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 천 년의 고룡
우적우적, 쩌어어억─!
탐(貪)의 권능에 의해 삼켜지는 무(無)의 공간.
“어, 어떻게···.”
“말도 안돼···.”
그 기괴스러운 광경에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아···! 하아···!”
시안은 들뜬 숨을 사정없이 내뱉었다.
진화된 신체로 시전한 아수라(阿修羅).
언제나 고질적인 문제였던 반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쉽게 시전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수라(阿修羅)는 현재 시안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격.
당연하게도 무차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승부수였다.
그런데 의미가 없었다.
해방된 탐(貪)의 권능.
되찾은 악마 군주의 힘이자 권능은 시안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아르나이즈들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힘.
아르나이즈들이 왜 저들의 힘을 봉인해야만 했는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버거워하고 있었다.
해방된 권능이나 아수라(阿修羅)는 카일의 심득이 깃든 일격이다.
비록 카일이 아닌 시안이 펼친 일격이나.
그 아득한 심득의 힘을 삼키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쩌어어어억─!
굴네리아는 계속해서 무(無)의 세계를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굴네리아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보였다.
그로써 보이는 완벽한 틈.
지금 없애야 한다.
시안은 멸살의 검을 꽈득, 움켜쥐었다.
남아있는 마기를 쥐어짜내며 굴네리아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어딜!】
하지만 누르비아가 그 앞을 막아섰다.
피어나는 붉디 붉은 마력이 시안의 시야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시안은 멸살의 검에 마기를 담아 쏘아보냈다.
그러나 끝까지 닿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다시 한 번 누르비아의 마력이 넓게 퍼졌다.
넓게 퍼진 마력이 시안의 몸을 휘감았다.
“도울게!”
그 순간 아리아의 외침이 들려오며 찬란한 신성력이 시안을 휘감은 누르비아의 마력을 흩어버렸다.
악(惡)을 몰아내는 절대적인 힘.
거진 죽다 살아난 아리아였지만, 그 힘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귀찮게 굴긴!】
누르비아가 양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허공으로 수 십개의 마법진이 새겨지며 어마어마한 마력이 터져나왔다.
뚫어내야한다.
시안은 이를 까득, 씹었다.
굴네리아가 별 다른 여력이 없는 지금.
탐(貪)의 권능이 끝나기 전에 유의미한 타격을 줘야한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시안은 모든 마기를 쥐어짜내었다.
“전군! 영주님을 도와 공격하라!”
그런 시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전장 가득히 루카스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역시나 별 다른 설명이 없음에도 병사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키에에에에에에엑─!!
흉측한 마물들이 그 앞을 막아서며 끝없이 드리웠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그 싸움은 치열함을 넘어서고 있었다.
수인족들은 그 치열한 전투의 현장을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 이게··· 이게 어찌···”
“아아···.”
수인족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붉은 마력의 세계.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정신을 끊어버릴 듯한 광기.
그리고 카리스의 모습.
수인족의 대족장이자 가장 믿음직 한 존재, 카리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긍지 높은 대족장은 그 누구보다 악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결국 악마들에 의해 굴복했다.
카리스조차 저 악(惡)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수인족들은 절망에 사무쳐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크하학···!”
시안이라는 인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붉은 마력이 드리운 어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콰앙!
굉음이 터지며, 불멸의 갑옷이 또 다시 짓이겨졌다.
짓이겨진 틈 사이로 누르비아의 마력이 스며들었다.
푸확!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새빨간 피가 터져나왔다.
불멸의 갑옷이 한 번 막아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치명상을 면치 못했을 일격이었다.
시안은 멸살의 검을 흩뿌리며 누르비아를 떨쳐내었다.
그리고 다시 굴네리아를 향해 몸을 쏘아내려던 순간.
【위험했군.】
굴네리아의 탐식(貪食)이, 끝내 마지막을 맞이했다.
히죽.
굴네리아의 입가가 기괴하게 벌어진다.
심연의 아가리 속에서 갉아먹는 듯한 굶주림이 드러난다.
······ 끝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인족들의 머릿속으로 공통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상대할 격이 다르다.
대적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투지조차 생기지 않는다.
승리의 희망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분열하는 무저갱의 차원.
일그러지는 공포.
쩌어어어어억─!
타락이 대지를 적시고.
하늘의 선한 믿음이 조금씩 좀 먹힌다.
폭사하는 광기의 마력.
이 거친 광기에는 끝이 없었다.
참으로 비참한 악의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렇기에 저 절대적인 악(惡)을 몰아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으아아아아아!!”
시안은 굴네리아를 향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 뒤를 따라 아리아가 보조하며 신성력을 터트렸다.
루카스와 루벤의 병사들, 기사들 또한 마물들과 맞서며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가 가진 바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 누구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대체 왜···?
수인족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끝난 싸움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들은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영주님께서 쓰러지지 않으셨다! 모두 포기하지 마라!!”
“으아아아아!”
대체 시안이라는 저 인간이 뭐길래?
도무지 이해할 수 없─.
키에에에에에엑─!!
일순간 앞선 시야로 끔찍한 괴성이 들려왔다.
탐(貪)의 권능으로 피어난 마물들이 수인족들을 덮쳐왔다.
수인족들은 그 누구도 저항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한 여인이 은발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수인족들의 앞을 막아섰다.
“루나···?”
지금은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용인족의 혈통.
다이애나는 수인족들을 위협하는 마물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다이애나는, 루나는 수인족들을 지키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용인의 힘을 끌어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왜···? 왜 우리를···?”
머릿속이 계속해서 혼란스러웠다.
다이애나는 수인족들을 지켜줄 이유가 없었다.
다이애나를 배척하고 버린 건 다름 아닌 수인족들이었으니까.
수인족들은 다이애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남겼다.
무엇보다 수인족들은 계속해서 방관의 태도를 일관했다.
그러니 그냥 죽게 내버려둔다 한들.
여기서 죽어 사라진다고 한들.
그 누가 뭐라할 사람도, 따질 명분도 없었다.
아니, 그게 수인족들이 맞이할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수인족들을 떠난 건. 내 선택이었어.”
일순간 들려온 다이애나의 목소리.
“무엇보다, 이곳에서 안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다이애나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이애나도··· 잘 몰랐으니까.
지금 이렇게 수인족들을 지키고 있는 이유를 다이애나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
“······”
그렇기에 수인족들 또한 알지 못했다.
절망만이 가득한 전장.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싸움.
이 역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크르르···!”
수인족들 중 하나가 낮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 짖음을 시작으로 수인족들이 하나 둘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날선 이빨을 드리우고, 날카로운 발톱을 치켜세웠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방관의 태도는 곧 투지로 변질되며 끝없는 기세가 터져나왔다.
“싸워라! 더 이상 우리의 운명을 다른 이의 손에 두지 마라!!”
“인간들을 도와라! 그들과 같이 싸워라!”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수많은 수인족들이 파도처럼 달려들었다.
#
[······]
상황을 지켜보던 카르제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역시나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말함이 정확하겠다.
모든 것이 끝났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힘을 해방한 2명의 군주.
모두 이곳에서 죽는다.
그것이 이 상황 끝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결과.
바꿀 수 없는 미래이자 결정된 운명이다.
그렇기에 저 발악은 죽음을 잠시 체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가오는 결과의 운명을 조금 뒤로 미룰 뿐이다.
발버둥쳐도 달라지지 않는 결과다.
그 속에서 과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의미하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관조하는 공간 너머.
마치 카르제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무의미하지 않아.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꽈아앙!
정신마저 뒤흔들리는 충격이 이어진다.
“쿨럭···!”
시안의 입가로 끝내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목구멍까지 치솟은 피는 아무리 삼켜도 계속해서 차올랐다.
“크하학···!”
몸이 자꾸만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 사이로 터벅.
【천 년전, 우리를 막아서고자 발악했던 이들이 있었다.】
굴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나이즈라 불리던 존재들이었지. 놀랍게도 그들은 우리를 한 번 몰아내는데 성공했었다.】
굴네리아는 천천히 시안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끔찍한 악의가 시안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허나, 지금의 광경을 보라.】
굴네리아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드리운 광기의 세계.
그 속에서 처참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수인족들이 가세하고 있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무의미한 일이었다.】
약간의 시간 벌이에 지나지 않았다.
굴네리아가 다시금 시안을 바라봤다.
악마들은 죽어도 죽지 않는 불멸(不滅)의 존재.
반면에 아르나이즈들은 필멸(必滅)의 존재였다.
필멸(必滅)과 불멸(不滅).
영원한 싸움 속에서 승패는 뻔히 결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념은 세월 속에 스러져 잿더미만 남았고, 그들이 남긴 의지는 변질되어 퇴색되었다.】
굴네리아는 자기를 보란 듯이 손을 펼쳐보였다.
그 누구보다 고결했던 아르나이즈 노에미.
그런 노에미의 후손인 카리스.
허나, 카리스는 지금 지독한 악마에 지나지 않았다.
【끝내 아르나이즈들은 우리를 막아설 수 없었다.】
패배한 것은 아르나이즈였다.
【그들의 의지는 헛되고 또 무의미했다.】
굴네리아는 양 입가를 찢으며 히죽, 웃어보였다.
그 뒤로 누르비아가 비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둘의 모습에 시안은 아무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의미.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
시안도 한 때는···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었다.
과거, 시안의 재능은 정말이지 처참했다.
재능이 처참하다 못해 박살이 나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안에게 노력이란 정말이지 괴로운 무언가였다.
무언가를 성취해본 적이 없기에, 그 괴로운 과정을 견디기 힘들었다.
남들은 노력하면 무언가를 이룬다.
그러나 시안은 노력해도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
그 괴로운 시간을 견뎌도 이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시안에게 노력은 정말이지 괴롭고 또 괴로웠다.
무의미.
시안에게 노력은 그야말로 무의미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안은 시도와 도전이라는 것을 아예 하지 않았다.
해봤자 안될 거라는 생각에.
어차피 실망할거라는 생각에.
그 끝에 안되는 자신이 정말 하찮고 쓰레기 같았기에.
시안은 끝내 노력이라는 것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숨만 쉬며 인형처럼 살아갔다.
지금의 상황은, 그때의 시안과 비슷했다.
악마들은 죽지 않는 불멸(不滅)의 존재.
따라서 이 과정의 노력은 결국 무의미하다.
설령 이번을 막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번’ 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악마들은 또 다시 등장한다.
백 년이 안되면 천 년.
천 년이 안되면 수 천년.
계속, 계속 반복해서 재림할 뿐이다.
그 싸움의 끝은 결정되어 있다 말할 수 있었다.
해봤자 안된다.
어차피 실망할거다.
지금의 노력은, 과정은, 의지는 역시나 무의미하다.
시안이 처참한 재능에 좌절했던 것처럼.
천 년전, 아르나이즈들의 노력은 무의미했다.
그런데 왜일까.
아르나이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 악마들이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언제고 악마들이 재림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되려 그를 대비하고자 성물을 만들었다.
시안은 해도 안되는 일에 포기했지만.
아르나이즈들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의미가 없는 일임에도 그들은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네들의 유산을 후예들을 위해 남기며 뒷일을 대비했다.
천 년의 세월 끝에 아르나이즈들은 모두 죽어 사라졌고.
그들이 남긴 의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비록 실패했지만.
언젠가··· 환청처럼 들었던 카일의 말이었다.
카일도 실패하는 것이 있다니.
처음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바꾸지 못하는 운명을 마주한 지금.
시안은 저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카일은 시도했었다.
뒤바뀌지 않는 운명을 바꿀 방법을 찾아냈고, 또 시도했다.
그리고 끝내 실패했다.
최강의 아르나이즈인 카일조차 이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무의미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실패했지만.
카일은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의지는 아직 남아있다.
카일은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 확신도 없는 무의미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노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카일은 죽어 사라졌지만, 그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후작가의 망나니이자.
천하의 둔재였던 시안.
하루하루 인형처럼 숨만 쉬며 살아가던 시안.
그 누구도 달라지지 않을거라 고개젓던 놈팽이.
“무의미하지 않아.”
그 시안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내가 바로 그 증거다.”
【헛소리.】
굴네리아가 시안의 말을 일축시켜버렸다.
【너라고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와 동시에 두 군주에게서 터져나온 아득한 악의(惡意)가 시안의 전신을 잠식해왔다.
할 수 있을까.
글쎄, 아마 힘들겠지.
생각은 부정으로 이어지나.
시안은 그럼에도 멸살의 검을 놓지 않았다.
#
[······!!!!!]
카르제의 얼굴로 크나큰 충격이 아로새겨졌다.
관조하는 공간 너머로 보이는 시안.
그러나 지금 카르제의 두 눈으로 보이는 존재는 어째서인지 시안이 아니었다.
천 년의 세월 속.
카르제는 종족을 불문하고 정말 수많은 존재들을 지켜봐왔다.
그리고 존재들은 언제나 그러하듯 각자의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한다.
더 많은 부. 보다 높은 경지.
혹은 조금 더 나은 세상.
그렇게 많은 이들이 각자 목표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이들은 정말이지 극소수였다.
일명 재능.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이들만이 그 목표에 도달한다.
다른 이들은 모두 실패라는 경험을 한다.
금방 무의미한 일임을 깨닫고, 빠르게 자신과 타협하여 포기한다.
그런데 가끔. 정말 가끔.
거진 수백 년마다 한 번씩, 간혹가다 있었다.
스스로의 목표와 타협하지 않는 이가 꼭 한 명씩 있었다.
그들은 포기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해도 안되는 일이고,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임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무의미함에 목숨과 일생을 바쳤다.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은 이들이었다.
삶은 찰나의 깜빡임이나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굳이 안되는 일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다.
카르제가 보기엔 참으로 바보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천 년의 세월동안 카르제는 그로한 존재들을 봐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어째선지 세상을 바꾸는 건, 그런 바보들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던 이가.
언젠가 문득 바라봤을 땐.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었다.
끝내 그 목표에 도달하여 세상을 바꿔버린다.
그리고 지금 카르제의 기억 속으로 어떤 한 바보같은 존재가 비쳐보였다.
오래 전, 세상을 오시했던 절대적인 존재.
그러나 끝내 필멸의 운명 앞에 굴복한 존재.
그 존재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또한 까마득한 천 년의 세월.
그 끝에 아르나이즈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할 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굴복했다 생각했다.
존재의 죽음은 곧 끝과도 같았기에.
필멸(必滅)의 운명에 굴복했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바로 그 증거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있다.
보이는 것은 그와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때와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하고 처참한 후예였다.
그러나 카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금 악마와 싸우고 있다.
그가 남긴 의지와 신념은 죽지 않고 여기에 살아있다.
필멸의 운명 속, 필멸자가 이어가는 불멸의 유지.
세대와 세대를 이어 그 유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굴복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굴복한 것이 아니었다.
카일은 굴복하지··· 않았다.
카르제가 가진 하나의 사실이 부정된다.
그로써 파생된 모든 것들이 부정된다.
아르나이즈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하지 않았다.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다. 죽음 또한 의미가 없지 않다.
가치있는 죽음은, 있다.
아르나이즈들이 고통 속에서 만들어낸 죽음.
설령 그 죽음이 무의미하더라도 상관 없었다.
지금 여기.
그 죽음을 무의미하지 않게 만들고자 싸우는 자가 있었다.
이것이 필멸자가 불멸의 운명과 싸우는 방법.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렇기에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나는 망가진 운명의 고리를 끊겠다.’
천 년의 세월.
카르제의 타성을 구성해온 가치관.
‘설령, 내가 할 수 없을지라도.’
그 가치관이 모조리 부정된다.
천 년전부터 시작되어온 기나긴 싸움.
그리고 천 년전에 패배로 끝나버린 싸움.
아니, 패배로 생각했던 그 싸움.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확신은 서지 않는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필멸과 불멸.
운명을 뒤바꾸는 싸움.
‘인과의 운명. 그것은 언제나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허나, 과정을 이해하면 결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법.’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신(神)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한 번 걸어보고 싶은 건 무슨 이유일까.
지금 보이는 저 희망.
아주 미약한 희망.
무의미하다 생각했지만 어쩌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
저것에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었다.
카르제는 곧 자연으로 돌아갈 죽음의 운명 앞에 서있다.
다가온 삶의 끝자락에서 무의미함에 삼켜져있었다.
허나,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지 않다면.
무구한 세월 속.
타성에 젖어온 천 년의 고룡은.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
끝내 그 몸을 일으켰다.