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 그가 남긴 것(1)
꿈 속을 부유하는 듯한 감각.
몽롱한 정신이 이어진다.
사르르···.
산들거리는 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바람···?
의식 사이로 의문이 떠올랐다.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거지?
아니, 그보다 지금 떠오르는 이 의식은 뭐지?
난 분명 죽었을텐데? 여긴 죽음 이후의 세계인 것인가?
사후 세계가 정말 존재했나?
의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의문을 이어나가는 의식에 대한 의문도 계속 이어졌다.
시간의 흐름조차 인지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
문득 오른쪽의 다리가 저려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치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찌리릿, 오른 다리에 전기가 일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한 육체적인 통증이었다.
선명한 신체적인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다.
번쩍.
감겨있던 시안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떠진 두 눈으로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낯선 천장이었다.
낯선 천장···?
사후 세계에 낯선 천장이 있나?
그런 의문을 이어가며 시안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오른쪽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그렇게 시선을 내리자 시안은 금방 통증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길게 내려앉은 백금발의 여인.
한 여인이 시안의 다리를 베개 삼아 엎드려 자고 있었다.
살짝 비친 여인의 옆 얼굴.
그건 가히 초월적이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미모였다.
아리아?
“끄으윽···?”
아리아의 이름을 불렀으나 입가를 비집어 새어나온 건 고통 어린 신음이었다.
목구멍에 가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메말라 비틀어져있었다.
“으음···.”
아리아가 꼼지락거리며 엎드린 몸을 들썩거렸다.
그와 동시에 눌려있던 피가 잠깐 통하며 찌릿한 전기가 더욱 거세졌다.
“아윽···!”
다시 한 번 입가로 메마른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번엔 그 소리가 조금 컸던 탓일까.
옆으로 비치는 아리아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작게 들린 눈꺼풀 사이로 고통에 겨워하는 시안이 비쳐보였다.
“시안···?”
아리아의 두 눈이 일순간 크게 떠졌다.
벌떡, 몸을 일으킨 아리아의 얼굴엔 크나큰 놀람이 새겨져있었다.
두 눈동자가 쉼없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 시안···.”
아리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입술이 아이처럼 비죽거렸고.
두 눈가가 울먹거리며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못난이 같은 표정이었다.
“시안!!!”
아리아가 와락! 시안의 가슴에 안겼다.
아찔한 아리아의 향기가 느껴지며, 가녀린 아리아의 몸이 시안의 품에 안겨졌다.
자, 잠깐···!
시안은 당황하며 아리아를 밀쳐내려고 했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좋지 않은 지금.
아리아가 이렇게 안기면 마기(魔氣)가 미쳐날뛸테니까.
지금 상황에서 날뛰는 마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다시 기절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일까.
‘멀쩡···해?’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 아리아가 가까이 붙으면 진즉에 반응이 있어야했다.
특히나 아리아의 체향까지 느껴질 정도면 아주 미쳐날뛰어야했다.
그런데 잠잠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의 표면처럼 내부가 고요했다.
물론 통증이 느껴지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통증이었다.
내부에서 들끓는 현기증과 같은 거부 반응은 전혀 없었다.
‘이게 무슨···?’
알 수 없는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품에 안긴 아리아의 가녀린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아리아의 얼굴이 파묻힌 시안의 가슴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다행···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시안은 뭐가 뭔지도 모른 채, 한동안 아리아를 껴안고 있어야만 했다.
#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아리아는 시안에게 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것일까.
“······”
아리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순백의 얼굴은 마치 홍당무와 똑같은 색을 하고 있었다.
시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으윽···!”
하지만 전신을 강타하는 통증에 시안은 다시 몸을 뉘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아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정도는··· 아니야.”
말마따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지금도 벌써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시안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거야?”
어째서 자신이 죽지 않았는지.
왜 이렇게 누워 살아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게···.”
아리아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꽤나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카르제··· 님이?”
시안은 살아있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몸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부에 잠재된 초월의 마력.
그 허락되지 않은 힘은, 현재 시안이라는 존재에 담겨있었다.
다름 아닌 무한의 마력을 담는 의지의 기관.
드래곤 하트(Dragon Heart)가 시안의 존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내재된 초월의 마력은 더 이상 시안을 삼키지 않았다.
되려 시안의 의지에 따라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아마 이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아리아의 신성에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은 이유가 말이다.
강대한 신성이라도 이 초월의 힘을 헤집을 수 없는 것.
시안은 더 이상 신성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 말은 즉.
카일이 다루던 근원의 마(魔)에 근접했다는 뜻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시안이 현질한 노에미의 유산, 소울 오브 드래곤(Soul of Dragon).
시안의 신체는 이미 드래곤의 수준으로 강화되어있었다.
여기에 드래곤 하트까지 더해진 상황.
시안은 전신에서 완연한 드래곤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용인족(龍人族)과는 그 결이 달랐다.
용인족은 드래곤의 특색을 지녔다 뿐, 드래곤은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드래곤 하트와 같은 정체성이 없었다.
하지만 시안은 달랐다.
인간이되, 드래곤인 존재.
시안은 가히 새로운 종족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해서 지금 느껴지는 육체의 통증은 아마 적응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육체에, 새로운 존재에 그리고 새로운 인과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
“카르제님께서··· 내게 드래곤 하트를 남기셨다고?”
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멍한 정신으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카르제님이 죽으면 이것도 사라져야 하는 거 아니야?”
드래곤은 그 시체를 남기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카르제가 시안에게 드래곤 하트를 남겼다고 한들, 카르제의 죽음과 함께 이 또한 사라져야했다.
“그게··· 사라지지 않았어.”
“사라지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시안이 묻자 아리아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며 답했다.
“마지막에 드래곤으로서의 죽음을 거부했거든. 그 때문에 드래곤의 육체 또한 사라지지 않았어.”
생명이 다한 드래곤의 사체.
카르제의 사체이자 대륙에 유일한 드래곤의 사체가 현재 이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사용해달래.”
아리아는 시안을 바라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그로써 이 세상에 자신의 유지를 남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면서 아리아는 카르제의 유언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다.
시안은 멍하니, 정말 멍하니 아리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기나긴 이야기가 끝이 나고.
“마지막으로, 네게 이런 말을 남기셨어.”
‘샤를롯이 잠든 곳으로 가보거라. 그곳에 진실이 있을지니.’
그 말을 끝으로.
카르제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시안에게 드래곤 하트를, 이곳에는 자신의 육체를.
그리하여 자신의 유지를 이 세상에 남긴 채 말이다.
“······”
시안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별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멍한 정신.
그 사이로 띠링!
『[스토리 히든 퀘스트] - ‘가치있는 죽음’ (클리어!)]』
품 속에서 문득 스마트 폰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시안은 천천히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손을 움직일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꾹.
《천 년이란 세월은 한 존재가 감당하기에 까마득한 세월이었습니다.》
《삶과 죽음. 그 순환의 반복을 외로이 지켜봐야하죠.》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내는 결과 또한 홀로 견뎌내야하죠.》
《그래서 일까요. 대륙에 남은 최후의 드래곤은 그 무구한 세월 속에서 타성에 젖어버렸습니다.》
《삶의 덧없음에 아무런 행동도 나서지 않았고.》
《다가온 삶의 끝자락에 죽음만을 기다렸죠.》
《고룡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고룡을 깨울 수 없었죠.》
《그러나 당신만은 달랐습니다.》
《당신은 무의미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발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천 년전, 고결한 아르나이즈들의 노력이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말이죠.》
《아니, 설령 무의미한 일이어도 상관 없었습니다.》
《당신은 아르나이즈들의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했으니까요.》
《당신의 존재가, 아르나이즈들의 존재를 유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당신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아주 자그마한 틀어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천 년의 고룡은 그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유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가치란, 반드시 주관적인 요소입니다.》
《사람마다 그리고 존재마다 그 의미는 제각각이죠.》
《그렇다면 고룡, 카르제는 어떤 가치를 본 것일까요.》
《이제는 알 수 없는 물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존재는 아직 남아있죠.》
《당신이 이루는 업적.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
《그 속에 언제나 카르제의 존재가 깃들어 있을테니까요.》
《필멸의 존재가 이어나가는 불멸의 유지.》
《카르제가 이 세상에 남긴 진정한 유지.》
《그것은 어쩌면 당신이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보상: 카르제의 유지]
.
.
.
“······”
여전히 멍한 정신.
시안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스마트 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기나긴 침묵은 정말로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시안은 멍하니 스마트 폰 화면만을 바라봤다.
아리아는 그런 시안의 심정을 이해라도 하듯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정말로 기나긴 정적이 지나가고.
“카르제 루벤.”
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카르제 루벤?”
“어때? 어감은 괜찮은 거 같은데.”
“나쁘지 않기는 한데···.”
어떤 이름 같기도 한 명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르제라는 이름이 들어있지 않은가.
그런데 카르제면 카르제지, 카르제 루벤은 또 뭐란 말인가.
아리아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봤고.
시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훗날, 나의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
카르제의 이름. 시안의 성인 루벤.
그 두 가지를 본따 지은 이름이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줄 이름이자.
먼 훗날, 시안이 죽더라도 영원히 기억될 이름.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안은 이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자 아이면··· 좀 곤란한데. 여자 아이면 뭐로 지어줘야 하지?”
시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생각에 시안은 아리아에게 바라봤다.
여자 아이의 이름은 역시 여자에게 물어봐야 상책.
“혹시 예쁜 이름 없어?”
시안은 곧장 아리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일까.
“무, 무, 무, 무슨 소리를··· 하, 하, 하는 거야···?!”
아리아가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어찌나 당황한 것인지 두 팔을 휘저으며 시안에게서 멀어졌다.
순백의 얼굴 또한 후끈, 달아올라있었다.
홍당무를 넘어 제철에 수확한 딸기처럼 벌겋게 익어있었다.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 아이가 여자 아이면, 지어줄 좋은 이름이 있나 해서.”
“그, 그걸 왜, 왜, 왜, 나, 나한테···.”
아리아가 말을 더듬으며 답해보였다.
그러다 문득. 서, 설마!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갑자기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나, 난··· 아직 준비가···.”
그리고는 기어들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 지,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나···? 나, 나 아직 여, 연애도 못 해봤는데···.”
‘왜 저래?’
시안은 왜 저러나 싶었다.
진짜 왜 저러나 싶었다.
아리아는 혼자서 계속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잘익은 딸기의 얼굴은 어느덧 드래곤 브레스를 맞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시안은 그런 아리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가서 생각하지 뭐.’
아직 연인도 없거늘 뭔 놈의 아이는 아이란 말인가.
아리아가 왜 저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시안은 생각의 흐름을 바꾸었다.
다름 아닌 아리아가 방금 전에 해준 이야기.
정확히는 카르제가 시안에게 남긴 유언.
‘샤를롯이 잠든 곳으로 가보거라. 그곳에 진실이 있을지니.’
아르나이즈 전당을 말하는 건가?
제국의 황궁 지하에 위치한 아르나이즈 전당.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역시나 이곳이었다.
딱 봐도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다.
그러나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르제가 굳이 두루뭉술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냥 아르나이즈 전당으로 가보라, 그렇게 말하면 되었다.
그럼에도 카르제는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아르나이즈 전당은 어디까지나 아르나이즈들을 기리는 곳이었다.
샤를롯이 잠든 곳이라 말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시안이 방문했을 때 별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
레아 또한 그에 관해서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음···.
‘전당이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전당이 맞는 것 같았다.
아르나이즈 전당은 샤를롯 제국의 인간들이 지은 명칭이었다.
카르제는 그 정확한 명칭을 모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카르제가 말한 곳은 아르나이즈 전당이 맞는 것 같았다.
다만, 왜 그곳으로 가보라는 건데···.
‘가보면 알겠지.’
여기서 길게 생각해봐야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보다.
“헬렌과 카리스는? 그 둘은 어떻게 되었어?”
시안은 고개를 돌려 아리아에게 물었다.
누르비아와 굴네리아에게 잠식되었던 두 사람.
시안이 군주의 정신을 노렸다고는 하나 이미 합일된 정신이었다.
진(眞) - 아수라(阿修羅)의 영향을 없잖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둘의 정신 또한 같이 소멸되었을 위험도 있었다.
해서 그 둘의 상태를 아리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일까.
“두, 둘만의 시간도 좀··· 가, 가져보고 아이는 그 다음에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아리아는 여전히 혼자서 뭐라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저 무슨 상상을 하는 지 백금발의 머리를 빙빙, 돌리며 몸도 배배꼬고 있었다.
“아리아.”
“무, 물론 아이가 사랑스럽기는 하,하지만··· 그래도···.”
“아리아?”
“평범하게 둘만의 시간을 즐기면서··· 핫!”
그 순간 아리아가 흠칫, 놀라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시안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뭐라고··· 그랬어?”
“헬렌과 카리스 말이야. 그 둘은 어떻게 되었냐고.”
아리아는 그때서야 몸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손가락에 꼬인 백금발의 머리를 풀고, 배배 꼬던 몸도 바로 서보였다.
“무, 무사해.”
그리고 들려온 아리아의 답.
왜인지 살짝 목소리가 떨려있었다.
“그런데 깨어나지 않고 있어.”
그럴 것이다.
말했다시피 이미 합일된 정신이었고 그렇기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아득한 충격에서 깨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리아가 신성력으로 치료한 것 같았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이 받은 건 어디까지나 정신의 데미지였으니까.
하지만 육체의 회복은 확연한 효과가 있었을 터.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날 터였다.
“다행이다.”
시안은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그런 시안의 모습에 아리아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목숨을 걸고 지켜낸 두 사람.
아니, 목숨 정도를 건 것이 아니었다.
시안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불살라 악마들을 상대했다.
그로써 수많은 루벤의 사람들.
수많은 수인족들을 지켜내었다.
하지만 시안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아예 없었다.
그런데도 시안은 마다하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신실한 사제들조차 이러할 수 없거늘.
“왜··· 그랬어?”
“응? 뭐가?”
갑작스러운 아리아의 물음에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뭘 묻는지 모르는 모습에 아리아는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혀버렸다.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아. 그야 뭐···.”
이어진 아리아의 물음에 시안은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고 단호히 말했다.
“몰라.”
“뭐?”
“나도 몰라. 사람들을 지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냥 하는 거지.”
시안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아리아는 또 다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간 아리아가 봐온 시안은 정말이지 놈팽이나 다름 없었다.
평소의 분위기는 어딘가 어벙하며.
돈이라면 아주 환장을 하다 못해 미쳐버리는 사내였다.
이런 이가 어찌 놈팽이가 아닐 수 있을까.
그러나 정작 시안이라는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목숨이 걸리고 억만금의 골드를 준다해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순간에는 그 어떤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약속했었거든. 반드시 구해주기로.”
이어진 시안의 말.
아리아는 역시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약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참···.
시안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벤이라는 영지의 영주, 시안.
아리아가 놀러가본 루벤은 천상의 낙원이었다.
어둠의 숲이라는 위치였지만 크게 상관 없었다.
질병과 같은 문제도 전혀 없었다.
식량은 풍족했고 사람들은 화목했다.
교육 시설도 상당히 갖추어져있었다.
여러 종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터라 견문을 넓히기에도 더없이 좋았다.
아이를 키우기에 정말이지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었다.
교황청보다는 확실히 루벤이 좋았다.
그 빌어먹을 교황청에서 키우는 것보다 자유로운 루벤이 백배, 천배는 더 좋았다.
그럼··· 내 성도 루벤으로 바뀌는 건가?
아리아 리뉴 사피에르에서 아리아 리뉴 루벤으로 바뀌는 건가?
가만, 시안에게 미들 네임이 있었던가?
음··· 그냥 아리아 루벤도 괜찮을지도?
생각해보니 아이는 둘 정도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남자 아이랑 여자 아이.
남자 아이면 카르제 루벤이라 하고···.
여자 아이면 음··· 아. 그래.
여자 아이는 내 성을 따면 좋을 것 같다.
사피에르 루벤.
어머, 예뻐라.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쁜 걸까.
“히힛.”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웃음.
아리아는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갔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를 지켜보던 시안.
‘또 갑자기 왜 저래.’
진짜 왜 저러나 싶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띠링!
손에 쥔 스마트 폰에서 다시 한 번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전설 업적 ‘불멸(不滅)의 유지를 이어가는 자’ 달성!》
바라본 화면 위로 전설 업적 달성의 알림창이 떠올라있었다.
《전설 등급 업적 달성으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재차 떠오른 알림창.
[추가 보상: 카르제의 유산]
“카르제의 유산···?”
그거라면 이미 받지 않았나?
다름 아닌 시안의 안에서 힘차게 뛰고 있는 드래곤 하트.
이것이야말로 카르제가 남긴 유산이 아니던가.
“그런데 유산은 또 뭔─.”
바로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바로 카르제의 둥지에 있던 어마어마한 보물.
가히 몇 십억은 가뿐히 뛰어넘을 그 천 년의 보물들.
“서, 설마···!!”
시안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