“에리스? 에미르?”
그리고 아리아가 마지막 말을 완성했을 때.
콰아아아아아아아─!!!
실로 어마어마한 신성이 아리아의 몸에서 터져나왔다.
방금 전, 시안에게 나온 것과는 차원 자체를 달리했다.
오죽하면 잔잔하던 마기가 약간 요동칠 정도였다.
아니, 그것보다.
“너도 되네?”
“그, 그러게···.”
아리아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아리아가 설마하니 용언을 사용할 수는 없을 터.
아무래도 신어(神語)가 아리아에 내재된 신성에 반응한 것 같았다.
애초에 신어(神語)는 뮤리엘이 사용하던 것.
시안이 사용한 것이 이상한 것일 뿐.
아리아가 사용한 것은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뮤리엘 이외에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더니···.
확실히 아리아가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음···.’
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아하니··· 이 책자는 뮤리엘이 남긴 것 같았다.
아니면 카르제가 적어놓은 것이던가.
‘나한텐 그닥 쓸모가 없는데.’
어느 쪽이든 시안에겐 쓸모가 없었다.
용언을 사용한다하더라도 신성력은 좀 그랬다.
매번 말하지만 신성은 시안과 맞지 않았으니까.
‘음···.’
이어지는 고민.
하지만 이번엔 그리 길지 않았다.
“이거, 너 가져라.”
시안은 아리아에게 책자를 건넸다.
“어? 나 준다고?”
“그래. 나한테는 별 쓸모가 없어서.”
시안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어, 얼만데?”
그러자 등 뒤로 아리아의 물음이 들려왔다.
다시 몸을 돌리자 아리아가 떨리는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사용해봤으니 본인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책자가 어느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지를 말이다.
시안은 순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참.
이런 말을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원.
“얼마긴 무슨. 선물이니까 그냥 가져.”
그러자 아리아가 두 눈을 찢어져라 떠보였다.
“돈··· 안받아? 정말?”
“어. 그냥 가져.”
그러자 아리아의 몸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표정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시안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뭐, 돈을 받으면 받을 수야 있었다.
그리고 뮤리엘의 신어(神語)라면 족히 수 억골드는 가뿐히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돈은 많으니까.’
지금 눈앞에 즐비한게 돈이고 골드이지 않은가.
심지어 본래 내야했던 상속세도 탈세한 마당이었다.
물론 돈이야 많으면 언제나 많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이번 일에 아리아의 도움이 정말로 컸다.
시안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다.
아리아가 버텨주지 않았더라면.
또 아리아가 축복과 더불어 루벤의 병사들을 보좌주지 않았더라면.
이번 일은 시작도 전에 끝났을 터였다.
그 고마움의 대가라 생각하면 까짓거 아깝지도 않았다.
‘어차피 신어(神語)는 아리아밖에 사용할 수 없기도 하고.’
정확히는 시안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쓸모가 없었다.
시안은 다시 등을 돌렸다.
하지만 금방 떠오른 생각에 멈칫.
또 다시 몸을 돌려, 멍한 표정의 아리아에게 말했다.
“아 참.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뭔데?”
“너 이거. 황녀님한테 말하면 안된다.”
“황녀님?”
갑자기 엘레나의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 것일까.
아리아의 표정이 일순간 새침해졌다.
“뭘 말하지 말라는 건데.”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목소리 또한 퉁명스러웠다.
시안은 아리아 손에 들린 책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거 줬다는 거 말이야. 저번에 내가 장신구 선물한 거 그대로 말했더구만.”
물론 말한다고한들 큰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 아리아가 다시 엘레나를 만날 기회도 거진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뭐랄까. 왜인지 쎄하다고 해야할까.
일단 시안은 황궁에 가야할 일이 있었다.
카르제가 남긴 마지막 유언, 아르나이즈 전당에 가야했으니까.
그곳에서 엘레나를 만날 가능성은 다분했다.
물론 이 사실을 엘레나가 어찌 알 수 있겠냐만은.
왜인지 쎄한 기분은 바로 잡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흐응···.”
그러자 아리아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답지 않은 콧소리까지 내며, 요염한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니, 뭐···.”
요염한 눈빛과 도도한 몸짓.
초월적인 미모와 더불어 아리아에게서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너 하는 거 봐서?”
지어지는 눈웃음은 꽤나 고혹적으로 다가왔다.
“······”
그런 아리아의 모습에 시안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까부터 정신이 이상한 것 같더라니.
얘가 왜 저래 진짜.
“됐다. 다시 내놔.”
시안은 성큼,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아, 알았어! 그냥 장난 한 번 친거야.”
그러자 아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품 안으로 책자를 끌어안으며 눈을 홱, 치켜떠보였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관철시켰다.
“줬다 빼앗는 게 어딨어. 치사해.”
“치사하긴 무슨.”
시안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황녀님께 말하지 마. 우리 둘만의 비밀인거야. 알겠어?”
“우리 둘만의 비밀···?”
“그래.”
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좋아. 히힛.”
아리아가 해맑은 소녀처럼 좋아라했다.
이번엔 또 왜 저러는걸까.
‘에이, 알게 뭐냐.’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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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은 카르제의 둥지에 있던 모든 보물들을 쓸어담을 수 있었다.
“진짜 아슬아슬했네.”
그리고 정말 아슬아슬했다.
인벤토리의 공간이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신체로 비유하자면 목구멍까지 꼴깍꼴깍, 넘어올 정도로 꽉 들어차있었다.
그래도 천만다행히 모든 보물들을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었다.
《도, 도망쳐어···! 도망쳐어어어어!!》
그 때문에 모바일 영주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발작을 넘어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에엑? 시, 시스템? 시스템? 뭐, 뭐예요!》
《이 문 열어요! 이 문 당장 열어요!! 시스템!! 시스템!!!!》
대체 스마트 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원.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거나 카르제의 유산을 모두 챙긴 직후.
시안은 마지막으로 카르제의 육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름 아닌 악마 군주와의 혈전이 있었던 곳.
카르제의 육체는 죽음을 맞이한 그곳에 그대로 놓여져있었다.
옮길 이유도 없었지만 옮길 여력이 없다고 봄이 정확했다.
거진 100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
카르제를 옮긴다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시안은 그런 카르제의 시신 앞에 서 보였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흔적을 남긴 드래곤.
마주한 카르제는 정말 죽은 것이 맞나 싶었다.
어쩌면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느껴지는 존재감은 여전했으니까.
당장이라도 눈을 떠 그 위압감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폭풍우와 같던 숨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감긴 두 눈은 아무리 기다려도 떠지지 않았다.
생명의 신호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
시안은 이제 시신이 되어버린 카르제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런 시안의 옆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인족의 장로이자 거북이의 특색을 지닌 귀인족(龜人族), 파벨.
“깨어나셨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찾아뵈니 자리를 비우셨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게 잠시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시안은 멋쩍게 웃으며 답을 해보였다.
파벨은 굳이 캐물을 생각이 없었는지 작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수인족들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파벨은 시안을 향해 깊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시안은 가볍게 손사래를 쳐보이며 답했다.
“저 혼자한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카르제님이 없었더라면···.”
시안은 다시 시선을 돌려 카르제를 바라봤다.
파벨 또한 시안을 따라 카르제를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
파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원망?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파벨이 재차 말을 이었다.
“수인족들의 수호자이시나, 그 의무를 방관을 하신 것 말입니다.”
그러면서 파벨은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시안 또한 이해한다는 듯 작은 미소로 화답해보였다.
“사실, 저희 수인족들은 너무도 의지를 많이 해왔습니다. 수 백년 전,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이후. 저희들의 삶은 고립되었으나 평화로웠죠.”
위협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설령 위협이 있더라도 수호자인 카르제가 나서주었으니까.
그렇게 지내온 세월이 수 백년.
“수인족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과 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평화란, 반드시 주체적인 힘이 기반되어야함을 이들은 잊어버렸다.
엘란두르의 하얀 늑대 기사단.
그들이 강대한 적이라고는 하나 너무 허망하게 무너졌다.
별로 싸워보지도 않고 그 투지와 의지를 꺾어버렸다.
“어쩌면 수호자께서는··· 그것을 걱정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문득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의 부재 이후, 남게 되는 수인족들을 말입니다.”
카르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인족들.
천 년의 고룡, 카르제는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있었다.
빠르면 몇 년. 길어봐야 십여년을 넘지 못했다.
그렇게 대륙의 마지막 드래곤은 멸족한다.
카르제는 평생토록 수인족들을 지켜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인족들은 여전히 대륙에 남아있다.
그들은 언젠가 스스로를 스스로가 지켜야만 했다.
“그래서 방관하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지금 와서 들더군요.”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알려주고자 말이다.
물론 시안이 본 카르제는 그렇지 않았다.
삶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에 젖은 타성으로 일을 방관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파벨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타성 때문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타성 때문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정말로 그러했다면 카르제는 끝까지 나설 이유가 없었으니까.
특히나 시안이 상속세를 빌미로 5억 골드를 뜯어내었을 때.
수호의 의무이니 뭐니를 들먹였을 때.
카르제는 이를 무시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카르제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카르제는 분명히 삶의 덧없음과 무의미한 타성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카르제는 한편으로.
“결국, 수호자께서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저희를 수호해주시고 가신 것이지요.”
마지막까지 수인족들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본인이 없더라도 수인족들에게 스스로를 지킬 의지를 심어줌으로써 말이다.
비록 그 방식이 상당히 거칠더라도, 앞으로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카르제가 남긴 유지와 유산.
그가 남긴 것.
어쩌면 비단 시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파벨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시안 또한 그 이상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어진 오랜 정적은, 카르제를 기리는 시간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오랜 정적 끝에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루벤이라는 영지의 영주입니다.”
갑작스러운 시안의 말.
그러나 알고 있는 사실에 파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참에 수인족들도 저희 루벤에서 같이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
“······ 예?”
이어진 시안의 말에 파벨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시안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제 안에는 카르제님의 유지가 남아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맹하게 요동치는 드래곤 하트.
카르제는 마지막 유지를 다름 아닌 시안에게 남겼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까지 수인족들을 수호하고자 했던 카르제.
“괜찮으시다면, 그 의무를 제가 이어받을까 합니다.”
시안은 그런 카르제의 유지를 이어받고자 했다.
“현재 수인족들은 위험한 상태입니다.”
엘란두르에게 받은 피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악마들의 침공에 왕국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렸다.
그래도 살아남은 수인족들은 많았기에 다시 재건할 힘은 충분했다.
그러나 수인족들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숨을 수가 없었다.
이제 수호자인 카르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미 엘란두르에 의해 그 위치가 발각되었으니까.
한 번 발각된 정보는 언제고 대륙으로 퍼져나간다.
수 백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수인족.
인간들은 반드시라고 할 만큼 탐욕을 드러낼 터였다.
무엇보다 엘란두르도 문제였다.
비록 성물이라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언제고 엘란두르가 또 다시 들이닥칠 수 있었다.
수인족들은 세상이라는 풍파에 그대로 놓여있는 셈이었다.
스스로를 지킬 의지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그 힘을 키울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제가 방패막이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카르제가 수인족들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처럼.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닐 터였다.
파벨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족장께서 깨어나시면 한 번 상의해보시지요.”
“······”
파벨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정말··· 정말로···.”
그저. 단지.
“감사··· 드립니다.”
이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시안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영주님.”
한쪽에서 시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루카스가 시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헬렌님과 카리스님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래?”
시안은 눈을 떠보이며 파벨을 바라봤다.
파벨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거기가 어디야?”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루카스는 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
루카스는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쿠우우우웅···!
갑자기 대지 전체로 크나큰 진동이 느껴졌으니까.
마치 거대한 지진이 난 것만 같은 떨림이었다.
그리고 이 떨림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진과 같은 땅의 움직임 때문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바로 뒤에서 루카스를 따라오고 있는 시안.
“영주··· 님?”
시안이 유발시키는 거대한 지진이었다.
그 과정에는 특별한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쿠우우우웅···!
단순한 걸음이면 되었다.
시안이 한 걸음 내딛으면 쿠우우우웅···!
대지가 크게 떨리며 지진과도 같은 진동이 유발되었다.
“아, 아니 이게··· 대체···.”
루카스의 얼굴에서 잠시 정신이라는 것이 빠져버렸다.
그런 루카스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아, 잠깐만 루카스. 한 쪽에만 인벤토리를 매달았더니 허리가 엄청 아프네.”
시안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왼쪽 허리에 묶여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풀더니, 반대편인 오른쪽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그와 동시에 쿠우우우웅···!
어마어마한 무게감이 터져나왔다.
“아으···! 이럴 줄 알았으면 무게 감소도 조금 현질해둘 걸 그랬나.”
카르제의 보물들이 죄다 들어있는 인벤토리.
그 무게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시안은 낑낑거리며 작업을 마무리했다.
“후우! 불멸의 갑옷이 아니었으면 허리에 맬 수도 없었겠네. 자, 다시 가자.”
시안은 만족스럽게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역시나 쿠우우우우웅···!
시안이 지나간 땅이 움푹, 패여졌다.
대체 얼만 큼의 무게가 있어야 저런 광경이 나올 수 있을까.
일단 인간은 절대 불가능했다.
아무리 살이 쪄도 저건 불가능했다.
오우거라면···? 하는 생각도 말이 안되었다.
저것이 가능하려면···.
그래, 드래곤 정도 되어야했다.
뒤쪽으로 눈을 감고 있는 카르제.
가히 100M에 달하는 거대한 카르제가 살아 움직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쿠우우우우웅···!
그런데 시안은 카르제와 같은 움직임을 재현하고 있었다.
“저··· 그··· 영주님?”
루카스는 잠시나마 ‘이걸 물어보는 게 맞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응? 왜?”
그리고 그런 루카스의 물음에 잠시 걸음을 멈춰선 시안.
우그극, 쩌적.
일순간 시안이 딛고 있는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멈춰있는 시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땅이 찌그러지고 있었다.
루카스는 끝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카르제님의 힘을··· 이어받으시면서 말입니다.”
우그극. 계속 갈라지는 땅.
쩌적. 무너져내리는 대지.
“혹시, 몸무게도 드래곤이 되신 겁니까?”
루카스는 진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루카스를 따라 이동한 곳은 수인족들의 수도 안.
그 중에서도 중심부에 위치한 한 건물이었다.
쿠우우우웅···!
시안은 힘겨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우그극, 하며 땅이 박살이 나버렸다.
비단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시안이 이곳까지 걸어온 길.
그곳이 전부 죄다 우그러지고 찌그러져있었다.
멀쩡한 도심을 그야말로 박살내고 있었다.
조금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 에이, 루벤에서 살라고 하면 되니까.’
정 뭐하면 현질해서 고쳐주고.
돈이야 많으니까.
시안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시안은 시선을 들어 정면의 건물을 바라봤다.
2층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1층의 건물이었다.
“여기에 헬렌과 카리스가 있다는 거지?”
“그렇긴 합니다만···.”
루카스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해보였다.
시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렇게 내딛는 발걸음마다, 땅을 박살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 영주님!”
루카스가 당황하며 한 발 나서보였다.
그리고 루카스가 시안을 말리기도 전.
“야!!! 여기 환자들 다 죽일 셈이야?!?!”
안 쪽에서 아리아가 기겁을 하며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